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1621년 1월부터 3월 사이에 후금이 요양과 심양을 잇달아 함락하고 요동 지역을 장악하자 상황은 급변하였다. 육상교통로가 끊긴 명과 조선의 위기의식은 매우 고조되었다. 그렇지만 후금은 여세를 몰아 대공세를 취하지 못했다. 후금 지도부안에 지속적인 팽창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내부권력 투쟁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갑자기 늘어난 영토와 인구를 일단 후금의 통치 질서 안으로 흡수하여 재조직하는 문제도 중요한 현안이었다. 이런 요인이 작용하여 요동 장악 후 후금의 공세는 잠시 주춤하였다. 누르하치Nurhachi(努爾哈, 1559~1626)는 명과 조선 두 나라를 동시에 적으로 삼아 전쟁을 벌이기보다는 외교적 방법으로 조선을 먼저 제어하는 노선을 선호했다. 그럼에도 조선을 대하는 후금의 태도가 매우 고압적으로 바뀐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누르하치는 심양과 요양을 점령하자마자 "만주국 칸이 조선국 왕에게 서신을 보낸다 [滿州國汗致書朝鮮國王]"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국서를 조선에 보냈는데, 조선 왕을 가리켜 "너汝"라고 하대하였다. 핵심 내용은 요동에서 조선으로 넘어간 난민을 모두 돌려보내라는 요구였다.‘ 약 두 달 후에 국서를 다시 보냈다. 이번에는 예전과는 달리 오직 황제만 쓸 수 있는 "조詔"라는 표현을 썼으며 사신이 만포가 아닌 의주로 와서 국서를 전달하였다. 이는 앞으로 후금이 명을 대신할 것이라는 분명한 의사 표시였다. - P33
우리나라 병력이 과연 요양의 병력만 한가? (그러니 후금에) 답서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적을 결코 당해내지 못할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저 한때의 사의邪議(배금론)를 두려워하여 (답서작성에 나서지 않고 있으니) 종묘사직을 어쩌려는 것인가? (이는) 또한 그저 자기 자신만 사랑하고 나라의 위망은 돌아보지 않는(작태)다. 아울러 왕으로 (하여금) 기미를 고집하도록 하는 것은곧 훗날 기미를 주장한 죄를 왕에게 돌리려는 의도다. 옛날의 대신들이 과연 이 같았는가?
결국 두 역관이 의주부윤이 작성한 서신을 가지고 요동에들어갔다. 하지만 요동 정세가 어지러워 길이 막혔다는 이유로 서신을 전달하지 않고 그냥 돌아왔다. 이후 역관을 다시 보내라는 광해군의 불같은 독촉에 비변사는 넉 달 넘게 회계조차 하지 않았다. 광해군은 누차 독촉하였다.
나라를 위한 도모가 좋지 않아 적병이 (이미) 강에 다다랐으니.종묘사직의 위기가 조석에 박두하였다. 왕이 주는 옷을 입고 왕이 주는 음식을 먹으면서 어찌 종묘사직의 위망을 염려하지 않는단 말인가? 비변사는 (일을) 파하고 나가버리기를 일삼으니, 이렇게 하고도 (종묘사직이) 무사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비변사는 협조하지 않았고, 임금의 명은 효과를보지 못하였다. 조선을 대하는 후금의 자세는 날로 고압적으로 변했다. 결국 후금이 그동안 양국을 오가며 외교 업무를 전담했던 조선 역관 하서국河瑞國(?~1622)과 그 일행을 처형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또한 광해군의 재촉으로 파견한 박규영朴葵英과 역관 황연해黄連海는 후금에 억류되었고 정충신이 가지고 간 서신은 양구리가 찢어버리는 등 양국 사이에는 긴장이 고조되었다. - P39
・(비변사 당상들이) 서로 돌아보며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사대한지 200년 동안 이처럼 치욕스러운 경멸을 당하고 명예를 더럽힘이 심한 적이 일찍이 있었던가?"라고 하였습니다. 성상의의도하신 바는 본래 백성에게 은택을 베푸는 것이었고, 신들이쟁론한 바는 단지 의리를 좇는 것이었습니다. 천조에 죄를짓느니 차라리 성상께 죄를 짓겠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끝내 강력하게 변론하며 진언하지 못하여(결국)군신 상하가 모두 (명 황제의) 크나큰 질책을 받게 되었습니다.
명의 장수가 조선이 명의 파병 요구에 따르지 않고 이리저리 핑계만 대는 태도를 크게 질타한 직후 비변사에서 그 대책을 아뢴 내용이다. 자기들은 즉각 파병을 외쳤는데 국왕 광해군이 갖가자 핑계를 대며 파병을 회피하다가 이제 요동 방면 명 장수의 호된 질책을 받았으니, 200년 사대의 역사상 이런 치욕이 어디 있느냐는항변이었다. 특히 밑줄 부분이 압권이다. 파병하라는 천자의 칙서를 거부하여 천자에게 죄를 짓느니, 차라리 파병을 반대하는 전하의 뜻에 반하여 파병함으로써 전하에게 죄를 짓는 편이 낫다는 의미다. 신하로서 국왕의 명을 따르는 게 순리지만, 국왕의 뜻과 천자인 황제의 뜻이 충돌한다면 당연히 황제의 뜻을 따르겠다는 폭탄선언이었다. 이런 의식으로 무장한 신료들이었기에, 광해군이 감군어사앞에서 끝내 뜻을 굽히지 않자 이제 왕의 정통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조선 국왕보다 명 황제의 명을 더 중하게 여기는 신료(배신臣)들의 눈에, 감군어사의 목전에서 황제의 칙서를 노골적으로 거부한 광해군은 더 이상 조선의 국왕일 수 없었다. 조선 국왕은 양반신료들의 지지와 명 황제와의 군신 관계를 정통성의 두 축으로 삼았다. 이런 상황에서 광해군의 행위는 일종의 ‘도박‘에 가까웠다. 그래야 할 만큼 광해군도 절실했다. - P54
칙서의 요구를 공개적으로 거부했을 뿐 아니라 황제의 은총과 사대 정성을 기리는 존호까지 일관되게 거부한 광해군은 이제명의 번국인 조선의 왕일 수 없었다. 번국의 사대 도리를 정正과 의義개념으로 인식하는 신료들의 눈에, 칙서를 거부하고 후금과 대화를 모색하는 광해군의 태도는 사邪이자 불의不義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광해군의 권위는 결정적으로 추락했으며, 레임덕 현상이 나타났다. 광해군은 신료들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되었으며 승정원마저 그를 외면했다. 그 어떤 붕당과 소규모 정치 그룹도 광해군을 지지하지 않았다. 신료들은 왕에 대한 항의 표시로 집무를 내려놓기 일쑤였다. 일부 고위 대신은 아예 등청하지 않는 방식으로불만을 표출했다. 그 결과 광해군 재위 마지막 10개월 동안 조선의 행정은 사실상 마비 상태였다. 광해군과 신료들은 다시는 화합할수 없을 정도로 어긋나버렸다. 정변이 일어나기 좋은 환경은 이렇게 조성되고 있었다. - P58
대외관과 국내외 정세는 불가분의 관계다. 정세에 따라 수시로 변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래야 한다. 그러나 조선 신료들의 대명관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매우 독특한 성격이었다. 많은 학자가 조선과 명의 관계를 중국적 질서하에서 이루어진 책봉·조공 관계의 전형적 예로 보지만, 나는 조명 관계를 중국적 질서에서 이루어진 예외적이고 특이한 관계로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번국(조선)이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황제국(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황제국이 완전히 멸망해사라졌음에도 기존의 사대 의리를 영원히 유지해야 한다는 논리는 유교 정치이론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책봉·조공 관계를 군신 관계로만 보지 않고 부자 관계로 이해하고 실제로 그렇게 실천까지 한 예는 동아시아 역사상 조명 관계가 유일하다. 즉명을 대국이 아닌 상국, 더 나아가 군부로 보는 순간 이미 조명 관계는 춘추전국시대의 사대자소事大字小 관계에서 이탈한 셈이다. 더 나아가 한당 이래 중국적 책봉. 조공관계의 실제와도 다른, 몹시 변형된 관계일 수밖에 없다. 어떤 사례가 역사상 전무후무하다면, 그것은 희소하고 특수한 예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명과 조선의 책봉·조공관계는 이런 시각에서 접근해야, 이미 명이 망해 사라진 후에도 계속 숭명배청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조선 후기 정치·지성사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P62
최근에는 호란의 주요 원인을 조선보다 후금 쪽에서 찾는 움직임이 대세이다. 김종원에 따르면, 정묘호란은 후금 내부의정치·사회·경제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일어났다. 그는 정치·군사적 요인으로 팔기 내부의 알력, 연정 체제의 권력을 홍타이지로 집중하려는 의도, 영원성 패배 이후 저하된 후금군의 사기 진작용 군사 작전, 배후의 모문룡 제거, 모문룡을 지원하는조선을 확실히 제압할 필요 등을 두루 꼽았다. 이 밖에도 요동 지역한인의 반란과 도주로 인한 내부 소요 및 식량과 생필품 부족 같은후금의 사회·경제적 형편도 중시하였다. 김종원의 연구는 정묘호란의 원인에 관한 가장 종합적이고 상세한 설명을 제공한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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