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어딘가로 자꾸만 사라져 버리는 창밖 풍경을 내다보았다. 그렇다면 ‘거기에 있었다‘는 게 과연 무슨 의미인지 의문을 품은 적은 없을까? 지금은 그저 몇 토막의 추억만 떠오르는, 프랑스에서 보낸 이 주. 중세 도시의 오래된 성벽에서 갑자기 엄습한 허기, 포도 덩굴로 뒤덮인 지붕 밑 카페에서 보낸 어느 저녁나절. 노르웨이는 또 어땠는가. 호수의 차가운 냉기,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만 같던 한낮, 상점이 문 닫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산 맥주, 숨 막히게 아름다웠던, 난생처음 본 피오르의 풍경.
"제가 본 것들, 그건 모두 제 것입니다." - P41

가방에서 끄집어낸 물건들로 잔뜩 어질러진 방 한가운데, 옷을입은 채로 그가 배를 바닥에 대고 엎드려 있다. 그의 시선은 물건들이 만들어 낸 별자리와 같은 문양, 그것들의 형상, 놓인 위치와 가리키는 방향을 유심히 관찰한다. 이것은 어쩌면 징조일지도 모른다. 거기 어딘가에 그에게 발송된 편지가 있다. 아내와 아이의 문제에 관한 편지. 하지만 무엇보다 그 자신의 문제에 관한 편지. 글자도 모르겠고 기호도 모르겠다. 그러하니 아마도 인간의 손이 쓴 편지는 아닌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 기호들이 그와 연관되어있음은 명백하다. 그가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하다. 그것들이 보인다는 것, 그 자체가 신비로운 일이다. 아니, 그가 지금 바라보고 있다는 것, 나아가 그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가 바로 놀라운 신비다. - P80

하지만 시간에 대해 나는 의견이 다르다. 모든 여행자의 시간은수없이 많은 시간이 하나로 모인 결합체다. 그것은 혼돈의 대양속에서 정리된 시간, 섬과 군도의 시간이다. 기차역의 시계가 만들어 내는 시간, 가는 곳마다 달라지는, 그때그때 약속된 시간이자 자오선의 시간이기에 그 시간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시간이 사라져 버리고, 먼동이 트기가 무섭게 오후와 저녁의 발소리가 계단에서 들려온다. 그저 잠시 머무는 대도시에서의 빡빡한 시간은 하룻저녁을 송두리째 바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비행기에서 목격할 수 있는, 인적 없는 평원의 느긋한 시간이 있다.
나는 세상이 뇌 속에, 그 주름 속에, 솔방울샘 안에 있고, 목구멍 안에 걸려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이라는 이름의 구체(球體). 그래서 그것은 기침으로 쏟아 내거나 침으로 뱉어 낼 수 있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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