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레이철 린드 부인이 놀라다
레이철 린드 부인은 에이번리 마을의 큰길이 작은 골짜기 쪽으로 비탈져 내려가는 곳에 살았다. 길가에 오리나무와 귀걸이를 닮은 후크시아 꽃나무가 늘어섰고, 오래된 커스버트네 농가가 자리한 숲에서 시작한 개울이 집 앞을 가로질렀다. 개울은 숲속 깊은 상류에서 어두운 비밀을 간직한 폭포와 물웅덩이를만들며 복잡하게 뒤엉켜 세차게 흐르다가, 린드 부인의 집 앞에 이를 즈음에는 조용하고 잔잔해졌다. 개울조차 레이철 린드부인의 집 앞을 지날 때는 예의 바르고 얌전하게 흘러야 한다는 것을 아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린드 부인이 창가에 앉아 개울이든 아이들이든 앞을 지나는 것은 무엇이든 놓치지 않고 눈여겨보고, 조금이라도 이상하거나 평소와 다르다 싶으면 그 까닭과 사정을 캐내고 만다는 것을 알아서인지도 모르겠다. - P7
여자아이는 매슈가 지나쳐 간 뒤에도 줄곧 매슈를 쳐다보았고 지금도 매슈를 바라보고 있었다. 매슈는 여자아이를 보지도않았지만, 보았더라도 아이가 어떤 모습인지 제대로 알아채지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했을 터였다. 아이는 열한 살 정도로 보였고, 아주 짧고 몸에 꽉 끼는 누런빛이 도는 볼품없는 회색빛 혼방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에는 색이 바래고 납작한 갈색 밀짚모자를 썼으며 모자 아래로 숱 많은 새빨간 머리카락을 두 갈래로 땋아 등 뒤로 늘어뜨렸다. 작고 하얀 얼굴은 갸름했는데 주근깨투성이였다. 입도 크고 눈도 컸다. 눈동자는 햇살과 기분에 따라 초록색이 되었다가 잿빛이 되었다가 했다. 여기까지는 보통 사람의 시선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모습이었다.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매우 뾰족하고 도드라진 턱도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또한 큰 눈은 생기발랄했고 입은 귀여운 입술에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낼 것 같았으며, 이마는 넓고 그랬다. 한마디로 보는 눈이 예리한 사람이었다면, 제자리가 아닌 곳으로 인도된 이 여자아이가 부끄럼 많은 매슈 커스버트가 그토록 터무니없이 무서워하는 흔하디흔한 여자들과 전혀 다른 정신세계의 소유자라고 결론 내렸을 것이다. 다행히 매슈는 먼저 말을 거는 시련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 매슈가 자신에게 오고 있다는 확신이 들자마자, 여자아이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햇볕에 그을린 야윈 한 손으로 다 해진 구식 여행용 가방의 손잡이를 꽉 움켜잡았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을 매슈에게 내밀며 말했다. 유난히 또랑또랑하고 싹싹한 목소리였다. - P23
"초록 지붕 집의 매슈 커스버트 아저씨 맞으시죠? 만나 뵙게되어 정말 기뻐요. 절 데리러 오시지 않을까 봐 막 걱정이 되려고 해서, 아저씨가 못 오시는 온갖 이유를 상상하고 있었어요. 아저씨가 오늘 밤까지 절 데리러 오시지 않으면 커다란 벚나무가 있는 모퉁이까지 기찻길을 따라 내려갈 생각이었어요. 그나무에 올라가서 밤을 보내려고 마음먹었거든요. 전 하나도 무쉽지 않아요 하얀 벚꽃이 활짝 핀 나무 위에서 달빛을 받으며 잔다니 굉장히 멋질거 같지 않으세요? 대리석으로 된 넓은 방에 있다고 상상할 수도 있고요 그리고 아저씨가 오늘 밤에 못오셔도 내일 아침에는 꼭 오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 P24
이미 날이 꽤 어두워졌지만, 린드 부인이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창가에 앉아서 두 사람을 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마차는 언덕을 올라 초록 지붕 집 앞으로 난 좁고 긴 오솔길로 들어섰다. 집에 도착할 즈음 매슈는 곧 진실이 드러날 거라는 생각에 움츠러들면서도 알지 못할 힘이 났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이런 실수 때문에 마릴라나 자신이 겪게 될 어려움이 아니라 아이가 느낄 실망이었다. 아이의 눈에서 기쁨의 빛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마치 뭔가를 죽이는 데 힘을 보태야 할 때처럼 거북했다. 새끼 양이나 송아지 같은 죄 없는 어린 생명을 죽여야할 때와 아주 비슷한 기분이었다. 두 사람은 벌써 꽤 어두워진 뜰로 들어섰다. 포플러 잎사귀들이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매슈가 아이를 마차에서 내려 주는데, 아이가 작게 소곤댔다. "나무들이 자면서 하는 말 좀 들어 보세요. 멋진 꿈을 꾸고 있나 봐요!" 그러고는 ‘전 재산‘이 담긴 낡은 여행 가방을 꽉 움켜쥐고 매슈를 따라 집으로 들어섰다. - P41
"그럼 영원히 방에서 살아야겠네요. 린드 아주머니께 그렇게말해서 죄송하다고는 말할 수 없으니까요. 제가 어떻게 그래요? 전 미안한 마음이 안 들어요. 마릴라 아주머니를 속상하게한 건 죄송하지만, 린드 아주머니한테 그렇게 말한 건 잘했다고 생각해요. 속이 후련했거든요. 미안한 마음도 없는데 미안하다고 할 순 없잖아요? 그건 상상조차 안 되는 일이라고요." 앤이 애처롭게 말했다. 마릴라가 몸을 일으켰다. "아마 내일 아침이면 상상하기가 한결 쉬워질 게다. 밤새 네가 한 행동을 생각해 보면 마음가짐도 좀 달라질 거고 초록지붕 집에 살게 해 주면 착한 아이가 되도록 노력하겠다더니, 오늘 저녁에는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구나." 마릴라는 분노로 출렁이는 앤의 가슴에 묵직한 한마디를 던지고는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으로 부엌으로 내려갔다. 앤에게 화가 난 것만큼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말문이 막힌 린드 부인의 표정이 떠오를 때마다 웃음이 나와 입이 씰룩거렸고, 그러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크게 한바탕 웃고 싶었기 때문이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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