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장제스를 대체하고자 하는 그에게 공산당의 등장은 하늘이 주신 기회였다. ‘최고‘가 되고자 하는 자라면 누구든 그것이 스탈린의 손에 달렸으며, 그의 총애를 얻기 위해서는 중국공산당을 통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장쉐량은 공산당과 접선하여 그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식량과 의복을제공했고, 그들과 함께 장제스를 끌어내릴 계획을 모의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장쉐량이 계속 공산당군을 돕게 하기 위해서 둘의 내통을 장려했다. 마오쩌둥은 한발 더 나아가서 장제스를 없애버리라고 그를 부추겼다. 장쉐량은 자신이 장제스를 대체하도록 소련이 후원하리라고 믿게 되었다. 이러한 착각 속에서 그는 쿠데타 계획을 꾸몄고, 쿠데타를 일으키기만 하면 소련이 그에 대한 지지를 선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장쉐량은 장제스를 시안으로 꾀어냈다. 휘하의 병사들이 고향 만주로돌아가 일본군과 맞서 싸우고 싶다는 이유로 산시 성의 공산당과 싸우라는 그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으니, 시안으로 와서 직접 그들을 설득해달라는 것이었다. 장제스는 요청에 응하여 1936년 12월 초 시안으로 향했다. 12월 12일 새벽, 일과인 아침 운동을 막 끝내고 옷을 갈아입고 있던 장제스는 총소리를 들었다. 400명 남짓한 장쉐량의 병사들이 그의 막사를 공격하고 있었다. 경호실장을 포함하여 장제스의 경호원 다수가 사망했다. 장제스는 가까스로 뒤편의 야산으로 탈출해 어느 동굴에 몸을 숨겼다. 혹한의 날씨에 신발도 양말도 없이 잠옷 셔츠 차림인 채였다. 요행히 살아남았지만, 그는 곧 수색대에게 붙잡혔다. 장쉐량은 자신이 일을 벌인 이유는장제스에게 일본과 싸우라고 압박하기 위함이었다고 공식 선포했다. 그는 난징에 전신을 보내서 자신의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요구 사항 1번은 "난징 국민 정부의 개편"이었다. 마오쩌둥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그는 중국공산당과 소련이 당연히 자신에게 새 정부의 수장직을 제의하리라고 생각했다. - P259
사실 장쉐량에게 장제스를 풀어달라고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장제스를구금하고 이틀 뒤인 12월 14일, 장쉐량은 자신이 재앙적인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고, 장제스를 석방하고 그와 함께 난징으로 갈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바로 그날, 소련은 가장 수위 높은 표현을 동원해서 장쉐량의행위를 비난했고, 그가 일본을 돕고 있다고 규탄하면서 단호히 장제스에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중국 여론이 장제스를 거의 전적으로 지지한다는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장제스의 군대가 지금 이 순간 중국 북부의 쑤이위안 성(현재 내몽골자치구의 일부/옮긴이)을 잠식해오고 있는 일본에 맞서서 완강히 항전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들이 보기에 장제스는 항일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강경파였고, 그의 몰락은 일본의 침략만 수월하게만들 터였다. 장쉐량이 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장제스의 부재로 국무총리 대행이 된 쿵샹시는 중국 전역의 영향력 있는 인물들과 접촉해서 그들의 도움을 구했고, 그중 대부분에게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끝내 협력하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은 칭링이었다. 쿵샹시가 그녀에게 연락해서 지원을 요청하자, 그녀는 장제스가 억류되어서 아주 기쁘며, 장쉐량의 행동은 전적으로 옳다고 말했다. "내가 그 사람이라도 똑같이 행동했을 겁니다. 아니, 나라면 그보다 더했겠지요!" 그러나 소련의 화를 살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녀는 이러한 감상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지는 않았다. 쿵샹시는 스탈린에게 전언을 보내서 중국공산당이 쿠데타와 연관되어있다는 "소문이 있다"면서, "만약 장제스의 목숨이 위태로워진다면 온 나라의 분노가 중국공산당에서 소비에트 연합을 향해서 번져갈 것"이라고전했다. 그는 이런 상황이 중국이 소련에 맞서서 일본과 손을 잡는 결과로이어질 수 있음을 강력히 시사했다. 스탈린은 장쉐량에 대한 비난 수위를 높였고, 중국공산당에게 장제스가 확실히 석방될 수 있도록 도우라고 지시했다. - P262
안전을 보장받은 이상, 장쉐량은 포로를 풀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장애물은 단 하나였다. 공산당이 장제스에게 자신들의 특사와 대화하라고 요구한 것이었다. 그 특사는 훗날 외교 전문가로 명성을 떨치게 되는 저우언라이로, 얼마 전부터 시안에 머무르고 있었다. 만남이 성사되기 전에는 시안을 떠날 수 없다고 장쉐량이 일러주었음에도, 장제스는 특사와의 대화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장제스의 경호단과 장쉐량 휘하 군대에는 이미 공산당 세력이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장제스가 저우언라이를 만나는 일은 요즘으로 치면 미국의 대통령이 악명 높은 테러집단의 대표를 접견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날, 저우언라이는 장제스의 침실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방금 도착한 전갈을 가지고 있었다.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가 귀국할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소련은 이것이 장제스와의 타협을 이끌어낼 유일한 수단임을 알았다. 장제스와 저우언라이의 회담은 짧았다. 장제스가 건넨 말은 "난징으로와서 직접 교섭하자"가 전부였다. 그러나 이 말은 공산당의 위상을 바꾸어놓았다. 이때부터,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박멸해야 하는 도적떼가 아니라 합법적이고 중요한 정당으로 대우받았다. 그에 걸맞게 교섭이 뒤따랐고, 몇 개월 지나지 않아서 일본과의 전쟁이 발발하자 두 정당은 동등한 동지로서 ‘통일전선‘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전쟁 중에 장제스는 공산당에 많은 것들을 양보했다. 덕분에 공산당군은 괄목할 만큼 성장했고, 항일 전쟁이 끝난 후에는 장제스와 맞붙어 승리를 거둘 정도가 되어 있었다. 아들장징궈를 되찾아오고자 하는 절박한 마음 때문에 장제스는 스탈린과 마오가 합심하여 벌일 수 있는 일을 과소평가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장제스는 아들을 위해서 막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지만, 그를 스탈린의 마수에서 구해내는 데에는 성공했다. 인질 장징궈는 1937년 3월 석방되어 가족과 함께 소련에서 중국으로 돌아왔다. 강제수용소에서의 중노동을 비롯하여 12년간 무수한 시련을 견딘 후였다. - P266
그녀는 장쉐량이 자신에게그녀의 몫이아부한 내용, 즉 그가 그녀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장제스를 풀어주었다는말을 세세히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나름의 결론을 내리는 것도 주저하지않았다. "도널드 씨가 주춧돌을 놓고 쯔원 오라버니가 벽을 올렸다면, 지붕을 씌워야 한 것은 나였다." 장제스는 아내의 글을 자신의 진술과 묶어서 소책자로 발간했다. 동료들을 향한 그녀의 비난에 승인 도장을 찍어준 셈이었다. 부부는 이 소책자로 사실상 쑹씨 가족을 제외한 장제스의 모든 동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화를 돋우는 데에 성공했다. 사람들은 메이링에 대해서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어쨌든 그녀는 아내로서 남편의 안전이 최우선이었고, 악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제스의 행동은 용서할 수 없었다. 국민당과 중국의 지도자로서, 장쉐량에게 강경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난징 국민 정부로서는 유일한 길이었음을 그는 알아야 마땅했다. 천리푸와 같은 측근들은이후 수십 년간 이 일을 두고 불평했다. 장제스의 가장 큰 손실은 그의 옛‘동무‘ 다이지타오와 소원해진 것이었다. 장제스는 다이지타오의 사생아 웨이궈를 입양해서 둘째 아들로 삼았고, 다이지타오는 오랫동안 장제스에게 수많은 귀중한 조언들을 솔직하게 건네왔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 그는 강경한 대처를 주장한 주요 인물로서, 메이링의 분노를 샀다. 장제스의 의심을 감지하자. 다이지타오는 다른 이들처럼 입을 굳게 다물었다. 본래부터 의지할 친구와 조언가가 몇 없던 장제스에게 남은 이들의 수는 더욱 줄어들었다. 이미 충분하지 않았던 충성심도 더욱 옅어졌다. 일본의 위협이 사라지면, 많은 동료들이 그를 등지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위기를 극복한 것이 자신의 덕이라는 메이링의 생각은 옳았다. 분명 그녀가 시안으로 가지 않았다면 장쉐량은 장제스 편에 서도 자신이 안전하리라고는 확신하지 못했을 것이며, 따라서 장제스를 풀어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난징과 시안 간의 전쟁이 뒤따랐을 것이고, 장제스는 난징국민당군의 포탄에 맞든지 아니면 실제로 장제스를 죽일 생각도 했던 장쉐량, 혹은 공산당에게 살해당했을 것이다(저우언라이는 공산당 보안기관전문가들과 함께 시안에 있었다. 장쉐량이 장제스를 죽이는 것을 ‘돕기‘ 위해서였다). 중국은 혼란스러운 내전에 빠졌을 것이고, 이는 침략자 일본에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절호의 기회였을 것이다. 메이링이 남편을 구하면서 조국도 구했다고 할 수 있는 셈이었다. - P269
난징에서 충칭으로 정부를 이전하는 작업은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일본군의 끊임없는 폭격 속에 공무원, 의료진, 교사와 학생들을 비롯한 수십만 명의 사람들은 각자의 소중한 장비, 기기, 서류들을 침착하게 상자에답은 다음 2,000여 킬로미터를 행군했다. 포장이 끝난 물품들은 꼭 필요한경우 (귀한) 화물차에 실렸고 수레가 있으면 수레에 실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인부들이 지고 날랐다. 기계들은 나무 굴림대를 놓고 사람이 끌어서배에 실은 뒤에 양쯔 강 상류로 운반했다. 국립중앙대학교에서는 7톤 무게의 장비를 옮겨야 했는데, 기중기가 없었다. 학생들은 맨손으로 이 장비를 한 발짝 두 발짝 옮겨서 배에 실었다. 짐을 실은 배들은 위태로운 양쯔강의 협곡을 지나야 했다. 양옆에 우뚝 선 절벽 때문에 물길이 좁아지면서거세게 요동쳤고, 하늘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물살은 강에 잠긴 바위에 부닥쳐 소용돌이를 이루면서 굽이치고 솟아올랐다. 몇몇 지점에서는배를 끄는 인부들이 몸을 수그린 채 한쪽 어깨에 줄을 단단히 감아 걸고초인적인 힘으로 배를 여울에서 끌어내야 했다. 힘을 모아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서, 인부들은 거친 목소리로 일제히 끙끙대며 같은 음으로 구호를 외쳤다. 이런 방식으로 국립중앙대학교는 옮길 수 있는 모든 소유물을 운반하는 데에 성공했다. 방대한 양의 도서관 자료도, 해부학 수업을 위한 20여구의 시신들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국립중앙대학교 산하의 농업대학은 보유하고 있던 동물을 종(種)마다 한 마리씩 배에 실어서 운반했고, 학생들은 이 배를 노아의 방주라고 불렀다. 나머지 가축들은 유목민들이 하는 것처럼 교직원들이 육로로 몰아서 이동시켰다. 이동은 1년이나 계속되었다. 네덜란드와 미국에서 들여온 귀중한 소떼가 특유의 느긋한 속도로 움직였고, 때로는 등에 대나무 우리를 지고 닭과 오리를 운반하는 일을 성내며 거부했기 때문이다. 고된 여정의 끝에 짐승들은 한 마리도 빠짐없이 충칭에 도착했고, 오히려 도중에 태어난 송아지 한 마리가 추가되었다. 1,000명이 넘는 학생과 교사들이 제각기 충칭에 도착하자, 안락한 숙소와 교실이 그들을 맞이했다. 모두 산의 절벽을 파서 만든 곳들이었다. 새로운 교정은 비행기를 타고 먼저 충칭에 도착한 공학 교수들의 감독 아래 1,800명의 인부들에 의해서 28일 만에 완공된 곳이었다. 전쟁 때문에 엄청난 격변과 궁핍에 맞닥뜨렸음에도 사람들은 의연하게 견뎠고, 항전하겠다는 장제스의 결정을 지지했다. 장제스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길지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지만, 그는 ‘적보다 더오래 버티기‘를 자신의 전략으로 삼았다. 중국은 땅이 광활하고 길이 나지않은 산악 지대도 있기 때문에 일본이 중국 전체를 점령하는 일은 불가능한 반면, 장제스가 후퇴하여 버티고 있을 공간은 충분했다. 맹렬한 민족주의 정서가 그를 지탱했다. 그의 첫 번째 아내이자 장징궈의 어머니인 마오푸메이의 사망 역시 그를 격분하게 했다. 그녀는 1939년 12월 일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 - P275
이러한 비타협적인 자세 덕에 장제스는 항일 전쟁 시기에 엄청난 위신을얻게 되었다. 거국적 단결의 기치 아래에 단결하여 일본과 싸울 수 있도록모든성들은 자체 병력의 지휘권을 그에게 넘겼다. 장제스가 명실공히 중국을 통일하는 데에 가장 가까웠던 때가 바로 이 시기였다. 그의 통제 바같에 있는 유일한 세력은 공산당군이었다. 공산당군은 별도의 지휘 체계를 유지했고, 장제스에게서는 명령을 받는 형식만 취했다. 이런 형식이 가능했던 것은 스탈린의 덕이었다. 스탈린은 전면적인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장제스와 조약을 맺었고, 문자 그대로 장제스의 유일한 무기 공급원이 되었다. 장제스가 수용한 또 하나의 양해 사항은 공산당군이 최전선에서 싸우지 않고 일본군 후방에서 게릴라전만 벌이는 것이었다. 이러한특혜로 말미암아 중국공산당의 미래는 하늘과 땅만큼 달라졌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장제스에게 도전하는 다른 이들의 군대는 모두 일본군에의해서 전멸된 상태였다. 그리하여 마오쩌둥은 총통의 유일한 경쟁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 P277
사람들은 세부적인 내용까지는 몰라도, 권력의 중심에서 엄청난 부패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다. ‘국난을 이용해서 재산을 축적한다(發國難財)‘라는 신조어까지 생길 정도였다. 쿵샹시 가족은 끊임없이 언론, 대중, 국민당 고위층, 그리고 미국 정부의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장제스는 동서 쿵샹시를 계속 자신의 ‘재정 부문 차르‘로 두었고, 어떠한 조치도 취하기를 거부했다. 쿵샹시는 중화민국의 재정이 사실상 모든 경제적 기반으로부터 단절된 상태에서도 극심한 전쟁의 압박을 버티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전쟁을 지속하면서 통화 유통을 유지하는 기적을 이루어냈다"고 자평했는데, 이는 타당한 말이었다. 쿵샹시가 회고담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의 주된 비결은 "토지세를 지방세가 아닌 국세로 만든 것이었다. 그 결과 "토지세 수입이 중앙 정부 지출의 50퍼센트 이상을 충당했다." 쿵샹시가 전통적으로 지방 정부의 몫이던 수입을 빼앗아서 자신의 가족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중앙 정부의 국고로 돌려놓자, 많은 성의 지도자들이 장제스 정권을 원수처럼 여겼다. 쿵샹시는 그들의 항의를 가볍게 일축했다. "물론 몇몇 성들은 다른 데보다 다루기 어려웠지. 그들의 사리사욕 또는 단순한 무지 때문이었다네." 그러나 실제로는 앙심을 품은 많은 적들이 훗날 비밀리에 공산당을 도왔고, 결국 장제스를 끌어내렸다.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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