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은 그 계곡을 찾았더니 바윗돌들이 온통 벌겋다. 샘이 있는 곳마다 붉은 페인트로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지나가는 등산객의 말로는 근처 기도원의 원장이 사람들을 데리고 와 그 페인트칠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오랫동안 잊고 있던 낱말이 생각났다. 기도원 사람들이 방법을 했구나!
교회 다니는 사람 몇 사람이 봉은사를 비롯한 여러 절에서 땅 밟기를 했다고 한다. 미얀마의 불교 사원까지 찾아가 그 일을 했다니 용맹하기도 하다. 땅 밟기는 구약에 그 근거가 있다는데, 그것은 방법에 해당할까 치성에 해당할까. 종교가 맞닥뜨려 싸워야 할 것은 다른 종교가 아니라 경건함이 깃들 수 없는, 그것이 아예 무엇인지모르는 마음이어야 할 것이다. (2010) - P66

내가 생각하는 바의 좋은 서사는 승리의 서사이다. 세상을 턱없이 낙관하자는 말은 물론 아니다. 우리의 삶에서 행복과 불행은 늘 균형이 맞지 않는다. 유쾌한 일이 하나면 답답한 일이 아홉이고, 승리가 하나면 패배가 아홉이다. 그래서 유쾌한 승리에만 눈을 돌리자는 이야기는 더욱 아니다. 어떤 승리도 패배의 순간과 연결되어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 역도 사실이다. 우리의 드라마가 증명하듯작은 승리 속에 큰 것의 패배가 숨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큰 승리의 약속이 없는 작은 패배는 없다. - P72

그런데 저 환상적으로 엄혹했던 유신 시절의 독재자도 국민들을 나태와 방종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착한 생각이 마음속에 가득했을 것이다. 그는 인간이 저마다 스스로 성장하고 스스로 다스릴만한 판단력이 있다고 믿지 않았을뿐더러 그런 능력 자체가 위험하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는 사람들이 먹고 입는 것을 간섭했고, 자고 일어나는 시간을 정했으며, 부르는 노래를 감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불러야 할 노래를 스스로 만들어 가르쳤다. 그는 우리가 저마다 살아야 할 삶의 목표까지 정해주었지만, 사람들은 날마다 불안했고 나날이 주눅이 들어갔다.
지금 우리의 젊은이들은 노래도 잘부르고 춤도 잘 춘다. 글도 잘쓰고 멋도 잘 낸다. 그것은 이들이 누가 미리 지정해준 삶을 곱게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자유로운 세상에 살고 있으며, 제가 저 자신을 자유롭게 이끌어나갈 수 있다는 긍지를 지녔기 때문이다. 김수영 시인이 「사랑의 변주곡」에서 말했던 것처럼 제 마음속의 복숭아씨와 살구 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을 알고 그 힘을 창조력의 밑받침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판단하고 선택하기전에 모든 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가려놓은 채, 생명에 삽질을하고 시멘트를 발라 둑을 쌓아둔다면, 거기 고이는 것은 창조하는자의 사랑이 아니라 굴종하는 자의 중오일 것이다. (2011) - P100

신화 시대에 지하신이 물러간 자리에 하늘신이 들어선다.
왕조 시대에 왕조는 조각상으로 왕들의 치적을 나열하여 그 무적불패성을 자랑한다. 이 말 끝에 적은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모든 문명이 망한다는, 그렇게 역사는 매일매일 새로 시작한다는 아주 오래된 증거에 다름 아니다." 지금 손꼽아 6백 일 5백 일을 세는 사람들에게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이 음악처럼 흐르는 사람들에게는 현실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2011)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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