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발달 과정에서 환경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싶지는않다. 아이들은 가르치지 않아도 자기 힘으로 많은 걸 배운다. 웃기, 걷기, 말하기도 그러하고, 성격처럼 더 복잡한 것도 알아서 발달한다. 지독한 학대나 치명적인 유전자 결함만 없으면, 아이들은 무사히 성장할 것이다. 교육적 음악사업과 게임 사업의 규모가 10억달러에 달하고, 아이들의 발달 과정을 제어하겠다고 아이들의 식단을 관리하는 부모도 있지만, 그런 게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는 드물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들을 애지중지 키우며 스트레스를 아예 없애주려는 것은 무의미하다. 아이를 키운 부모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어떤 아이도 부모가 바라는 대로는 되지 않으며 아이들이 자라서 어떤 유형의 성인이 될지를 어른들은 거의 좌우할 수 없다. 나와 함께 일하는 소아신경학자들도 "아이는 정해진대로 만들어진다"라고 말하곤 했다. 당신이 아이를 완전히 망쳐놓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 P141

 그날 아침 내 마음의 눈에는 뒤뜰 정원의 다리 셋달린 의자가 사이코패시의 세 가지 요소와 그것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새로운 사이코패시 이론의 토대가 되었다.
세 개의 다리란, 안와전두피질과 편도체를 포함한 전측두엽의유별난 저기능, 전사유전자로 대표되는 고위험 변이 유전자 여러개, 어린 시절 초기의 감정적·신체적·성적 학대였다.
나에게는 ‘유년 시절의 학대‘라는 다리가 없었다. 그래서 몇 년에 걸쳐 사이코패스에 관해 강연을 하면서도 나는 계속 사이코패스에 속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하지만 동료들은 가끔씩 나의 안정된(또는 내가 그렇다고 믿은) 행동을 놓고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동료들이 단순히 내가 한 어떤 짓에 분개했거나 나의 성공을 질투해서 과잉반응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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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박물관의 카페테리아에서 만난 남자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원본과 마주했을 때만큼 만족스러운 순간은 없다고. 세상에 복사본이 많아질수록 원본의 위력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으며, 때로 그 위력은 거룩한 성유물에 버금간다고도 했다. 그에 따르면, 세상에 하나뿐인 것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며, 그로 인해 늘 파손에 대한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앞에 여행객 한 무리가 둘러서서 경건한 태도로 그림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따금 팽팽한 긴장의 순간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어디선가 찰칵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지곤 했다. 마치 디지털 언어로 내뱉는 새로운 ‘아멘‘처럼. - P94

하지만 기차 여행을 선택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허락된 밤 시간 전부를 송두리째바쳐야 한다. 조상들의 오랜 여행 습관처럼 다리와 고가도로, 터널을 일일이 통과하며 육로를 횡단해야 한다. 무엇 하나 빠뜨리거나 건너뛰어선 안 된다. 1밀리미터도 빠짐없이 바퀴로 밟아 가면서 순간과 접선하는 동안, 반복되지 않는 배열이 끝없이 펼쳐진다. 바퀴와 철로, 시간과 공간, 온 우주에서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배열이 계속해서 전개된다. - P97

뭔가를 글로 묘사한다는 건, 그것을 사용하는 것과 비슷해서 결국엔 그것을 망가뜨리게 된다. 색깔이 엷어지고 모서리는 닳아서, 글로 적어 놓은 것들은 결국 희미해지고 사라져 버린다. 특히 장소에 관한 글이 그렇다. 여행 안내서들은 침략이나 전염병처럼 지구의 상당 부분을 파괴하고 막대한 손실을 초래했다. 다양한언어로 수백만 부를 찍으면서 해당 장소를 속박하고 약화시키고 그 윤곽을 지워 버렸다.
나 또한 한때, 젊은 날의 무지함 탓에 어떤 장소들을 묘사해 보겠다는 시도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훗날 내가 써 놓은 글을 다시 읽어 보았을 때,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그 강렬했던 존재감을 되살리려 애쓰고 그 글의 소곤거림에 귀를 기울여 보았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진실은 가혹했다. 뭔가를 글로 쓴다는 건, 그것을 파괴한다는 의미였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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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건 MAOA 대립유전자와 폭력성 사이의 연결고리뿐이었다. 아직까지 유전자와 사이코패시 사이의 진정한 연결고리는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나는 사례연구를 전부 살펴보았다. 독재자를 포함해 모든 사이코패스가 어릴 때부터 ‘정신병자‘라는 소리를들었으며, 하나같이 학대를 받았고, 생물학적 부모를 한쪽 이상 잃은 경우가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릴 때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부인한 예도 있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면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너무 창피했거나 가족의 일원인 가해자를 감싸기 위한 것이었다.
수감된 사이코패스 중 유아기에 신체적·감정적 학대나 성적 학대를 당한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청소년 사이코패스 범죄자 35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70퍼센트가 어린 시절 내내 심각한 학대를 받았다고 답했다. 어린 시절에 대한 믿을 만한 기억이 기껏해야 서너 살 이후에야 시작된다고보면, 이 결과는 더 높은 비율의 성인 사이코패스 범죄자들이 자신이 기억하는 것보다 일찍부터 상당한 학대를 경험한다는 의미를함축했다. 그렇다면 이들 중 90퍼센트 이상이 생애 초기의 한 시점에 학대를 당했을 수도 있다. 나는 여기에다 가해자를 감싸는 사이코패스들을 더하면, 사이코패스 중 어린 시절에 학대를 받은 비율은 거의 99퍼센트에 육박할 수도 있다고 추론했다.
내가 범죄자가 아닌 이유를 생각하기 시작한 게 바로 이때다. 살인자들은 학대를 당한 적이 있었고 나는 그런 적이 없었다. 우리를 만드는 건 양육이 아니라 본성이라는 나의 신념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떻게 키우느냐‘가 결국은 범죄자를 만들어내는 데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 P125

후성유전학적 꼬리표는 환경적 스트레스 때문에 생기는 많은 유전부호 변경 가운데 하나다. 또 이것이 바로 본성과 양육의 상호작용 바탕에 있는 핵심 기제 중 하나다.
후성유전학적 상호작용이 대사, 암 그리고 전염병 발병에 어떤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최근에 수많은 연구가 있었다. 하지만 후성유전학적 상호작용은 조현병부터 사이코패시에 이르는 정신장애를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내가 진로를 선택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영화 <찰리>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면은 주인공이 자신의 교사 겸 치료사의 칠판으로 가서 ‘that that is is that that is not is not is that it it is‘라고 쓰고는 그녀에게 이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장면이다. 그녀가 해독하지 못하자, 주인공은 칠판으로 가서 구두점을 찍는다. That that is, is. That that is not, is not. Is that it? Itis.‘ (있는 건 있어. 없는 건 없고, 이제 됐어? 그래.)
이 수수께끼는 후성유전체 epigenome 가 무엇인지 훌륭하게 비유해준다. 이 비유에서 원래의 DNA 염기쌍 부호는 ‘thatthatisisthatthatisnotisnotisthatititis ‘이고, 서열을 배열하는 방식은 부호가일련의 단어로 전사되게 지시하지만 딱히 문장이 되게끔 지시하는 건 아니다. 보통 DNA에서 RNA로 전사된 메시지는 단백질로, 여기서는 빈틈없고 상식적인 문장 ‘That that is, is. That thatis not, is not. Is that it? It is‘로 번역될 것이다. 하지만 환경적 스트레스 요인들이 원래 유전된 DNA의 일부에 후성유전학적 꼬리표가 첨가되도록 유도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구두점, 띄어쓰기, 일반적 문형을 바꾸어 약간 다른 의미를 생산할 수 있다. "That that is, is. That that is not, is not. Is that it? It is?‘ (있는 건 있어. 없는 건 없고, 이제 됐어? 그래?) 단어들도 같고, 순서도 같지만 마지막에 첨가된 물음표가 메시지의 취지를 바꿔놓는다. 문장이 의도한 ‘유전적 의미에 가해진 이 약간의 ‘후성유전학적 변화는 돌연변이와 다르다. 돌연변이에서는 글자가 하나 이상 추가되거나 기존 글자가 삭제됨으로써 문장의 실제 철자가 바뀐다. 물론 그러한 변화는 문장의 기능을 근본적으로 변질시킬 수 있어서, 문장은이제 이처럼 될 것이다. That that is, is. That that is not, is snot, Is that it? It is. (있는 건 있어. 없는 건 콧물이고. 그게 다야? 네.)다시 말하면 유전체는 당신이 태어날 때 물려받은 책이고, 후성유전체는 당신이 그 책을 읽는 방식이다. - P128

후성유전체가 작동하는 가장 흔한 모습은 환경적 스트레스 요인이 히스톤이라 불리는 단백질 실패에 감겨 있는 DNA 실들을 감쌀 때 볼 수 있다. 스트레스 요인은 메틸 methyl과 아세틸 acetyl 이라는아주 작은 작용기 functional group들을 유전자에 덧붙일 수도 있고 유전자에서 떼어낼 수도 있다. 이 작용기들은 DNA 가닥에 들러붙는작은 원자단atomic group 일 뿐이지만, 그러한 변경은 어떤 유전자가 읽힘으로써 맡은 일을 수행하는 능력을 멈추거나 늦추거나 재촉할 수 있다. 한 유전자의 행동이 바뀌면 만들어지는 단백질의 양이 바뀌므로 뇌 회로 안의 신경전달물질 균형이 바뀌고 결국 사고, 감정, 행동이 바뀐다. 사고, 감정, 행동이 바뀌는 것은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데서 주요 초점이고 본성-양육 문제를 이해하는 열쇠다. 메틸기와 아세틸기를 덧붙이는 주된 환경적 자극중 하나가 스트레스고, 이러한 자극에는 학대, 출생 전 산모의 불안, 마약, 일부 식품이 원인이 된다. 스트레스로 인해 호르몬의 일종인 코르티솔 cortisol이 방출되면, 코르티솔이 메틸기와 아세틸기를 주는 분자로부터 메틸기와 아세틸기를 받아서 DNA로 옮긴다.
이러한 첨가가 사이코패시의 병인을 이해하는 열쇠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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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어딘가로 자꾸만 사라져 버리는 창밖 풍경을 내다보았다. 그렇다면 ‘거기에 있었다‘는 게 과연 무슨 의미인지 의문을 품은 적은 없을까? 지금은 그저 몇 토막의 추억만 떠오르는, 프랑스에서 보낸 이 주. 중세 도시의 오래된 성벽에서 갑자기 엄습한 허기, 포도 덩굴로 뒤덮인 지붕 밑 카페에서 보낸 어느 저녁나절. 노르웨이는 또 어땠는가. 호수의 차가운 냉기,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만 같던 한낮, 상점이 문 닫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산 맥주, 숨 막히게 아름다웠던, 난생처음 본 피오르의 풍경.
"제가 본 것들, 그건 모두 제 것입니다." - P41

가방에서 끄집어낸 물건들로 잔뜩 어질러진 방 한가운데, 옷을입은 채로 그가 배를 바닥에 대고 엎드려 있다. 그의 시선은 물건들이 만들어 낸 별자리와 같은 문양, 그것들의 형상, 놓인 위치와 가리키는 방향을 유심히 관찰한다. 이것은 어쩌면 징조일지도 모른다. 거기 어딘가에 그에게 발송된 편지가 있다. 아내와 아이의 문제에 관한 편지. 하지만 무엇보다 그 자신의 문제에 관한 편지. 글자도 모르겠고 기호도 모르겠다. 그러하니 아마도 인간의 손이 쓴 편지는 아닌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 기호들이 그와 연관되어있음은 명백하다. 그가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하다. 그것들이 보인다는 것, 그 자체가 신비로운 일이다. 아니, 그가 지금 바라보고 있다는 것, 나아가 그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가 바로 놀라운 신비다. - P80

하지만 시간에 대해 나는 의견이 다르다. 모든 여행자의 시간은수없이 많은 시간이 하나로 모인 결합체다. 그것은 혼돈의 대양속에서 정리된 시간, 섬과 군도의 시간이다. 기차역의 시계가 만들어 내는 시간, 가는 곳마다 달라지는, 그때그때 약속된 시간이자 자오선의 시간이기에 그 시간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시간이 사라져 버리고, 먼동이 트기가 무섭게 오후와 저녁의 발소리가 계단에서 들려온다. 그저 잠시 머무는 대도시에서의 빡빡한 시간은 하룻저녁을 송두리째 바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비행기에서 목격할 수 있는, 인적 없는 평원의 느긋한 시간이 있다.
나는 세상이 뇌 속에, 그 주름 속에, 솔방울샘 안에 있고, 목구멍 안에 걸려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이라는 이름의 구체(球體). 그래서 그것은 기침으로 쏟아 내거나 침으로 뱉어 낼 수 있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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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내가 있다

나는 서너 살이다. 창틀에 앉아 있는데, 주위엔 온통 널브러진 장난감들, 거꾸로 처박힌 블록 탑들, 눈이 불거져 나온 인형들. 집안은 컴컴하고 방마다 공기가 차갑게 식어 흩어지고 있다. 아무도 없다. 다들 떠났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점점 사그라드는 그들의 음성, 발소리의 메아리, 웃음소리가 멀어져 가며 계속 귓가에 울린다. 창밖은 텅 빈 정원. 어둠이 하늘에서 내려와 조용히 번져 가며, 마치 검은 이슬처럼 만물에 내려앉는다.
가장 끔찍한 것은 정적, 두 눈에 생생히 보이는, 끈적거리는 그것, 차가운 석양, 그리고 불과 1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어둠 속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가는 나트륨램프의 가녀린 불빛. - P11

별로 크지 않은 그것은 오드라강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나 역시 작은 아이였다. 강의 위상을 결정짓는 건 크기에 따른 순위다. 나중에 지도에서 확인해 보니 그리 대단치 않은 평범한 강이었지만, 그래도 존재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아마존 여왕의 궁전에 초대된 시골 자작 부인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당시의 내게는 충분히 거대했다. 오랜 세월 아무런 속박도 당하지 않으면서 마음껏 흐르고, 범람의 기운이 충만한, 예측 불가능한 강. 강변 근처 어디쯤에서는 물속에 잠긴 장애물이 물줄기를 가로막아 소용돌이를 일으키기도 했다. 강은 유유히 퍼레이드를 하면서 저 멀리 북쪽어딘가, 수평선 너머에 감춰진 자신의 목적지에 집중했다. 강물을 쉼 없이 응시하기는 쉽지 않았는데, 수평선을 따라 시선을 위쪽으로 옮기다 보면 어김없이 균형감을 잃곤 했기 때문이다. - P14

한 번이라도 소설 쓰기를 시도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힘든 작업인지 안다. 그건 아마도 스스로에게 부과할 수 있는 가장 고약한 업무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홀로 두고, 좁은 1인용 방에 가두고, 완전한 고독 속에 빠져들어야만 하니까. 그것은 통제할 수 있는 정신병이고, 스스로에게 작업의 족쇄를 채우는 강박적인 편집증이며, 그것도 우리가 잘알고 있는 만년필이나 버슬, 베네치아의 가면 따위는 모두 버리고, 정육점 도살업자의 앞치마를 입고, 고무 장화를 신고, 손에는 내장을 제거하는 칼을 들어야만 하는 일이다. 작가의 지하실에서는 지나가는 행인들의 다리가 보이고 구두 굽 소리가 들린다. 이따금 누군가가 멈춰 서서 몸을 숙여 창문을 들여다보기도 하는데, 그러면 비로소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고 몇 마디 대화도 나눌수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성급히 설계한 ‘호기심의 방‘에서 저절로 진행되고 있는 자신의 게임에 온 정신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임시로 세워 놓은 무대에 말들이 올려진다. 작가와 주인공, 작중 화자와 독자, 서술하는 자와 서술당하는 자. 발과 구두, 구두 굽과 얼굴 들은 언젠가는 그 게임의 일부가 된다. - P27

망가지고 손상되고 상처 나고 부서진 모든 것에 자꾸만 끌리는것. 이것이 나의 증상이다. 시시한 것들, 뭔가를 만들다가 발생한 실수, 막다른 골목. 좀 더 발전할 수 있었는데 어떤 이유에선가 더이상 뻗어 나가지 못한 것들, 혹은 그 반대의 경우, 즉 애초의 설계에서 너무 많이 확장된 것들 말이다. 표준을 벗어난 것, 너무 작거나 너무 큰 것, 넘치거나 모자라는 것, 끔찍하고 역겨운 것. 좌우대칭이 어긋난 모형,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사방으로 번식하고, 싹을 틔우는 것, 혹은 그 반대로 수많은 개체가 하나로 줄어든 경우도 그렇다. 반면에 통계 수치에 따라 일정하게 반복되는 패턴, 예를 들어 모두가 흡족한 표정으로 화목한 미소를 지으며 뭔가를 축하하는 풍경은 내게 아무런 흥미도 일으키지 못한다. 내 감수성은 기형학(畸形學)이나 괴짜를 향하고 있다. 나는 이런 기형의 상태 속에서 존재가 참모습을 드러내고 본성을 나타낸다는 고통스럽고도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 갑작스럽고 우연한 출현. 당황해서 튀어나오는 "아이쿠." 소리, 완벽하게 주름 잡힌스커트 아래로 삐져나온 속치마 솔기, 벨벳 의자 덮개 밑에서 돌연 모습을 드러낸 흉측한 금속 받침대, 부드러움에 대한 환상을 뻔뻔하게 깨뜨린, 푹신한 안락의자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스프링 하나.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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