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걸릴 뿐이에요.

현성이가 새 신발을 신고 왔다. 생긴 건 축구화 같아도
‘풋살화‘ 라고 했다. 내가 잘 못 알아들으니까 또박또박 "풋,
살, 화, 풋살화예요. 축구화 아니고"라고 강조했다. 풋살화는 축구화랑 바닥이 다르고, 그냥 운동화보다 발등 부분이 납작해서 공 차기가 좋다고 했다. 아버지랑 같이 인터넷 쇼핑몰을 둘러보며 골랐고, 자기는 3학년치고는 발이 작아서 치수를 정할 때 좀 고민했고, 지난주에 주문했는데 어제야 도착했기 때문에 오늘 처음 신었으며, 이걸 신었더니 잘 뛰어지는 것 같았고, 그런데 생각만큼 그렇게 잘 되지는 않았다고 했다. 이야기를 계속하려는 현성이를 간신히 말렸다.
- P15

어른들이 보기에는 간단한 일이라 어린이가 시간을 지체하면 일부러 꾸물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어렸을때 기다려 주는 어른을 많이 만나지 못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지금 어린이를 기다려 주면, 어린이들은 나중에 다른 어른이 될 것이다. 세상의 어떤 부분은 시간의 흐름만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나는 어린이에게 느긋한 어른이 되는 것이 넓게 보아 세상을 좋게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이를 기다려 주는 순간에는 작은 보람이나 기쁨도 있다. 그것도 성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린이와 어른은 함께 자랄 수 있다.
- P19

 어린이의 허세는 진지하고 낙관적이다. 그래서 멋있다. 결정적으로 그 허세 때문에 하윤이가 옥스퍼드(또는 케임브리지)에 갈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바다 건너까지 유학을 가겠는가. 어린이의 ‘부풀리기‘는 하나의 선언 이다. ‘여기까지 자라겠다‘고 하는 선언.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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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죄수는 딜레마에 빠졌다. 늘 산책하던 길을 따라 한가롭게 걷고 있는데, 교도소 마당을 내려다보는 옆 건물의 열린 창문에서 갑자기 바이올린 연주 소리가 울려퍼졌다. 활기 넘치는 콘스키Kontski 마주르카였다. 탈옥 신호다. 그러나 그는 지금 교도소 정문과는 정반대 쪽에 있었다. 탈옥은 교도관이 눈치채기 전에 기습적으로 감행해야 한다. 한 번 실수하면 끝장이다.
- P9

협동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생물학의 영역에 깊이 들어와 버렸다. 유전자는 협동해서 염색체를 만들고, 염색체는 협동해서 게놈 genome이 되고, 게놈은 협동해서 세포를 형성하고, 세포는 협동해서 복합 세포를 이루고, 복합 세포는 협동해서개체를 만들고, 개체는 협동해서 군체를 이룬다. 한 마리의 꿀벌조차도 겉보기와는 달리 아주 높은 수준의 협동을 하며 산다.
- P30

‘해밀턴이 입증했듯이, 군체 곤충은 자매 (여왕벌, 여왕개미)의 번식을 도움으로써 자신이 스스로 번식하는 것보다 더 많은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할수 있다. 그러므로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일개미의 경이로운 이타주의는 사실 이기주의이다. 개미 군체의 이타적 협동 관계란 착각에 불과하다. 각각의 일개미는 그들 자신이 아니라 여왕개미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식, 곧 그들의 자매를 통해 유전적 영속성(永續性)을 추구한다. 그것은 인간이 경쟁자를 제거하고 승진의 계단을 올라가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유전적 이기성이다. 크로포트킨이 말했듯이 개미와 흰개미는 개별적으로는 <홉스주의적 전쟁>을 포기했지만, 그들의 유전자는 그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 P30

윌리엄스와 해밀턴은 인간의 행동을 조종하는 좀더 강한 동력, 즉 유전적 이익을 밝혀냄으로써 이타성이 끼여들 여지를 만들어주었다. 유전자는 이기적이지만 때로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개체의 이타성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들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기적 유전자> 이론 덕분에 개체의 이타주의를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P35

호박벌과 꿀벌의 이 같은 차이에 대해 새롭게 밝혀진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여왕 꿀벌은 일처다부제로 여러 마리의 수벌과 짝짓기를 한다. 반면에 여왕 호박벌은 일처일부제여서 한 마리의 수벌하고만 짝짓기를 한다. 그 결과 유전학적 계산에 따른 승률(勝率)이 나온다. 앞에서 수벌은 무수정란으로부터 부화한다고 했는데, 따라서 모든 수벌은 어미 유전자 절반의 순수한 클론 clone이다. 반면에 일벌은 아비와 어미가 있으며, 모두 암컷이다. 호박벌의 일벌은 어미의 아들(25%의 유전자를 공유) 보다는 자매 일벌들의 아들(정확히 37.5%의 유전자를 공유)과 핏줄이 더 가깝다. 이때문에 군체가 수컷을 생산하기 시작하면 일벌들은 꿀벌의 경우에서처럼 자매 일벌을 경계하고 여왕벌에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자매들과 힘을 합쳐 여왕벌에 대항한다. 여왕의 아들 대신에 일벌의 아들을 번식시키는 것이다. 여왕벌과 일벌의 이 같은 불화때문에 호박벌의 군체는 소집단을 벗어나지 못하고, 매년 활동기가 끝날 때마다 해체된다.
- P43

이 패러독스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꿀벌의 세계로 돌아가보자.
일벌들은 저마다 자기 아들을 낳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일벌이 아들을 낳지 못하게 하려는 욕구도 이에 못지않게 크다. 즉 이기적 욕구를 가지고 있는 일벌 하나하나는 그의 아들 생산을 방해하려는 이기적 욕구를 가지고 있는 수천 마리의 일벌들에게 감시당하고 있다. 따라서 벌의 사회는 셰익스피어가 생각한 것처럼 위로부터 움직여지는 전제군주 국가가 아니다. 그것은 다수의 개개인이 가진 욕망이 각자의 이기주의를 억제하는 민주주의 사회이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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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난롯불 주위에 빙 둘러앉았다.그러자 웨믹이 말했다. "자. 아버님, 저희에게 신문을 좀 읽어 주세요."
노인장이 안경을 꺼내는 동안 웨믹은 나에게 이것이 습관적인 행사이며 신문을 큰 소리로 읽는 일은 노신사에게 무한한 만족감을 준다고 설명해 주었다. "나는 사과의 말을 하진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부친에겐 다른 즐거움이 별로 없거든요. 그렇지요. 아버님?"
"알았다. 존, 알았어." 노인은 자기한테 말을 걸었다는 것을 눈치 채고 대답했다.
"그저 아버님이 신문에서 눈을 뗄 때 가끔씩 고개만 끄덕여드리세요." 웨믹은 말했다. "그러면 왕처럼 행복해하실 겁니다.
자, 우리는 잔뜩 귀를 기울이고 있어요. 아버님."
"알았다. 존, 알았어!" 노인은 명랑하게 대답했다. 정신없이 서두르며 마냥 즐거워하는 그의 모습은 정말이지 더없이 유쾌한 정경이었다.
- P88

미스 해비셤은 내가 지난번 마지막으로 두 사람을 함께 보았을 때 그랬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하게 에스텔러를 애지중지했다. 나는 ‘끔찍‘이라는 말을 일부러 반복해서 말했는데, 그 이유는 그녀의 강렬한 표정과 힘찬 포옹에는 진정으로 끔찍한 뭔가가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에스텔러의 아름다운 모습을 열심히 뜯어보았으며,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와 동작 하나하나에 온정신을 집중하여 눈을 폐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그녀를 바라보는 동안 자신의 떨리는 손가락들을 우물우물 씹어대며 앉아 있었는데, 마치 자기가 길러 낸 그 아름다운 존재를 게걸스레 잡아먹고라도 있는 것처럼 보였다.
- P97

나는 이 모든 것에서 깨달았다. 비록 그 때문에 비참한 심정이 되었고, 또 그것으로 인해 내 종속된 처지를 새삼 통렬하게 의식하고 심지어 비하감까지도 통렬하게 느꼈지만, 나는 이 모는 것에서 깨달았다. 에스텔러가 남자들에 대한 미스 해비셤의 원한을 풀어 줄 도구로 의도되어 있다는 것과 에스텔러가 일정기간 동안 그런 의도를 만족시켜 주기 전까지는 나한테 주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이 모든 것에서 깨달았다. 왜 내가 그녀의 상대로 미리 정해져 있는지를, 남자를 매혹하고 고문하고 해를 끼치도록 그녀를 세상에 내보낼 때 미스 해비셤은 그녀가 모든 구애자들의 손이 닿지 못하는 곳에 있으며, 그래서 그녀를 차지하려는 경쟁에 뛰어든 모든 남자들은 필연적으로 실패하게 되어 있다는 악의적인 확신을 가지고 그럴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에서 깨달았다. 비록 상을 탈 승자로 예정되어 있지만 나 역시 교묘하고 뒤틀린 술책에 의해 그동안은 고통당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 모든 것에서 깨달았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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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는 너무 혹독한 가난과 기근 속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해마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을 거지로 만든다. 먹을 것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경쟁을 벌이는 그들은 체면도 자존심도 돌아볼 줄 모른다. 그런데 우리 자선가들은 그들에게 일거리를 주어 제 손으로 밥을 벌어 먹도록 할 생각은 않고 동냥만 주고 있다.
- P559

베전트(Besant) 박사의 눈부신 자치 시위운동이 확실히 농민을 감동시키기는 했지만, 교육받은 활동가들을 농민의 실생활과 접촉하게만든 것은 케다 투쟁이었다. 그들은 농민과 손잡기를 배웠다. 그들은거기에서 자기 활동의 진정한 터전을 발견했고, 그 희생정신의 역량도 증가했다. 발라브바이가 이 운동 중에 스스로 깨달은 것만도 작은 성공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지난해의 수재구조사업과 올해의 바르돌리 (Bardoli) 사티아그라하에서도 잘 알 수있다. 구자라트 사람들의 생활은 새로운 힘과 생기로 넘쳤다. 파티다.
파티다르의 농민들은 자기 힘의 놀라움을 자각했다. 씨올의 구원은 씨올 자신들에 달렸다는 것과 어느만큼 고난 당하고 희생할 수 있느냐 하는 그 역량에 달렸다는 교훈을 가슴 깊이 새겼다. 케다 투쟁을 통하여 사티아그라하는 구자라트 땅에 뿌리내렸다.
- P565

내게 음식 문제는 경전에 의해 결정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외부적으로 교리의 지도에 따른 것이 아닌 어떤 원리들에 따라 걸어온 내 일생의 진로와 서로 얽혀 있는 문제였다. 나는 그 원리들을 버리면서까지 살 생각은 없었다. 내가 아내와 자식들과 친구들에 대해서 매정하게 강조해왔던 원리를 나 자신을 위해 어떻게 누그러뜨릴 수가있을까?
- P580

그러나 그렇게 마지못해 하는 복종은 사티아그라하를 하는 데 필요한, 자발적인 순종은 아니다. 사티아그라하를 하는 사람은 사회의 모는 법을 이지적으로, 또한 자기의 자유 의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신성한 자기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킨다. 이와 같이 사회의 모든 법을 성실히 지키고 난 후에야 사람은 누구나 어떤 특정한 법은 선하고옳으며, 어떤 것은 부당하고 사악한 것이라고 능히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오직 그런 다음에야 어떤 특정한 법에 대해 명확한 조건 아래서 시민의 불복종을 할 수 있는 권리가 그에게 부여된다.
- P600

생명 가진 모든 것을 평등하게 대하는 것은 자기 정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자기 정화가 없으면서 아힘사의 법칙을 지킨다는 것은 허망한꿈일 뿐이다. 혼이 정결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실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기 정화는 생활의 모든 행동의 정화를 뜻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정화란 잘 옮겨가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정화는 필연적으로 자기의 환경 정화에까지 가고야 만다.
- P637

인도에 돌아온 후에도 언제나 내 속에 보이지 않게 정욕이 잠재해있는 것을 경험하곤 한다. 그것을 알게 될 때 낙심은 하지 않지만 부끄러움을 느낀다. 경험과 실험은 나를 붙들어 버티게 해주고 기쁨을 준다. 그러나 아직도 지나가야 하는 험난한 길이 내 앞에 있음을 안다.
나는 나를 무(無)에까지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피조물 중의 맨끝에 세우지 않는 한 구원은 있을 수 없다. 아힘사는 겸허의 궁극점이다.
어쨌거나 당분간은 독자와 이별해야 하는 이 마당에 나는 독자에게내가 진리의 신 앞에, 마음과 말과 행동에 아힘사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비는 이 기도에 같이 참여해주기를 바란다.
- P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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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장

덴마크에 도착해 보니, 그 나라의 왕과 왕비가 부엌용 식탁 위에 놓인 안락의자 두 개에 높이 올라앉아 알현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덴마크의 귀족 전체가 배석해 있었는데, 거인처럼 큰 조상한테 물려받은 양가죽 구두를 신은 귀족 소년 한 명과 점잖은 차림이지만 얼굴이 더럽고 늘그막에 평민에서 출세한 것처럼 보이는 귀족 한 사람, 그리고 머리에 빗을 꽂고 두 다리는 하얀 비단 양말 차림인 기사 계급의 대표 한 명이 그 전부였으며, 전체적으로 모두 여성적인 외모를 풍겼다. 재능 있는 우리 고향 읍내사람은 팔짱을 낀 채 조금 떨어진 곳에 우울한 얼굴로 서 있었다. 나는 그의 곱슬머리와 앞이마가 좀 더 그럴듯해 보였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P7

"~그런데 내가 갈 리치먼드는 서리 주의 리치먼드고, 거리는 16킬로미터야. 나는 마차를 타고 가도록 되어 있고, 네가 나를 데려다주도록 되어 있어. 이건 내 돈지갑이야. 너는 여기서 내 마차 삯을 꺼내 지불하도록 되어있어. 아냐. 너는 그걸 받아야만 해! 우린 우리한테 주어진 지시에 복종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권이 없어, 너와 나는 말이야. 우린 우리 자신의 의지를 따를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야,너와 나는 말이야."
그녀가 나에게 돈지갑을 건네며 나를 쳐다보았을 때 나는 그녀의 말에 어떤 감춰진 의미가 있다고 은근히 기대했다. 그녀는 그 말을 경멸하듯이 말했지만 불쾌한 감정을 내비치지는 않았던 것이다.
"마차를 불러와야겠어, 에스텔러. 여기서 잠깐 좀 쉬고 있겠니?"
"그래. 난 여기서 잠깐 쉬게끔 되어 있어. 그리고 차도 좀 마시도록 되어 있어. 그동안 너는 나를 돌봐주게끔 되어 있고 말이야."
그녀는 자기 팔을 내 팔에 끼었는데, 이것 역시 마치 그렇게하도록 되어 있는 것처럼 그렇게 했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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