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극
눈, 바람, 얼음…. 지금 내게 남아 있는 남극의 기억은 그것뿐이다. 그중에서도 바람에 대한 인상이 더욱 강하게 남아 있다. 남들은 남극 하면 추운 겨울을먼저 떠올릴지 모르지만 내가 받은 남극의 첫인상은 거센 바람이었다.
남미 최남단에서 세 시간 가량을 밖이 보이지 않는 C-130 수송기를 타고 날아온 우리들은 그저 퉁‘ 하는 둔탁한 충격음으로 착륙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후 비행기 뒤쪽의 화물칸 문이 먼저 열렸다.
멀리 펼쳐진 활주로와 너무나 화창한 날씨, ‘이거, 별거 아니잖아?‘ 눈보라에 추운 날씨를 생각했던 우리들에게는 실망감과 함께 안도감이 들었다. 앞문을통해서 순서대로 내리는 대원들. 그러나 활주로에 발을 내딛자마자 조금 전의 생각은 싹 달아났다. 바로 내 앞의 대원이 휘청거렸고, 나도 내리자마자 앞쪽에서부는 강한 바람에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아니, 이런 강풍에 어떻게 착륙을 한건가? 착륙하는 방향에서 불어오는 강풍을 뒷문 쪽에서는 전혀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강풍은 활주로를 지나면서 흙먼지를 몰고 왔다. 얼떨결에 준비 없이 내린 우리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하얀 눈은 고사하고 흙바람에 정신이 없었다. 바람을마주보고 격납고로 걸어가는데 입과 눈으로 흙가루가 들어왔다. 침을 뱉었다.
아뿔싸…. 바람이 세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었다.
뱉은 침이 강풍에 날아가지 못하고 얼굴에 달라붙었다.
"젠장.…"
이렇게 남극과의 첫만남은 시작되었다.
- P11

이곳 지형은 모두 돌조각으로 이뤄진 악산(岳山)이다. 한국의 북한산 같은 기암의 돌산이 아니라 모조리 깨진 기왓장을 쌓아 놓은 것 같은 돌산이다. 대부분의 풍화가 기계적 풍화다. 추운 온도 변화와 물이 얼었다 녹았다 해서 생긴 것이다. 스스로 결대로 쪼개져 널브러진 것들이 태반이고, 지척의 거리를 두고 돌들 사이로 발이 빠지거나 겹질러지기 일쑤다. 혹 넘어지기라도 하면 생채기가 난다기보다는 돌에 베인다‘는 표현이 걸맞을지도 모른다. 사이사이에 흙들이 쌓이기도 하지만 이런 곳일수록 조심해야 한다. 한국의 늦겨울과 초봄의 눈녹은 산길을 생각하면 딱 맞다. 쌓인 눈은 질척거려 찍찍 미끄러지기 일쑤고, 그늘에 들어가면 한기가 밀려온다.
- P27

하역 마지막 날에는 다행히 날씨가 점점 좋아져서 바람도 잦아들고, 구름도울어 간간이 내리던 눈발도 그쳤다. 하지만 자외선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내가남극에 갈 때만 하더라도 햇빛 걱정은 안했었다. 해가 아무리 내려와도 지구 기준으로 남위 2.3.5도 이상 내려오지 않고, 더구나 극지방이면 해가 비스듬히 비출것이고, 따라서 오존 구멍이 있어도 별 상관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정말로 어설프게 알고 추측을 한 것이라 무식한 추정일 수밖에 없었다. 태양은 의외로 직접적으로 작열했고, 공기가 워낙 맑아 태양과 나 사이에는 거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대로 내리꽂혔다. ‘꽂혔다‘란 표현이 너무나 적절하다.
어디 그뿐인가. 어딜 둘러봐도 태양빛을 흡수할 만한 것이 없었다. 앞으로는 바다. 뒤로는 눈과 얼음뿐, 하늘에서 내리꽂힐 뿐만 아니라 바닥에서도, 멀리 바다에서도 햇빛이 대원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빛이 너무 강했다. 더구나 해가 좀 길어야 말이지. 우스운 얘기이긴 하지만 한국의 공해가 그립기(?)까지 했다. 적어도 자외선은 막아 주니까. 여기서는 구름 낀 날씨에도 밖에 하루 종일 있으면 얼굴이 탄다. 아침에 본 대원이 저녁 먹을 때면 얼굴이 까맣게 타서 들어온다.
- P4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집에 들어가자 아내가 달력을 보고 있었다. 아내가 말했다.
"크리스마스가 삼 주밖에 남지 않았어요. 그런데 일꾼들은 코빼기도 보이질 않네요."그리고 아내는 여자만이 생각해낼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이대로 수수방관하면 예수님의 생일에도 공사가 끝날 것 같지않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크리스마스는 하루하루 다가와 지나가버릴 것이고, 우리 모두가 새해의 숙취와 휴가에서 회복할 때쯤이면 벌써 2월이 되어 있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따라서 작업을 끝낸 걸 축하하는 파티를 열어 일꾼들을 초대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꾼들만 아니라 그 부인들도 반드시 함께 초대하자는 것이었다.
이 아이디어에 숨어 있는 계교는 두 가지 가정에 근거하고 있었다. 첫째로는 남편들이 남의 집에서 어떻게 일하는지 한 번도보지 못한 부인들이 호기심 때문에라도 이 초대를 거절하지 못할것이란 점이었다. 둘째로는 어떤 부인도 자기 남편이 일을 마무리짓지 못하는 사람이길 원하지 않을 것이란 점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 부인은 다른 부인들 앞에서 체면을 잃고 많은 사람 앞에서낭패를 당할 것이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남편에게 심한 바가지를 긁어대지 않겠는가! - P336

 주로 집과 주변 골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우리에게만 빠져 살았던 해였다. 그래도 하루하루가 우리에게는 즐거웠다. 물론 때로는 좌절을 맛보고 종종 불편하기는 했지만 결코 지루하거나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었다.
모리스가 마르를 잔에 따라 가져왔다. 그리고 의자를 끌어다앉으며 말했다.
"아피 크리스마스"
그것으로 그의 영어는 끝이었다.
"보나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P3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총소리를 들었다. 나는 뒤푸르의 총알이 빗나갔길 바랐다. 여기서 오래도록 살아도 나는 진짜 시골 사람이 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접시에 올려진 맛있는 요리보다 살아 있는 야생 멧돼지를 더 좋아하는 한 진짜 프랑스 사람도 될 수 없을 것같았다. 그래, 프랑스인들은 그들의 배를 위해 살라고 내버려두자.
나는 잔인한 피의 잔치에서 멀리 떨어져 문명인으로 살 테니까.
이런 고상한 자존심은 저녁식사 시간이 되면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앙리에트가 산토끼 한 마리를 가져와, 내 아내와 향료와 겨자를 넣어 맛있게 요리한 것이었다. 나는 두 그릇이나 먹어치웠다. 피가 걸쭉하게 섞인 육즙은 황홀할 지경이었다.
- P3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도 신체 접촉으로 반가움을 표현하는 프로방스식 예법에 익숙해지는 데 여러 달이 걸렸다. 영국에서 교육받은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도 인간관계에서 일종의 타성에 빠져 있었다. 상대와 항상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악수 대신에 목례를 하며, 여자 친척에게만 입맞춤을 하고,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하는애정표현은 개에게만 국한시키라고 배웠다. 따라서 공항 검색원이 몸수색을 하듯이 몸을 더듬는 프로방스식 인사법은 처음에 무척이나 당혹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런 인사법을즐긴다. 이런 식으로 인간관계를 표현하는 의식의 미묘한 멋에,
프로방스식 만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그런 몸짓언어에 매료되고 말았다.
- P180

입맞춤이 끝나면 대화가 시작된다. 시장바구니와 꾸러미를 내려놓는다. 개는 카페의 탁자 다리에 묶는다. 자전거와 연장은 가까운 벽에 기대어둔다. 진지하고 흡족한 대화를 하려면 두 손이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에 이런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두 손으로 마침표도 찍고, 마무리짓기 힘든 이야기를 끝내기도 하는 것이다.
말이란 입만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프로방스 사람들은 충분히 신체적으로 여기지 않는 말을 두 손으로 강조하고 윤색하기도 한다. 따라서 손과 언제나 웅변적인 어깨는 생각을 조용히 주고받는데 필수적이다. 실제로 멀리 떨어져 아무런 소리를 듣지 못하더라도, 몸짓과 손짓만 보고서 프로방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대강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 P182

드문 현상은 아니다. 프로방스는 북유럽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상당한 충격이다. 프로방스에서는 모든 것이 순수 자체다. 기온은 영상 37, 39도에서 영하 7도까지 극과 극을 달린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도로가 유실되고 고속도로가 폐쇄될 정도로 엄청나게쏟아붓는다. 미스트랄은 심신을 피곤하게 만드는 무지막지한 바람으로 겨울에는 모진 추위를, 여름에는 잔인할 정도로 건조한 공기를 몰고 온다. 음식은 흙냄새가 물씬 풍기는 강한 맛으로, 부드러운 음식에 익숙한 소화기관을 뒤집어놓기 일쑤다. 포도주는 숙성되지 않아 쉽게 마셔지지만, 조심스레 오랫동안 숙성시킨 포도주에 비해 알코올 함량이 높은 경우가 적지 않다. 영국과 사뭇 다른 기후와 음식이 복합된 결과에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프로방스에는 적당한 것이 없어, 수잔을 한 방에 보내버린 것처럼 많은 사람을 고생시킨다.  - P198

9월의 주말이면 3차 대전을 준비하는 듯한 소리가 시골을 뒤덮는다. 사냥철의 시작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소리였다. 프랑스에서 남자다운 남자라면 모두가 총을 메고 사냥개를 끌고, 살생충동에따라 사냥감을 찾아 산으로 향한다. 사냥철이 임박했다는 첫 조짐은 우편물로 시작되었다. 베종라로멘에 있는 한 총포상이 보낸엄청난 카탈로그였다. 모든 총기류를 완벽하게 갖추고 사냥 전의 가격으로 제공하겠다는 광고였다. 60, 70개의 모델이 있었다.
베르니 카롱 그랑 베카시에, 아니면 전자 조준기가 달린 뤼제 매그넘 44구경을 가지고 싶은 생각에, 이 땅에 태어난 후 줄곧 잠자고 있던 내 사냥 본능이 꿈틀대며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위험한 기구를 다루는 내 능력을 조금도 믿지 않는 아내가 발등이나 쏠거면서 전자 조준기가 필요하겠냐고 빈정댔다.
- P26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 강연에서 "저는 글을 신뢰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기억이 나는군요. 사실입니다. 글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말도 마찬가지고요. 말과 글은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군요. 앞에서여러 번 말씀드린 것처럼 말과 글 모두 자연스러운 행동이 아니라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질서를 필요로 하는 시스템이라고 믿기 때문이죠.
- P101

다시 말하지만 글을 쓰면서 우리가 전략적으로 몸에 익혀야 하는 시간 감각은 글을 쓰는 우리의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쓴 글을 읽게 될 독자의 마음속에 흐르는 시간과 관련된 감각입니다. 이 감각을 익혀 두어야 교과서적으로 글을 쓸 때뿐 아니라 나만의 방식으로 글을 쓸때도 참고할 수 있겠죠. 의외의 방식으로 글을 전개해나간다고 할 때 그 ‘의외‘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독자가 일반적으로 갖게 되는 시간 감각에 반전이라는 충격을 준 것일 테니까요.
- P113

우리가 앞에서 ‘나만의 슬픔, 나만의 기쁨, 나만의 분노‘, 이 모든 나만의 것‘을 ‘모두의 언어‘로 옮기는 게 글쓰기라고 규정하지 않았던가요. 그러니 우선 슬픔 자체가 그냥 슬픔이 아닌 거죠. ‘나만의 슬픔‘이니까요. ‘모두의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나부터 과연 그것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 ‘나만의 슬픔‘이면서, 더 나아가 내 몫의 문장을 통해 새롭게 변신하게될 ‘나만의 슬픔‘이기도 한 거죠.
- P126

셋째, 주어를 반복적으로 쓰게 되면 의도하지 않았어도 해당 주어가 강조될 수 있으니 문장 안에 숨길 수 있다면 숨기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앞에 쓴 짧은 문장의글에서도 주어가 감춰져 있는 걸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첫 문장부터 그렇죠? 짧은 문장의 경우 주어를 지나치게 노출해 쓰면 독자가 글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자칫주어만 남길 수 있으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 P137

넷째, 문장의 끝에 붙는 ‘-이다‘ 혹은 그 준말인 ‘-다‘를 서술격 조사라고 부르는데,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을 쓸 때는 이 서술격 조사를 생략하거나 아니면 다른 종결어미 (가령 - ㄹ까‘나 ‘ - ㄴ가)로 바꿔 쓰거나 그도 아니면 아예 서술격 조사나 종결어미를 과감히 생략한 문장을 중간중간 섞어 주시는 게 좋습니다.
제가 쓴 글에도 ‘ㅡㄹ까‘ 같은 종결어미를 쓰거나("설령 그런 소원을 갖게 되었더라도 굳이 공공연하게 밝힐 필요가 있었을까") 과감히 생략한 문장 ("자신이 쓰는 책의 한 문장에, 그것도 한 꼭지의 첫 문장에?",
"첫 문장의 효과를 톡톡히 봤구나 하는", "하지만 그것도 잠깐) 이 보이시죠. 리듬 때문입니다. 읽을 때마다 ‘다‘가 툭툭 튀어나오면 마치 ‘다다다다‘ 하고 오토바이가 달려가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으니까요. 긴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에서도 거슬리는데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에서야 오죽하겠습니까. 실제로 한국 소설가들이 질색하는 것 중 하나가 죄다 ‘- 다‘로 끝나면서 이어지는 문장이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나네요.
- P138

앞에서 여러 번 말씀드렸다시피 글쓰기는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니 ‘내 생각이나 기분을글로 간단히 표현하는 것도 못 하다니‘라고 자책하실필요 없습니다. 외려 그게 자연스러운 거니까요. 자책감은 떨어 버리시고 수영이나 스케이팅을 익힌다고 생각하시면서 글쓰기를 연습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제가할 수 있는 건 여러분에게 행운을 빌어드리는 것밖에 없겠네요.
행운을 빕니다!
- P14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