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자연이 보내 준 최고의 사절단
새끼 암컷 코끼리는 태어난 지 한 달 되었지만 이미 나보다 더 무거웠다. 게다가 나보다 빠르고 활력이 넘쳤다. 새끼 코끼리 주리가 엄마 옆구리를 떠나 흙먼지와 건초를 흩날리며 몇 번인가 발을 헛디디기도 하면서, 마침내 작은 코를 내 카메라 앞에 들이밀었을 때 나는기쁨의 환호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내가 원한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으니까. - P11
나는 지금도 코끼리 주리를 찾아간다. 요즘 주리는 몸집이 많이 커졌으며 20 전에 비해 제멋대로 날뛰는 일은 줄었다. 우리는 이따금 함께 점심을 먹는다. 나는 주리의 우리 옆에 앉고, 주리는 우리 안을 한가로이 거닐면서 함께 이 야기를 나눈다. 이야기는 대부분 내가 한다. 몇 년 전 나는 얼굴 오른쪽에 커다랗게 붕대를 두른 채 주리의 우리에 들렀다. 주리가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더니 평소보다 조금 길게 내 얼굴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암이야." 내가 주리에게 말했다. "걱정할 건 없어. 다 떼어 냈어. 의사가 다 잘라 냈고 이제 난 멋진 흉터를 갖게 될 거야." 주리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코를 높이 쳐들었다. "알아, 알아. 너는 절대 암 같은 문제가 없겠지?" 주리는 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알았어, 설명해 줄게." - P25
그러나 코프 법칙에서 단 하나 가장 커다란 동인으로 손꼽을 만한 것이 있는데 이는 너무도 당연해서 오히려 종종 간과되곤 한다. "맨 꼭대기에는 늘 여유가 있어요." 진화생물학자 존 보너John Bonne가 예전에 내게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그의 지적에 따르면 작은 동물은 비슷한 생태적 지위에서 다른 많은 동물과 경쟁을 벌여야 한다. 그러나 자신이 속한 생물군계의 최상층에 오른 동물은 "경쟁에서 벗어날" 수 있다. 따라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은 동물이 점차 커진다. 게다가 크기가 커질 뿐 아니라 종도 달라진다. 생명체가 점점 커짐에 따라 물질과 에너지를 지배하는 보편 법칙이 생명을 유지하는 힘에 영향을 미친다. 저서 『왜 크기가 중요한가 Why Size Matters』에서 보너는 크기야말로 진화를 비롯한 생물학의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코끼리가 왜 우리 인류의 공통 조상을 확대해놓은 모습이 아니라, 코끼리처럼 생기게 되었는지 설명해 준다. 기다란 코 같은 돌연변이 덕분에 훨씬 적합한 형태를 갖추게 되어 몸집이커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커지는 몸집을 수용하기 위해 그러한 돌연변이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 P36
많은 생명체, 특히 포유류의 몸집은 진화로 인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커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 진화는 궁극적으로 몸집이 큰 동물을 멸종의 위기로 내몬다. 나는 이런 현상을 코프의 절벽 Cope‘s Cliff‘ 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몸집이 큰 동물일수록 매일매일 생존을 위해 더 많은 먹이와 물을 먹어야 하며 이로 인해 결핍의 시기에는 굶어 죽을 가능성이 커진다. 또 임신 기간도 길어지며 한 번에 한 마리 새끼만 낳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몸집이 작은 동물만큼 빠르게 수를 늘리지 못하는 것은 물론 개체 수를 그대로 유지하지도 못한다는 의미다. 그 결과, 변화하는 기후에 맞춰 신속하게 진화할수 없다. - P38
그러나 만일 좀비가 당신 팔뚝을 베어 물려는 순간 당신으로서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게다가 총에 남은 총알이 한 개뿐이라면, 그리고죽지 않은 사람 군단의 일원으로서 동료 인간에게 무엇을 해 줄 수있을지 잠시 생각해 본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코끼리의 세포 역시 바로 그렇게 행동한다. p53의 명령하에 돌연변이 세포는 싸우지 않는다. 이 세포는 악성 돌연변이의 불가피성을 인식하는 순간, 이른바 세포 자살apoptosis이라고 알려진 과정대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게다가 이 세포는 한 종류의 암에 대해서만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 p53 유전자는 코끼리에게 있는 모든 종류의 악성 돌연변이에 대응하여 세포가 이렇게 행동하도록 프로그램을 만든다. 이는 우리가 암이라고 일컫는 이상 증상 복합체에 대해 단일 치료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기존의 가정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발견이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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