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일이 처음 벌어졌을 때는 그것이 대단한 변화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침팬지 같은 다른 영장류, 몇몇 원숭이, 그리고 매력적인 베록스시파카 여우원숭이 등도 때때로 두 발로 걷는다. 하지만 우리처럼 습관적으로 두 발로 걷는 것은 온몸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고, 수많은 보완적 조정을 초래했다. 온몸의 뼈 하나, 근육 하나까지 변화를 면치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불분명하고, 아무리 부차적이고, 아무리 간접적이거나 희미하게 연관된 내용이라 할지라도, 모든 부속은 걸음걸이의 큰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바뀌어야 했다. 생물이 생활방식의 큰 변화를 겪을 때마다. 그러니까 물에서 뭍으로 올라오고, 뭍에서 물로 돌아가고, 하늘로 가고, 지하로 갈 때마다, 이와 비슷하게 대대적인 재편작업이 벌어졌을 것이다.
몸에서 뚜렷한 변화만을 떼어내 따로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쩌면 어디에나 변화의 영향이 미쳤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축소한 표현인지도 모른다. 수백 수천 가지 영향이 미쳤고, 영향들의 영향이 또 미쳤다. 자연선택은 영원히 우리를 미세조정하고 손질한다. 위대한 프랑스 분자생물학자 프랑수아 자코브(François Jacob)의 표현대로 영원히 "땜질"한다.
- P489

코알라의 주머니는 캥거루의 주머니처럼 위로 열리지 않고 아래로 열려 있다. 나무에 매달려 살아가는 동물로서는 좋은 생각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 역시 역사의 유물인 탓이다.
코알라는 웜뱃을 닮은 선조로부터 유래했다. 웜뱃은 땅파기 선수들이다.

(웜뱃은) 터널을 파는 굴착기처럼 큼직한 발에 흙을 잔뜩 담아 마구 휘두른다. 그런 선조의 주머니가 앞으로 열려 있었다면, 새끼들의 눈과 이빨에는 시도 때도 없이 티끌이 끼었을 것이다. 그래서 주머니는 뒤로 열리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생물이 나무로 올라갔다. 아마도 신선한 식량 공급원을 찾아나섰을 것이다. 이때 ‘설계‘가 함께 따라갔다. 바꾸기에는 너무 복잡했던 것이다.
- P491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는 서로 다른 종류의 박테리아에서 유래한뒤, 우리 눈에 보일 만큼 큰 생물체가 이 땅에 나타나기 한참 전부터 수십 억 년에 걸쳐 상보적인 화학 묘기를 연마해왔다. 둘 다 그화학적 기술 때문에 다른 세포에게 납치된 셈이고,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을 만큼 큰 생물들의 크고 복잡한 세포 속 세포액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엽록체는 식물세포 속에서, 미토콘드리아는 식물세포와 동물세포 속에서 말이다.
식물의 엽록체가 포획한 태양에너지는 복잡한 식량사슬의 바닥에놓인다. 식물의 에너지는 식량사슬을 통해서 곤충 같은 초식동물로전달되고, 그곳에서 다른 곤충, 식충동물, 늑대나 표범 같은 육식동물로 전달되고, 또 그곳에서 독수리나 쇠똥구리 같은 청소동물로전달되고, 결국 마지막으로 곰팡이나 박테리아 같은 분해자로 전달된다. 식량사슬의 매 단계를 통과할 때마다 약간의 에너지가 열이되어 빠져나가고, 나머지 에너지는 근육 수축 같은 생물학적 과정들을 추진하는 데 사용된다. 태양이 처음 입력해준 에너지 외에는새로운 에너지가 더해지지 않는 것이다. 심해의 열수구(熱水口)에 살면서 화산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 특이한 소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생명을 움직이는 모든 에너지는 결국 식물이 잡아낸 햇빛에서 온다.
- P499

나뭇가지들이 땅 위에 거의 펼쳐질 정도로 둥치가 짧아지더라도 나무가 얻는 광자에는 전혀 손실이 없고, 더구나 막대한 비용을 아낄 수 있다. 그런데 왜 하늘을 향해 높이 줄기를 밀어올리느라고온갖 비용을 지르는 걸까?
나무의 타고난 서식지는 숲이라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나무는 같은 종이는 다른 종이는 경쟁자 나무들을 누르기 위해서 키를 키우는 것이다. 공터나 정원의 나무는 둥치 바닥까지 풍성하게 가지들이 나 있다고 해서 착각하지 말자. 군대 교관이 사랑해마지않는 둥글둥글한 모양의 나무가 등장한 것은, 그것이 현재 공터나 정원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요즘 보는 것은 ‘빽빽한 숲‘이라는 자연적 서식지를 벗어난 나무들이다. 산림수의 타고난 모양새는 키가 크고, 둥치가 노출되어 있고, 대부분의 가지와 잎은나무 꼭대기에서 광자 빗줄기의 예봉을 받아내는 천개에 몰려 있는 형태다. - P500

무기경쟁은 진화적 시간에서 펼쳐진다는 점을 명심하자. 현재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는 치타 개체와 가젤 개체의 경쟁과 혼동해서는안 된다. 진화적 시간에서의 경쟁은 실시간 경쟁을 위한 도구를 구축하는 경쟁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략이나 속도로 상대를능가하기 위한 도구가 양쪽의 유전자풀에 갖춰져가는 과정이다. 두번째로 명심할 점은, 개체가 포식자에게서 도망칠 때 자신과 같은 종의 경쟁 개체들을 앞지르기 위해서 달리기 도구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러닝화와 곰에 관한 이솝우화급 유명한 농담은 아주 옳은 이야기다. 치타가 한 무리의 가젤을 쫓기시작했을 때, 가젤에게 중요한 것은 치타를 앞질러 달리는 게 아니라 제 무리의 느린 가젤들을 앞질러 달리는 것이다.
무기경쟁이라는 용어를 이해하고 보면, 숲의 나무들 역시 무기경쟁에 돌입한 상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개별 나무들은 바로 옆에있는 이웃 나무들보다 태양에 더 가까이 가려고 경쟁한다. 오래된나무가 죽어서 천개에 빈 공간이 생기면 경쟁이 특히 심해진다. 늙은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가 온 숲에 메아리치면, 그런 기회를 노리고 있던 묘목들은 그 소리를 신호탄 삼아서 실시간 경쟁에 돌입한다.(물론 우리 동물들의 실시간보다야 훨씬 느리다), 아마도 선조들의 진화적 무기경쟁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유전자, 즉 더 빠르고 높이 자라는 유전자를 갖춘 나무가 실시간 경쟁의 승자가 될 것이다.
숲 속 나무들의 무기경쟁은 대칭적 경쟁이다. 양측이 천개에서의공간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놓고 다투기 때문이다. 한편, 포식자와먹잇감의 무기경쟁은 비대칭적이다. 공격 무기와 방어 무기 사이의경쟁이기 때문이다. 기생생물과 숙주의 무기경쟁도 마찬가지다. 놀랍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한 종의 수컷과 암컷,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무기경쟁이 있다.
- P507

인식했던바, 자연선택은 한 개체군의 경쟁 개체들 사이에서만 선택을 한다. 개체들의 경쟁 때문에 개체군 전체가 멸종을 향해 달음질치더라도, 자연선택은 미지막 개체가 죽는 순간까지 줄기차게 가장경쟁력 있는 개체를 선택한다. 자연선택은 최후의 일각까지 가장경쟁력 있는 유전자를 선호함으로써 개체군을 멸종으로 몰아갈 수있고, 그 유전자를 최후에 멸종할 운명으로 만들 수도 있다.
- P516

찰스 다윈은 시인이 아니었지만, 《종의 기원》의 마지막 문단은 시적인 크레센도가 돋보인다.

따라서 자연의 전쟁으로부터, 기근과 죽음으로부터, 우리가 상상할수 있는 가장 고귀한 것, 즉 더욱 고등한 동물이 직접 생성되어 나온다. 이러한 생명관에는 장엄함이 있다. 최초에 소수의 형태 혹은 하나의 형태에 갖가지 능력을 지닌 생명의 숨결이 불어넣어졌다. 행성이고정된 중력의 법칙에 따라 영원히 돌고 도는 동안, 이토록 단순한 시작으로부터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멋진 무한한 형태가 진화해 나왔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 P526

 자연선택은 생존에 도움이 되는 무작위적인은 변화들을 체계적으로 포착하고,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긴 시간에 걸쳐 아주 조금씩 그것을 축적하여, 결국 진화로 하여금 불가능과 다양성의 산을 오르게 한다. 그 산의 높이와 넓이에는 한계가 없는 듯하다. 그 비유적인 산을 가리켜 나는 ‘불가능의 산‘ 이라고 부른다. 자연선택이라는 불가능의 펌프는 생물의 복잡성을 ‘불가능의산‘으로 밀어올린다. 이것은 태양의 에너지가 물을 진짜 산 위로 끌어올리는 것과 비슷한 통계적 작업이다. 자연선택이 국지적으로나마 통계적으로 가능한 방향을 거슬러 통계적으로 불가능한 방향으로 밀어주기 때문에, 생명은 더욱 복잡하게 진화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태양으로부터 그칠 줄 모르고 에너지가 공급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 P550

창조론자들은 종종 파스퇴르의 실험과 같은 것들을 자기네에게 유리한 증거로 끌어다 말한다. 그들의 잘못된 논리는 이렇게 흐른다. "자연발생은 오늘날 어디에서도 관찰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명이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윈의 1871년 발언은 이런 식의 비논리에 대한 예리한 응수였다. 생명의 자연발생은물론 극히 드문 사건이다. 하지만 한 번은 일어났던 사건이다. 최초의 자연발생이 자연적인 사건이었다고 생각하든, 초자연적인 사건이었다고 생각하든 말이다.  - P553

우리가 아는 최고의 자기복제 분자는 DNA다. 우리가 흔히 보는 발전된 생물체들에서 DNA와 단백질은 깔끔하게 서로를 보완한다. 단백질 분자는 탁월한 효소지만 서툰 복제자고, DNA는 정확하게그 반대다. DNA는 삼차원 형태로 접히지 않으므로 효소로 기능할수 없다. DNA는 활짝 열린 직선 모양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복제자이자 아미노산 서열 지정자로서 안성맞춤이다. 단백질 분자는착착 접혀서 ‘닫힌‘ 형태이기 때문에 서열 정보가 ‘노출되지‘ 않고,
따라서 정보가 복사되거나 읽힐 수 없다. 단백질의 서열 정보는 복잡하게 꼬인 단백질 내부에 묻혀 있어서 접근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기다란 DNA 사슬은 서열 정보가 노출되어 있으므로, 주형으로 쉽게 기능한다.
생명 기원의 딜레마란 이런 것이다. DNA는 복제할 수 있지만, 복제 과정을 촉매하기 위해서 별도의 효소를 필요로 한다. 단백질은 DNA 형성을 촉매할 수 있지만, 정확한 아미노산 서열을 규정해주는 DNA가 있어야 한다. 초기 지구의 분자들은 어떻게 이 강고한 결합을 끊고 자연선택을 개시했을까? 여기에 RNA가 등장한다.
RNA는 DNA와 종류가 같은 폴리뉴클레오티드 분자다. RNA는 DNA의 네 가지 암호 ‘문자‘에 상응하는 암호를 지닐 수 있고, 실제로 살아 있는 세포에서 DNA의 유전 정보를 다른 장소로 운반해 쉽게 사용되도록 하는 역할을 맡는다. 먼저 DNA가 주형으로 작용해 RNA 암호 서열을 조립하면, 그 RNA를 주형으로 사용해서 단백질서열이 조립된다. DNA에서 곧바로 단백질이 조립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바이러스들은 아예 DNA가 없고, 대신 RNA를 유전 분자로 갖고있다. RNA가 세대에서 세대로 유전정보를 옮기는 일을 전적으로 담당한다. - P556

생물학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눈길을 돌리는 어디에나 초록이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가 활짝 피어 번성하는 계통수의 한가운데에 작은 가지로 자리잡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먹고, 자라고, 썩고, 헤엄치고, 걷고, 날고, 땅을 파고, 몰래 다가가고, 추격하고, 도망치고, 앞질러가고, 앞질러 속이는 무수한 종들에게 우리가 둘러싸여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보다 적어도 열 배는 많은 초록식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움직일 에너지가 없을 것이다. 포식자와 먹잇감, 기생생물과 숙주가 끝없이 증강하는 무기경쟁을 벌이지 않는다면, 다윈이 이야기한 ‘자연의 전쟁‘과 ‘기근과 죽음‘이 없다면, 무언가를 바라보는 능력을 지닌 신경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식하고 이해하는 능력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멋진 무한한 형태에 둘러싸여 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무작위적이지 않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직접적인 결과다. 그것은 마을 유일의 게임, 지상 최대의 쇼다.
- P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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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래의 외모는 여러 종류의 큰 어류들과 닮았다. 그중 하나인 만새기 (Corppierta hipturnis)는 실제로 가끔 ‘돌고래‘ 라고 불린다. 만새기와 진짜 돌고래는 바다 표층에서 날래게 사냥을 하는 생활방식에 알맞도록 둘 다 유선형 몸통을 갖고 있다. 그들의 수영 기술은겉보기에는 비슷할지 몰라도 서로 빌려온 것은 아니다. 세부 사항들을 살펴보면 금세 차이가 드러난다. 둘 다 주로 꼬리로 가속을 하지만, 만새기는 다른 물고기들처럼 꼬리를 옆으로 흔드는 반면에,
진짜 돌고래는 꼬리를 상하로 흔든다. 포유류의 과거를 부지불식간에 드러내는 것이다.
도마뱀과 뱀은 척추를 옆으로 흔들며 이동했던 선조 어류의 습성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땅에서 수영한다‘고도 할 수 있다. 말이나 치타가 달리는 모습을 이와 대비시켜 보라. 이 포유류들도 물고기나 뱀처럼 척추를 굽혀서 가속을 하지만, 옆으로가 아니라 위아래로 구부린다.
포유류의 족보에서 어떻게 이런 전이가 일어났는가 하는 것은 재미있는 질문이다. 어쩌면 중간 단계가 있었을 것이다. 개구리처럼 어느 방향으로도 척추를 거의 굽히지 않는 형태였을지도 모른다.
한편 악어는 보통의 파충류들과 마찬가지로 도마뱀처럼 걷지만, 위로 펄쩍 뛸 수도 있다(무시무시하게 재빠르다). 물론 포유류의 선조가 악어와 닮지는 않았겠지만, 우리의 중간 단계 선조도 악어처럼 두 가지 자세를 함께 취했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할 수는 있다.
- P398

오스트레일리아의 근사한 유대 포유류 동물상에 관해서는 동물의지리적 분포를 다룬 장에서 이미 이야기했다. 여기서 지적할 점은,
유대류의 동물 각각이 세계 다른 곳을 점령한 ‘태반류(즉 유대류가 아닌) 포유류의 상응하는 동물 각각과 수렴 진화했다는 것이다. 왼쪽그림에 소개된 유대류들은 태반이 있는 상대 동물(즉 태반류 중 같은 ‘업종‘에서 살아가는 동물)과 전혀 같지 않다. 외모상의 특징부터 다를때도 있다. 그래도 대체로 인상적일 정도로 서로 닮았고, 그러면서도 창조자가 빌려오기를 했다고 볼 만큼 많이 닮지는 않았다.
유전자풀에서 유전자가 성적으로 섞이는 것은 유전적 발상을 빌려주거나 공유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성적 재조합은 한 종에만 국한되므로, 유대류와 태반류 포유류 등 서로 다른 종을 비교하는 것이 목적인 이 장에서는 적합하지 않은 이야기다. 흥미롭게도, 박테리아들 사이에서는 고차원적인 DNA 빌려주기가 성행한다. 박테리아들은 (상당히 관계가 먼 균주들끼리도) 자유분방한  난교를통해서 DNA 발상을 교환한다. 이 과정을 유성생식의 전 단계라고 간주하는 사람도 있다. 발상 빌려오기 기법은 박테리아들이 항생제에 대한 내성 같은 유용한 ‘기술을 습득하는 주된 방법이다.
종종 이해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변형‘ 이라는 말로 그 현상을 표현하기도 한다.  - P403

이 장을 시작하면서 나는 박쥐와 사람의 팔을 예로 들어 ‘상동성‘을 소개했다. 단어의 특이한 용법을 고집하면서, 골격은 같지만 뼈들은 다르다는 표현도 썼다. 그런데 우리는 다시 톰슨의 변형 작업을 통해서 상동성 개념을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한 기관을고무판에 그린 다음, 그것을 왜곡해서 다른 기관으로 만들어낼 수있다면, 그때 두 기관(가령 박쥐의 손과 사람의 손)을 상동기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수학자들에게는 이런 상황을 지칭하는 용어가있다. 위상동형(homeomorphic)‘이다."
- P416

선조를 공유하는 게 아니라 기능을 공유하기 때문에 생긴 닮은꼴에 대해서는 ‘상사성‘이라는 단어가 쓰이게 되었다. 가령 박쥐의 날개와 곤충의 날개는 상사기관으로, 박쥐의 날개와 사람의 팔 같은 상동기관과는 관계가 다르다. - P417

왜 아니겠는가? 윗슨과 크릭이 일으킨 분자생물학적 혁명의 결론은 바로 DNA는 DNA라는 것이었다. DNA는 그것이 사람의 DNA인지 침팬지의 DNA인지 사과의 DNA인지 신경 쓰지 않는다.
DNA 조각은 자신과 상보적인 조각이기만 하면 무엇과도 행복하게짝을 짓는다. 그렇지만 결합력까지 다 같은 것은 아니다. DNA 단일 가닥은 제 정확한 짝과는 단단하게 결합하지만, 그와 비슷한 다른 단일 가닥과는 좀 더 느슨하게 결합한다. DNA ‘문자(윗슨과 크릭의 염기)‘들 중에서 상대 가닥의 문자와 짝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결합이 약해지는 것이다. 군데군데 이빨이 나간 지퍼와 비슷하다.
다른 종의 가닥끼리 결합했을 때, 그 결합 강도를 어떻게 잴까?
우스울 정도로 단순한 방법이 있다. 결합의 ‘녹는점‘을 재면 된다.
이중 나선 DNA의 녹는점이 약 85 도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시리라. 정상적으로 적절하게 짝지은 이중 나선 DNA 라면, 가령 사람의DNA 한 가닥이 ‘녹아서‘ 상보적인 두 가닥으로 풀릴 때는 85도가맞다. 하지만 결합이 더 약하면 (사람의 가닥과 침팬지의 가닥이 결합한 경우라면) 더 낮은 온도에서도 결합이 깨진다. 사람의 DNA가 그보다 더먼 친척인 물고기나 두꺼비의 DNA와 결합한 경우라면, 그보다 더 낮은 온도로도 풀릴 것이다. DNA 가닥이 같은 종의 가닥과 결합했을 때와 다른 종의 가닥과 결합했을 때의 녹는점 차이가 바로 두 종의 유전적 거리를 말해주는 잣대다. 대강의 경험적 규칙으로, 녹는점이 1도 낮아지면 서로 맞는 DNA 문자 수가 1퍼센트 줄어든다고본다(혹은 지퍼에서 빠진 이빨 수가 1퍼센트 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 P425

동물이 화가 나면 목덜미 털이 곤두선다. 동물이 공포를 느낄 때도그렇다. 털을 쭈뼛 세워서 몸을 더 커 보이게 만듦으로써 위험한 경쟁자나 포식자에게 겁을 주는 것이다. 우리 털 없는 원숭이들 역시,
있지도 않은 (혹은 겨우 조금 남은 털을 세우는 메커니즘을 이식 갖고있다. 그것이 소름이다. 우리의 털 세우기 메커니즘은 흔적이다. 오래전의 선조들에게는 유용하게 쓰였겠지만 지금은 기능을 잃고 유물로만 남았다. 흔적이 된 털은 우리 몸 구석구석에 우리 역사가 쓰여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리고 진화가 실제로 발생했음을 말해주는 설득력 있는 증거다. 이것 역시 화석에서 나온 증거가 아니라 현생 동물에게서 나온 증거다.
- P452

대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설계상의 굵직한 실수라도(심지어 파국적인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실수라도) 후속 땜질 조치로 얼마든지 수정할 수있다는 것이다. 적당한 환경에서라면 독창적이고 정교한 땜질을 통해서 처음의 실수를 완벽하게 보완할 수 있다. 일반적인 진화 과정에서는 굵직한 돌연변이가 등장한 뒤에 거의 언제나 수많은 땜질 작업을 거쳐야 한다. 대체로 옳은 방향으로 개선하는 돌연변이라고해도 마찬가지다. 그 후에도 자연선택은 수많은 작은 돌연변이를선호함으로써 뒤청소를 한다. 최초의 대규모 돌연변이가 남긴 울퉁불퉁한 모서리들을 매끄럽게 다듬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과 매의 눈이 최초 설계에 심각한 실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잘 보는 것이다. 다시 헬름홀츠를 인용해보자.

눈은 다른 광학 도구들이 가질 수 있는 결점을 모조리 갖고 있다. 더구나 눈에만 고유한 결점도 있다. 그렇지만 그 결점들은 너무나 훌륭하게 상쇄되어 있다. 그래서 정상적인 조명 환경에서라면, 결점들로인한 영상의 부정확성이 망막 원뿔 세포들에 의해 규정된 민감성 한계를 넘어설 만큼 뚜렷하게 인식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다소 변화된 조건에서 관찰을 하려는 순간, 색수차, 비점수차, 맹점, 정맥 그림자, 매질의 불완전한 투명성, 기타 내가 지적했던 모든결점이 인식되기 시작한다.

- P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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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이 우연히 바람이나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올 확률은 장애물의 거리와 반비례한다고 말한다면 너무 단순한 계산일 것이다.
그러나 거리와 횡단 가능성에 대강의 반비례 관계가 성립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섬들 간의 거리는 평균 수십 킬로미터인 반면, 섬들과본토의 거리는 965킬로미터로 격차가 무척 크므로, 우리는 그 군도가 충분히 분화의 산실이 되리라고 예측할 수 있다. 실제로 그랬고, 다윈도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군도를 떠난 뒤에야. 결코 다시 밟지못할 그곳을 뜨고 나서야 깨우쳤지만 말이다.
군도 내 섬들 간의 거리는 수십 킬로미터, 군도 전체와 본토와의 거리는 수백 킬로미터로 격차가 크기 때문에, 진화론자는 섬에 서식하는 종들이 서로간에는 상당히 비슷하지만 본토의 연관종과는차이가 있으리라고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정확하게 그것이 우리가 목격하는 바다. 다윈도 아래 인용문에서 그 점을 지적했는데, 아직 진화 사상을 형성하기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슬아슬할 정도로 진화적 언어에 가까운 표현을 구사했다. 내가 이탤릭체로 강조한 핵심 구절은 이 장 곳곳에서 여러 맥락으로 인용될 것이다.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작은 집단 새들의 구조가 이처럼 이행성과 다양성을 보여주므로, 우리는 이 군도에 원래 새들이 부재했다가, 한 종이 이동해 와서 다양한 목적에 맞게 변형된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원래 수리 종류였던 한 새가 이곳에 도입되어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폴리보리가 수행하는 썩은 고기 처치 업무를 맡게 된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 P351

초기의 포경선들은 갈라파고스 군도에서 큰거북을 수천 마리 잡아다가 식량으로 배에 실었다. 고기를 신선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선원들은 거북들을 살려두었다가 필요한 시점에 죽였다. 하지만 도살을 기다리는 거북들에게는 먹이도 물도 주지 않았다. 거북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거꾸로 뒤집은 다음 때로는 몇 층씩 포개어 쌓았다. 여러분을 소름 끼치게 하려고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물론 그런 야만적인 잔인성에 나도 소름이 끼치지만), 요점은, 먹이나 신선한물 없이도 거북들이 몇 주씩 산다는 것이다.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페루 해류를 타고 갈라파고스 군도까지 떠내려가는 시간 정도는 쉽게 견뎌낸다. 게다가 거북은 물에 뜬다.
갈라파고스 군도의 한 섬에 처음으로 도착해 증식한 거북들은 같은 방도를 통해서 비교적 쉽게(역시 우연히) 훨씬 가까운 다른 섬들로 넘어갔을 것이다. 섬에 도착한 거북들은 섬 동물들이 흔히 드러내는 특징을 갖게 되었다. 몸집이 더 크게 진화한 것이다. 섬 거대중은 예전부터 잘 알려져 있던 현상이다 (헷갈리게시리 섬 왜소증이라는 현상도 마찬가지로 잘 알려져 있다).  거북들이 다윈의 핀치들의 모범을 따랐다면, 섬마다 다른 종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우연히 이 섬에서 저 섬으로 옮겨간 뒤에, 서로 더는 교배할 수 없게 되었고(이것이 종을 나누는 정의임을 잊지 말자), 그리하여 다른 유전자들로 오염되지 않은 채 서로 다른 생활방식을 자유롭게 진화시켰을 것이다. - P356

방금 나는 ‘밀어내는 것처럼 보인다‘는 표현을 썼는데, 말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얼른 철회해야겠다. 뚜껑 덮는 책상들이 용암을 분출하면서 대륙판을 밀어내는 모습을 상상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이것은 비현실적인 상상이다. 규모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판은 너무나 육중하기 때문에 해령 화산의 분출력으로는밀리지 않는다. 차라리 올챙이가 유조선을 미는 편이 승산이 있을 것이다.
실제의 힘은 따로 있다. 연약권은 성질상 반액체이기 때문에, 권역 전체에서 대류가 일어난다. 판의 아랫면 어디에서든 연약권의 대류가 느껴지는 것이다. 연약권은 한 지점에서 일정한 방향을 향해 천천히 이동한 뒤, 한 바퀴를 돌아 더 낮은 높이에서 그 장소로돌아온다. 가령 남아메리카판 아래의 연약권 상층은 꿋꿋하게 서쪽으로만 계속 이동한다. 뚜껑 책상 의 분출력이 남아메리카판을 민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판의 아랫면 전역에서 일정한방향으로 착실히 움직이는 대류가 그 위에 짐처럼 떠 있는 내륙을함께 나른다는 것은 상상할 만한 일이다. 이것은 올챙이가 이니다.
엔진을 끈 채 페루 해류에 몸을 맡긴 유조선은 분명 흐름에 따라 흘러갈 것이다.
이것이 현대의 판구조론이다.  - P374

탐정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설명을 내놓는다. 해령에서 해양저가확장함에 따라 두 판은 멀어지고 있다. 해령의 화산 활동에서 새로생겨난 바위들이 두 판에 더해지고, 우리가 아프리카판과 남아메리카판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뚜껑 책상들에 얹힌 채 서로 반대 방향으로 운반된다. 컬러 화보 18~19쪽의 그림들은 이 과정을 묘사한 것인데, 가짜로 색을 입혀서 암석의 연대를 표현했다. 더 붉을수록 더젊은 바위다. 대서양 중앙 해령을 기준으로 양쪽의 연대 패턴이 깔끔한 거울상을 이룬다.
얼마나 명쾌한 이야기인가! 그런데 더 좋은 소식이 있다. 탐정은 선상 실험실에서 표본들을 처리할 때 바위에 미묘한 무늬가 난 것을 발견한다. 깊은 암석권에서 뽑아낸 바위는 나침반 바늘처럼 살짝자성을 띤다. 이것은 잘 알려져 있는 현상이다. 지구의 자기장이 화성암을 구성하는 고운 결정들을 편극(偏極)시키기 때문에, 용암이 굳을 때 바위에 자기장의 자취가 남는 것이다. 한순간 얼어버린 작은 나침반 바늘들처럼, 결정들은 용암이 굳는 순간에 가리키던 방향으로 고정된다.
- P377

창조론자들은 화석만이 진화의 증거인 것처럼 말한다. 물론 화석은 굉장히 강력한 증거다. 다윈의 시대 이래 트럭 수십 대 분량의 화석이 발굴되었고, 그것들은 모두 진화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거나적어도 진화에 합치하는 증거들이다. 보다 주목할 사실은, 진화에모순되는 화석이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석 증거가 이처럼 강력함에도 불구하고, 화석이 진화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인 것은 아니다. 화석이 한 조각도 발견되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살아 있는 동물들이 보여주는 증거만으로도다윈이 옳다는 결론으로 압도적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범죄가 벌어진 뒤에 현장에 달려온 탐정은 화석보다 더 확고한 살아 있는 증거들을 수집할 수 있다.
이 장에서 우리는 섬이나 대륙의 동물 분포를 살펴보았다. 그럼으로써 모든 동물은 기나긴 세월 동안 공통선조로부터 진화해왔다는가설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다음 장은 현대 동물들을 서로 비교해볼 차례다. 동물의 여러 특징이 동물계에 어떻게분포되어 있는지, 특히 유전암호 서열을 비교한 결과가 어떤지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 장과 똑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 P382

포유류의 골격은 얼마나 대단한 작품인가, 아름다워서 하는 말이아니다. 물론 아름답기도 하지만, 우리가 ‘포유류의 골격‘ 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하다는 말이다. 그토록 복잡하게 맞물린 구조가 포유류 전반에 걸쳐 근사한 다양성을 드러내는 데다가 동시에 어떤 부분에서든 포유류 전반에 걸쳐 분명 같은 구조라고 파악할 수 있으니 말이다.
사람의 골격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하니까 그림으로 볼 필요도없겠고, 박쥐의 골격을 오른쪽 그림으로 살펴보자. 뼈 하나하나에대해 사람의 골격에서도 대응하는 뼈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환상적이지 않은가! 우리가 그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이유는, 뼈들이 이어진 순서가 같기 때문이다. 뼈들의 비율이 다를 뿐이다. 박쥐의 손은 엄청나게 크지만(제 몸에 비해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도 박쥐의 긴 날개뼈와 우리의 손가락이 상응하는 관계라는 것을 못 알아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의 손과 박쥐의 손은 분명 같은 구조의 두형태다(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절대 부인할 수 없으리라).
이런 식의 동일함을 전문용어로는 ‘상동성‘ 이라고 한다. 박쥐의 나는 날개와 사람의 쥐는 손은 ‘상동기관‘ 이다. 공통선조의 손이 서로 다른 후손 계통에서 부분마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서로 다른 정도로 잡아들여지거나 압축된 것이다(나머지 골격도 그렇다).
- P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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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직소퍼즐‘이나 플러그 음모론‘을 생각한다면 물론, 그럴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 대신 ‘매끄러운 개선의 기울기‘를 떠올려야 한다. 너무 복잡해서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것이 어떻게 진화했을까 하는 수수께끼에 직면해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과거에도 늘 요즘처럼 완벽하게 완성된 상태였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고도로 진화해 완전히 다듬어진 효소 분자는 반응을 수조 배 빠르게 촉매한다. 정확하게 알맞은 형태로 아름답게 제작되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자연선택의 선호를 받기 위해서 꼭 수조 배의속도를 낼 필요는 없다. 백만 배만 해도 좋다! 천 배도 좋다. 열 배나 두 배라도 자연선택의 간택을 받기엔 충분하다. 효소의 성능은매끄러운 기울기를 따라 개선된다. 구멍이 전혀 없는 데서 시작해, 조잡한 모양의 구멍들을 거쳐, 결국 적절한 형태와 화학적 특징을갖춘 소켓이 되기까지, 꾸준히 나아간다. ‘기울기는 각 단계가 전단계에 비해,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눈에 띄는 개선이 이루어졌다는뜻이다.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는 최소 수준보다 더 작은 개선이라 우리 눈에는 안 띄어도, 자연선택의 눈에는 충분히 될 수 있다.
- P326

그러니. 배아 발생의 전 과정이 이처럼 정교하고 연쇄적인 사건들을 거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유전자들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다. 유전자들이 아미노산 서열을 결정하고, 그것이 단백질의 삼차구조를결정하고, 그것이 소켓 같은 활성 부위의 형태를 결정하고, 그것이 세포의 화학반응을 결정하고, 그것이 배아 발생 과정에서 세포가 찌르레기 같은 행동을 하도록 결정한다. 그렇기에 부잡한 연쇄적사건들의 시작점에서 유전자에 차이가 발생하면 결국 배아 발생 방식에도 차이가 빚어지고, 따라서 성체의 형태와 행동에도 차이가 발생한다. 그 성체가 생존과 번식에서 어떤 성공을 거두느냐에 따라서 그 차이를 만들었던 유전자가 유전자풀에서 생존할지 실패할지가결정된다. 이것이 자연선택이다.
- P327

 세포들은 유전적으로는 동일하지만 화학적 속성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배아에서 연속적으로 세포분열이 일어날 때 그 각각의 역사가 누적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 P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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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르레기들의 떼짓기를 프로그래밍하는 방법은 이렇다. 새 한 마리의 행동을 프로그래밍하는 데 거의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이자. 그 로봇 찌르레기에게 세세한 규칙들을 부여하자. 나는 방법, 서로의거리와 상대 위치에 기반해 이웃 찌르레기들에게 반응하는 방법을설정하자. 이웃들의 행동에 얼마나 무게를 둘지, 방향을 바꿀 때 자신의 뜻에 얼마나 무게를 둘지에 관한 규칙들도 심어주자. 실제 새의 행동을 세심하게 측정함으로써 모형 규칙들의 정보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규칙들을 무작위로 변이시키는 경향성도 사이버 새에게 부여하자.
찌르레기 한 마리의 행동을 모두 규정한 복잡한 프로그램을 완성했다면, 이제 이 장에서 강조하는 결정적인 단계로 나아갈 차례다.
무리 전체의 행동을 프로그래밍하려고 애쓰지 마라. 예전 세대의 프로그래머들이라면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그 대신 방금 프로그래밍한 한 마리의 컴퓨터 찌르레기를 복제하자. 로봇 새를 천 마리쯤 복사하자. 모두 같게 만들 수도 있고, 저마다 제 규칙에서 약간의 변이를 일으키게끔 차이를 줄 수도 있다. 천 마리 모형 찌르레기를 컴퓨터에 풀어 놓자. 그들이 모두 같은 규칙들을 준수하되, 자유롭게 상호작용하도록 내버려두자.
- P297

여기에서 핵심은 안무가도, 지도자도 없다는 점이다. 질서나 조직이나 구조 등은 전역적인 규칙들에 의해 생겨난 게 아니라, 여러 차례 반복되어 국지적으로 지켜지는 규칙들의 부산물로 생겨났다. 이것이 바로 발생의 방식이다. 발생은 국지적 규칙들로만 이루어지는과정이다. 다양한 차원에 규칙들이 적용되지만, 특히 중요한 것은 하나의 세포 차원이다. 안무가는 없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도 없다. 중앙집중식 계획은 없다. 건축가도 없다. 발생이나 제작 분야에서 이런 식의 프로그래밍 원리를 가리켜 자기조립 (self-assembly)이라고 한다.
- P298

사람, 독수리, 두더지, 돌고래, 치타, 표범개구리, 제비…… 이들의 몸은 하나같이 아름답게 조직되어 있기 때문에, 발달을 지시한유전자들이 청사진이나 설계도나 계획안처럼 기능하지 않는다는사실을 우리는 좀처럼 믿기 어렵다. 하지만 아니다. 컴퓨터 찌르레기들처럼 그것도 개별 세포들이 국지적인 규칙들만을 따른 결과다. 아름답게 설계된 몸은 개별 세포들이 국지적으로 준수한 규칙들의 결과로서 창발한 것이지, 뭔가 전역적인 계획을 참조해 만들어진게 아니다.
발달하는 배아의 세포들은 거대한 무리 속 찌르레기들처럼 선회하며 춤을 춘다. 물론 중요한 차이도 있다. 찌르레기들과는 달리 세포들은 면이나 덩어리 형태로 서로 물리적으로 붙어 있다. 세포들의 ‘떼‘는 ‘조직‘이다. 세포들이 작은 찌르레기들마냥 선회하며 춤을추면 삼차원 형상이 구축된다. 세포들의 움직임에 따라 조직이 함입하기 때문에, 혹은 국지적인 세포의 성장과 사멸 패턴에 따라 조직이 부풀거나 쭈그러들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 대한 비유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종이접기다. 탁월한 발생학자 루이스 월퍼트가《하나의 세포가 어떻게 인간이 되는가 (The Triumph of the Embryo)》에서 제시했던 비유다.  - P299

우리가 그림에서 보는 것은 바이러스들의 유전물질이 담긴 단백질 용기고, (달 착륙선) T4의 경우에는 숙주를 감염시키는 도구도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은, 단백질 용기가 조립되는 방식이다. 이것이 실제로 자기조립되기 때문이다. 사전에 만들어진 단백질 분자 여러 개가 조립되어 하나의 바이러스를 이룬다. 단백질 분자 각각도 자기조립되는데, 아미노산 서열이 화학법칙의 힘에 따라 저만의 독특한 ‘삼차구조‘를 이루는 과정을 거친다. 이것도 뒤에서 살펴볼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단백질 분자들이 서로 결합해 바이러스의 ‘사차구조‘를 이룬다. 분자들은 국지적 규칙을 따를 뿐, 전역적 계획이나 청사진은 없다.
- P303

종이접기가 정말로 생물학을 닮은 듯한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정크선도 발생 과정서 여러 유생 단계를 거치는데, 그 중간 단계들도 나름대로 보기 좋은 형태들이라는 점이다. 마치 애벌레가 나비로 가는 길의 중간 단계고, 애벌레와 나비는 전혀 닮지 않았으며, 애벌레도 나름대로 아름답고 잘 작동하는 생물인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단순한 정사각형 종이 한 장에서 시작해 그것을 접기만 하면(절대 자르지 않고, 절대 풀로 붙이지 않고, 절대 다른 종이를 끼워넣지 않는다), 그과정에서 세 가지 확연한 유생 단계가 등장한다. 쌍동선, 덮개 두 개달린 상자, 액자에 든 사진. 그런 다음 ‘성체‘인 정크선으로 절정을이룬다.
종이접기 비유를 더 옹호해보자면, 정크선 접는 법을 처음 배운사람은 정크선 자체만이 아니라 세 유생 단계(쌍동선, 찬장, 액자)에 대해서도 깜짝 놀란다. 내 손으로 접고는 있지만, 정크선이나 유생 단계들에 대한 청사진을 따라 작업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최종생산물과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접기 규칙들을 따랐을 뿐인데, 결국에는 번데기에서 나비가 빠져나오듯 정크선이 등장한다. 이처럼 종이접기 비유는 전역적 계획과 대비되는 국지적 규칙들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종이접기 비유를 지지하는 이유가 또 있다. 접기, 함입하기, 뒤집기는 배아의 조직들이 몸을 만들 때 즐겨 사용하는 기교라는 점이다. 특히 초기 배아 단계들에 이 비유가 잘 들어맞는다. - P305

하지만 종이를 접는 손이 없는데, 대체 어떤 기계적 과정에 의해서 이런 역동적인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일까? 내가 앞에서 설명했듯이, 단순한 팽창 그 자체도 부분적으로 추진력이 된다. 조직 전역에서 세포들이 증식하면 조직의 면적이 커지고, 조직은 달리 아무데도 갈 곳이 없기 때문에 접히거나 함입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는 이보다 좀 더 통제된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말이다.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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