"다이애나가 그러는데 다른 아이들은 전부 바구니에 먹을 것을 담아온대요. 전 요리를 못하잖아요, 마릴라 아주머니. 그리고•••••• 그리고•••••• 볼록 소매 옷을 안 입고 가는 건 괜찮은데,
바구니 없이 소풍에 가면 창피해서 견딜 수 없을 거 같아요 다이애나한테 그 얘기를 들은 뒤로 계속 마음에 걸렸어요."
"그거라면 더 걱정할 필요 없다. 음식은 내가 만들어 주마."
"아, 고맙습니다, 아주머니. 아, 아주머니는 제게 참 잘해 주세요. 아, 정말 고맙습니다."
‘아‘를 연발하던 앤이 마릴라의 품에 뛰어들더니 뛸 듯이 기뻐하며 윤기 없는 마릴라의 뺨에 마구 입을 맞추었다. 어린아이가 먼저 다가와 마릴라의 얼굴에 입을 맞춘 것은 평생 처음있는 일이었다. 놀랍도록 따뜻한 기분이 마릴라의 가슴에 순식간에 퍼졌다. 마릴라는 앤의 충동적 입맞춤이 말할 수 없이 즐거웠지만,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 P153

"앤, 넌 무슨 일이든 그렇게 온 마음을 다 쏟는구나. 앞으로살면서 실망할 일이 많을까 봐 걱정이다."
마릴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 마릴라 아주머니, 뭔가를 기대하는 건 그 자체로 즐겁잖아요. 어쩌면 바라던 결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기대할 때의 즐거움은 아무도 못 막을걸요. 린드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자 복 받을지어다. 왜냐하면 결코 실망할 일도 없으니‘라고 말씀하시지만, 전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기대도 하지 않는 게 더 나쁜 거 같아요." - P157

길버트 블라이드는 여자아이의 시선을 끌어야 하는 입장이되어본 적도 없었고, 또 시선 끌기에 실패한 경우도 거의 없었다. 갸름한 턱에 커다란 두 눈을 가진 빨강 머리 여자아이 셜리. 에이번리의 여느 여학생들과는 다른 그 아이도 자신을 쳐다봐야 했다.
길버트는 통로를 가로질러 팔을 뻗더니 길게 땋은 앤의 빨강머리 끝을 잡고 쭉 잡아당기며 날카롭게 속삭였다.
"홍당무! 홍당무!"
그때서야 앤이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길버트를 쳐다봤다!
쳐다보기만 한 게 아니었다. 앤은 튀어 오르듯 일어났다. 상상의 세계는 돌이킬 수 없이 산산조각이 났다. 앤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길을 길버트에게 던졌고, 화가 난 나머지 눈물까지 글썽였다.
"이 비열한 나쁜 놈아! 어떻게 그런 말을!"
앤이 격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다음 ‘퍽‘ 하는 소리가 났다. 앤이 석판으로 길버트의 머리를 내리쳤고 깔끔하게 두 동강이 났다. 머리가 아니라 석판이. - P185

앤이 엄숙하게 손을 내밀었다.
"나도 그대를 영원히 사랑하겠소, 다이애나. 이 시간 뒤로 그대와의 추억은 우리가 마지막으로 함께 읽은 책처럼 나의 외로운 인생에 별처럼 빛날 것이오. 다이애나, 내가 영원토록 소중히 간직할 수 있도록 이별에 앞서 그대의 칠흑 같은 긴 머리카락 몇 올을 주시겠소?"
감정을 자극하는 앤의 말투에 다이애나는 다시금 눈물을 흘렸다. 그러다가 눈물을 훔치면서 현실로 돌아와 물었다.
"뭐 자를 만한거 있니?"
"응. 마침 앞치마 주머니에 조각보를 만들 때 쓰던 가위가 있어."
앤은 엄숙한 자세로 곱슬곱슬한 다이애나의 머리칼을 조금잘랐다.
"잘 지내시오, 내 사랑하는 친구여. 이후로 우리는 곁에 있으면서도 낯선 이처럼 살아야 하오. 그러나 나의 마음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오."
앤은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다이애나를 지켜보며 다이애나가 뒤를 돌아볼 때마다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 낭만적인 이별은 한동안 적잖이 위안이 되었다. - P220

"잘 모르겠지만 상상은 할 수 있어요. 굉장히 놀라고 화가나셨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저희도 나름 이유가 있었어요. 할머니도 상상할 수 있으신가요? 할 수 있다면 저희 입장이 되어보세요. 저희도 침대 위에 누가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고, 할머니 때문에 놀라 기절할 뻔했어요. 얼마나 놀랐는데요. 게다가 손님방에서 자기로 되어 있었는데 손님방에서도 못 잤어요. 할머니는 손님방에서 주무시는 게 익숙하시겠죠. 하지만 할머니가 한 번도 그런 특권을 누린 적 없는 고아 여자애라면 기분이 어땠을지 상상해 보세요."
앤이 간절히 말했다.
이제 매서운 눈빛은 온데간데없었다. 배리 할머니는 웃음을터뜨렸다. 걱정 때문에 입도 벙긋 못하고 부엌에서 기다리던 다이애나는 그 웃음소리에 숨통이 트이고 안심이 됐다.
"내 상상력은 조금 녹슨 것 같구나. 상상 같은 걸 해 본 지가 너무 오래된 게지. 네 입장을 들으니 내 입장만큼이나 설득력이 있구나. 모든 일이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달라 보이니 말이다. 이리 와 앉아서 네 이야기를 해 보거라."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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