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내가 있다
나는 서너 살이다. 창틀에 앉아 있는데, 주위엔 온통 널브러진 장난감들, 거꾸로 처박힌 블록 탑들, 눈이 불거져 나온 인형들. 집안은 컴컴하고 방마다 공기가 차갑게 식어 흩어지고 있다. 아무도 없다. 다들 떠났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점점 사그라드는 그들의 음성, 발소리의 메아리, 웃음소리가 멀어져 가며 계속 귓가에 울린다. 창밖은 텅 빈 정원. 어둠이 하늘에서 내려와 조용히 번져 가며, 마치 검은 이슬처럼 만물에 내려앉는다. 가장 끔찍한 것은 정적, 두 눈에 생생히 보이는, 끈적거리는 그것, 차가운 석양, 그리고 불과 1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어둠 속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가는 나트륨램프의 가녀린 불빛. - P11
별로 크지 않은 그것은 오드라강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나 역시 작은 아이였다. 강의 위상을 결정짓는 건 크기에 따른 순위다. 나중에 지도에서 확인해 보니 그리 대단치 않은 평범한 강이었지만, 그래도 존재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아마존 여왕의 궁전에 초대된 시골 자작 부인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당시의 내게는 충분히 거대했다. 오랜 세월 아무런 속박도 당하지 않으면서 마음껏 흐르고, 범람의 기운이 충만한, 예측 불가능한 강. 강변 근처 어디쯤에서는 물속에 잠긴 장애물이 물줄기를 가로막아 소용돌이를 일으키기도 했다. 강은 유유히 퍼레이드를 하면서 저 멀리 북쪽어딘가, 수평선 너머에 감춰진 자신의 목적지에 집중했다. 강물을 쉼 없이 응시하기는 쉽지 않았는데, 수평선을 따라 시선을 위쪽으로 옮기다 보면 어김없이 균형감을 잃곤 했기 때문이다. - P14
한 번이라도 소설 쓰기를 시도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힘든 작업인지 안다. 그건 아마도 스스로에게 부과할 수 있는 가장 고약한 업무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홀로 두고, 좁은 1인용 방에 가두고, 완전한 고독 속에 빠져들어야만 하니까. 그것은 통제할 수 있는 정신병이고, 스스로에게 작업의 족쇄를 채우는 강박적인 편집증이며, 그것도 우리가 잘알고 있는 만년필이나 버슬, 베네치아의 가면 따위는 모두 버리고, 정육점 도살업자의 앞치마를 입고, 고무 장화를 신고, 손에는 내장을 제거하는 칼을 들어야만 하는 일이다. 작가의 지하실에서는 지나가는 행인들의 다리가 보이고 구두 굽 소리가 들린다. 이따금 누군가가 멈춰 서서 몸을 숙여 창문을 들여다보기도 하는데, 그러면 비로소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고 몇 마디 대화도 나눌수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성급히 설계한 ‘호기심의 방‘에서 저절로 진행되고 있는 자신의 게임에 온 정신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임시로 세워 놓은 무대에 말들이 올려진다. 작가와 주인공, 작중 화자와 독자, 서술하는 자와 서술당하는 자. 발과 구두, 구두 굽과 얼굴 들은 언젠가는 그 게임의 일부가 된다. - P27
망가지고 손상되고 상처 나고 부서진 모든 것에 자꾸만 끌리는것. 이것이 나의 증상이다. 시시한 것들, 뭔가를 만들다가 발생한 실수, 막다른 골목. 좀 더 발전할 수 있었는데 어떤 이유에선가 더이상 뻗어 나가지 못한 것들, 혹은 그 반대의 경우, 즉 애초의 설계에서 너무 많이 확장된 것들 말이다. 표준을 벗어난 것, 너무 작거나 너무 큰 것, 넘치거나 모자라는 것, 끔찍하고 역겨운 것. 좌우대칭이 어긋난 모형,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사방으로 번식하고, 싹을 틔우는 것, 혹은 그 반대로 수많은 개체가 하나로 줄어든 경우도 그렇다. 반면에 통계 수치에 따라 일정하게 반복되는 패턴, 예를 들어 모두가 흡족한 표정으로 화목한 미소를 지으며 뭔가를 축하하는 풍경은 내게 아무런 흥미도 일으키지 못한다. 내 감수성은 기형학(畸形學)이나 괴짜를 향하고 있다. 나는 이런 기형의 상태 속에서 존재가 참모습을 드러내고 본성을 나타낸다는 고통스럽고도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 갑작스럽고 우연한 출현. 당황해서 튀어나오는 "아이쿠." 소리, 완벽하게 주름 잡힌스커트 아래로 삐져나온 속치마 솔기, 벨벳 의자 덮개 밑에서 돌연 모습을 드러낸 흉측한 금속 받침대, 부드러움에 대한 환상을 뻔뻔하게 깨뜨린, 푹신한 안락의자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스프링 하나.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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