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금과 조선의 국경 무역은 맹약을 체결하고 1년이 지나도록 지지부진하였다. 후금은 당장 개시를 열라고 압박하는 동시에조선의 이런저런 핑계를 대체로 수용하는 편이었다. 특히 첫 개시를 통해 후금으로 들어간 물량은 방금 막 전쟁을 통해 우열을 정한국가 간의 무역 (일방적 공출)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양이 적었다.
요컨대 후금이 조선에서 가져간 경제적 가치는 맹약에 따른 예물의 성격이 강했고, 후금의 경제 사정을 호전시킬 만한 양도 아니었다. 따라서 정묘호란의 발발 요인 중에서 후금의 경제 문제를 강조할 근거는 사실상 없다. 특히 식량 문제가 협상 과정에 일언반구조차 등장하지 않은 사실을 간과하면 곤란하다. 후금 내부의 경제 사정이 나빴다고 해서 그것을 곧바로 침공의 동인이나 목적으로 볼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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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은 추웠다. 옅은 잿빛 안개가 축축하게 살갗을찔러 따끔거렸다. 공항을 보자 리머스의 머리에 전쟁이 떠올랐다. 안개 속에 반쯤 가려진 채 참을성 있게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기계들,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와 그 메아리, 갑작스러운 외침 소리, 여자의 하이힐이 돌바닥에 닿을 때마다 나는 불협화음, 바로 옆에 대기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엔진이 으르렁거리는 소리. 도처에 음모라도 꾸미는 듯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새벽부터 깨어 있었던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그런 분위기였다. 그것은 밤이 사라지고 아침이오는 것을 본 공통된 경험에서 유래하는 우월감 같은 것이었다. 공항 직원들의 표정에는 동틀 녘의 신비감이 배어 있고 추위가 그 표정에 생기를 주고 있었다. 그들은 승객과 수화물을 전장에서 돌아온 병사들처럼 무뚝뚝한 태도로 다루고있었다. 그날 아침 그들에게 보통 사람은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였다. - P95

한 소녀가 해변에 서서 갈매기들에게 빵 조각을 던져 주고있었다. 그녀는 리머스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바닷바람이치렁하고 검은 머리카락을 나부끼게 하고 코트 자락을 펄럭이게 했다. 그러자 소녀의 몸은 바다를 향해 활 모양으로 젖혀졌다. 그 순간 리머스는 리즈가 준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영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것을 되찾아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하찮은 것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었다. 평범한 생활이 가치 있다는 믿음, 빵 부스러기를 종이 봉지에 넣고 해변으로 걸어가 갈매기들에게 던져 주는 소박함. 하찮은 것에대한 이 관심은 리머스가 이제껏 가질 수 없었던 것이었다. 갈매기에게 던져 줄 빵이든 사랑이든, 다른 무엇이든 간에, 그는 돌아가서 그것을 찾을 것이다. 스스로 찾지 못하면 그를 대신해서 리즈가 그것을 찾게 할 것이다.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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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검문소

미국인은 리머스에게 다시 커피 잔을 건네주면서 말했다.
「돌아가서 한숨 주무세요. 그 사람이 나타나면 전화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리머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검문소 창문 너머로 텅 빈거리를 내다보았다.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다른 시간에 올지도 모릅니다. 그가 오면 본부로 연락해 달라고 경찰에 부탁해도 됩니다. 본부에서 이곳까지 넉넉잡고 20분이면 달려올 수 있을 겁니다.」 이제 곧 어두워질 거요.」 리머스가 말했다.
「하지만 영원히 기다릴 수는 없잖습니까. 벌써 예정보다아홉시간이나 지났어요.」「당신은 가고 싶으면 가도 좋아요. 수고했소.」 리머스가 다시 덧붙여 말했다. 「당신이 아주 친절했다고 크레이머한테 말해두겠소.」
「언제까지 기다리실 겁니까?」
「그가 올 때까지」  - P7

그 순간 카를이 무슨 소리를 듣고 위험을 느낀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고는 자전거 핸들 위로 몸을낮게 구부리고 맹렬히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아직 다리 위에 혼자 서 있는 보초가 있었다. 그는 돌아서서 카를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예기치 않게 서치라이트가 켜졌다. 눈부시게 새하얀 빛이 카를을 포착했다. 카를은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에 갇힌 토끼 같았다. 위아래로 요동치는 사이렌 소리가울려 퍼졌다. 거칠게 명령을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리머스앞에서 두 경찰관이 무릎을 꿇고 모래주머니 틈새로 그쪽을 내다보면서 능숙한 솜씨로 자동 소총을 재빨리 장전했다.
동독 보초는 조심스럽게 그들을 피해 자기 구역 쪽으로 총을 쏘았다. 첫 번째 총알은 카를을 앞으로 홱 밀어붙인 것 같았고, 두 번째 총알은 그를 뒤로 잡아당긴 것 같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그는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자전거 위에 앉아서 보초 옆을 통과했다. 보초는 여전히 그에게 총을 쏘고있었다. 그때 카를이 축 늘어지면서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들은 쓰러진 자전거가 달각거리는 소리를 또렷이 들었다. 리머스는 카를이 죽었기를 신에게 기도했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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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인 태도를 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긍정 심리학의 연구결과가 뒷받침한다. 이런 연구에 따르면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건강이 증진되고 더 행복한 결혼 생활, 더 성공적인 직장생활 등 온갖 종류의 이득을 얻는다. 하지만 심리학 연구가보통 그렇듯이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는 모든 연구에는 그와 반대되는 결론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연구가 존재한다. 긍정적인 성향의 사람은 속기 쉽고 고정관념에 지나치게 의존하며 좋은 논증을구성하는 데 서툴다. 게다가 일부 연구에 따르면 부정적인 감정은 유익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실망감을 더 잘 처리하고 더 창의적이며 협상을 더 잘하는 경향을 보인다. 부정적인 감정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심리학적, 신경학적 또는 생물학적 연구 결과를 근거로 나쁜 감정이 어떤 목적에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나쁜 감정이 어떤 이유로 인해 진화했다는 생각은 새로운 게 아니다. 진화론을 정립한 것으로 유명한 19세기 과학자 찰스 다윈이 1872년 저서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에서 그런 설명을 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끼면 혈액이대근육으로 잘 흘러들어서 위험으로부터 더 쉽게 도망칠 수 있다. 그렇다면 부정적인 감정은 (포식자로부터 도망치는) 자연적인행동에 도움이 되도록 진화했기 때문에 좋은 것이라는 결론이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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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621년 1월부터 3월 사이에 후금이 요양과 심양을 잇달아 함락하고 요동 지역을 장악하자 상황은 급변하였다. 육상교통로가 끊긴 명과 조선의 위기의식은 매우 고조되었다. 그렇지만 후금은 여세를 몰아 대공세를 취하지 못했다. 후금 지도부안에 지속적인 팽창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내부권력 투쟁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갑자기 늘어난 영토와 인구를 일단 후금의 통치 질서 안으로 흡수하여 재조직하는 문제도 중요한 현안이었다. 이런 요인이 작용하여 요동 장악 후 후금의 공세는 잠시 주춤하였다. 누르하치Nurhachi(努爾哈, 1559~1626)는 명과 조선 두 나라를 동시에 적으로 삼아 전쟁을 벌이기보다는 외교적 방법으로 조선을 먼저 제어하는 노선을 선호했다. 그럼에도 조선을 대하는 후금의 태도가 매우 고압적으로 바뀐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누르하치는 심양과 요양을 점령하자마자 "만주국 칸이 조선국 왕에게 서신을 보낸다 [滿州國汗致書朝鮮國王]"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국서를 조선에 보냈는데, 조선 왕을 가리켜 "너汝"라고 하대하였다. 핵심 내용은 요동에서 조선으로 넘어간 난민을 모두 돌려보내라는 요구였다.‘ 약 두 달 후에 국서를 다시 보냈다. 이번에는 예전과는 달리 오직 황제만 쓸 수 있는 "조詔"라는 표현을 썼으며 사신이 만포가 아닌 의주로 와서 국서를 전달하였다.
이는 앞으로 후금이 명을 대신할 것이라는 분명한 의사 표시였다. - P33

우리나라 병력이 과연 요양의 병력만 한가? (그러니 후금에) 답서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적을 결코 당해내지 못할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저 한때의 사의邪議(배금론)를 두려워하여 (답서작성에 나서지 않고 있으니) 종묘사직을 어쩌려는 것인가? (이는) 또한 그저 자기 자신만 사랑하고 나라의 위망은 돌아보지 않는(작태)다. 아울러 왕으로 (하여금) 기미를 고집하도록 하는 것은곧 훗날 기미를 주장한 죄를 왕에게 돌리려는 의도다. 옛날의 대신들이 과연 이 같았는가?

결국 두 역관이 의주부윤이 작성한 서신을 가지고 요동에들어갔다. 하지만 요동 정세가 어지러워 길이 막혔다는 이유로 서신을 전달하지 않고 그냥 돌아왔다. 이후 역관을 다시 보내라는 광해군의 불같은 독촉에 비변사는 넉 달 넘게 회계조차 하지 않았다. 광해군은 누차 독촉하였다.

나라를 위한 도모가 좋지 않아 적병이 (이미) 강에 다다랐으니.종묘사직의 위기가 조석에 박두하였다. 왕이 주는 옷을 입고 왕이 주는 음식을 먹으면서 어찌 종묘사직의 위망을 염려하지 않는단 말인가? 비변사는 (일을) 파하고 나가버리기를 일삼으니, 이렇게 하고도 (종묘사직이) 무사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비변사는 협조하지 않았고, 임금의 명은 효과를보지 못하였다.
조선을 대하는 후금의 자세는 날로 고압적으로 변했다. 결국 후금이 그동안 양국을 오가며 외교 업무를 전담했던 조선 역관 하서국河瑞國(?~1622)과 그 일행을 처형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또한 광해군의 재촉으로 파견한 박규영朴葵英과 역관 황연해黄連海는 후금에 억류되었고 정충신이 가지고 간 서신은 양구리가 찢어버리는 등 양국 사이에는 긴장이 고조되었다. - P39

・(비변사 당상들이) 서로 돌아보며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사대한지 200년 동안 이처럼 치욕스러운 경멸을 당하고 명예를 더럽힘이 심한 적이 일찍이 있었던가?"라고 하였습니다. 성상의의도하신 바는 본래 백성에게 은택을 베푸는 것이었고, 신들이쟁론한 바는 단지 의리를 좇는 것이었습니다. 천조에 죄를짓느니 차라리 성상께 죄를 짓겠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끝내 강력하게 변론하며 진언하지 못하여(결국)군신 상하가 모두 (명 황제의) 크나큰 질책을 받게 되었습니다. 

명의 장수가 조선이 명의 파병 요구에 따르지 않고 이리저리 핑계만 대는 태도를 크게 질타한 직후 비변사에서 그 대책을 아뢴 내용이다. 자기들은 즉각 파병을 외쳤는데 국왕 광해군이 갖가자 핑계를 대며 파병을 회피하다가 이제 요동 방면 명 장수의 호된 질책을 받았으니, 200년 사대의 역사상 이런 치욕이 어디 있느냐는항변이었다. 특히 밑줄 부분이 압권이다. 파병하라는 천자의 칙서를 거부하여 천자에게 죄를 짓느니, 차라리 파병을 반대하는 전하의 뜻에 반하여 파병함으로써 전하에게 죄를 짓는 편이 낫다는 의미다. 신하로서 국왕의 명을 따르는 게 순리지만, 국왕의 뜻과 천자인 황제의 뜻이 충돌한다면 당연히 황제의 뜻을 따르겠다는 폭탄선언이었다.
이런 의식으로 무장한 신료들이었기에, 광해군이 감군어사앞에서 끝내 뜻을 굽히지 않자 이제 왕의 정통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조선 국왕보다 명 황제의 명을 더 중하게 여기는 신료(배신臣)들의 눈에, 감군어사의 목전에서 황제의 칙서를 노골적으로 거부한 광해군은 더 이상 조선의 국왕일 수 없었다. 조선 국왕은 양반신료들의 지지와 명 황제와의 군신 관계를 정통성의 두 축으로 삼았다. 이런 상황에서 광해군의 행위는 일종의 ‘도박‘에 가까웠다.
그래야 할 만큼 광해군도 절실했다.  - P54

칙서의 요구를 공개적으로 거부했을 뿐 아니라 황제의 은총과 사대 정성을 기리는 존호까지 일관되게 거부한 광해군은 이제명의 번국인 조선의 왕일 수 없었다. 번국의 사대 도리를 정正과 의義개념으로 인식하는 신료들의 눈에, 칙서를 거부하고 후금과 대화를 모색하는 광해군의 태도는 사邪이자 불의不義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광해군의 권위는 결정적으로 추락했으며, 레임덕 현상이 나타났다. 광해군은 신료들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되었으며 승정원마저 그를 외면했다. 그 어떤 붕당과 소규모 정치 그룹도 광해군을 지지하지 않았다. 신료들은 왕에 대한 항의 표시로 집무를 내려놓기 일쑤였다. 일부 고위 대신은 아예 등청하지 않는 방식으로불만을 표출했다. 그 결과 광해군 재위 마지막 10개월 동안 조선의 행정은 사실상 마비 상태였다. 광해군과 신료들은 다시는 화합할수 없을 정도로 어긋나버렸다. 정변이 일어나기 좋은 환경은 이렇게 조성되고 있었다. - P58

대외관과 국내외 정세는 불가분의 관계다. 정세에 따라 수시로 변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래야 한다. 그러나 조선 신료들의 대명관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매우 독특한 성격이었다. 많은 학자가 조선과 명의 관계를 중국적 질서하에서 이루어진 책봉·조공 관계의 전형적 예로 보지만, 나는 조명 관계를 중국적 질서에서 이루어진 예외적이고 특이한 관계로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번국(조선)이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황제국(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황제국이 완전히 멸망해사라졌음에도 기존의 사대 의리를 영원히 유지해야 한다는 논리는 유교 정치이론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책봉·조공 관계를 군신 관계로만 보지 않고 부자 관계로 이해하고 실제로 그렇게 실천까지 한 예는 동아시아 역사상 조명 관계가 유일하다. 즉명을 대국이 아닌 상국, 더 나아가 군부로 보는 순간 이미 조명 관계는 춘추전국시대의 사대자소事大字小 관계에서 이탈한 셈이다. 더 나아가 한당 이래 중국적 책봉. 조공관계의 실제와도 다른, 몹시 변형된 관계일 수밖에 없다. 어떤 사례가 역사상 전무후무하다면, 그것은 희소하고 특수한 예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명과 조선의 책봉·조공관계는 이런 시각에서 접근해야, 이미 명이 망해 사라진 후에도 계속 숭명배청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조선 후기 정치·지성사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P62

최근에는 호란의 주요 원인을 조선보다 후금 쪽에서 찾는 움직임이 대세이다. 김종원에 따르면, 정묘호란은 후금 내부의정치·사회·경제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일어났다. 그는 정치·군사적 요인으로 팔기 내부의 알력, 연정 체제의 권력을 홍타이지로 집중하려는 의도, 영원성 패배 이후 저하된 후금군의 사기 진작용 군사 작전, 배후의 모문룡 제거, 모문룡을 지원하는조선을 확실히 제압할 필요 등을 두루 꼽았다. 이 밖에도 요동 지역한인의 반란과 도주로 인한 내부 소요 및 식량과 생필품 부족 같은후금의 사회·경제적 형편도 중시하였다. 김종원의 연구는 정묘호란의 원인에 관한 가장 종합적이고 상세한 설명을 제공한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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