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은 인도에서 왔다

아침에 깨어나 눈을 뜨면 우리의 ‘봄‘은 시작됩니다. 별다른 생각 없이 눈을 뜨지만 본다는 것은 숨 쉬는 것과 같습니다. 의식하지 않아도 일어나는 생리 현상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보는 것은 무의식중에 하나의 각인처럼 뇌로 전해지고, 그에 맞춰 우리 몸이 반응합니다. 집안 곳곳에 무엇이 있는지 신경 쓰지 않고 움직여도 어디 부딪혀 넘어지지 않는 것은 본다는 행위가 기억으로 뇌에 저장되기 때문입니다. ‘본다는 것‘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선택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특별한 미술이나 영화를 선택해서 볼 수는 있지만요.
그럼 볼 만한 물건이 없었던 선사시대에는 어땠을까요? 굳이 기억으로 저장할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요? 늘 마주치는 자연이 전부였을테니까요. 하지만 곧 인간은 무언가를 만들어냈습니다. 처음엔 필요에 의해 물건을 만들었지만 점차 ‘볼만한 가치‘를 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런 물건을 미술이라고 부릅니다.  - P5

미술은 달라요. 서양미술이 스스로 발전을 거듭한 끝에 일상에서먼 곳까지 달려나갔다면 동양미술은 생활에 밀착해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동양미술은 좀 더 일상의 물건이 많다는 뜻인가요?

동양미술 역시 미술입니다. 하지만 밥그릇도 미술이 될 수 있다는 거죠. 물론 잘 만든 밥그릇이어야겠지만요. 우리는 사람이 동양에서만들어낸 것들 가운데 미적 특성이 들어간 전부를 미술로 다룰 겁니다.
오랫동안 서양에서는 쓰임새가 확실한 공예품은 미술로 보비 않았어요. 크래프트 아트(Craft Arts)라는 별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했죠. - P20

하나만 짚고 가겠습니다. 인도 미술이라고 하면 대부분 오늘날 인도를 기준으로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다룰 인도 미술은 현재국경으로 아프가니스탄 일부와 파키스탄, 네팔, 방글라데시 미술까지 포함합니다.

다른 나라는 워낙 가까우니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아프가니스탄은 의외네요.

먼 과거에는 인도의 힘이 거기까지 미쳤거든요. 인더스 문명의 중심인 인더스강이 어디에 있는지 아나요?
지금은 파키스탄에 있답니다. 사실 인도, 즉 인디아라는 명칭은 인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도 인더스강 유역을 가리켜 인디아라 불렀지요. 인디아의 유래를 알려면 오늘날 인더스강이 있는 나라인 파키스탄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파키스탄이란 국명은 파키스탄 주요 주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든 겁니다. 다음 페이지 파키스탄 지도를 보세요. 펀자브의 P, 아프가니아의A, 카슈미르의 K, 신드의 S, 발루치스탄의 Stan을 모으면 PAKSSTAN인데, 여기서 두 번 들어간 S 하나를 빼고... - P51

네? 인도는 인더스문명에서 시작된 거 아닌가요?
맞아요. 하지만 인도의 가장 오래된 문명은 우리가 아는 인더스문명이 아닙니다. ‘인더스문명의 기원이 되는 문명‘이 또 있어요.
아래 사진이 그 흔적 중 하나인 메르가르의 모습입니다. 인더스 문명보다 더 오래전, 인더스강 유역에 들어섰던 문명의 유적이죠. 이문명을 인더스 문명에 앞선 문명이란 뜻에서 먼저 선(先) 자를 붙여 선인더스 문명이라 불러요. - P80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인더스 문명을 낳았다는 생각은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오랫동안 기정사실처럼 여겨졌습니다. 심지어 인더스 문명을 만든 드라비다인을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라고까지 했죠. 하지만 메르가르의 발굴을 통해 드라비다인이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훨씬 먼저 문명을 일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됩니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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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살펴본 모든 사례에서 보듯 빠른 산업화와 현대화의 결과인 급속한 사회변화는 발전을 위협으로 느끼는 남성의잔인한 반응을 야기했다. 이 모든 경우에서 결정적 특징은 폭력이라는 범죄행위가 결코 거친 에너지의 즉흥적 발산이 아니라 학습되고, 외부에서 유입되고, 하나의 의례로 굳어진 것.
요컨대 사회 공동체의 집단적-상징적 실체의 일부라는 것이었다. 대중의 ‘순진한 시선이 짐짓 외면한 것은 폭력의 잔인함 자체가 아니라 이 범죄에 내재된 ‘문화적‘이고 의례로 굳어진, 상징적 풍습이었다. - P38

로더럼 사건도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파키스탄 출신 무슬림 청소년의 ‘정치적 무의식‘과 직면한다. 이들의 폭력은 단지 충동에서 비롯된 혼란이 아닌 정확히 이데올로기적 틀을 지닌다. 자신이 사회로부터 소외되었다고 느낀 청소년 집단은 지배집단의 하층계급 출신소녀들을 상대로 복수를 감행했다. 그러므로 종교와 문화에서도 여성을 겨냥한 잔인한 폭력의 특징이 있으리라는 의혹은 지극히 합리적인 문제제기다.
여성 혐오가 이슬람교 내의 문제라는 식의 비난은 성립될 수 없다(이슬람교는 기독교보다 더 여성을 혐오하지 않는다). 그런 비난을 떠나서 우리는 많은 이슬람교 국가와 사회가 여성을 종속적인 위치에 두고 사회생활에서 배제하는 풍습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근본주의라고 칭해지는 여러 집단과 운동은 남녀의 엄격한 위계질서를 구축하고 수호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따라서 우리는 비록 ‘유럽의‘ 근본주의자가 이슬람 세계의 근본주의자보다 훨씬 더 소외되어 있고(누가 이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겠는가?), 또한 자유주의 세속사회의 근본주의 비판이 오류투성이라 하더라도 이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양측의 근본주의에 동일한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 P40

법으로 실현될 수 있는 목적만을 올바른 목적으로, 다시 말해보편타당함(정의의 본질 분석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보편타당함)뿐만 아니라 일반화까지도 가능한 목표만을 올바른 목표로 인정하려는 완고한 관습 탓에 아주 드물게 얻는 통찰이 있다. 즉, 보편타당하기에 언제 어디서나 적용될 수 있어야한다는 관점은, 곧 보게 되겠지만 정의의 특징과 모순된다는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보편성을 인정할 수 있기에 보편타당한 목표라고 할지라도 다른 상황에서는, 물론 이 다른 관계에서도 비슷하게 보일 수는 있지만, 적용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다루는 문제인 폭력은 일상의 경험이 보여주듯 수단이 될 수 없다. 인간과 관련하여 말하자면, 분노는 더없이 분명한 폭력의 분출을 부른다. 이 폭력은 스스로 상정한 목표를 이루려는 수단이 아니다. 폭력은 수단이 아니라, 선언이다.
- 발터 벤야민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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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풍부한 자원을 하나만 꼽으라면 그것은 낙천성이다. 그리고 낙천성은 어쨌든 어느 정도는 천재의 전제 조건이다. 음울한 천재라는 이미지가 있긴 하지만, 창조적 과학자들은 덜 창조적인 동료들에 비해 더 낙천적인 경향이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낙천적인 직원은 비관적인 직원보다 더 창의적이다. 그리고 실리콘밸리보다 낙천적인 곳은 어디에도 없다.
이곳 주민 말마따나 인정사정없이 낙천적인 곳이다. 실리콘밸리를 제외한 미국 모든 곳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으면 온갖 부정적 의견을 만나지만, 실리콘밸리에서는 도전을 만난다. 왜 안 해? 뭘 기다리는데? 인정사정없다. - P458

"약한 유대에서는 새로운 것을 배울 가능성이 큽니다." 이유는 많다. 약한 유대는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과 엮이는 경우가 많기때문에, 빈이나 실리콘밸리 같은 이민자 사회의 이점을 누릴 수 있다. (오늘날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의 50퍼센트는 공동 창업자 중 적어도한 명이 외국 태생이다. 또한 우리는 유대가 약한 사람에게 더 모질게 말하는데, 이 점이야말로 창의성의 중요한 요소다.
강한 유대는 편안함과 소속감을 선사하지만, 우리의 세계관도 제약한다. 강한 유대를 맺는 집단은 약한 유대 집단에 비해 집단사고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그래노베터는 약한 유대가 늘 좋지는 않다고 설명한다. "선생이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 안정적인 존재이고 선생에게 주로 필요한 것이 뒷받침이라면, 약한 유대는 별 도움이 안 될 겁니다." 하지만 실리콘밸리 같은 장소에서 약한 유대는 황금과 같다.
약한 유대를 점이라고 생각해보라. 앞에서 보았듯 점은 많을수록 좋다. 유동적인 장소에서는 이 모든 점이 수도관처럼 지식을 전달하고 아이디어를 처리한다. - P468

 일기 예보가 이토록 힘든 것은 기상 조건이 무작위적이서가 아니라 상호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창조성과, 특히 협력적 창조성과 무척 비슷하게 들린다.
재즈 트리오가 즉흥 연주를 하면 개별 음악가들 혼자서는 결코 만들 수 없는 연주가 탄생한다. 심리학자이자 재즈 음악가 키스 소여는 "각 음악가의 정신 구조에 대해 모든 것을 알더라도 집단적 즉흥 연주가 어떻게 나타날지 예측하기란 여전히 난해하다"고 말했다. 악단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 이제 작은 악단을 교향악단으로, 작은 도시로, 아테네나 피렌체 같은 대도시로 확장해보라.
그러면 문제가 보일 것이다. 황금기는 비선형계라서 예측이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라도 극히 어렵다. 한 가지 요인에 집중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  - P495

이 모든 것은 유전과 아무 상관이 없다. 늙은 골턴의 헛기침 소리가 시대를 뛰어넘어 들린다. 미안해요. 프랜시스, 하지만 당신이 본성 대 양육이라는 용어를 만든 탓에 우리는 각각의 장단점을 놓고열띤 토론을 벌여야 했답니다. 그건 바보 같은 주장이에요. 불필요하고요. 창조성은 ‘여기 안에서 ‘나 ‘저기 바깥에서‘가 아니라 둘 사이의 공간에서 일어난다. 창조성은 관계다. 사람과 장소의 교차로에서 펼쳐지는 관계.
이 교차로는 여느 교차로처럼 위험하고 인정사정없는 장소다.
주의를 기울이고 걸음을 늦추고 저기 바보들을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교차로는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 고대 아테네든 서니베일의 상점가든, 초라한 교차로야말로 진정한 게니우스 로키이기 때문이다. 천재가 사는 장소. - P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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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번지는 한이 서린 곳이었다. 갓난아이의 독기가 집안 가득했다. 그 집 여자들은 그걸 알고 있었고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몇 년 동안은 각자 나름대로 원혼을 견디며 살았지만, 1873년에 이르자 집에 남은 희생자는 세서와 그녀의 딸 덴버뿐이었다. 할머니 베이비 섹스는 세상을 떠났고, 아들 하워드와 뷰글러는 열세 살이 되던 해에, 그저 들여다보기만 했는데 거울이 깨져버리고(뷰글러는 이 일을 신호로받아들였다) 케이크 위에 작디작은 손자국 두 개가 찍히는 걸 (하워드에겐 이것이 신호였다) 보자마자 그길로 달아나버렸다. 두 아이 모두모락 김이 나는 병아리콩이 바닥에 한솥 소복이 쌓여 있는 꼴이나, 바스러진 소다크래커가 문지방 옆에 나란히 한 줄로 뿌려져 있는 모습은 아직 보이지도 않았는데 달아나버렸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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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접근 방식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내가 아직 아돌프 히틀러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적으로 단언할 것인가? 오히려 내가 히틀러를 알고 ‘이해‘ 하면 할수록 그는 더 나의 적이 되어야만 하지 않을까? 외부 행위에서 ‘내면의 의미‘로 나아가는 방식, 행위 주체가 자신의 행동을 해석하고 정당화하는 이야기로 나아가는 방식은 우리가사용하는 기만이라는 가면으로 나아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인생에서 우리가 쌓은 경험, 우리 스스로 털어놓는 이야기는 객관적 사실로 남은 행위와 달리 근본적으로 거짓말이다. 진리는 저 바깥에 있다. 진리는 행위 이외의 결코 다른 어떤 곳에 있지 않다. - P22

다음으로 폐기해야 할 좌파의 금기는 이슬람에 대한 일체의 비판을 거부하는 태도다. 그들은 이슬람 비판이 서구의 ‘이슬람 공포증‘의 발현이며, 이는 이슬람을 악마로 간주한 반이민 극우 대중영합주의자의 태도와 같다고 두려워한다. 이슬람 공포증에 죄책감을 느끼는 많은 서구 진보좌파들의 병적인 두려움을 이제 제발 끝내도록 하자! 살만 루슈디는 불필요하게 무슬림을 도발했다고 낙인찍혔고, 사형을 선고한 파트와 Fatwa에 그 자신도 일부 책임이 있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이슬람 비판을 두려워한 결과, 루슈디와 유사한 상황에서 같은 결과가 나타났다. 이슬람 비판에 부담을 느낄수록 서구 진보 좌파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로부터 위선적인 이슬람 혐오자라는 비난을 더 거세게 받았다. 초자아의 역설을 충실하게 재생산하는 명망가 무리들이라고나 할까. 그럴듯한 도덕적 요구와 내용상 말이 되지 않음에도 자아를 장악한 초자아의 요구를 맹목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그만큼 자아의 죄책감이 커지는 것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이슬람에 대한 무조건적 묵인은 이슬람의 압박을 더 크게 만들 수밖에 없다. - P25

 자유를 중시하고, 종교를 개인의 선택에 일임한 서구 세속사회에서 국가공권력은 개인의 자유를 보호했고, 이를 위해 사적 영역에 간섭하기도 했다(일례로, 아동학대가 의심되는 경우). 그러나 이슬람은 다르다. 탈랄 아사드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슬람법은 ‘가정‘ 영역의 간섭, ‘사적 영역‘의 침범을 허용하지 않는다.
물론 공적 영역에서 법 준수는 훨씬 엄격할 수 있다. 공동체가중시하는 것은 무슬림 개인의 사회적 행위 - 그가 말로 표현한 것까지 포함하여 -이지 내면의 생각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문제 삼지 않는다." 『쿠란』에는 이런 말씀이 나온다. "믿고싶은 자는 믿고, 믿기 싫은 자는 믿지 않도록 내버려두라"(수라 18장 29절). 그러나 "자기 의지대로 생각할 권리에는 사람들을 거짓 종교로 회심시키려고 자신의 종교적-도덕적 신념을 공개적으로 드러낼 권리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 P27

 바꿔 말해, 기독교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유럽에서
‘연합전선을 구축할 위협은 없다(상대 종교를 폄하하고 심판하는 증오 섞인 장광설의 작은 이벤트들은 제외하자). 유럽의 이슬람 공동체는 역설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먼저, 이들이2등 시민으로 격하되지 않고 이들의 신앙생활을 펼치게 응원하는 유일한 정치세력이 ‘신은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 자유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유일하게 의지할 세력이 무신론자라는 것이 유럽에 거주하며 신을 믿는 이슬람의 현주소다. 반면 신앙인으로서는 흡사 거울에 비친 것과 다름없는신앙생활을 하는 기독교도가 이슬람 최악의 정치적 적이다. 역설은, 마호메트 풍자화를 처음 게재한 사람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라는 이념을 옹호하면서 동시에 그 풍자화를 여기저기 전파하는 자유주의자가 이슬람의 유일하고도 진정한 동맹이라는 점이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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