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서
가장 오래된 유서는 약 4000년 전 고대 이집트에서  쓰였다. 이 유서를 처음 번역한 사람은 여기에 ‘삶에 지친 자가 영혼과 벌인 논쟁‘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첫 줄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내 영혼에 입을 열어 말한다. 영혼의 말에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어 지은이는 산문과 대화, 시를 오가면서 자살에 동의하도록 자신의 영혼을 설득하려 노력한다.
- P11

점점 강해지는 대형 태풍, 더 심각해지는 해수면 상승,
가뭄과 물 부족, 점점 넓어져 가는 오염 해역, 대규모 해충발생, 죽어 가는 숲, 매일같이 사라지는 수백 종의 생물과같이 잇따르는 비상사태들이 인간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이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좋은 이야기가 아니다. 전 지구적인 위기가 심각해지고 있지만 마치 저 멀리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비슷하다. 우리는 실존을 뒤흔드는 위기와 그 위급함을 인식하지만 생존을 위한 전쟁을 치르고 있음을 알고 있을 때조차도 거기에 온전히 몰두하지는 못한다. 인식과 느낌의 간극 때문에 사려 깊고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 다시 말해 기꺼이 행동할 뜻이 있는 사람들조차 행동하기가 아주 힘들 수 있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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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중간고사 기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나는 훌리아와 사랑놀음을 벌이기 시작한 이후로 수업을 자주 빼먹은 데다 미친놈 칼춤 추듯 더 많은 소설을 휘갈겨댄 바람에 그 중차대한 시험을 치를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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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이미 그의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는 자기 위로 몸을 굽히고 있는 얼굴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려고 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그는 자기를 간질이고 찌르고 비집는 손가락들을 느끼고서 이 새로 온 사람들이 자기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시계를 낚아채고 호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지갑을 빼내고, 그가 첫번째 영성체를 받은 이후로 목에 두르고 다녔던 림피아스의 신부가 새겨진 메달을 잡아뜯었다. 루초 아브릴 마로킨이 인간의 본성에 대한 놀라움을 못이겨 어둡고도 어두운 밤 속으로 빠져든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 P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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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어휘를 써야 내 의도를 정확히 전달할 수 있을까."

우리가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갈등하고 고민하는 부분이다. 여기에는 평소에 지각하지 못한 전제 조건이 깔려있다. 어휘의 정의가 고정돼 있다는 사실이다. 같은 어휘를가지고 사람마다 내리는 정의가 제각각이라면 바벨탑이 무너진 직후에 서로 다른 언어를 구사하느라 소통이 막힌 바빌론처럼 극심한 혼란에 빠질 테니 마땅해 보인다. 그러나한번쯤 그 당연한 삼식을 뒤집어 이런 의문을 가질 만하다.

"고정된 어휘에서 새로운 생각이 나올 수 있을까?"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거트루드 스타인은 자신의집에서 관찰한 물건, 음식, 방 등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부드러운 단추들(Tender Buttons)에 썼다. 이것은 무엇에 대한 정의일까.

내부에서는 잠들고 있고
외부에서는 붉어지고 있다.
 
바로 구운 쇠고기‘ 이다. 모든 수수께끼가 그렇듯 답을알고 나면 쉽다. 그런데 과연 ‘구운 쇠고기‘ 이기만 할까? 혹시 갓밝이의 ‘방‘ 같지 않은가? - P265

한편으로 아름다움은 낡고 닮은 어휘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아름다운 일을 하고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아름다운 집에서 아름다운 인생을 살며 아름답다는 찬사를 받는 것, 많은 사람의 꿈이 아닐는지, 꿈과는 별개로 누가 그런 식으로 문장을 쓰면 나는 꼭 빵점을 줄 것이다.
‘아름답다‘는 어휘는 햇살 좋은 오후, 해변을 거닐다 발견한 입 꾹 다문 하얀 조가비 같다.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부귀했는지, 헌신적이었는지, 출중했는지, 행복하고 즐거웠는지, 보람 있었는지, 뭐가 어땠는지 구체적인 정보가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  - P274

‘아름다움‘은 오랫동안 예술가에게 경외의 대상이자 다다라야 할 목표, 행위를 하는 목적, 삶의 이유, 그리고 라이벌이었다. 오랫동안 궁금했다. 이름다움은 어디에서 생겨날까 하고………. ‘너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아름답다.‘ 라는 시구는 이름다움이 어디에서 생겨나는지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왜 우리176가 먹먹한 감동을 느끼는지에 대해 들려준다.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허락된 시간이 언젠가는 끝날 것이기 때문에, 죽을 것이기 때문에.
아름다움은 세상의 온갖 소란 속에 잊고 지낸 진실을 찰나의 빛처럼 일깨워준다. 자칫 허무나 비관으로 빠질 수있는 ‘생의 유한성‘을 지혜롭게 견딜 힘을 준다. 아름다움은 이처럼 생의 유한성으로부터 생겨난다. 그러니 아름다움은 희귀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 태어난 것은 모두 죽으니 그죽음의 개수만큼 흔하디흔해야 한다.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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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입되는 정보량이 워낙 많다 보니 찬찬히 살필 여유 없이 텍스트는 Z자 형태로, SNS는 수직으로 대충 훑고 쓰륵쓰륵 넘긴다. 동영상 플랫폼의 경우 눈길을 붙잡는 콘텐츠를 발견하면 잠시 넋을 놓고 보지만 끝나도 멈출 줄 모르고 또 찾아다닌다. 대부분의 플랫폼이 오랜 시간 체류할 수 있도록 사용자에게 맞춤한 알고리즘을 설정하고 있어 유혹을 뿌리치기 쉽지 않다.
자기도 모르는 새 생각하지 않는 습관이 배고 스마트폰 화면을 누비는 손가락만큼이나 성미가 부산해져 무엇하나 골똘히 집중하지 못한다. 사용자의 이런 성향을 알기에 온라인상의 어휘는 클릭 수나 체류 시간을 높일 목적으로 더욱 직감적이고 자극적으로 되어 가고 이제 그런 어휘들조차 단조롭다.
숫자가 기업 수익과 사회적 영향력으로 연결되는 구조를가진 반응 미디어를 손에 들고 있는 한 사유, 추론, 음미, 상상, 사색  등이 끼어들 틈은 없다. 내면에 집중할 시간을 스스로에게 내어주지 않는다는 소리다. 정신적 존재인 인간은 그에 따른 후유증을 피할 길 없다.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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