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화실과 기도 모임의 담장 너머에서는 ‘백색 테러‘가 타이완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장제스와 그 휘하의 패잔병들, 중화민국 행정부, 이들의 가솔까지 도합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도착한 종착지 타이완은 그들을 반기지 않았다. 일본이 떠난 자리를 국민당이 접수했던 2년 전, 타이완에서는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처음에 타이완의 인구 대부분은 다시 중국의 통치를 받게 된 것을 두 팔 벌려 환영했지만, 환호는 곧 분노로 바뀌었다. 중국 본토의 사람들이 장제스 정권에 등을 돌리게 만들었던 "승리의재난"이 타이완에서도 재연되었던 것이다. 만연한 부패, 무능한 통치(고도로 효율적이었던 일본과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졌다), 그리고 조상 대대로 타이완에 거주해온 본성인(本省人)들을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외성인(外省人)들, 그리고 그밖에 국민당이 타이완을 접수하면서 발생한 무수히 많은 폐해들이 1947년 2월 28일 봉기를 야기했다. 그리고 잔혹한 무력 진압이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 P382

장제스가 여든넷, 메이링이 일흔셋이던 1971년, 부부의 유유자적한 삶은산산조각났다.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과의관계 회복을 꾀하면서 이듬해 초에 베이징을 방문하겠다고 선포한 것이었다. 그가 파견한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베이징에서 대통령의 방중을 대비하던 10월, 유엔은 ‘중국‘ 의석을 중화인민공화국에 배정하고 타이완의 중화민국을 퇴출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서구 정치인들이 부지런히 마오쩌둥의 방 문을 두드리는 동안, 비탄에 빠진 메이링은 신앙에서 안식을 찾으며 「성서」의 구절을 연거푸 암송했다. "우리가 모든 일에 괴로움을 당해도 꺾이지 않으며 난처한 일을 당해도 실망하지 않고 핍박을 받아도 버림을 당하지 않으며 맞아서 쓰러져도 죽지 않습니다."(「고린도후서」 제4장 8-9절/옮긴이)에마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이렇게 적었다. "분별과 정직의 시계추가 조만간 제자리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중요한 건 어떤 일이 벌어지느나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야." - P394

장징궈는 1950년대 초 아버지의 명을 따라서 새 근거지 타이완을 사수하기 위한 ‘백색 테러‘를 주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정권 승계 후에는 ‘민중친화적‘이라는 평판을 얻는 데에 성공했다. 주민들과 전혀 접촉이 없었던아버지와 달리 그는 서민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노력했다. 끊임없이 각지를 시찰하면서 도로변의 조그만 가판대에서 밥을 먹고, 주변 사람들과한담을 나누었다. 겉모습에서도 그는 위풍당당하고 강인한 아버지의 외양을 따르는 대신 소탈한 모습을 선택했다. 정치적으로는 장제스가 죽자마자 그의 정책 대부분을 사실상 완전히 개정했다. 장제스는 타이완의 경제발전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지만, 장징궈는 그것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었다. 그의 통치 아래 타이완은 ‘타이완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압도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장징궈의 재임 기간 동안 타이완의 경제 성장률은 두 자릿•수를 기록했고, 1977년부터 6년 안에 국민소득은 세 배가 되었다. 상당한수준의 자유화도 뒤따랐다. 사상 처음으로 타이완 국민들에게 여행을 목적으로 한 자유로운 출국이 허가되었다. 본토 출신의 국민당 노병들은 고향에 가서 가족과 상봉할 수 있게 되었다. 봉쇄되었던 해안가와 산지 역시대중에게 개방되었다.
장징궈 정부는 청렴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장징궈와 그의 가족은 그 어떤 재산도 축적하지 않았다. 또한 장징궈는 공공심이 투철한 다수의 인재들을 곁에 두었다. 공직을 맡아서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국가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이들이었다. 부패의 부재, 근면성실하게 나라에 대한 의무를 다한다는 정신은 타이완의 성공을 견인했다. 일당 독재 체제 아래 공산당 및 중화민국으로부터의 타이완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의 활동은 여전히 금지되었지만, 제재는 지나치지 않았고 장징궈는 많은 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타이완을 민주화의 길로 이끌었다.
1985년, 장징궈는 세 아들 중 누구도 총통직을 물려받지 않을 것이라고선언함으로써 그의 가족에게 정권이 이양되리라는 항간의 예측을 공개적으로 부인했다. - P426

장징궈의 통치 아래 타이완은 이전과 아주 다른 모습으로 변화했다. 경제적 번영이 타이완 사회에 새로운 차원의 열망을 불어넣었다.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사회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매년 30만 명에 달하는, 여행또는 유학을 가서 세계 다른 나라들을 목격한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다. 당의 공식 입장에 반하는 내용을 담은 출판물이 우후죽순처럼 간행되었다.
민주화를 향한 거스를 수 없는 시류 속에서, 1987년 장징궈는 계엄령을 해제했고, 새로운 정당의 설립과 언론의 자유를 허가했다. - P428

장례식 이튿날, 당시 타이완의 총통 천수이볜이 메이링의 맨해튼 저택을 방문해서 애도를 표하고 경의의 뜻을 담아서 그녀의 친척들에게 타이완국기를 수여했다. 2000년에 선출된 천수이볜은 타이완 역사상 첫 반국민당 계열 총통이었다. 메이링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역사의 산증인이었다. - P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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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징웨이는 항일 전쟁에 비관적이었다. 그는 또한 전투의 패배를 장제스의 탓으로 돌렸다. 눈 깜짝할 만큼 짧은 시간에 상하이 및 기타 주요 도시들과 광활한 영토를 상실한 것은 장제스의 "부패하고 사악한.....1인독재의 결과라고 했다. 왕징웨이가 보기에 장제스는 경쟁자들을 끊임없이의심하고 그들을 부당하게 대하는 인물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견해에 공감했다. 미국 주재무관 조지프 스틸웰은 1938년 충칭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장제스는 "모든 것을 부하들에게 비밀로 하고 싶어한다. 그들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불신 탓에 그는 자신의 군대를 효율적으로 만들지도 못했다."
왕징웨이는 중국을 보존하는 유일한 길은 일본과의 ‘평화‘를 모색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1938년 말, 그는 충칭을 빠져나와 하노이를 거쳐서 상하이로 향했고, 도중에 장제스의 첩보원들에 의한 수많은 암살 시도가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다수의 총상 때문에 그는 결국 6년 후때 이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1940년 3월, 일본의 점령지인 난징에서 그가 이끄는 괴뢰정권이 수립되었다.
왕징웨이는 쑨원의 본래 후계자였고, 쑨원이 소리 높여 외친 ‘대(大)아시아주의‘는 지금 점령국 일본의 구호였다. 이러한 사실은 자신이 쑨원의 진정한 계승자라는 왕징웨이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고, 장제스는 전에 없던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장제스는쑨원에게 공식적으로 ‘국부‘ 칭호를 수여했다(그러나 이 논리는 어딘가가 이상했다. 쑨원은 중국을 향한 일본의 호전적인 야망을 거부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왕징웨이가 난징에서 취임 선서를 한 날, 칭링은 충칭으로 가서 장제스에대한 연대를 표해야겠다고 즉흥적으로 결정했다. 메이링은 이전에 칭링에게 충칭 방문을 제안한 바 있었고 여기에 아이링도 굉장한 열의를 보였다. 칭링은 자매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고, 동시에 쑨원의 부인이 왕징웨이정권에 반대한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다. 세 자매는 이튿날 전시수도 충칭으로 향했다.
칭링은 여왕과 여신, 유명 여배우가 동시에 받을 법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 P296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에서는 중국을 동정하는 여론이 전에 없이 거세졌다. 미국인들이 보기에 이 가련하고 신비로운 나라는 일본이라는 무시무시한 악당에 맞서서홀로 지난 4년 반을 싸우고 있었다. 메이링은 그 영웅적인 나라에서 온 대표였고, 아름다운 여성, 그것도 ‘상아색 비단 살결‘의 얼굴을 지닌 여성이었다(그녀는 얼굴 생김새만 빼면 미국인 여성과 다를 바 없었다). 미국인들의 환영은 굉장했다. 1943년 2월 메이링은 워싱턴 DC에 도착해서 공식 순회를 시작했고, 엘리너 루스벨트 영부인이 친히 기차역으로 나와서 그녀를 맞이했다. 영부인은 메이링의 팔짱을 끼고서, 역 바깥에서 대통령 전용차를 타고 기다리고 있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안내했다. 메이링은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는 1만7,000명, 로스앤젤레스의 야외 공연장 할리우드 볼에서는 3만 명의 인파 앞에서 연설했고, 가는 도시마다 열광적인 군중의 환영을 받았다. 2월 18일 미국 의회에서 연설했을 때에는(이는 대단한 영예였다), 고혹적인 치파오를 차려입은 아담한 그녀가 장엄한 국회의사당 안에서 수많은 쟁쟁한 인사들 사이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흠잡을 데 없는 미국식 영어로 진행된 그녀의 연설은 많은 유력 인사들을 눈물짓게 했다. 기립 박수는 4분이나 이어졌다.
이 모든 것들은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완벽주의자인 메이링은 지칠 때까지 연설문을 수정하고 또 수정했다. 몇몇 행사에서는 진이 빠진나머지 거의 실신할 뻔했다. 메이링이 뉴욕의 차이나타운에서 촬영한 뉴스 영화를 본 장제스는 그녀가 아파 보이고, 상황에 대처하느라 허덕이는것 같다며 걱정했다. 메이링은 미국을 방문하기 전에도 고혈압과 암으로 추정되는 결과적으로는 아니었다) 위장병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공식순회 전에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그리고 조금은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 메이링은 3개월 먼저 미국으로 건너와서 뉴욕장로교 병원에 입원했다. 요양후에 그녀는 미국의 대중 앞에 최상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었고, 그들의 환심을 사서 중국에 대한 미국의 원조 규모를 증대시켰다. 순회는 대성공이었다. - P308

이 시기에 메이링은 남편이 형부 쿵샹시를 소환한 일로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쿵샹시는 1944년 중반 부총리 겸 외무부 장관 자격으로 공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미국에 왔다가 병 치료를 이유로 계속 머무르고 있었다. 1945년 봄, 연루된 채권액수가 1,000만 달러 이상인 비리 사건이 터졌다. 쿵샹시는 그중 300만 달러 이상을 착복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국민당 당원들은 위아래 할 것 없이 분노로 들끓었고, 장제스는 어쩔 수 없이 조사를 지시했다. 그는 쿵샹시에게 전보를 연달아 보내서 귀국하여 조사에 응하라고 촉구했고, 전보가 거듭될수록 표현의 수위도 점점 높아졌다. 결국 쿵샹시는 7월에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해임되었고, 유용한 공금의 일부를 토해내야 했다.
장제스는 처남 쑹쯔원을 후임 국무총리로 삼았다. 이로 인해서 쑹쯔원과 쿵씨 가족의 관계가 틀어졌다. 이때부터 쿵샹시는 기회만 있으면 쑹쯔원을 비방했고, 아이링은 말년에 가서야 동생과 반쪽짜리 화해를 했다.
아이링은 장제스의 처사에 분노했다. 그녀가 보기에 이것은 자신의 남편, 더 나아가 그녀 자신에 대한 부당한 대우였다. 남들이 없는 자리에서 아이링은 동생에게 하소연을 쏟아냈다. 에마는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다. 중국과 연관이 있는 미국인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그녀는 쿵샹시 가족을 몹시 싫어했고, 자신의 친구 메이링이 지나치게 "쿵샹시부인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다른 누구라도 그녀의 곁에 있으면 좋겠다"고 일기에 적은 바 있었다. 메이링은 전적으로 언니의 역성을 들었고, 남편의 전보를 무시했다. 그녀는 에마에게도 그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8일, 소련이 일본에 전쟁을 선포했다. 10일, 일본이 항복 의사를 발표했고, 전 세계에서 축하 행사가 이어졌다. 뉴욕에 머무르고 있던 메이링은 승리의 순간을 남편과 함께 나누기 위해서 귀국을 서두르는 대신, 타임스퀘어로 차를 몰았다. 그곳에서 메이링은 구름처럼 모여든 떠들썩한 인파에 갇혀, 사람들이 기뻐하며 큰 소리로 웃고 성조기를 흔드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이 공간과 일체감을 느꼈고,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하나를 선택하라면 아이링과 함께 뉴욕에 머무르는 쪽이 훨씬 더 메이링의 마음에 들었다. - P318

1945년 8월 10일, 충칭에 있던 장제스는 일본이 항복 의사를 표명했음을 이례적인 방식으로 알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영어로 항복 의사를 밝혔다. 메이링은 뉴욕에 있었기 때문에, 장제스의 곁에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뉴스를 모니터링할 영어 구사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그는 그 정도로 고립된 존재였다). 장제스의 일기에 따르면, 오후 8시경 장제스의 처소 근처에 위치한 미군 본부에서 커다란 함성이 터져나왔고, 이어서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제스는 전령(그의 친척)을 보내서 "무슨 일로 소란인지 물었다. 중국 전역 최고 사령관 장제스는 그렇게 역사적인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장제스가 보인 반응은 희열이 아니라 극도의 긴장감이었다. 중국 통치를 두고 마오쩌둥과 결판을 내야 할 순간이 마침내 도래했다. 스탈린이 4,600킬로미터를 웃도는 기나긴 전선을 넘어서 150만 명의 병력을 중국 북부에 투입한 것이 바로 얼마 전이었다. 장제스가 즉시 대응하지 않으면 소련군이 점령한 영토(최종적으로는 소련이 유럽 중부와 동부에서 점령한 전체 면적보다 컸다)가 마오쩌둥 측에 넘어갈지도 몰랐다. 전쟁 전에는 공산당군의 규모가 매우 작았으나, 이제는 100만 명이 넘어 국민당군의 3분의 1에 육박할 정도였다. 장제스는 즉각 병력을 재배치하고자 했다. 그날 저녁, 멕시코 대사를 응접하던 그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는 대사 때문에 지휘관들에게 전보를 보낼 틈이 나지 않아서 신경이 몹시 곤두섰다.
미국은 중국의 평화를 원했다. 그들은 마오쩌둥을 충칭으로 초청해서 평화 협상을 진행하라고 장제스를 압박했다. 장제스의 암살 사주 경력을 익히 알고 있던 마오쩌둥은 장제스의 영역에 발을 들일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마오쩌둥이 협상 게임에 임하기를 원했다. 마오쩌둥이 군사적으로 장제스를 이기리라는 확신이 없던 그는 마오쩌둥에게 세번이나 전보를 보내서 충칭으로 가라고 명했다. 마오쩌둥은 마지못해 8월28일 자신의 근거지인 옌안을 떠나, 미국 대사 헐리와 함께 미국 비행기를타고(미국인들이 또한 그의 안전을 보장해주었다) 충칭으로 갔다. 8월 31일자 일기에서 장제스는 마오쩌둥이 "호출에 응하여 왔다"는 점이 흡족했으며, 자신의 "도덕적 권위와 강력한 아우라"에 "주님의 뜻"이 더해진 것이 주효하게 작용했다고 적었다. 그는 자신이 마오쩌둥을 다룰 수 있다고 확신했다. - P320

의기양양해진 장제스는 국민 정부 주석의 전용기를 새로 구매했다. 최첨단 C-54 모델이었다. 1944년 메이링과 아이링이 리우데자네이루로 갈때에 이 모델 한 대를 전세내어 타고 갔는데, 보는 사람마다 크게 감탄했었다. 트루먼 대통령이 선물한 C-47 모델 전용기를 사용한 지 겨우 1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장제스는 스스로를 위해서 C-54 모델을 새로 주문했다. ‘차이나-아메리카‘라고 불린 새로운 수송기는 장제스의 취향을 잘 아는 이들의 감독하에 단장되었다. 비용 180만 달러는 재무부에서 마지못해지불했다. 국민정부가 마주한 위기 상황을 고려할 때, 이러한 낭비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마치 상사를 따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일본이 점령했던 도시와 마을을 접수하기 위해서 파견된 국민당 관료들은 조금의 제약도 없이 실컷 자신들의 욕구를 채웠다. 이들은 오랫동안 결핍에 시달려왔고, 기회가 도래하자 주택과 자동차, 그리고 다른 귀중품들을 빼앗았다. 누구든 국민당관료들이 탐내는 것을 소유하고 있다면 ‘부역자‘로 지목되어서 소유품을 몰수당할 위험이 있었다. 관료들은 스스로를 승자로 인식하여 종종 공개적으로 지역민들을 멸시했고, 외세의 지배하에 살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망국의 노예‘라고 칭했다. 중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국민당을 "해방자"라고 환영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들을 "강도", "메뚜기떼"라고 욕했다. 삽시간에 장제스와 그의 정권을 향한 열광과 흠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강렬한 혐오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유력지「대공보」는 국민당의 인수 작업을 "승리의 재난"이라고 표현했다. 대중적인 인기 측면에서, 장제스는 영광의 정점에 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 P324

갈공산당과의 전쟁에서 장제스의 상황은 그보다 나았다. 그의 군대는 1년이넘도록 거의 모든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가장 관건이 되는 전장은 소련과 국경을 맞댄 만주 지역이었다. 공산당이 이 지역을 손에 넣으면, 그들은 긴요한 소련의 무기와 군사 훈련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었다. 장제스의 군대가 공산당군을 몰아내기 직전까지 갔던 1946년 6월, 장제스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추격을 중지하고 휴전을 명한 것이다. 국공 내전의종식을 꾀하고자 중국을 방문한 조지 마셜 장군의 압박 때문이었다. 휴전은 4개월간 지속되었다. 휴전 덕분에 마오쩌둥의 군대는 소련과 그 위성국가 북한, 외몽골과의 접경 지역에 독일 면적보다 넓은 근거지를 탄탄하게 구축했고, ‘스탈린의 전폭적인 원조를 최대한으로 누릴 수 있었다. 그중에는 결정적으로 철도의 보수가 포함되어 있었고, 이로써 중화기와 대규모 병력의 신속한 수송이 가능해졌다. 장제스의 처참한 오판은 전쟁의 결과를 바꾸어놓았다. 1947년 봄이 되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 P325

메이링은 남편을 위해서 한 가지 임무는 기꺼이 수행했다. 1947년 말, 그녀는 칭링을 초대해서 상하이 근방의 명승지인 항저우로 나들이를 갔다.
장대하고 고요한 호수 주위를 거닐던 도중, 메이링은 공산당이 내전을 끝내는 데에 합의하기 위해서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칭링에게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노골적인 질문을 받은 칭링은 당황했다. 자매들은 정치적 견해 차이에 대해서는 늘 언급을 피해왔다. 칭링은 마오쩌둥이장제스를 무찌르도록 있는 힘껏 돕는 한편으로 메이링에게 민물 새우 같은 맛있는 음식을 보냈고, 메이링은 진저케이크와 치즈비스킷으로 답례하고는 했다. 칭링은 아이링의 아픈 눈을 위한 치료법을 제안했고 쑹쯔량의 딸에게 책을 보내주기도 했다. 사방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전투는 그들의 삶과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메이링의 질문은 냉혹한 현실을 절감하게 했다. 게다가 그때까지 칭링은 다른 가족들이 간악한 무리로취급하는 공산당의 정식 당원이 아니라 그들의 입장에 동조하는 지지자일 뿐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었다. 메이링의 질문은 가식은 여기까지라고, 형제자매들 모두 칭링이 자신들을 파괴하려고 드는 조직의 핵심 인사임을알고 있다고 알리는 신호였다. 칭링은 허둥지둥하며 이전과 똑같은 거짓시늉을 되풀이했다. 자신은 공산당과 아무 관계가 없으며, 따라서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칭링은 동생과 헤어져 상하이로 가는 바로 다음 열차를 탔고, 상하이에 내린 즉시 동생과 나눈 대화를 공산당에 보고했다. 당의 눈을 피해서 가족들과 거래를 하고 있다는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 P330

아이링은 메이링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조언했다. 메이링이 뉴욕을 떠나겠다는 분위기만 풍겨도 그녀는 "난리를 쳤다." 아이링에게 장제스는 그들 가족에게 온갖 몹쓸 짓을 저지른 데다가 끔찍할 만큼 무능한, 그들의 헌신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이링은 동생을 걱정했고, 동생이 죽으러 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귀국길에 오르는 꼴을 두고볼 수 없었다. 공산당은 타이완으로 진격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스탈린의 지원을 등에 업고, 타이완의 국민당 내부에 간첩들을 전략적으로 배치해둔 공산당의 타이완 점령은 성공할 가능성이 컸다. 총통이 타이완 탈출을 완고히 거부하는 상황에서, 아이링은 메이링이 그와 함께 죽기를 원하지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어려움에 처한 남편을 버리는 것이 아내로서 얼마나 지탄받는 일인지도 그녀는 고통스러울 만큼 잘 알았다. 또한 메이링이 장제스를 떠나면 그가 절대로 그녀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종국에는 장제스가 용서하지 않았던 수많은 이들의 전철을 메이링이 밟게 되리라는것도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다. 아이링은 평소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졌지만, 이때는 그녀답지 않게 어찌 할 바를 몰랐다. - P336

마오쩌둥은 기차역으로 나와서 칭링을 마중했다. 어린이들이 그녀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소련식 환영 행사였다. 쉰여섯의 나이에 (그녀는 마오쩌등보다 11개월 연상이었다) 칭링은 마오쩌둥 정부의 부주석이 되었다.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한 1949년 10월 1일, 칭링은 그의 바로 뒤에서 톈안먼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자매들이 쫓겨난 망명자 신세이던 그때 칭링은 인생의 정점에 서 있었다. - P343

엄밀히 말하면 칭링은 중국공산당 당원이 아니었다. 1930년대에 그녀는 코민테른에 가입했지만, 코민테른을 직접 관할하고 있던 소련은 칭링이 조직 바깥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는 편이 낫다고 보았다. 1943년 코민테른이 해체된 이후 칭링은 중국공산당과 소련을 자신의 ‘조작‘으로 간주했지만 정식으로 당원이 된 것은 아니었다. 공산당의 중국에서 그녀는 정책결정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나 불만은 없었다. 정치적으로 출세하겠다는 야망도 없고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던 그녀는 중국복리회를 자기 나름대로 꾸려가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칭링이 가족의 재산을 송두리째 공산당에 넘길 때에 함께 기증한 쑹씨 가족의 옛집이 중국복리회의 새로운 거처가 되었다. 중국복리회는 여성 및 아동 전담 병원, 유아원, 소련식 ‘소년궁小年宮:어린이를 위한 놀이 시설과 교육 시설을 갖춘 일종의 청소년 수련관/옮긴이)‘을 운영했고, 어린이 극장도 열었다. 그러나 주된 업무이던 기아구호는 중단해야 했다. 중국공산당의 공식 입장에 따르면, 중화인민공화국에 배를 곯는 사람은 없었다. 미국의 국제 방송국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에서 칭링이 굶주리는 이들을 돕고 있다고 보도하자, 그녀는 즉시 저우언라이에게 편지를 보내서 이 "파렴치한 사실 왜곡"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겠다고 나섰다. - P345

칭링의 집에서는 진짜 가족 같은 분위기가 흘렀다. 즐겁게 웃고 떠드는 날도, 샐쭉하니 토라져서 씩씩대는 날도 있었다.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유독 일반 대중에게까지 퍼졌다는 점이 평소와 달랐다. 국가 지도자들의 사생활은 이중삼중의 베일에 싸여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다른 고위 간부가 불륜을 저질렀다고 해도 그 소문은 당의 핵심 집단 내에서 퍼질 뿐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널리 소문이 퍼진 것은 칭링뿐이었다.
이 소문과 쑨원의 탄생 기념 행사에서 배제된 사건은 칭링을 불안하게했다. 이러다가 자신의 생존에 없어서는 안 될 쑨원 부인 칭호를 박탈당할수도 있겠다는 깨달음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이전에 장제스 치하에서도 비슷한 소문이 있었지만, 그때는 그녀가 공개적으로 소문을 반박할 수있었다. 몇몇 신문이 그녀의 입장을 실어주었고, 그것도 여의치 않다면 전단지로 만들어서 상하이의 고층 건물 옥상에서 뿌리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칭링은 국가 부주석임에도 자신의 목소리를 전할 수단이 없었다. 대중 앞에 나서서 자신을 변호할 길이 없었던 그녀는 오로지 당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녀가 쑨원을 향한 정절을 충실히 지켰더라도, 당에서 그녀를 쑨원 부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 섬뜩한 현실 앞에서는 칭링도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복종을 표현할 방법을 찾아냈다. 1957년 4월, 마오쩌둥 정부의 2인자 류사오치가 상하이에 와서 아내 왕광메이와 함께 칭링을 방문했다. 명석하고 우아한 왕광메이는 명문가 출신으로 공산당 집권 이전에 베이징의 가톨릭계 대학교에서 물리학 학위를 받은 수재였다. 부부는 칭링과 사이가 좋았다. 칭링은 류사오치 부부의 방문을 당이 보낸 화해의 신호로 해석했고,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류사오치에게 공산당 가입을희망한다고 말했다. 왕광메이는 입당하고자 하는 칭링의 간절함을 눈치챘다. 류사오치는 무척 기뻤지만, 이것이 "아주 중대한 일인 만큼 마오 주석에게 보고하겠다고 신중을 기하여 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정권의 3인자 저우언라이를 데리고 다시 상하이를 방문했다. 두 사람은 칭링에게 당 외부에서 당의 혁명 사업을 돕는 편이 더 낫겠다며, 당에 가입하지않더라도 모든 주요 사안을 수시로 알려줄 테니 의사 결정에 참여해도 좋다고 전했다. 칭링은 고개를 끄덕였다.  - P350

1958년 마오쩌둥은 그 이름도 웅장한 ‘대약진(大躍進)‘을 개시했다. 군사 사업의 모든 영역을 초고속으로 건설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러기위해서는 철강이 필요했고, 경제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던 마오쩌둥은 전국 인민에게 철강을 만들라고 명했다. 토법고로(法高라고 불리는 가정용 용광로가 중국 전역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칭링 역시 자신의 직원들과 함께 정원에 용광로를 만들었다. 이 거대하고 흉물스러운 장치를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그녀는 수려한 고목을 몇 그루나 베어야 했다.「인민일보」는 그녀가 붉게 녹인 쇠를 손수 집게로 들어올려 청년들의 망치질을 도왔다고 보도했다. 칭링은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저항하지 않았다.
중국 전역에 대기근이 들었다. 대약진 운동으로 인한 인적, 물적 자원의막대한 낭비가 주된 원인이었다. ‘기근은 1958년부터 1961년까지 4년간 이어졌다. 4,000만 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굶어 죽었다. 특권층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칭링의 주변에도 배를 곯는 이들이 있었다. 직원들의 식사를 보충하기 위해서 칭링이 애완용으로 기르던 염소를 도축하라고 명한 적도있었다.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의 폭정을 목격한 일부 공산당 원로들은 반발했다. 대표적인 인물은 국방부 장관 펑더화이였다. 그는 1959년 7월 공개적으로 비판당했다(그는 이후 감금 상태에서 사망했다). 펑더화이를 존•경했던 칭링은 큰 충격을 받았다. 오랫동안 신임해온 비서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는 속마음을 드러냈다. "신경이 곤두서 있고, 밤이면 악몽을 꿔"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편지는 읽고 나면 태워버리렴." - P354

1966년 문화 대혁명이 시작되자 칭링은 더 이상 집 밖의 현실을 외면할 수없게 되었다. 문화 대혁명은 마오쩌둥이 일으킨 가장 큰 숙청 사업으로, 주요 표적은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서 국가 주석이 된 류사오치였다. 그가 대약진 이후 돌연 마오쩌둥을 공격하고 마오쩌둥의 초고속 군수 사업화를 중단시킨 것(덕분에 대기근도 끝이 났다)이 원인이었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계획을 방해한 류사오치를 증오했고, 그가 감옥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도록 만들었다. 류사오치의 아내 왕광메이는 "미국중앙정보국(CIA)과 국민당의 간첩이라는 황당무계한 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혔다. 중국 전역에서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류사오치의 추종자로 몰려서 고초를겪었다. 이들에게는 ‘주자파走資派‘, ‘마귀‘ 등 기괴하고도 무시무시한 꼬리표가 붙었다. 총리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충실한 종노릇을 해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
칭링은 이번에도 쑨원 부인이라는 신분 덕택에 최악을 모면했다. 실제로 마오쩌둥이 홍위병으로부터 보호할 것을 특별히 명한 인물들의 명단에서 그녀는 첫째 줄에 위치했다. 칭링 역시 곤욕을 치렀지만, 다른 이들이 겪은 것에 비하면 그저 성가신 일에 불과했다. - P360

사실 그 어떤 정책도 장칭이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마오 주석의 개였습니다. 그가 누구를 물라고 명령하면 가서 물었죠." 장칭은 1930년대에 상하이에서 배우로 활동하다가 몇몇 좌파 예술가들과 함께 옌안으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마오쩌둥의 눈에들었다. 1938년 마오쩌둥은 (세 번째) 아내를 버리고 장칭과 결혼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마오쩌둥은 장칭이 악의에 가득 찬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기꺼이 그 악의를 이용했다. "장칭은 전갈보다도 독이 가득한사람이라네." 마오쩌둥은 집안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며 새끼손가락을 전갈의 꼬리 모양으로 까딱까딱 움직였다. 장칭은 마오쩌둥의 명에 따라서 문화 대혁명을 진두지휘했고, 남들이 꺼리는 일을 도맡았다. 그녀가 모두에게 미움받고 있음을 마오쩌둥도 알았다. 불치병을 앓던 말년의 그는 쿠데타가 일어날까 두려워하며 정적들을 향해 거듭 메시지를 보냈다. ‘내 아내와 그 패거리는 당신들 마음대로 처리해도 좋다. 단, 내가 죽을 때까지는 기다려달라‘는 것이었다.
장칭과 사인방이 수감되자 칭링은 기뻤다. 그녀는 흥분하여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은 이 요사스러운 여자에게 지나치게 인정을 베풀고 있어! 글쎄 그 여자가 날씨가 너무 춥다면서 가발을 되돌려달라고 요청했다지 뭐니!" 사인방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던 1980년, 칭링은 안나 왕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장칭이 저지른 최악의 악행은 모든 일이 남편 마오쩌둥의지시였다고 주장하여 그의 명예를 더럽힌 것이라고 말했다. "정신 나간 여자 같으니라고!" 마오쩌둥의 부주석은 소리쳤다.  - P368

그해 6월 25일, 김일성이 이끄는 북한군이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지원 아래 남한을 침공했다.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틀 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타이완에 대한 ‘불개입‘ 방침을 뒤집고 타이완 방어에 뛰어들었다.
이로써 타이완의 미래가 보장되었다. 미국의 원조가 도착하기 시작하면서 장제스는 위기를 넘겼다. 메이링은 한없이 고양되었다. 타이완의 날씨("끔찍해, 지독스럽게 덥고 후텁지근하고")와 피부병("땀띠랑 두드러기가 잔뜩생겼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생기가 넘쳤다. "새로운 기획을 추진하고사업을 확장할 생각에 머릿속이 바빠", "올해 [1951년]가 가기 전에 본토를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 - P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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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장제스를 대체하고자 하는 그에게 공산당의 등장은 하늘이 주신 기회였다. ‘최고‘가 되고자 하는 자라면 누구든 그것이 스탈린의 손에 달렸으며, 그의 총애를 얻기 위해서는 중국공산당을 통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장쉐량은 공산당과 접선하여 그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식량과 의복을제공했고, 그들과 함께 장제스를 끌어내릴 계획을 모의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장쉐량이 계속 공산당군을 돕게 하기 위해서 둘의 내통을 장려했다. 마오쩌둥은 한발 더 나아가서 장제스를 없애버리라고 그를 부추겼다. 장쉐량은 자신이 장제스를 대체하도록 소련이 후원하리라고 믿게 되었다. 이러한 착각 속에서 그는 쿠데타 계획을 꾸몄고, 쿠데타를 일으키기만 하면 소련이 그에 대한 지지를 선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장쉐량은 장제스를 시안으로 꾀어냈다. 휘하의 병사들이 고향 만주로돌아가 일본군과 맞서 싸우고 싶다는 이유로 산시 성의 공산당과 싸우라는 그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으니, 시안으로 와서 직접 그들을 설득해달라는 것이었다. 장제스는 요청에 응하여 1936년 12월 초 시안으로 향했다.
12월 12일 새벽, 일과인 아침 운동을 막 끝내고 옷을 갈아입고 있던 장제스는 총소리를 들었다. 400명 남짓한 장쉐량의 병사들이 그의 막사를 공격하고 있었다. 경호실장을 포함하여 장제스의 경호원 다수가 사망했다.
장제스는 가까스로 뒤편의 야산으로 탈출해 어느 동굴에 몸을 숨겼다. 혹한의 날씨에 신발도 양말도 없이 잠옷 셔츠 차림인 채였다. 요행히 살아남았지만, 그는 곧 수색대에게 붙잡혔다. 장쉐량은 자신이 일을 벌인 이유는장제스에게 일본과 싸우라고 압박하기 위함이었다고 공식 선포했다. 그는 난징에 전신을 보내서 자신의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요구 사항 1번은 "난징 국민 정부의 개편"이었다. 마오쩌둥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그는 중국공산당과 소련이 당연히 자신에게 새 정부의 수장직을 제의하리라고 생각했다. - P259

사실 장쉐량에게 장제스를 풀어달라고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장제스를구금하고 이틀 뒤인 12월 14일, 장쉐량은 자신이 재앙적인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고, 장제스를 석방하고 그와 함께 난징으로 갈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바로 그날, 소련은 가장 수위 높은 표현을 동원해서 장쉐량의행위를 비난했고, 그가 일본을 돕고 있다고 규탄하면서 단호히 장제스에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중국 여론이 장제스를 거의 전적으로 지지한다는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장제스의 군대가 지금 이 순간 중국 북부의 쑤이위안 성(현재 내몽골자치구의 일부/옮긴이)을 잠식해오고 있는 일본에 맞서서 완강히 항전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들이 보기에 장제스는 항일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강경파였고, 그의 몰락은 일본의 침략만 수월하게만들 터였다. 장쉐량이 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장제스의 부재로 국무총리 대행이 된 쿵샹시는 중국 전역의 영향력 있는 인물들과 접촉해서 그들의 도움을 구했고, 그중 대부분에게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끝내 협력하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은 칭링이었다. 쿵샹시가 그녀에게 연락해서 지원을 요청하자, 그녀는 장제스가 억류되어서 아주 기쁘며, 장쉐량의 행동은 전적으로 옳다고 말했다. "내가 그 사람이라도 똑같이 행동했을 겁니다. 아니, 나라면 그보다 더했겠지요!" 그러나 소련의 화를 살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녀는 이러한 감상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지는 않았다.
쿵샹시는 스탈린에게 전언을 보내서 중국공산당이 쿠데타와 연관되어있다는 "소문이 있다"면서, "만약 장제스의 목숨이 위태로워진다면 온 나라의 분노가 중국공산당에서 소비에트 연합을 향해서 번져갈 것"이라고전했다. 그는 이런 상황이 중국이 소련에 맞서서 일본과 손을 잡는 결과로이어질 수 있음을 강력히 시사했다. 스탈린은 장쉐량에 대한 비난 수위를 높였고, 중국공산당에게 장제스가 확실히 석방될 수 있도록 도우라고 지시했다. - P262

안전을 보장받은 이상, 장쉐량은 포로를 풀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장애물은 단 하나였다. 공산당이 장제스에게 자신들의 특사와 대화하라고 요구한 것이었다. 그 특사는 훗날 외교 전문가로 명성을 떨치게 되는 저우언라이로, 얼마 전부터 시안에 머무르고 있었다. 만남이 성사되기 전에는 시안을 떠날 수 없다고 장쉐량이 일러주었음에도, 장제스는 특사와의 대화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장제스의 경호단과 장쉐량 휘하 군대에는 이미 공산당 세력이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장제스가 저우언라이를 만나는 일은 요즘으로 치면 미국의 대통령이 악명 높은 테러집단의 대표를 접견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날, 저우언라이는 장제스의 침실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방금 도착한 전갈을 가지고 있었다.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가 귀국할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소련은 이것이 장제스와의 타협을 이끌어낼 유일한 수단임을 알았다.
장제스와 저우언라이의 회담은 짧았다. 장제스가 건넨 말은 "난징으로와서 직접 교섭하자"가 전부였다. 그러나 이 말은 공산당의 위상을 바꾸어놓았다. 이때부터,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박멸해야 하는 도적떼가 아니라 합법적이고 중요한 정당으로 대우받았다. 그에 걸맞게 교섭이 뒤따랐고,
몇 개월 지나지 않아서 일본과의 전쟁이 발발하자 두 정당은 동등한 동지로서 ‘통일전선‘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전쟁 중에 장제스는 공산당에 많은 것들을 양보했다. 덕분에 공산당군은 괄목할 만큼 성장했고, 항일 전쟁이 끝난 후에는 장제스와 맞붙어 승리를 거둘 정도가 되어 있었다. 아들장징궈를 되찾아오고자 하는 절박한 마음 때문에 장제스는 스탈린과 마오가 합심하여 벌일 수 있는 일을 과소평가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장제스는 아들을 위해서 막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지만, 그를 스탈린의 마수에서 구해내는 데에는 성공했다. 인질 장징궈는 1937년 3월 석방되어 가족과 함께 소련에서 중국으로 돌아왔다. 강제수용소에서의 중노동을 비롯하여 12년간 무수한 시련을 견딘 후였다. - P266

그녀는 장쉐량이 자신에게그녀의 몫이아부한 내용, 즉 그가 그녀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장제스를 풀어주었다는말을 세세히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나름의 결론을 내리는 것도 주저하지않았다. "도널드 씨가 주춧돌을 놓고 쯔원 오라버니가 벽을 올렸다면, 지붕을 씌워야 한 것은 나였다."
장제스는 아내의 글을 자신의 진술과 묶어서 소책자로 발간했다. 동료들을 향한 그녀의 비난에 승인 도장을 찍어준 셈이었다. 부부는 이 소책자로 사실상 쑹씨 가족을 제외한 장제스의 모든 동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화를 돋우는 데에 성공했다. 사람들은 메이링에 대해서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어쨌든 그녀는 아내로서 남편의 안전이 최우선이었고, 악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제스의 행동은 용서할 수 없었다. 국민당과 중국의 지도자로서, 장쉐량에게 강경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난징 국민 정부로서는 유일한 길이었음을 그는 알아야 마땅했다. 천리푸와 같은 측근들은이후 수십 년간 이 일을 두고 불평했다. 장제스의 가장 큰 손실은 그의 옛‘동무‘ 다이지타오와 소원해진 것이었다. 장제스는 다이지타오의 사생아 웨이궈를 입양해서 둘째 아들로 삼았고, 다이지타오는 오랫동안 장제스에게 수많은 귀중한 조언들을 솔직하게 건네왔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 그는 강경한 대처를 주장한 주요 인물로서, 메이링의 분노를 샀다. 장제스의 의심을 감지하자. 다이지타오는 다른 이들처럼 입을 굳게 다물었다. 본래부터 의지할 친구와 조언가가 몇 없던 장제스에게 남은 이들의 수는 더욱 줄어들었다. 이미 충분하지 않았던 충성심도 더욱 옅어졌다. 일본의 위협이 사라지면, 많은 동료들이 그를 등지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위기를 극복한 것이 자신의 덕이라는 메이링의 생각은 옳았다. 분명 그녀가 시안으로 가지 않았다면 장쉐량은 장제스 편에 서도 자신이 안전하리라고는 확신하지 못했을 것이며, 따라서 장제스를 풀어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난징과 시안 간의 전쟁이 뒤따랐을 것이고, 장제스는 난징국민당군의 포탄에 맞든지 아니면 실제로 장제스를 죽일 생각도 했던 장쉐량, 혹은 공산당에게 살해당했을 것이다(저우언라이는 공산당 보안기관전문가들과 함께 시안에 있었다. 장쉐량이 장제스를 죽이는 것을 ‘돕기‘
위해서였다). 중국은 혼란스러운 내전에 빠졌을 것이고, 이는 침략자 일본에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절호의 기회였을 것이다. 메이링이 남편을 구하면서 조국도 구했다고 할 수 있는 셈이었다. - P269

난징에서 충칭으로 정부를 이전하는 작업은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일본군의 끊임없는 폭격 속에 공무원, 의료진, 교사와 학생들을 비롯한 수십만 명의 사람들은 각자의 소중한 장비, 기기, 서류들을 침착하게 상자에답은 다음 2,000여 킬로미터를 행군했다. 포장이 끝난 물품들은 꼭 필요한경우 (귀한) 화물차에 실렸고 수레가 있으면 수레에 실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인부들이 지고 날랐다. 기계들은 나무 굴림대를 놓고 사람이 끌어서배에 실은 뒤에 양쯔 강 상류로 운반했다. 국립중앙대학교에서는 7톤 무게의 장비를 옮겨야 했는데, 기중기가 없었다. 학생들은 맨손으로 이 장비를 한 발짝 두 발짝 옮겨서 배에 실었다. 짐을 실은 배들은 위태로운 양쯔강의 협곡을 지나야 했다. 양옆에 우뚝 선 절벽 때문에 물길이 좁아지면서거세게 요동쳤고, 하늘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물살은 강에 잠긴 바위에 부닥쳐 소용돌이를 이루면서 굽이치고 솟아올랐다. 몇몇 지점에서는배를 끄는 인부들이 몸을 수그린 채 한쪽 어깨에 줄을 단단히 감아 걸고초인적인 힘으로 배를 여울에서 끌어내야 했다. 힘을 모아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서, 인부들은 거친 목소리로 일제히 끙끙대며 같은 음으로 구호를 외쳤다.
이런 방식으로 국립중앙대학교는 옮길 수 있는 모든 소유물을 운반하는 데에 성공했다. 방대한 양의 도서관 자료도, 해부학 수업을 위한 20여구의 시신들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국립중앙대학교 산하의 농업대학은 보유하고 있던 동물을 종(種)마다 한 마리씩 배에 실어서 운반했고, 학생들은 이 배를 노아의 방주라고 불렀다. 나머지 가축들은 유목민들이 하는 것처럼 교직원들이 육로로 몰아서 이동시켰다. 이동은 1년이나 계속되었다. 네덜란드와 미국에서 들여온 귀중한 소떼가 특유의 느긋한 속도로 움직였고, 때로는 등에 대나무 우리를 지고 닭과 오리를 운반하는 일을 성내며 거부했기 때문이다. 고된 여정의 끝에 짐승들은 한 마리도 빠짐없이 충칭에 도착했고, 오히려 도중에 태어난 송아지 한 마리가 추가되었다.
1,000명이 넘는 학생과 교사들이 제각기 충칭에 도착하자, 안락한 숙소와 교실이 그들을 맞이했다. 모두 산의 절벽을 파서 만든 곳들이었다. 새로운 교정은 비행기를 타고 먼저 충칭에 도착한 공학 교수들의 감독 아래 1,800명의 인부들에 의해서 28일 만에 완공된 곳이었다.
전쟁 때문에 엄청난 격변과 궁핍에 맞닥뜨렸음에도 사람들은 의연하게 견뎠고, 항전하겠다는 장제스의 결정을 지지했다. 장제스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길지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지만, 그는 ‘적보다 더오래 버티기‘를 자신의 전략으로 삼았다. 중국은 땅이 광활하고 길이 나지않은 산악 지대도 있기 때문에 일본이 중국 전체를 점령하는 일은 불가능한 반면, 장제스가 후퇴하여 버티고 있을 공간은 충분했다. 맹렬한 민족주의 정서가 그를 지탱했다. 그의 첫 번째 아내이자 장징궈의 어머니인 마오푸메이의 사망 역시 그를 격분하게 했다. 그녀는 1939년 12월 일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 - P275

이러한 비타협적인 자세 덕에 장제스는 항일 전쟁 시기에 엄청난 위신을얻게 되었다. 거국적 단결의 기치 아래에 단결하여 일본과 싸울 수 있도록모든성들은 자체 병력의 지휘권을 그에게 넘겼다. 장제스가 명실공히 중국을 통일하는 데에 가장 가까웠던 때가 바로 이 시기였다. 그의 통제 바같에 있는 유일한 세력은 공산당군이었다. 공산당군은 별도의 지휘 체계를 유지했고, 장제스에게서는 명령을 받는 형식만 취했다. 이런 형식이 가능했던 것은 스탈린의 덕이었다. 스탈린은 전면적인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장제스와 조약을 맺었고, 문자 그대로 장제스의 유일한 무기 공급원이 되었다. 장제스가 수용한 또 하나의 양해 사항은 공산당군이 최전선에서 싸우지 않고 일본군 후방에서 게릴라전만 벌이는 것이었다. 이러한특혜로 말미암아 중국공산당의 미래는 하늘과 땅만큼 달라졌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장제스에게 도전하는 다른 이들의 군대는 모두 일본군에의해서 전멸된 상태였다. 그리하여 마오쩌둥은 총통의 유일한 경쟁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 P277

사람들은 세부적인 내용까지는 몰라도, 권력의 중심에서 엄청난 부패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다. ‘국난을 이용해서 재산을 축적한다(發國難財)‘라는 신조어까지 생길 정도였다. 쿵샹시 가족은 끊임없이 언론, 대중, 국민당 고위층, 그리고 미국 정부의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장제스는 동서 쿵샹시를 계속 자신의 ‘재정 부문 차르‘로 두었고, 어떠한 조치도 취하기를 거부했다. 쿵샹시는 중화민국의 재정이 사실상 모든 경제적 기반으로부터 단절된 상태에서도 극심한 전쟁의 압박을 버티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전쟁을 지속하면서 통화 유통을 유지하는 기적을 이루어냈다"고 자평했는데, 이는 타당한 말이었다.
쿵샹시가 회고담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의 주된 비결은 "토지세를 지방세가 아닌 국세로 만든 것이었다. 그 결과 "토지세 수입이 중앙 정부 지출의 50퍼센트 이상을 충당했다." 쿵샹시가 전통적으로 지방 정부의 몫이던 수입을 빼앗아서 자신의 가족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중앙 정부의 국고로 돌려놓자, 많은 성의 지도자들이 장제스 정권을 원수처럼 여겼다. 쿵샹시는 그들의 항의를 가볍게 일축했다. "물론 몇몇 성들은 다른 데보다 다루기 어려웠지. 그들의 사리사욕 또는 단순한 무지 때문이었다네." 그러나 실제로는 앙심을 품은 많은 적들이 훗날 비밀리에 공산당을 도왔고, 결국 장제스를 끌어내렸다.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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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엔젤의 미니밴은 지금 막 도착했다.
"이제 왔군."
그는 손을 비볐다.
최근 그의 분노는 종종 심술궂게 좋은 기분으로 나타나곤 했다. 이 땅에 머물 시간이 점점 줄어들수록 자신이 천하무적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만사가 자신의 계획대로 잘 따라주기만 한다면야. 리틀 엔젤이 대학에 가서 그 유럽 책들을 전부 읽으며 무어라 했더라?
"타인은 지옥이야."
약은 문제없이 들었다. 하지만 남들보다 뛰어난 그의 능력, 모든 사람과 모든 것, 심지어 죽음까지도 능가하는 그의 능력은 초능력이었다. ‘죽음 네까짓 게 뭐란 말이냐‘
벌레와 병아리나 죽는 거지, 천사는 죽지 않는다고.
골수암? 지난번에 약초와 미네랄을 발견했다고. 그걸 복용하면 산호초처럼 뼈가 다시 자라난다고! 비타민 C, 비타민D, 비타민 A도 있어. 차가버섯 차를 마시면 돼. 장내 종양? 강황을 먹으면 돼! 셀레늄도 있고. 저런, 저런.
"나는 천하무적이야." 그는 혼잣말을 했다. "나는 천하무적이아니야" - P93

그는 보이지 않는 인터뷰어에게 말했다.
그의 어머니는 100세 가까이 살 수 있었다. 그래서 그도 최소한 그때까지는 살겠거니 싶었다. 마음속으로는 아직도 어린애였다. 웃고 싶고, 좋은 책을 읽고 싶고, 모험을 떠나고 싶고, 페를라가 만든 알본디가스 수프를 한 번 더 먹고 싶었다. 대학에 갔다면 좋았을 텐데. 파리에 가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카리브 해협을 일주하는 크루즈를 탈걸 그랬어. 내심 스노클링을 해보고 싶기도 했다. 일단 건강해지면 하러 가야지. 그는 시애틀에 가볼 생각도 했다. 막냇동생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봐야겠어. 그러다 불현듯, 자기가 샌디에이고의 북쪽인 라호이아에도 안 가봤다는게 떠올랐다. 그곳에서는 부자 미국 놈들이 다 모여서 선탠하고다이아몬드를 사대지. 그 해변을 걸어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왜 성게와 조개껍데기를 줍지 않았지? 갑자기 성게가 꼭 한번가져봤어야 할 좋은 물건처럼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디즈니랜드에 가보는 것도 까먹었군. 그는 충격을 받은 채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너무 바빠서 동물원에 가볼 새도 없었다니. 자기 이마라도 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사자나 호랑이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보고 싶은 건 코뿔소였다. 미니에게 코뿔소 모형을 좋은 놈으로 하나 사달라고 해야겠다. 그러자 그걸 또 어디다 둬야하나 고민이 되었다. 침대 옆에 둬야지. 딱 맞는 장소 아닌가. 그는 코뿔소였다. 그러니 죽음이란 놈을 들이받아 확 처박아버릴것이다. 랄로는 문신이 있지. 나도 하나 새겨보면 어떨까. 건강이좋아지면 말이다. - P104

"나의 엔젤, 무척 섹시하네."
페를라는 사람들이 다 모인 곳에서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온몸의 뼈가 죄다 석회처럼 굳어가고 다리가 밤낮으로 아픈데 섹시하기란 참 힘든 법이다. 게다가 기저귀까지 차고있지 않나. 그의 용감한 딸은 종종 이렇게 묻곤 했다.
"아빠, 아직 오줌 안쌌죠?"
예수님 제기랄. ‘죄송합니다. 주님.‘ 하지만 어쩌다가 그는 딸보다 더 작아져버렸을까?

내 자식들보다 더 키가 커지기

빅 엔젤은 언제나 가족의 지도자였다. 돈 안토니오가 가족들을 라파스에 굶어 죽게 내버려두었을 때, 형제자매들은 빅 엔젤을 아버지처럼 따랐다. 그랬던 빅 엔젤이 이제는 자기 딸의 아기 노릇을 하고 있다니. 지금은 딸애가 그의 가랑이에다 베이비파우더를 바르고 있다. 이 상황이 가족들이 전부 모였을 때 그가즐겨 하던 야한 농담같이 느껴졌다.
"아빠, 괜찮아요?"
그녀가 물었다.
"내가 괜찮아질 날이 언제 또 오겠냐."
그는 저 먼 곳을 응시했다. 미니는 아버지 마음속에서 아주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대체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나는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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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에!"
그가 자녀들에게 분명히 선언한 메시지가 두 가지 있었다. 시간을 잘 지켜라. 그리고 변명을 하지 마라. 그런데 지금 그는 늦어서 무슨 알리바이를 댈지 수십 가지 변명을 만들어내고 있지않은가. 자기 생일 전날 엄마를 묻으러 가게 되다니. 그의 마지막 생일이 될 터였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그는 명령을 선포하여 전국에 흩어져 있는 가족을 불러들였다. 이 생일은 아무도잊지 못할 완벽한 파티가 되리라.
"너는 좋은 애다."
빅 엔젤은 가만히 있다가 말하고는 미니의 손을 토닥였다.
그리고 자신의 거대한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눈을 가늘게떠야만 했다. 눈까지 맛이 가고 있구나. 참 잘됐군. 시력이 뛰어나다는 걸 늘 자랑스럽게 생각했는데. 그는 시간이 흘러가도록 그냥 놔두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아직 안경을 쓸 때는 아니었다.
이만하면 됐지.
"라디오 꺼라!"
그가 쏘아붙였지만, 아들은 대꾸했다.
"라디오 안 켰는데요, 아부지."
"그럼 라디오 켜라!"
랄로는 라디오를 켰다.
"다시 꺼!" - P45

그는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하지만 그만큼 "난 이제 죽을 때가 됐어"라는 말도 많이 했다.
그는 이미 신부에게 고백했다. 소변에 다시 선혈이 나오기 시작하면 곧 쓰러지게 될 거라고 나겔 의사가 말했을 때, 곧바로 고해성사를 했다. 참으로 묘하게도, 그 순간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는 의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의사 이름은 메르세데스 조이 나겔이지. 그러고 보니 메르세데스 벤츠를 한 대 샀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나도 기쁨을 느꼈을 테니까. 의사는 엑스레이 사진 속 그의 복부 안에 주렁주렁 열린 죽음의 모습과 폐에 생긴 두 개의 어두운 반점을 보여주었다. 그는 그 진료실에 홀로 앉아 더없이 엄숙한 전사의 얼굴을 꼿꼿이 들고 의사를 응시했다.
"얼마나 남았습니까?"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손을 한 번 쓰다듬었다.
"얼마 안 남았습니다. 몇 주 정도요."
"나 사탕 먹어도 됩니까?"
그가 묻자 의사는 유리병을 열어주었다. 그는 체리 맛을 좋아했다. - P51

리틀엔젤은 착륙했다.
"막냇동생이 집에 왔다고!" 그가 혼잣말을 했다.
빅 엔젤의 배다른 동생인 그는 자신이 늦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나이 든 지 한참 되었는데도, 모두 그를 아직도 꼬마로 보았다. 하긴,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도 했다. 그는 지구상에서가장 나이를 많이 먹은 스물여덟 살짜리 인간이다. 28세로 지낸지 그럭저럭 20년쯤 되었다.
가모장의 장례식에는 빠질 수 없는 법이다. 게다가 늦어서도안 되었다. 그분은 리틀 엔젤의 엄마가 아니었다. 그는 종종 비딱하고 소심하게 그 점을 떠올렸다. 리틀 엔젤은 이 가족의 각주같은 존재였다. 모습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었을 때, 모든 이들이마음먹고 받아들여야 할 세부 사항 같은 존재 말이다. 왕 할아버지 돈 안토니오를 뺏어간 미국 여자, 바로 이 가족의 전설에 낙인을 찍은 미국 여자의 아들. 가족들은 심지어 그의 어머니가 일찍 죽은 것도 은근히 개탄스러워했다. 마마 아메리카가 저세상에서 미국 여자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할아버지를 몸싸움으로 뺏어 와야 하는데, 그 전에 선수를 쳐서 내세로 할아버지를 따라가다니. - P52

렌터카 센터에 도착했을 때 아직 아침 8시도 안 되었다는 걸깨닫고, 그는 갑자기 자신이 바보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안심도 되었다. 장례식에 못 갈 일은 없겠군. 마음속 깊이 상처받은 눈빛으로 자기를 쏘아보는 큰형의 타박을 받을 일도 없을 거다.
그는 빅 엔젤의 일정에 맞추고 있었다. 언제나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그 일정에 술에 취해 있을 때면, 빅 엔젤은 둘의 형제 관계를 두고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했다. 리틀 엔젤은 테킬라가 그에게 정말 잘맞는 술이라고 생각했다. 빅 엔젤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성스러움을 벗겨버리는 술이니까. 그래, 우리가 처음과 나중이라는 거지? 리틀 엔젤은 그 말의 속뜻을 모르지 않았다. 국경조차 뛰어넘는 형제자매라는 신비한 존재론에 대해서는 박사 학위를 받을수 있을 정도로 잘 알았다. 그는 어쨌든 미소를 지었다.
빅 엔젤은 의기소침해질 때마다 그들이 무슨 레슬링 태그 팀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렇게 선언하곤 했으니까.
"선수 입장! 몸무게 250파운드, 출신지 불명의 오메가!"
그러면 리틀 엔젤은 손을 들었고, 당황한 여자들과 아이들은 박수를 치곤 했다.
이 소리를 들을 때면 리틀 엔젤은 증인을 가진 기분이어서 내심 좋았다. 가족 중 그 누구도 자신의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쳇. 본 적도 없음은 물론이다. 그들의 아버지는 리틀 엔젤과 나머지 가족을 확실하게 갈라놓았으니까.
하지만 빅 엔젤은 리틀 엔젤을 보았다.  - P53

빅 엔젤은 리틀 엔젤을 자신의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이세상 속에서 고립된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리틀 엔젤은 몇 년 뒤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형이 ‘선수 입장‘ 선언을 외쳐댔을 때 그들은 후에 리처드 레인이 KTLA 방송국에 출연했을 때 소리치던 영어 표현도 공유했다. V 모양 안테나를 달아놓은 TV로 지지직대고 화질이 깨지는 방송을 같이 보다 고른 표현이었다.
"후아, 넬리! (대박 놀랍군!)"
더 디스트로이어가 블레시를 코너로 몰아붙여 무릎을 꿇고빌게 만들 때마다 레인은 이렇게 외치곤 했다.
그래서 빅 엔젤이 그를 ‘선수 입장‘이라는 말로 소개할 때, 리틀 엔젤은 가끔 이렇게 외치곤 했다.
"후아 넬리!"
그러면 나머지 가족들은 멀뚱히 쳐다볼 뿐이었다. - P56

빅 엔젤은 자기 모습이 훌륭해 보인다고 여겼다. 그 옛날 토킹헤드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너무 큰 정장을 입은 남자처럼 보인다고 생각하는 건 미니밖에 없었다.
가족들은 모두 자리를 잡고 앉아서 TV 게임 쇼를 보며 살충제를 지지직 뿌려대는 소리가 난다고 불평하고 있었다. 다들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든 채였다.
그는 이제는 가느다란 갈대같이 변해버린 목소리로 선언했다.
"엄마한테 내가 이런 꼴을 보일 수야 없지."
그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바짓단 아래로 슬쩍 보이는 그의발목은 닭 뼈 같았다. 고통을 꾹 참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의자에서 힘겹게 일어났다. 온갖 노력을 하느라툴툴거리면서, 순전한 분노를 품고 미친놈처럼 씩 웃었다. 알루미늄 보행기를 쓰는 것도 거부했다. 사람들이 자기가 보행기를잡고 걷는 모습을 보고 무어라 생각할지 상상만 해도 너무 아팠다. 다들 그쪽으로 몸을 숙이며 도와주려고 하다가도 혹시나 그몸에 손이 닿을까 조심하고 있었다. 그의 바지와 하얀 셔츠는 부풀어 오른 텐트처럼 텅 빈 채로 앙상한 몸을 감쌌다. 그는 눈물을 훔쳐내고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어머니의 병실로 걸어갔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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