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에 톈안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었다. 당시 나보다 겨우 몇 살 많은 학생들이 충동적인 이상주의에 고무되어 공산당 권력자들의 요새 안마당에 텐트촌을, 국가 안의 작은 국가를 건설했다. 텔레비전 속 그들은 동양과 서양 사이에서 갈등하는 듯 보였다. 서양의 여느 젊은이들처럼 덥수룩하게 머리를 기르고, 대형 휴대용 카세트 라디오를 들고 다니고, 미국의 독립 혁명지도자 패트릭 헨리의 말을 인용하면서도 입으로는 혁명가를 부르고, 여전히 인민복을 단추로 꽉 채운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요구를 전달하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한 학생 시위자가 기자에게 말했다. 「우리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나도 정확히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는 보다 많은 것을 원한다. 그들의 시위는 6월 3일 밤과 4일 새벽 정부의 확성기에서 <여기는 서양이 아니다. 중국이다>라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유혈 사태로 끝났다. 중앙정치국은 공산혁명 이후처음으로 인민 해방군으로 하여금 인민을 공격하게 했다. 중국 공산당은 당에대한 도전을 제압했다는 사실에 만족했지만 이미지 타격을 의식했고, 따라서그 뒤로 오랜 시간에 걸쳐 해당 사건을 조직적으로 무마시키며 역사에는 아주 개략적인 사실만 남도록 만들었다. - P34
내 책상 옆에 있던 창문 밖으로는 베이징의 고풍스러운 고루가 보였다. 1272년에 지어진, 마치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한 목재 건축물이었다. 고루와 그 옆에 있는 종탑은 수백 년 동안 베이징 시민들에게 잠자리에 들고 일어날 시간을 알려 주었다. 인근에서는 이 고루와 종탑이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고루에는 가죽으로 된 거대한 북이 스물네 개나 있었는데 천둥처럼 울리는 북소리는 베이징의 가장 외곽까지 닿을 정도였다. 중국 황제들은 계절의 흐름과 하루의 시간을 통제하는 데 집착했다. 여름이되면 궁궐의 가신들이 언제 털옷을 벗고 비단옷을 입을지 황제가 정확한 시점을 결정했다. 가을에는 역시 황제가 언제 낙엽을 갈퀴질할지 적당한 때를 결정했다. 시간을 통제하는 행위가 황제의 권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1900년에 베이징을 침략한 외국 군대는 상징적인 행위로서 고루에 올라가 총검으로 가죽 북을 찢었다. 중국인들은 한동안 이 고루에 <치욕을 기억하는탑>이라는 이름을 붙여 부르기도 했다. - P50
20세기 초 중국의 선도적인 혁명가 중 한 명인 량치차오(梁啓啓)는 한때 국가발전에서 개인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역설했지만 1903년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을 방문한 후에 그 같은 관점을 포기하고 중국 내에 존재하는 개별적인 씨족과 집안 간의 경쟁이 중국인의 발전을 저해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만약 우리가 민주주의 정부 체제를 지금 채택한다면 국가 차원의 자살을 저지르는 꼴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량치차오는 중국의 크롬웰 같은 인물을 꿈꾸면서 향후 20년, 30년, 심지어 50년은 <강권 통치를 행하며 강철과 불로 중국 동포들을 버리고 담금질해야한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중국인들에게 루소의 책을 읽도록 허락하고 워싱턴의 업적을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1911년에 청나라가 무너지고 대총통이 된 혁명가 쑨원(孫文)은 중국이 쇠락한 이유가 국민들이 백사장의 성긴 모래알처럼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처방을 제시했다. 그는 <개인에게 지나치게 많은 자유가 주어지면 안 된다. 반면 국가는 완전한 자유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정부를 <거대한 자동차>로, 지도자들을 손이 자유로울 필요가 있는 필수 불가결한 <운전사와 정비사>로 여기도록 사람들을 부추겼다. 중국에는 늘 시인이나 저술가, 혁명가가 존재했으며 중국 전문가 제레미 바르메와 린다 제이븐은 그들을 가리켜 중국 역사의 <자유로운 발>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마오쩌둥 주석은 <개인은 단체에 종속된다>는 관념을 금과옥조로여겼고 그에 따라 당은 <분열을 지향하는 성향을 모조리 근절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중국 공산당은 국민들을 노동 조직과 집단 농장에 편입시켰다. 자신이 속한 <단웨이> 즉 노동 조직에서 인가장을 받지 않는 한 결혼이나 이혼을 할 수 없었고, 비행기 표를 사거나 호텔에 묵을 수도 없었으며, 이러한 문제로 다른 단웨이를 찾아갈 수도 없었다. 거의 매일을 단웨이의 테두리 안에서 생활하고, 일하고, 쇼핑하고, 공부했다.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을 적발하고 교정하기 위한 수단으로 마오쩌둥은 선전 활동과 교육- 그는 이 교육을 사상개조라는 말로 지칭했으며 이 말은 통칭 <시나오(洗腦)> 즉 <정신의 정화>로 알려졌다 에 치중했다(1950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한 CIA 요원은 <세뇌brainwashing>라는 용어를 만들기도 했다). - P56
이론적으로 중국은 개인주의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개혁이 이미 시작된 후인 1980년에 개정된 중국의 권위 있는 사전 「사해(辭海)는 개인주의를 <부르주아적 세계관의 진수, 타인을 희생시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행동>으로 정의했다. 중국 공산당은 마거릿 대처가 주장하는 자유 시장 근본주의를 무엇보다 혐오했다. 그럼에도 공공 서비스 감축, 노동조합을 향한적개심, 국가와 군사력에 대한 긍지 등 대처리즘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들 중일부를 이미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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