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11월 5일, 수요일
눈사람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아침 11시, 무채색 하늘에서 쏟아지는 함박눈이 외계 행성의 무적함대처럼 로메리케의 언덕과 정원, 잔디밭을 침공했다. 오후 2시 , 릴레스트륌 시에서는 제설기가 가동됐다. 2시 반이 되자, 사라 크비네슬란은 콜로바이엔 가의 드문드문 떨어진 집들 사이로 도요다 코롤라 SRS를 천천히 조심스럽게 몰았다. 완만하게 펼쳐진 시골 풍경 위로 11월의 눈이 오리털이불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낮에 보니 집들이 달라 보인다고 사라는 생각했다. 너무 달라보여서 하마터면 그의 집을 그냥 지나칠 뻔했다. 급히 브레이크를밟자, 차가 미끄리지면서 뒷좌석에서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백미러에 아들의 못마땅한 얼굴이 비쳤다.
"엄마 금방 올게, 우리 아들."
- P12

 초췌하고 회색빛이 돌며 잔뜩 흐렸다. 늘 그렇듯이 눈동자는 충혈됐고, 큼지막한 코의 모공에는 검은색 피지가 박혀 있었다. 알코올에 찌든, 연푸른색 홍채가 자리한 눈 밑의 다크서클은 뜨거운 물로 세수하고, 수건으로 닦고, 아침을 먹고 나면 사라질 것이다. 어디까지나그의 짐작이었지만, 이제는 마흔이 되었기에 낮이면 어떤 얼굴이 될지 그도 알 수 없었다. 며칠간 악몽에 시달리고 깨어날 때의 그쫓기는 표정에도 평화가 내려앉고, 찡그렸던 미간도 말끔히 펴질지 아니면 그대로일지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소피스 가에 있는작고 간소한 아파트를 나가 오슬로 경찰청, 강력반의 홀레 반장으로 지내는 동안에는 거울을 피해 다니기 때문이다. 대신 타인의얼굴을 들여다보며 그 안에서 그들의 고통, 학전 악몽, 스스로 속이는 동기화 이유를 찾아내려 했다. 그들의 피곤한 거짓말을 들으며, 이미 마음의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감우에 집어넣는 자신의일에서 의미를 찾으려 노력했다. 미움과 자기혐오의 감옥이 어떤 것인지 그는 매우 잘 알고 있었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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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라호이아에 가고 싶어. 부자들이 가는 동네. 라호이아에 한 번도 안 가봤어."
빅 엔젤의 말에 리틀 엔젤이 대답했다.
"거기에 팬케이크 하우스가 있어. 팬케이크 사 먹을까?"
"뭐래?"
페를라는 계속 속삭였다.
"알았지?"
리틀 엔젤이 말하자, 빅 엔젤이 대꾸했다.
"알았다."
"8시야."
"준비할게."
"죽지마."
"아직은 안 죽어. 하지만 혹시 내가 죽으면 벌새가 보일 거야.
그럼 인사를 해. 그게 나일 테니까. 잊지 마."
"절대로 안 잊을게."
리틀 엔젤은 약속했다.
그들은 작별 인사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빅 엔젤은 아내를 꼭 껴안았다.
"뭐, 좋아 난 내일 죽을 거야.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해변에 갈거야."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남자들 때문에 내가 미쳐비리겠어.
빅 엔젤은 내일 아침에 여행할 생각을 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리틀 엔젤은 그들을 데리고 이 동네를 빠져나와 농구 코트와 맥도날드를 지나 805번 국도에 진입할 것이다. 라디오를 틀고 큰형에게 웃어주겠지. 티후아나는 저 멀리서 점점 작이지면서 보이지 않게 되리라. 그들은 북쪽과 서쪽으로 가서, 해변에 도착한 다음 탁 트인 구릿빛 바다 위를 영원히 떠도는 거대한 파도를 바라보리라.
- P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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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를 굴렸다.
"날 용서해라."
빅 엔젤이 말했다.
"형도 날 용서해."
리틀 엔젤이 대답했다.
이제 마당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말이야, 나한테 준 상자 인에는 뭐가 들었어?"
리틀 엔젤이 물었다. 손으로 침실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날 너한데 주려고 했던 거다. 그 크리스마스 날에."
빅 엔젤이 대답했다. 미니는 그의 휠체어를 굴려 멀어져갔다.
"가서 봐."
리틀 엔젤은 그 상자를 뜯지 않을 참이었다. 죽든지 말든지,
미겔 엔젤 따위, 죄다 될 대로 되라지. 하지만 그는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빅 슬립』 초판 사인본이 들어있었다.
- P461

우리 모두 기뻐하며 왔답니다.
즐겁게 당신을 축하하러요.
그들은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다. 마침내 노래가 끝나자, 모두는 큰 소리로 오랫동안 박수 쳤고, 자리를 뜰 때까지 박수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이윽고 리틀 엔젤은 형의 모습을 다시 보았다.
사람들이 박수 치고 휘파람을 부는 가운데, 빅 엔젤은 기진맥진한 권투 선수처럼 두 손을 들고 머리 위에서 손을 맞잡아 흔들면서 입 모양으로 ‘그라시아스‘라고 말했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반짝이는 눈물이 모든 이들을 바늘처럼 찔러댔다.
리틀 엔젤은 눈 위에 손을 얹었다.
- P466

빅 엔젤은 무릎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기진맥진한 채로 잠들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에게 계시를 내려주셨으니, 꿈에서 송별 파티를 보았던 것이다. 그는 모든 장면을 보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페를라가 겁에 질린 채로 소리치는 가운데 깨어났다. 그녀는 빅 엔젤의 얼굴과 베개에 묻은 피를 발견했고, 사람들은 허겁지겁 집에서 달려 나와 싫다는 빅 엔젤을 침대에서 끌어내어 응급실로 달렸다. 그러는 내내 그는 죽기를거부했다. 바로 이 파티 때문이었다. 이 케이크, 이 노래 때문이었다.
그는 이제껏 잡혀 있던 시간의 기포에서 빠져나왔다.  - P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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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로 바닷가 모래사장을 걸으면서 발에 모래가 밟히는 감각을 느낀다면 그 감각은 촉감보다는 감촉이라고하는 게 더 적확해 보이고, 아이들이 고운 모래를 가지고 손장난을 하면서 모래의 부드러운 질감을 느낀다면 그 감각은 감촉보다 촉감이 더 적절해 보인다 .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가? 감촉은 어떤 물체가 피부에 닿는 것을 느끼는 일을 가리키고, 촉감은 어떤 물체를 피부에 접촉하여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되는 일을 가리킨다. 곧 감촉은 감각의 수동성 · 비의도성을, 촉감은 감각의 능동성 · 의도성을 함의한다.
- P339

또한 패러다임은 한 시대를 지배하는 인식 체계라는 거시적 의미를 가지는 반면, 프레임은 어떤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틀이라는 점에서 미시적 의미를 가진다. 패러다임이 새롭게 바뀌거나 특정인에의해 자의적으로 변화되기 좀처럼 어려운 반면, 프레임은 주어진 맥락이나 상황에 따라 쉽게 바뀔 수 있다. 정치가나 선동가 등이 정치적 · 사회적 이슈를 제기하거나 선거 전략을 짤 때 프레임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도 프레임의 그런 속성 때문에 가능하다.
- P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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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축들은 야생 동물의 삶을 단축시켰던 많은 위협으로부터 인위적으로 보호된다. 순종 젖소는 굉장한 양의 우유를 생산하지만, 거치적거리게 디룽디룽 매달린 녀석의 젖통은 사자를 앞질러 달릴라치면 심각한 방해물이 될 것이다. 서러브레드 경주마는 뛰어난 달리기 주자이자 높이뛰기 선수지만, 녀석의 다리는 경주중에, 특히 점프를 하다가 부상을 입기 쉽다. 인위선택은 자연선택이라면 결코용인하지 않았을 영역으로까지 녀석을 밀어붙인 것이다.  - P104

우리 인간은 지나친 위험 회피의 문제를 쉽게 간과한다. 얼룩말이나 영양들이 사자가 시야에 뻔히 들어오는데도 기껏 경계를 늦추지않을 뿐 태연자약하게 풀을 뜯는 광경을 보면, 우리는 혼란스럽다.
우리는 수킬로미터 내에 사자 코빼기도 보이지 않을 때라도 스스로(혹은 사파리 안내인)의 위험 회피 성향을 좇아 랜드로버 안에 들어앉아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공포를 저울질할 다른 대상이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파리 오두막으로 돌아가서 푸짐하게 식사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의 야생 선조들은 위험을 감수하는 얼룩말들에게 더 크게 공감했을 것이다. 얼룩말처럼 그들도 잡아먹힐 위험과 아무것도 못 먹을 위험을 저울질해야 했을 테니 말이다. 물론 사자가 공격해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속한 무리의 규모를 감안할 때, 사자가 나 아닌 다른 구성원을 잡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풀밭으로 진출하지 않는다면, 혹은 물가로 내려가지 않는다면, 어차피 굶주림이나 갈증으로 죽을 것이다. 우리가 앞서 두 번이나 언급한 바로 그 경제적 대가교환의 교훈이다.‘
여담이 길어졌지만, 요는 야생 늑대에게도 다른 동물들처럼 최적의 도주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너무 대담한 거리와 너무 소심한 거리의 중간쯤에 적당히 놓인, 그리고 아마도 유연하게 바뀔 수 있는거리일 것이다. 진화적으로 긴 시간에 걸쳐 환경이 바뀌면, 자연선택은 도주거리를 조절해 연속선상에서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이동시킬 것이다.  - P107

마을 변두리의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야생 늑대들을 상상해보자.
녀석들 대부분은 돌과 창을 던지는 사람들이 무서워서 도주거리가아주 길 것이다. 사람의 모습이 저 멀리 나타났다 싶으면 당장 안전한 숲으로 내뺄 것이다. 하지만 몇몇 개체가, 유전적 우연에 의해,
평균보다 살짝 짧은 도주거리를 갖게 되었다. 녀석들은 위험을 약간더 감수하는 (용감하되 무모하지는 않은) 태도 때문에 위험을 회피하는 경쟁자들보다 더 많이 먹는다. 세대가 갈수록, 자연선택은 점점 더도주거리가 짧은 개체들을 선호할 것이고, 결국 녀석들은 인간이 던진 돌에 맞을 만큼 도주거리가 짧아질 것이다. 새롭게 수중에 들어온 식량원 때문에 늑대들의 최적 도주거리가 변한 것이다.
코핀저의 견해는 이런 식의 진화적 도주거리 단축이 개의 가축화 첫 단계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위선택이 아니라 자연선택이 낳은결과였다. 짧은 도주거리는 더 유순한 행동의 척도이기도 하다. 이초기 단계에서는 사람들이 일부러 유순한 개체들을 택해서 사육한게 아니었다. 이 단계에서 사람과 최초의 개들 사이의 상호작용은오직 적대적일 뿐이었다. 늑대들이 길들여진 것은 자발적 가축화였지, 사람에 의한 의도적 사육이 아니었다. 의도적 가축화는 나중에 이루어졌다. - P108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현상이 있었다. 유순함을 선택적으로 육성하다 보니 예상치 못한 부가적 효과들이 뒤따랐는데, 그야말로 환상적이고 전혀 예측하지 못한 현상이었다. 개를 사랑했던 다윈이 이 사실을 일있다면 아마도 넋을 잃었으리라.
길든 여우들은 행동만 개 같아진 것이 아니라 모습도 개 같아졌다. 그들은 여우다운 털가죽을 잃었고, 웰시콜리 같은 흑백 얼룩무늬가 나타났다. 여우답게 쫑긋 섰던 귀는 개처럼 펄럭거렸다. 꼬리끝도 여우답게 아래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개처럼 위로 섰다. 원래암여으는 1년에 한 번 발정하지만, 녀석들은 암캐처럼 반년마다 발정했다. 벨랴예프에 따르면, 녀석들은 짖는 소리도 개를 닮았다.
개를 닮은 이런 특징들은 그야말로 곁다리 효과였다. 벨랴예프의 연구진은 그런 특징들을 일부러 노린 적이 없다. 그들이 의도한 것은 유순함뿐이었다. 개를 닮은 다른 특징들은 유순함을 낳는 유전자에 진화적으로 편승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유전학자들에게는 놀라운 현상이 아니다. 하나의 유전자가 겉보기에 서로 무관한 듯한 여러 효과를 초래하는 ‘다형질 발현‘ 현상은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겉보기에‘ 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발생학적 발달은 복잡한 사업이다. 우리가 그 복잡한 내용을 속속들이 알고 보면, "겉보기에서로 무관한 듯했던 것들이 "우리가 예전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이해하게 된 어떤 경로에 의해 연결된" 것들로 바뀐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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