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

헨리 키터리지는 오랫동안 이웃 마을에서 약사로 일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여름날 약국으로 이어지는 큰길로 들어서기전 마지막 구간의 가시덤불에서 야생 라즈베리가 송알송알 알이맺힐 때나, 매일 아침 하루도 빠짐없이 약국으로 차를 몰았다.
은퇴한 지금도 그는 여전히 일찍 일어나 예전에 그런 아침을 얼마나 좋아했던가 떠올렸다. 마치 세상이 혼자만의 비밀인 듯이,
발밑에서 타이어가 부드럽게 구르고 햇살이 이른 아침 안개를가르고 모습을 드러내는 동안 오른쪽으로는 만(灣)이, 그다음엔 키 크고 늘씬한 소나무들이 잠시 보였다. 코끝을 간질이던 솔숲 향기와 소금기 짙은 공기, 그리고 겨울이면 찬 공기에서 묻어나는 냄새를 그는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래서 그는 언제나 창문을 조금 열고 운전을 하곤 했다. - P10

 아직 사준기의 신체적 특징이 나타나진 않았지만 아들이 별안간 눈에 띄게 퉁명스러워진 참이어서 아들의 기분이 독기운처럼 공기 중에 퍼지고, 올리브도 크리스토퍼만큼이나 변하고 또 변덕스러워 보이던 때였다. 모자는 순식간에 격렬히 싸우다가도, 그 분노는 이내 무언의 친밀감처럼 둘을 감싸버려 영문을 알 길 없는 헨리만 멍하니 따돌림을 받는 기분이 되었다.
- P13

봄이 왔다. 낮이 길어지고 남은 눈이 녹아 도로가 질척했다.
개나리가 활짝 피어 쌀쌀한 공기에 노란 구름을 보태고, 진달래가 세상에 진홍빛 고개를 내밀었다. 헨리는 모든 것을 데니즈의 눈을 통해 그려보았고, 그녀에게는 아름다움이 폭력이리라 생각했다. - P43

 그녀는 예전의 소녀가 아니라 - 소녀로 머무는 소녀는 없다 - 어머니였고, 고단했다. 둥글던 뺨은 배가 부풀면서 동시에 꺼져버려 그녀를 짓누르는 삶의 중력이 벌써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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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들쥐들은 생후 4주부터 각기 다른사료를 먹기 시작했는데, 생후 15주가 되자 두 집단의 성장 곡선은 눈에 띄게 달라지기 시작하였고, 22주가 되자 완연한 차이가 드러났다.
부드러운 사료를 먹은 집단의 체중이 단단한 사료를 먹은 집단에 비해서서히 늘기 시작하여 평균 37 그램, 즉 6퍼센트가 더 나갔다. 복부 지방도 평균 30퍼센트 더 많아서 비만으로 분류되기에 충분했다. 부드럽게 처리된 사료 때문에 뚱뚱해진 것이다. 이 같은 차이의 원인은 소화에 드는 에너지 비용에 있었다. 식사를 할 때마다 들쥐들의 체온은높아졌는데, 부드러운 사료를 먹인 집단은 단단한 사료를 먹인 집단에비해 체온이 덜 올라갔다. 두 집단 간의 체온 차이는 식후 1시간 동안특히 두드러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위가 활발히 음식을 부수고위액을 분비하는 시간이다. 실험을 행한 과학자들은 부드러운 음식이비만을 초래한 것은 소화 비용이 덜 들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이 실험이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불로 익히는 것이 음식을 부드럽게 하고 부드러운 음식이 에너지를 많이 얻게 한다면, 인간도 음식을 날로 먹을 때보다 익혀서 먹을 때 더 많은 에너지를 얻을 것이다. 그 이유는 불에 익히면 젤라틴화 및 단백질 변성이 일어나기 때문이기도하지만 소화에 드는 에너지도 감소하기 때문이다.
- P107

익힌 음식이 날것보다 좋은 이유는 생명체의 삶이 주로 에너지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화적 관점에서 볼 때, 음식을 불로 익히는 조리가 가져오는 비타민 파괴나 독성이 있는 화합물의 생성이라는 부정적인 변화는 더 많은 열량을 얻을 수 있다는 효과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양질의 음식을 먹은 침팬지 암컷은더 자주 출산할 수 있고 그 자손들의 생존율도 더 높다. 이와 마찬가지로 식량이 부족한 문화에서는 잘 먹은 엄마들이 출산율도 높고 자식들도 더 건강하다. 출산율뿐 아니라 엄마들 자신의 경쟁력, 생존력, 수명을 비교해 보아도 잘 먹은 쪽이 더 유리한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이 처음으로 익힌 음식을 먹어 더 많은 열량을 얻었을 때, 그들과 그 후손들은 날것을 먹는 같은 종의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유전자를후대로 전달하는 데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그 결과로 이들은 새로운 진화적 기회를 얻게 되었다.
- P112

중앙아메리카 본토 보아뱀은 벨리즈(유카탄 반도 연안의 입헌 군주제 국가 - 옮긴이) 연안의 섬으로 이주한 지 8000년이 채 지나지 않아 포유동물을 잡아먹던 식습관이 완전히 바뀌어 새를 잡아먹게 되었다. 따라서 새를 사냥할 수 있는 나무 위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몸통이 가늘어지고 암컷과 수컷간의 몸집 차이도 없어졌으며 체중은 과거의 5분의 1로 줄어드는 등 확연히 눈에 띄는 변화를 보였다. 진화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에 따르면, 이 같은 속도의 변화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그는 화석 기록을 근거로 들어, 하나의 종이 완전한 진화적 변이를 거쳐 새로운 종으로 변화하는 데 평균적으로 소요되는 기간을 약1만 5000~2만 년으로 추정했다. 우리 조상들처럼 성체로 자라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종은 진화하더라도 더 오랜 기간이 소요될 것... - P128

심지어 나무 타는 능력이 감소했다는 사실조차도 직립 원인이 화식을 했다는 가설과 맞아떨어진다. 직립 원인의 나무 타기 능력은 민철한 하빌리스와는 달리 오늘날 우리와 비슷했을 것이다. 이 변화는 직립 원인이 나무 위가 아니라 땅바닥에서 잠을 잤다는 것을 시사하는데, 이는 불을 사용하게 됨으로써 가능해졌을 새로운 행태이다. 불빛덕분에 밤에 육식 동물을 확인하고, 불로 겁을 주어 쫓아낼 수 있었을것이다. 영장류는 땅에서 자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작은 유인원은 나무 구멍, 숨겨진 둥지, 물 위로 늘어진 나뭇가지, 벼랑의 돌출 부위, 지상의 육식 동물이 접근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나무 등지에서 잠을 잔다. 대형 유인원들은 대개 잠을 자기 위한 보금자리나 둥지를 만든다.
인간이 아닌 영장류 중에서 규칙적으로 땅 위에서 자는 종은 대형 유인원 중 몸집이 가장 큰 고릴라 뿐이다. 고릴라는 육식 동물이 거의없는 숲에서 살고, 몸집도 상대적으로 거대하기 때문에 땅 위에서 직립 원인보다 더 안전하다. 땅에서 가장 자주 잠을 자는 것은 다 자란수컷으로, 이들의 체중은 127 킬로그램이나 나간다. 작은 고릴라는 나무 위에서 자는 일도 흔하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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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동안 나를 표현하는 수식어에 대해 고민해왔다. 학생, 인턴, 직장인처럼 누구에게나 때가 되면 따라붙게 마련인 명칭 말고 지금의 나를 가감 없이 담아내는 표현을 찾고 싶었다. 그나마 지난해 고민 끝에 찾은 건 ‘만드는 사람(maker)‘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영 아쉬웠다. 세상에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데다가 표현 자체가 너무두루뭉술하고 보편적인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까지의 내 삶을 관통하는 단어가 오직 하나 있다고 한다면, 그건 무엇일까? 그러던 중 모 문구회사 홈페이지의 대표 인사말을 읽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00사를 아끼는 소비자와 문구인 여러분!

문구인(文具人), 이 단어를 보는 순간 암실에 빛한 줄기가 찡 하고 들어와 온 방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마치 핑생을 찾아 헤맨 단 하나의 단어를 먼 길을돌고 돌아 이제야 조우한 느낌! 아아, 정말이지 나는 이 단어와 단숨에 사랑에 빠져버렸다.
- P7

 가만 보면 내 안에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같이사는 것 같다. 클래식하고 심플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과 아기자기한 총천연색의 귀여운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책상 위에도 묵직하고 우아한 디자인의 오브제들과 함께 오색찬란 화려한 색상의 팬시문구들이 늘 함께 어울려 있다. 본능적으로 끌리기도하겠지만 그런 언밸런스를 은근히 즐기는 것 같기도하다. 귀엽고 가벼운 것들이 즉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하는 명랑한 친구들이라면, 클래식한 오브제들은 말수는 별로 없지만 늘 든든하게 곁을 지켜주는 속 깊은친구 같다. 이 친구들을 바라보고 어루만지는 일에나는 시간을 과감하게 쓰고 있다. 집에서 대체 뭘 그렇게 하느냐는 말에 나는 퍽 억울하다. 책상 위에도나름대로의 분주한 시간들이 있단 말이다.
- P42

그래, 취향이라고 해서 꼭 멋들어질 필요가 있나! 그저 내가 좋아하는 사소한 것들로 행복과 만족을 찾아나가는 것도 충분히 즐거운 인생일 수 있다.
오늘도 나의 작은 우주, 책상 위 아끼는 수많은 문구들 틈에서 작은 행복을 찾으며 생각한다. 문구도 꽤좋은 취향이지.‘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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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더 여쭤보겠습니다. 선생님의 유년 시절이 퍽 멀게느껴지시나요? 선생님이 어머니 무릎에 앉아 있었던 때가 아득한 옛날처럼 여겨지세요?"
로리 씨는 뜻밖에도 유순한 카턴의 태도에 놀라며 대답했다.
"이십 년 전쯤만 해도 그랬다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마치 원을 그리듯 점차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 같소. 원만하게 죽음을 준비하는 방법의 하나라고 할까.
요즘은 오래전에 돌아가신 젊고 예뻤던 어머니(나는 이렇게 늙었는데 말이야!)에 대한 추억이 자주 떠오른다오. 세상이라는 것이 그리 실감 나지도 않고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모르고 천방지축 날뛰던 시절의 기억도."
"그 느낌 알 것 같습니다!" 카턴이 밝게 홍조를 띤 얼굴로 소리쳤다. "그래서 지금 더 나아졌다고 느끼시는 거죠?"
- P445

"아아, 카턴 아저씨다, 카턴 아저씨!" 어린 루시가 달려와 그의 팔에 열렬히 매달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아저씨가 오셨으니, 이제 우리 엄마 도와주실 거지요? 우리 아빠 구해 주실 거지요! 엄마를 보세요, 아저씨! 엄마를 가장 사랑하는 아저씨잖아요. 우리 엄마를 좀 보세요. 네?"
그는 허리를 굽혀 아이의 활짝 핀 꽃 같은 뺨에 자신의 뺨을 지그시 댔다. 이윽고 어린 루시를 살짝 떼어놓고 의식 없는 아이의 어머니를 들여다보았다.
"가기 전에. 그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머뭇거렸다. "아저씨가 엄마한테 키스해도 되지?"
사람들은 나중에 이 장면을 회상했는데, 카턴이 허리를 굽혀 루시의 얼굴에 자신의 입술을 살짝 대면서 몇 마디 중얼거렸다고 했다. 그때 그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어린 루시는 나중에 사람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훗날 그녀가 고운 할머니가 되었을 때 손자들을 앉혀 놓고 카턴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 P479

"나는 알고 있다. 바사드와 클라이, 드파르주, 방장스, 배심원, 판사 같은 옛 체제가 붕괴된 후 생겨난 기나긴 대열의 새 압제자들이 더는 지금처럼 사용하지 않아도 결국 이 보복적인 도구에 의해 멸망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 깊은 구렁텅이에서 솟아난 아름다운 도시와 현명한 사람들이, 시간이 걸릴지언정 진정한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승리와 패배를 겪음으로써, 현재의 악행과 그것을 잉태한 예전의 악행이 스스로 속죄하고 사라지리라는 것을.
- P538

내가 지금 하려는 일은 지금까지 했던 그 어떤 행위보다 훨씬 더 숭고하다. 그리고 지금 내가 가려고 하는 곳은 내가 알고 있는 어떤 곳보다 더없이 편안한 곳이리라."
- P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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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박사가 다네이를 석방시키려고, 아니, 최소한 재판은 받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에게 당시 여론은 너무 강경했고, 급격하게 변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국왕은 재판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자유와 평등, 박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라는 공화국은 세상을 상대로 승리, 아니면 죽음이라는 전쟁을 선포했다. 노트르담의 높은탑에는 밤낮으로 검은 깃발이 나부꼈고 삼십만 명에 달하는 시민이 프랑스 곳곳에서 지상의 압제자에 대항해 총궐기를 했다.
마치 용의 이빨을 널리 뿌려놓은 듯 언덕과 평원, 바위와 자갈,
충적토에서, 남쪽의 환한 하늘 아래, 북부의 구름 아래, 가을과겨울 할 것 없이, 포도밭과 올리브 과수원에서, 짧게 깎은 풀과 옥수수 그루터기에서, 넓은 강의 비옥한 강둑, 해안의 모래밭에서도 똑같이 열매를 맺은 듯했다. 그런데 어찌 사사로운 근심으로 인민 공화국 원년의 범람하는 물결을 거스르려 하겠는가. 그것도 하늘의 창문도 닫힌 상태에서,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는 홍수가 아닌 아래에서 위로 솟아오르는 대홍수를 말이다.
- P390

그들은 갑자기 다시 멈추더니 잠시 후 이번에는 새로운 춤을 추었다. 먼저 도로 너비만큼 줄지어 선 다음 고개를 숙이고 두팔을 머리 위로 올린 채 비명을 지르며 덮칠 듯 달렸다. 어떤 싸움도 이 춤의 절반만큼도 오싹하지 않으리라. 이것은 단연코 한때는 순진무구했으나 이제는 완전히 악마적으로 되어버린, 타락한 놀이였다. 원래 건전한 오락거리였지만 피를 끓게 하고 감각을 혼란스럽게 하며 강심장을 만들어주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다. 원래 선했던 것이 어떻게 뒤틀리고 추해졌는지 보여 주었을뿐 아니라 고상해 보였던 것일수록 더욱 추해 보일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젊은 하녀는 가슴을 풀어 헤쳤고, 예쁜 처녀의 머리는 헝클어졌으며, 피와 진흙탕 속에서 움직이는 섬세한 발동작은 박자가 맞지 않았다.
카르마놀이라는 춤이었다.  - P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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