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욕망을 일으키는 것은 굉장히 즐겁다. 상대가 남자건, 여자건.
버터가 녹듯이 상대의 눈이 빛나며 드러나는 달콤한 굶주림이 눈에 보인다. 자신의 힘을 동원하여 누군가를 열광하게 하는 것은 나쁜 일, 비열한 일, 더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누구에게 그런 식으로 느꼈더라…… 무의식중에 상관하고 싶지 않은 상대의 욕망을 깨웠음을 알았을 때는 소름이 끼치고, 자기혐오에 빠진다. 하지만 자기가 점찍어서 작업한 상대가 욕망한 것이라면, 조금도 리카의 존재를 깎아내린 것이 아니다. 줄곧 눌러두었던 순수한 감정이 피부로 배어나는 걸 느꼈다. 이거. 멈출 수 있을까. 불안해진다.
"메리 크리스마스 마치다 씨."
사바랭 savarin 시럽 같은 가지이 마나코의 목소리는 녹진하게 울려 퍼져, 면회실의 차갑고 단단한 벽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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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포기한 타락한 모습에 멀어져간 측근, 찬양하다 돌아선 언론, 무엇보다 자신을 버린 아내와 새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아들을 향한 저주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비참한 내 모습을 잘봐둬, 너희들 탓이니까…… 말로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누군가손을 내밀 때까지 소란을 피운다. 요지부동 자신의 생활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고집. 가족이 소중하다면서도 세간에 처자식이 자신을 버렸다는 인식을 심으려 한다. 마음을 고쳐먹고 자기 힘으로인생을 만회하려 한다면, 그는 이제 목숨쯤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가지이 마나코에게 살해당했다는 남자들에게도 많건 적건 그런 냄새가 나지 않았는가. 피해자가 생전에 한 말, 그리고 그들 주위에 있던 사람의 증언이 하나둘 떠오른다.

이대로 혼자 나이를 먹는 게 두렵다. 생활이 점점 피폐해진다. 누구든 좋으니 밥을 차려주고, 돌봐줄 여자가 필요했다. 수상하다고는 생각한다. 속고 있을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한다. 가족들은 그런여자와 헤어지라고 들볶는다. 그래도 상관없다. 가족과 절연하더라도 그녀를 선택하겠다.

그 여자는 외로운 생활을 보내는 피해자의 마음속 빈틈을 파고들었어요. 남자는 모자란 생물이지 않습니까? 여자의 보살핌과 따스함 없이는 생활해나갈 수 없잖아요?

요리 잘하는 착한 여성이 있다면, 남성이라면 누구라도 끌리지않겠어요? 남자를 잡으려면 먼저 위부터 잡으라고 하잖아요.

이 사건은 어디를 잘라도 그 단면에 고독한 남성의 지나친 자기 연민과 여성을 향한 증오가 배어 있다. 피해자를 탓하는 사고방식일까. ‘자기책임론‘이 제일 싫은데.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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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지은 밥에 버터와 간장을 넣고 비벼 먹는 거예요. 요리를하지 않는 당신도 그 정도는 하겠죠. 버터가 얼마나 훌륭한지 가장 잘 알 수 있는 음식이에요."
얼버무리고 넘어가지 못할 만큼, 그녀는 엄숙하게 말했다.
"버터는 에쉬레Échire"라는 브랜드의 가염 타입을 써요. 마루노우치에 전문점이 있으니 거기에서 손에 들어보고 잘 확인해서 사면 돼요. 버터 품귀인 지금이 해외 고급 버터를 시험할 좋은 기회예요. 맛있는 버터를 먹으면, 난 뭔가 이렇게 떨어지는 느낌이 들어요."
"떨어져요?"
"그래요. 붕 날아오르는 게 아니라, 떨어져요. 엘리베이터에서한층 아래로 쑥 떨어지는 느낌. 혀끝에서 몸이 깊이 가라앉아요."
방금 타고 온 엘리베이터에서 느낀 중력을 떠올려보았다. 메모하는 것도 잊고, 리카는 몸이 절로 앞으로 쏠리는 상대의 말솜씨에 빨려들었다. 가지이의 눈과 입술이 촉촉해지기 시작해서 흠칫놀랐다. 그녀의 황홀한 듯 멍한 시선은 이곳이 아닌 어딘가로 향해 있다.
"버터는 냉장고에서 막 꺼내서 차가운 채로 넣어요. 정말로 맛있는 버터는 차갑고 단단한 상태에서 식감과 향을 맛보아야 해요. 밥의 열기에 바로 녹으니까 반드시 녹기 전에 입으로 가져가야 해요. 차가운 버터와 따뜻한 밥. 일단 그 차이를 즐겨요. 그리고 당신 입속에서 두 가지가 녹아서 섞이며 황금색 샘이 될 거예요. 네, 보이지 않아도 황금색이란 걸 아는, 그런 맛이죠. 버터가 엉킨 밥 한알 한 알이 자기 존재를 주장하고, 마치 볶은 듯한 향기로움이 목에서 코로 빠져나가죠 진한 우유의 달콤함이 혀에 감기고..."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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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지색의 좁은 분양주택이 완만한 언덕배기를 따라가며 끝없이 이어졌다.
잘 정비된 동네는 어디에 있어도 똑같은 인상이어서, 마치다리카는 아까부터 계속 같은 장소를 뱅글뱅글 도는 기분이었다. 꽁꽁 언 오른손 손가락의 거스러미가 벗겨졌다.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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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은 그 계곡을 찾았더니 바윗돌들이 온통 벌겋다. 샘이 있는 곳마다 붉은 페인트로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지나가는 등산객의 말로는 근처 기도원의 원장이 사람들을 데리고 와 그 페인트칠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오랫동안 잊고 있던 낱말이 생각났다. 기도원 사람들이 방법을 했구나!
교회 다니는 사람 몇 사람이 봉은사를 비롯한 여러 절에서 땅 밟기를 했다고 한다. 미얀마의 불교 사원까지 찾아가 그 일을 했다니 용맹하기도 하다. 땅 밟기는 구약에 그 근거가 있다는데, 그것은 방법에 해당할까 치성에 해당할까. 종교가 맞닥뜨려 싸워야 할 것은 다른 종교가 아니라 경건함이 깃들 수 없는, 그것이 아예 무엇인지모르는 마음이어야 할 것이다. (2010) - P66

내가 생각하는 바의 좋은 서사는 승리의 서사이다. 세상을 턱없이 낙관하자는 말은 물론 아니다. 우리의 삶에서 행복과 불행은 늘 균형이 맞지 않는다. 유쾌한 일이 하나면 답답한 일이 아홉이고, 승리가 하나면 패배가 아홉이다. 그래서 유쾌한 승리에만 눈을 돌리자는 이야기는 더욱 아니다. 어떤 승리도 패배의 순간과 연결되어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 역도 사실이다. 우리의 드라마가 증명하듯작은 승리 속에 큰 것의 패배가 숨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큰 승리의 약속이 없는 작은 패배는 없다. - P72

그런데 저 환상적으로 엄혹했던 유신 시절의 독재자도 국민들을 나태와 방종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착한 생각이 마음속에 가득했을 것이다. 그는 인간이 저마다 스스로 성장하고 스스로 다스릴만한 판단력이 있다고 믿지 않았을뿐더러 그런 능력 자체가 위험하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는 사람들이 먹고 입는 것을 간섭했고, 자고 일어나는 시간을 정했으며, 부르는 노래를 감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불러야 할 노래를 스스로 만들어 가르쳤다. 그는 우리가 저마다 살아야 할 삶의 목표까지 정해주었지만, 사람들은 날마다 불안했고 나날이 주눅이 들어갔다.
지금 우리의 젊은이들은 노래도 잘부르고 춤도 잘 춘다. 글도 잘쓰고 멋도 잘 낸다. 그것은 이들이 누가 미리 지정해준 삶을 곱게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자유로운 세상에 살고 있으며, 제가 저 자신을 자유롭게 이끌어나갈 수 있다는 긍지를 지녔기 때문이다. 김수영 시인이 「사랑의 변주곡」에서 말했던 것처럼 제 마음속의 복숭아씨와 살구 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을 알고 그 힘을 창조력의 밑받침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판단하고 선택하기전에 모든 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가려놓은 채, 생명에 삽질을하고 시멘트를 발라 둑을 쌓아둔다면, 거기 고이는 것은 창조하는자의 사랑이 아니라 굴종하는 자의 중오일 것이다. (2011) - P100

신화 시대에 지하신이 물러간 자리에 하늘신이 들어선다.
왕조 시대에 왕조는 조각상으로 왕들의 치적을 나열하여 그 무적불패성을 자랑한다. 이 말 끝에 적은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모든 문명이 망한다는, 그렇게 역사는 매일매일 새로 시작한다는 아주 오래된 증거에 다름 아니다." 지금 손꼽아 6백 일 5백 일을 세는 사람들에게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이 음악처럼 흐르는 사람들에게는 현실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2011)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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