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이 접근 방식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내가 아직 아돌프 히틀러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적으로 단언할 것인가? 오히려 내가 히틀러를 알고 ‘이해‘ 하면 할수록 그는 더 나의 적이 되어야만 하지 않을까? 외부 행위에서 ‘내면의 의미‘로 나아가는 방식, 행위 주체가 자신의 행동을 해석하고 정당화하는 이야기로 나아가는 방식은 우리가사용하는 기만이라는 가면으로 나아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인생에서 우리가 쌓은 경험, 우리 스스로 털어놓는 이야기는 객관적 사실로 남은 행위와 달리 근본적으로 거짓말이다. 진리는 저 바깥에 있다. 진리는 행위 이외의 결코 다른 어떤 곳에 있지 않다. - P22
다음으로 폐기해야 할 좌파의 금기는 이슬람에 대한 일체의 비판을 거부하는 태도다. 그들은 이슬람 비판이 서구의 ‘이슬람 공포증‘의 발현이며, 이는 이슬람을 악마로 간주한 반이민 극우 대중영합주의자의 태도와 같다고 두려워한다. 이슬람 공포증에 죄책감을 느끼는 많은 서구 진보좌파들의 병적인 두려움을 이제 제발 끝내도록 하자! 살만 루슈디는 불필요하게 무슬림을 도발했다고 낙인찍혔고, 사형을 선고한 파트와 Fatwa에 그 자신도 일부 책임이 있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이슬람 비판을 두려워한 결과, 루슈디와 유사한 상황에서 같은 결과가 나타났다. 이슬람 비판에 부담을 느낄수록 서구 진보 좌파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로부터 위선적인 이슬람 혐오자라는 비난을 더 거세게 받았다. 초자아의 역설을 충실하게 재생산하는 명망가 무리들이라고나 할까. 그럴듯한 도덕적 요구와 내용상 말이 되지 않음에도 자아를 장악한 초자아의 요구를 맹목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그만큼 자아의 죄책감이 커지는 것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이슬람에 대한 무조건적 묵인은 이슬람의 압박을 더 크게 만들 수밖에 없다. - P25
자유를 중시하고, 종교를 개인의 선택에 일임한 서구 세속사회에서 국가공권력은 개인의 자유를 보호했고, 이를 위해 사적 영역에 간섭하기도 했다(일례로, 아동학대가 의심되는 경우). 그러나 이슬람은 다르다. 탈랄 아사드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슬람법은 ‘가정‘ 영역의 간섭, ‘사적 영역‘의 침범을 허용하지 않는다. 물론 공적 영역에서 법 준수는 훨씬 엄격할 수 있다. 공동체가중시하는 것은 무슬림 개인의 사회적 행위 - 그가 말로 표현한 것까지 포함하여 -이지 내면의 생각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문제 삼지 않는다." 『쿠란』에는 이런 말씀이 나온다. "믿고싶은 자는 믿고, 믿기 싫은 자는 믿지 않도록 내버려두라"(수라 18장 29절). 그러나 "자기 의지대로 생각할 권리에는 사람들을 거짓 종교로 회심시키려고 자신의 종교적-도덕적 신념을 공개적으로 드러낼 권리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 P27
바꿔 말해, 기독교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유럽에서 ‘연합전선을 구축할 위협은 없다(상대 종교를 폄하하고 심판하는 증오 섞인 장광설의 작은 이벤트들은 제외하자). 유럽의 이슬람 공동체는 역설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먼저, 이들이2등 시민으로 격하되지 않고 이들의 신앙생활을 펼치게 응원하는 유일한 정치세력이 ‘신은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 자유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유일하게 의지할 세력이 무신론자라는 것이 유럽에 거주하며 신을 믿는 이슬람의 현주소다. 반면 신앙인으로서는 흡사 거울에 비친 것과 다름없는신앙생활을 하는 기독교도가 이슬람 최악의 정치적 적이다. 역설은, 마호메트 풍자화를 처음 게재한 사람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라는 이념을 옹호하면서 동시에 그 풍자화를 여기저기 전파하는 자유주의자가 이슬람의 유일하고도 진정한 동맹이라는 점이다. - P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