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철학!

먹고사는 데 ‘철학‘ 따위는 필요 없다고들 합니다. 돈 벌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웬 철학이냐는 게지요. 게다가 구닥다리 불온 인물
‘마르크스‘까지 덤으로 붙어 있으면 말 다했지요. 헌책방에서나 구할 수 있는 1980년대 사상 서적도 아니고 말이에요..
- P4

철학은 세계관 世界理에 관한 학문입니다.
세계관이란 세계를 보는 관점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중세 서양 사람들은 기독교의 관점으로 세계를 보았습니다. 모든 게 하느님의뜻이라고 믿었지요. 그러니 그림도 기독교 일색일 수밖에요. 십자군 전쟁도 하느님의 뜻이고 마녀사냥도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만사 오케이! 이것이 세계관, 즉 철학의 위력입니다.
지금은 중세가 아니니 괜찮을까요? 현대 자본주의는 ‘돈‘ 중심세계관이 대세입니다. 중세 서양에서는 하느님의 뜻인지 아닌지가 중요했다면 지금은 돈이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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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놀라운 것은, 마치 중세 서양에서 십자군 전쟁과 마녀사냥을 당연시했듯 우리가 그런 자본주의 상황들을 당연시 한다는 점입니다. - P5

학생 : 아! 관념론 신화나 종교)이 기득권층의 이익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는 말씀이군요. 갈릴레이의 지동설을 인정하면 가톨릭교회의 권위가 무너지고 봉건 지배층의 입지도 타격을 받을 테니까,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관념론을 유지했다는 이야기네요. 갈릴레이가 종교계로부터 왜 그렇게 비난과 탄압을 받았는지 이해가 됩니다.
선생님 : 과학이 발전할수록 종교의 초라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과학과 종교의 갈등은 정치적으로는 진보(과학)와 보수(종교)의 모습을 띠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학은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는 데에 반해 종교는 낡은 교리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지요. 갈릴레이의 지동설 재판이나 다윈의 진화론 논란, 낙태에 대한 과학과 종교의 대립 등은 그런 양상을 잘 보여줍니다. 종교계는 정치적으로도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적 색채를 띠는 경우가 많지요. - P55

선생님 :버클리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내 밖에 객관적 실체로서 나무가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나무를 연상시키는 감각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즉, 물질의 존재는 불확실하나 내가 느끼는 ‘관념‘만은 명백히 존재한다는 이야기지요. 이것이 ‘주관적 관념론‘ 입니다.
학생 : 그러면 혹시 ‘객관적 관념론‘도 있나요? 주관적인 게 있으면 객관적인 것도 쌍으로 존재할 것 같은데요?
성생님 : 타이밍 좋게 잘 질문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플라톤의 ‘이데아‘나 기독교의 ‘신‘의 경우, 우리 외부에 정신적 실체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하지요? 이데아나 신이 세상의 근원이며본질이라고 주장하고요. 이것이 ‘객관적 관념론‘입니다.
버클리의 주장을 ‘주관적 관념론‘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버클리에게는 의심할 수 없이 확실한 것이라고는 ‘주관적‘으로 느끼는 관념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버클리는 주관적 관념론을 통해 유물론의 토대인 물질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거지요.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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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가장 중요한 열쇠가 어른들의 진솔성과 진정성이다. 아이들은 권위 인물이 먼저 자신의 내밀한 부분을 오픈하면 그것을 진솔성으로 받아들인다. 단 어른들의 자기 개방이 아이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한 인간으로서 자신들에게 마음을 열고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신뢰 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므로 자기 개방은 15세 인생수업을 이끄는 이들뿐만 아니라 모든부모와 교사가 익혀야 할 덕목이다. 부모와 교사가 먼저 자기 개방을 하면 서로에 대한 신뢰가 깊어질 뿐만 아니라 하나의 모델링이 되어 아이들도 자기 개방을 할 수 있게 된다. 개방은 개방을 낳고 치유적 관계가 된다.
- P138

지수처럼 자신에게 많은 장점이 있다고 옆에서 말해줘도 쉽게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장점을 장점으로 인식하지 못하며,
아예 자신의 장점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넌 어떤 장점을 가졌니?"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장점은 나를 이루는 하나의 특성이므로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은 곧 자신을 보다 깊숙이 이해하는 일이며, 또한 어린아이에서 성숙한 성인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수용하는 단계를 넘어 이를 토대로 ‘긍정적인 자아상‘ 을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P142

그렇다면 왜 이 시기에긍정적인 자아상을 형성해야 할까? 긍정적인 자아상은 성숙한어른의 모습으로 행복하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핵심 요소인 ‘자존감‘ 을 높이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자존감은 말 그대로 ‘자기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 으로, 자기 자신에대해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나타내는 자신에 대한 신념의 집합이다.
자존감은 자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생각과 나는 할 수 있어!" 라는 자신감이 어우러져 형성되는 인간 행동의 특성이다. 즉 자존감은 인간의 모든행동의 근원으로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자존감이다.
실제로 여러 연구결과에 따르면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인간관계가 원만하고 사회에 잘 적응하며 리더십이 뛰어나고 성공할 가능성이 높고, 공감능력 · 의사소통능력 문제해결능력 · 갈등조절능력 등이 뛰어나다고 한다. 자존감이 이처럼 인생의 거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며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한 개인이 가진 재능과 자질, 잠재력 등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 P144

15세를 비롯한 청소년기는 추상적인 자아 발달이 이루어지면서 부모로부터의 독립 욕구가 폭발하는 동시에 어린아이처럼 어딘가에 소속되어 의존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함께 존재하는 시기이다. 즉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는 충만하면서도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은,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로 이 두 가지 욕구를 충족시키는 친구집단을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 부모가 없으면 불안해하고 죽을 것처럼 굴던 아이들이 친구와만 이야기를 하려 하고, 지금까지 자신을 돌보는 존재로 생각했던 부모를 자신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존재로 여기며 격렬하게 저항하고 반항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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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협성은 대부분의 종교가 지닌 특징이다. 종교는 대부분 다른 집단과의 경쟁에서 이겨야만 생존할 수 있는 그런 집단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종교, 그리고 그것이 품고있는 배타적 도덕성은 그것을 잉태시킨 경쟁보다도 더 오랫동안 살아남는 경향이 있다.
- P267

물론 종교를 모든 부족간 갈등의 원흉으로 매도하려는 것은 아니다. 아서 케이스 Arthur Keith 가 지적했듯이,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나치 운동을 민족사회주의라고 명명함으로써 집단내의 도덕성과 집단 외의 잔인성이라는 이율 배반적 기준을 완성시켰다. 사회주의란 단어는 종족 내의 공동체주의를, 민족이라는 단어는 사악한 외부인을 지칭한다. 그에게는 종교적 선동이 필요없었다. 그러나 인간이 수백만 년 동안 집단 이기주의에 따라 조장되어 온 부족주의적 본능을 갖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종교가 개종자들의 공동체와 이교도의 추악함을 강조할수록 그만큼 번성할 수 있었음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둥은 자신의 논문에서그 같은 전통에 물들어 있는 종교들이 보편적 도덕성을 가르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전 지구를 단합시킬 만한 다른 세계의 적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보편적 도덕성이란 이루어질 수 없는 공허한 꿈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 P269

집단 간의 노동 분화가 집단 내의 노동 분화보다 더 생산적이라는 데에는 이론적 근거가 있다. 개체들끼리 서로 남는 것을 공유하는 행위는 각 개체가 언제 직면 할지 모르는 궁핍의 위험을 줄여준다. 그러나 생존 자원의 고갈이란 문제는 서로 다른 활동에 종사하는 부족들이나 서로 다른 지역에 떨어져 사는 부족들에게 동시에 닥칠 가능성보다는 한 부족 전체에게 동시에 닥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가뭄이 닥치면 수렵 부족은 큰 피해를 입지만 물고기를 잡기는 더 쉬워진다. 노동 분화에 대한 애덤 스미스의 낡은경구는 집단 내에서뿐 아니라 집단들 사이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 P290

고상한 야만인의 신화가 사라지지 않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원주민에 대해서도 우리는 위선적 감상주의를 드러낸다. 루소의 시대에 고상한 야만인의 신화는 사회적 미덕에 관한 것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생태론적 형식을 취한다. 윤리적 수준에서 지구 자원의 지속 가능한 활용을 중시하는 태도는 도덕적 인간을 판별하는 기준이 되고 말았다. 오늘날 환경 감상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약자를존중하는 태도, 범죄와 탐욕에 대한 혐오, 인간에 대한 믿음, 남이 나에게 하기를 바라는 대로 남에게 먼저 한다는 황금률의 준수등 대의를 지향하는 그 어떤 성향을 표명하는 것보다 정치적으로 유리하다. 오늘날 공해를 옹호하는 것은 13세기에 사탄을 옹호하는 것만큼이나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앞 장에서 말했듯이 인간은 진화적으로 당연한 이유 때문에 대의를 설교(실천하는 것은 별도로 하고)하는 데 중독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본능을 표출하기 위해 정치적 이슈를 활용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를 위해 가장 강력한 수단은 환경 보존 윤리를 내세우면서 사라져 가는 고래와 열대 우림의 운명을 서글퍼하고, 개발과 산업과 성장을 비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우리 조상들(현대의 원주민 부족들)이 우리보다 얼마나 도덕적으로 우월했는가를 장밋빛으로 채색하는 것이다.
- P299

생태학자 찰스 케이 Charles Kay는 북아메리카 원주민이 큰 짐승을 보호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고 결론내렸다. 그는 과거 엘크의 생장을 현재와비교한 자료에 근거해서 콜럼버스가 상륙하기 전에 이미 인디언들은 로키 산맥의 대부분 지역에서 엘크를 완전히 멸종시키기 직전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극단적 결론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백인이 도착했을 때 분쟁 지역을 제외한(분쟁 때문에 사냥을 하지 못한 지역) 북아메리카 전역에 짐승이 놀랄 만큼적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설사 짐승을 보호하라는 어떤 영적 · 종교적 명령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효과는 없었다는 것이다. 케이는오히려 종교적 · 샤머니즘적 의식이 문제를 더 악화시켰다고 주장한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사냥 행위와 짐승 숫자와의 관계를 깨닫지못했기 때문에 종교적 신념 체계가 오히려 발굽 달린 짐승들에 대한과잉 착취를 조장했다. 종교적인 동물 숭배와 동물 보호는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신화는 계속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설교하는 것이 실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 P301

그렇다면 우리는 왜 환경을 파괴하는 것일까? 대답은 별다른것이 아니다. 환경 파괴는 일종의 죄수의 딜레마에 의해 일어난다. 게임 참가자가 두 사람이 아니라 여럿이라는 점만 다르다. 죄수의 딜레마에 따르는 숙제는 두 명의 이기주의자가 더 큰 이익을위해 협동하면서 상대편의 희생 위에 이익을 얻으려는 유혹을 회피하는 것이다. 환경 보존의 문제는 이와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이기주의자들이 공해와 쓰레기를 배출해 다른 선량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것을 어떻게 방지할 것인가? 어떤 사람이 자제를 실천하면 그는 몰상식한 다른 사람의 손에 놀아나는 것밖에 안 된다. 나의 인내는 너에게 기회가 된다. 이것은 게임 참가자가 두 사람이 아니어서 게임이 더 힘들다는 점만 뺀다면 죄수의 딜레마와 똑같은 상황이다.
- P312

그러나 장담할 수 있는 결론 하나는 우리 인류에게 본능적인 환경 윤리 같은 것, 즉 자제의 습관을 계발하고 가르치는 내재적 경향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환경 윤리는 인간 본성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거스르면서 가르쳐져야 한다. 그것은 결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누구나 이 사실을 잘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적절한 슬로건을 외치거나 정성스레 기도를 하면 우리의 가슴 내면으로부터 생태론적으로 고상한 야만인이 깨어날 것이라는 희망에 여전히 집착하고 있다. 우리 가슴속에 그는 없다. 보비 로 Bobbi Low 와 조엘 하이넨 Joel Heinen은이렇게 말했다. "보편화된 방만한 집단 이익에 기대하는 환경 보존 철학은 보존 관리에 개체적 · 친족적 이익이 개입되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실패할 것이다. 이 전망이 빗나가기를 우리도 바라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 P313

메가포드 산란지, 비버 댐, 극락조 나무, 카누용 나무 등을 매머드, 맥, 청어 등과 비교할 때의 차이점은 전자는 이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동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소유권이 안정적이고 명확하며 보호받기가 쉽다. 우리의 조상들이 매머드나 엘크를 멸종으로부터 보호하지 못한 것은 야생 동물에 대해서는 소유권을확립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소유권이 반드시 개인적인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 공동체의 것이어도 된다 —— 아무튼 소유권은 환경 보존적 미덕의 열쇠이다.
- P335

폰암족의 이야기는 교훈적이다. 부나 재산의 사적 소유는 존경과 지위를 보장해 주지만 동시에 그것은 질시와 배척을 초래하기도 한다. 때문에 사적 소유권의 옹호가 성공적인 환경 보존의 수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사적 소유권의 옹호 자체를 혐오하는 것이다. 현대 환경 보존론자들은 진퇴양난의 지경에 처해 있다. 논리대로 하자면 사람들에게 환경을 보존할 동기를주기 위해 사적 또는 공동체적 소유를 추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축재에 대한 터부가 그런 생각 자체에 대해 반기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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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완전하다면 국유화는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기능할것이다. 그러나 시장이 완전하지 못한 것에 못지않게 정부도 완전하지 못하다. 정부는 부패를 통해서는 파킨슨의 법칙을 통해서든항상 부를 그 자신에게로 돌린다. 환경 문제를 처리하는 데도 정부는 해결자가 아니라 문제의 원인 제공자이다. 정부가 이전에는존재하지 않았던 공동 소유의 비극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정부에 속하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뉴기니 사람들이 벌목이나 극락조 사냥을 중지할 것인가? 뉴기니 정부가 헬리콥터 군단을 동원해 밤낮으로 산림을 순찰 비행하고 위반자를 사살한다면 가능할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정부를 원하지 않으며 설령 우리가 아닌 다른 이들이라고 해도 그런 정부 아래 살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생태적 미덕은 밑으로부터 생겨나야 하며, 위로부터 생겨나서는 안 된다.
- P339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사회 질서가 생겨났다.
고 믿었다. 홉스는 전제군주로부터, 루소는 은둔자로부터, 그리고 레닌은 당으로부터 사회 질서가 생겨난다고 믿었다. 그들은 모두 틀렸다. 사회 질서의 뿌리는 우리 인간의 머릿속에 있다. 인간의 머릿속에 완전한 조화와 미덕의 사회를 실현할 본능적인 능력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보다 나은 사회를 실현할 능력은 존재한다.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제도는 이 같은 본능을 이끌어낼 수 있는 그런 제도이다. 다시 말해 평등한 개인들 사이에 교환을 조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들 간에 우정을 쌓기위한 최선의 처방이 교역이듯이, 해방되어 권력을 회복한 개인들간에 협동을 조장하는 최선의 처방은 거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등한 개인 간의 사회적·물질적 거래를 조장해야 한다. 신뢰는 거래를 통해 획득되고, 또한 신뢰는 미덕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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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수렵채집 시대의 소부족 사회에서의 유행 추종은 오늘날보다 훨씬 유익한 관습이었을 것이다. 넓은 견지에서 보자면 인간 사회는 표범이나 사자 사회와는 달리 개체들의 집합이 아니다.
인간 사회는 집단으로 구성된 초유기체이다. 순응주의에 따라 조성되는 집단 간의 응집력은 여러 집단이 다른 여러 집단과 경쟁하기 위해 함께 행동해야만 하는 세계에서 매우 효과적인 무기이다.
옳은 결정인지보다는 그 결정이 만장일치로 이루어졌는지가 더중요하다. 
컴퓨터 과학자 허버트 사이먼 Herbert Simon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는 우리 선조들의 사회가 각 사회가 달성한 사회적 <유순도>, 즉 사회의 영향을 받아들이는 감수성의 정도에 비례해번성했다는 이론을 내놓았다. 비이기성의 미덕을 서로에게 끊임없이 설교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자. 우리가 이런종류의 사상 주입을 수용하도록 자연선택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타주의적 편향 덕분에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다. 어떤 일을 혼자서 해내려고 하기보다는 남들이 말하는 대로 따르는 것이 손쉬울 뿐 아니라 대개는 더 이익이다. - P259

집단 선택 이론을 부정하는 더 결정적인 근거가 있다. 인간이 순응주의자이며, 그렇기 때문에 집단과 운명을 함께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내가 앞에서 든 사례들은 개체들이 각자의 사리 추구를 위해 협동하는 경우이다. 이 사례들은 집단 선택이 아니다. 집단성을 매개로 한 개체 선택이다. 집단 선택이란 개체가 자기 이익을 희생하면서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예컨대 번식에서 자기 절제를 하는 것 같은경우이다. 인간에 대해 우리가 확보하고 있는 사례들은 하나같이 개체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집단성을 이용하는 것일 뿐, 집단을개체보다 앞세우는 것은 아니다. 집단 속에서 살아가는 이득을 추구하도록 선택된 정신(예를 들자면 순응주의)을 집단 선택에 의해진화된 정신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집단성이 개체의 선택을 증진시킨다고 해서 그것이 집단 선택은 아니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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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기억은 어김없이 멀어져 가고, 벌써 나는 많은것을 잊어버렸다. 이렇게 기억을 더듬으며 문장을 쓰다 보면때때로 격한 불안에 빠지고 만다. 불현듯, 혹시 내가 가장중요한 기억의 한 부분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 몸속 어딘가에 기억의 변경이라 할 만한어두운 장소가 있어 소중한 기억이 모두 거기에 쌓여 부드러운 진흙으로 바뀌어 버린 게 아닐까 하는.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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