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너무 많아서 힘들진 않아?"
"아니야. 힘들지 않아."
그렇게 말하니 정말로 힘들지 않아졌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자 지난 며칠간의 부끄러움과 초조함은 날아가버리고, 둘 사이에 어떤 새로운 깨달음이 떠올랐다. 이 덥고 환하고 붐비는 곳에서 그런 깨달음이 떠오르니 더더욱 짜릿한 느낌이었다. 그랬다. 그들이 여기에 온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챔피언 힐처럼 내밀하고 위험한 곳에서는 결코 서로를 정직하게 마주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여기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둘은 마주했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지만, 그래도 그 깨달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 프랜시스는 릴리안과 의자 하나에 끼어 앉다시피 바투 앉아 있었다. 너무 바싹 붙어 있어서 릴리안의 향취 하나하나가 세밀하게 구분될 정도였다. 파우더 냄새, 립스틱 냄새, 머리카락 냄새까지. 릴리안은 사촌 한 명에게 뭐라고 소리쳐 말하고, 이모 한 분의 술잔을 치우고, 몸을 돌려 어머니의 목걸이 구슬을 매만져주었다. 프랜시스는 내내 릴리안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있으면서도 그 모든 걸 알 수 있었고, 바라볼 수 있었다. 정확히 어떻게? 온 피부의 모동으로 보고 있는건 아닐까? - P252

"저 남자가 널 기다리고 있네. 이름이 뭐야?" 릴리안의 경쾌한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너 여기서 한 명 제대로 꼬셨네. 그치? 저 남자 눈빛이 번쩍번쩍 빛이 나는 게, 너한테 아주 푹 빠진 눈치야."
프랜시스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빛이 나는 거야."
릴리안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무슨 뜻이야?"
"저 남자가 내게 빠진 건, 내가 너에게 빠져 있기 때문일 뿐이야. 빛이 나는 건 너야, 릴리안."
릴리안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는 시선을 떨구고 입술을 벌렸다. 릴리안의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게 보였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쇄골 위의 움푹 꺼진 부분이 팔딱거리고 있었다. 심장이 여섯 번, 일곱 번, 여덟번, 아홉 번 뛰었을 때, 릴리안은 프랜시스의 눈을 올려다보고 말했다. "나 집에 데려다줘."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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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례적인 차이에 뒤따라오는 장애물과 맞서 싸운 많은 부모들과 아이들을 만났고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본보기로서 그들의 긍정적인 경험과 태도를 증언하고 싶었다. 많은 사람이 난관을 극복하고 보다 훌륭한 사람으로 거듭났으며 그들의 승리를 공유하고 싶었다. 그에 반해서 강간의 결과로서 아이를 얻은 어머니들은 인정을 받으려고 애썼다. 심지어는 그들이 부모로서 자식과 만족스러운 유대 관계를 형성한 경우에도 자식의 정체성이 그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강간에 의해 태어난 아이들은 대부분 그들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안다. 그리고 세상으로 나가기 이전부터 그들을 뒤덮는 상실감의 지겨운 반영을 느낀다. 결정적인 어떤 사정을 알지 못하는 한, 사람들은 청각 장애나 왜소증에 붙는 오명을 주저 없이 부인할 것이다. 하지만 같은 사람들이 강간에 대해서도 혐오감을 느끼지 않을 거라고는 거의 상상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오명은 강간을 당한 여성들과 강간에 의해 태어난 아이들을 끊임없이 괴롭힌다. 유전자가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믿는 오늘날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강간범이라고 공표하면서 뒤따라올 어느 정도의 동요를 예상하지 못할 사람이 있을까?
강간에 의해 태어난 아이라는 사실이 축하받을 정체성이 될 일은 아마도 절대로 없겠지만, 최근 수십 년 동안 강간 문제를 다루는 교육적, 법적, 심리학적 방법이 발전한 덕분에 사회적으로 좀더 수용되는 정체성이될 수는 있을 것 같다. 강간이라는 주제가 덜 금기시될수록 강간 피해자들이 비슷한 상황의 다른 피해자들과 보다 쉽게 만날 수 있고, 그 결과 강간피해자인 어머니들과 아이들이 그들에게 필요한 수평적 정체성 커뮤니티를 찾을 가능성도 더욱 높아질 것이다. 그 같은 지원이 없었음에도 자신의트라우마를 동력원으로 삼아서 좋은 부모로 거듭나는 여성들도 있다. 몇사람에 불과했지만, 심지어 상대적으로 덜 끔찍한 이력보다는 오히려 충격적인 폭력을 이겨냄으로써 보다 나은 부모가 될 수 있었다고 믿는 여성들도 있다. - P213

바버라는 가족으로서의 기능이 정지된 폐허 속에서 일어나서 다시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첫 인터뷰를 시작했을 때 그녀와 제프리는 결혼 8년째였다. 그리고 그녀는 딸과 지내면서 새로운 사교 기술을 배우는 중이었다. 그녀가 <나는 사람들이 내게 먼저 다가올 때까지 언제나 기다리는 편이었어요>라고 말했다. 이제 그녀는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기 시작했고 폴린에게도 똑같이 하도록 가르쳤다. 「나는 폴린에게 <친구를 사귀기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라고 물어요. 그런 다음 실습을 위해서 그녀를 공원에 데려가죠. 그녀를 양육하면서 나는 나 자신도 함께 양육하고 있어요.
그리고 마침내 내 인생에서 진정 인간다운 삶을, 즉 과거에는 전혀 꿈도 꾸지 않았던 삶을 시작할 시점에 도착했어요. 내가 폴린을 낳았고 그 결과그녀에게 생명을 준 셈이 되었지만 그녀도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내게 생명을 주었어요. 폴린에게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요. 내게도약간의 자유가 있었고 선택권도 있었어요. 나는 내 어머니 같은 사람이 될수도 있었지만 나 자신을 치료하기로 결심했어요. 아버지도 포함해서 우리 가족 전체를 생각하면 나는 마음이 무거워요. 그들은 결코 나쁜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녀는 수년 전 화장실에서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죽기 전에 사랑을 알게 해달라고 애원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녀가 말했다. 「나는 댄이 그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이제는 폴린이 그 응답이라는 사실을 알아요. 폴린은 매개 역할도 했어요. 나는 처음으로 하느님께 마음을 열었고 그다음에 폴린에게, 그리고 제프리에게 마음을 열었어요. 그리고 이제는 <좋아, 다음 대상은 누구지?>라고 생각하죠.」 - P222

강간에서 파생된 임신은 특히 종족 말살적 맥락에서 철저한 조사를받아 왔다. 종족을 말살하려는 목표를 가진 사람은 표적으로 삼은 종족을 강제로 불임화하는 방법이 어쩌면 가장 적절한 전술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대다수 무력 분쟁에서 정복자는 정복당한 종족의 여성들을 임신시키고 억지로 정복자의 아이를 낳게 한다. 이런 만연한 현상을 <강요된 임신>이라고 부른다. 노르웨이의 비영리 단체 <전쟁과 아동의 신원 프로젝트>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오늘날 살아 있는 사람들 중 대략 50만명 정도가 그렇게 임신된 것으로 추산된다. 영국인 정신과 의사 루스 자이페르트 Ruth Seifert는 여자를 강간하는 행위가 남자들 사이에서 의미하는 바는 그 여자의 주변에 있는 남자들이 《그들의》 여자를 보호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라고 썼다. 수전 브라운밀러는 여성의 육체에 대한 이런 전면적인 침해 행위를 <부도덕한 전쟁터>라고 묘사한다. 이러한 경우와, 선진화된 세계에서 평화로운 시기에 발생하는 강간에 의한 임신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강간 피해자가 임신을 했다고해서 죽임을 당하지도 않고, 지역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하지도 않을 것이며, 나중에 결혼할 때도 그다지 지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서양에서는 자식의 출신 배경을 감출 수 있다. 입양을 보내는 방법도 있다. 또한 그런 아이를 받아들이고 직접 키우는 여성들이 아이의 출생 배경을 상관하지 않는 남자를 만나는 경우도 빈번하다. 하지만 대다수 분쟁 지역의 종족 문제는 강간에 의해 임신한 여성들에게 그들이 겪은 일을 숨길 수 있는 어떠한여지도 남겨 두지 않는다. 가족들이 알고, 온 동네 사람들이 알기 때문에 강간 이전의 삶과는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살게 된다. - P224

고대부터 시작해서 예컨대 방글라데시와 체첸 공화국, 과테말라, 몇몇아프리카 국가들, 동티모르, 구 유고슬라비아 등의 사례를 포함한 최근의적어도 36건의 분쟁에 이르기까지 강간은 전략적으로 이용되어 왔다. 미국의 국제 인권감시단체 휴먼 라이츠 위치 Human Rights Watch의 보고서에따르면 이러한 강간 사건에는 무장 집단에 의해 강간당한 여성들과 소녀들은 물론이고 지역사회 전체를 굴복시키고, 굴욕감을 주고, 겁에 질리도록 만들려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서양의 관찰자들은 1937년 중일전쟁중에 발생한 난징 강간 사건의 결과로 임신하게 된 중국인 여성들이 집단자살을 했으며 수많은 일본인 혼혈아들이 영아 살해의 표적이 되었다고 보고했다. 인도와 방글라데시의 국경분쟁이 진정되자 방글라데시의 수상은 강간당해서 아이를 낳은 여성들에게 <국가적 영웅>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지만 그 여성들 중 상당수는 그들이 낳은 아기를 쓰레기통에 버렸고, 혹시라도 아이를 데리고 사는 여성들은 사회로부터 배척을 당했다. 코소보전쟁이 끝나자 코소보 프리슈티나의 한 젊은 남자는 「옵서버 Observer」와가진 인터뷰에서 <만약 내가 평범한 사람이라면 나는 그렇게 태어난 아이를 양육하고, 내 아내를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문화에서는 강간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여긴다. 나는 내 아내를 받아 줄 수 없다. 그녀는 불결하고, 불쾌하며, 적에게 점령당한 성(城)이다.  - P229

최근의 어떤 보고서에 따르면 강간에 의해 태어난 아동은 <국가 전체가 겪은 트라우마를 상징하고, 사회는 그들의 요구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법적인 문제에 직면한다. 아이의 국적은 보편적으로 아버지의 국적을 따라가고 따라서 아버지가 없는 아이는 국적도 없을 수 있다. 유러피언 대학 평화 연구 센터의 자흐라 이스마일ZahraIsmail은 이러한 현상은 필연적으로 아동의 본질적인 사회적 편익 문제를 초래하는데, 아동의 인권을 다루는 국제법이 국가의 책임을 전제로 하기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베트남에서는 종전 후 혼혈 아동을 <굴욕적인 인생>이라고 불렀고, 친부가 호적에 올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에 대한교육과 의료 서비스가 거부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보다 미국인처럼 보이거나 보다 아시아인처럼 보이기 위해 자신의 몸을 훼손하기도 했다. 크로아티아로 도피한 보스니아인 강간 희생자의 자녀들에게는 시민권이 인정되지 않았다. 1990년 이라크의 점령 기간 중 강간당한 쿠웨이트 여성들이 낳은 아이들은 지금까지도 시민권이 없다. 이스마일은 이러한 아동들이 비록 2차적이지만 강간의 또 다른 피해자이며 그들에게는 기본적인 인권마저 거부된다>고 주장한다. 계속해서 그녀는 <강요된 임신은 지금까지 오로지 여성의 문제로만 여겨졌고 전쟁 때문에 태어난 아동들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그 결과 그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되었을 뿐 아니라 희생자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고,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중에는 가해자진영으로 떠밀리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 P231

국제형사재판소(보통은 전범 재판소라고 불림)의 설립 계기가 된 1998년 로마 규정은 <특정 종족의 인구 구성에 영향을 미치거나, 국제법을 심각하게 위반하려는 의도로 여성을 강제로 임신시키고 불법 구금하는 행위>를 반인류적인 범죄로 간주한다. 이 규정은 강간이 피해자의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가해자에 대한 처벌과 주로 관계가 있다. 특히 고위직에 있으면서 강간 작전을 주도한 가해자가 주된 표적이다.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는 지역 시장으로 있으면서 경찰에게 투치족 여성들을 강간하도록 사주했던 장폴 아카예수에게 반인류적인 범죄와 고문에 대해 유죄를 선고함으로써 1998년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했다. ‘강요된임신이 종족 학살의 한 형태로 기소되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법규와 판례는 그 사건이 대대적인 강간보다는 종족 학살 의도가 있었다고 암시한다. 그리고 강간을 당하고 그 결과 임신까지 하게 된 여성들에게 동기 해석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그들의 아이에게도 무의미한 일이다. 벤슈프가 말했다. 같은 고문 피해자라도 남자들은 영웅이 되어 원래의 사회로 돌아갔어요. 반면 여자들은 가족의 명예에 먹칠한 창녀로 간주되었죠. 이라크에서는 미국의 침공이 일어난 해에 자신이 강간당했다고 신고한 여성들 중 절반 이상이 그들의 가족에 의해 살해되었다.  - P237

또한 어머니의 사랑, 즉 모성애 중 얼마나 많은 부분이 포유류의 DNA 속에 내재되어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부분이 사회적 관습의 문제인지, 얼마나 많은 부분이 개인적인 결심에 의한 결과인지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강간에 의해 임신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여성들은 그들 내면의 어둠을 억눌러서 자식에게 빛을 보여 주기 위해 이례적인 자식을 둔 다른 어떤 부모들보다 노력한다. 그럼에도 그들에 대한 지원은 다른 이례적인 가족들에 대한 지원보다 일관성이 없다. 이들 강간 피해자 여성들과 그들의 자식에게는 정체성 커뮤니티가 필요하다. 온라인 세계의 단편적인 지원을 통해 제공되는 것보다 더 많은 존엄성을 찾을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언급되는 아이들에게는 모두 상처가 있다. 하지만 강간에의해 태어난 아이들은 그들의 잘못이 아님에도 그들 자신이 곧 상처가 된다. 이 아이들을 태어나게 만든 호된 시련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어머니들이 두려워하는 만큼 심장을 움츠러들게 하지 못한다. 모성애는 설령 그어머니들이 단단히 방어막을 치고 있더라도 그것을 뚫고 들어갈 수 있다. - P240

수감의 세 가지 기본적인 원리는 제지, 무력화, 응징이다. 제지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 범죄를 계획하는 이들의 의욕이 감옥에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꺾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대다수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게 일어난다.‘ 2,500명 이상의 경찰서장, 보안관, 검찰 및 그 밖의 법 집행 관련 종사자들이 이끄는 단체 <파이트 크라임: 인베스트 인 키즈>는 <범죄와의 전쟁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은 체포와수감으로 범죄 문제에서 벗어나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안다‘고 말했다. 200여 건의 연구를 수집해서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행동 치료나 가족교육 프로그램, 최고의 재활 프로그램 등은 중범죄의 경우에도 재범률을30~40퍼센트 감소시킨 반면, 징벌적인 요법을 실시한 경우에는 재범률의변화가 없거나 오히려 증가했다. 미국 국립 보건원은 <겁을 주는 방법은먹혀들지 않고 문제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고 조언했다.
무력화는 사람들이 감옥에 갇혀 있어서 쉽게 추가 범죄를 저지를 수없는 경우에 한해서 효과가 있다. 하지만 범죄자를 평생 감옥에 가두어 둘계획이 아니라면 그들이 출소한 이후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한 문제가 남아 있다. 종종 교도소는 초범자가 경험 많은 동료에게 범죄 기술을 배우는부정적인 감화의 공간이 된다. 컬럼비아 대학 국립 약물중독 및 남용 센터소장 조지프 캘리파노 주니어 Joseph A. Califano Jr.는 최근에 <청소년 사법제도가 추가 범죄와 성인 교도소로 향하는 길을 닦아 준 범죄의 대학이 되었다‘고 말했다. 18세 미만의 미성년 수감자들 중 80퍼센트 이상이 출감후 3년 이내에 또다시 체포된다. 아들이 자기 집처럼 교도소에 드나들기를 원치 않는다면 애초에 교도소를 가지 않게 해야 한다. 일단 한 번이라도 교도소에 발을 들이면 계속해서 드나들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응징은 보복 즉 가해자가 징계받는 모습을 보면서 피해자가 느끼는 쾌감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다. 응징은 피해자를 만족시키는 한 방법이다. 무력감을 느끼던 피해자는 자신의 적이 투옥되거나 처형되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응징의 장점은 제한적이다. 가해자의 처형을 주장하면서 싸운 사람들과 인터뷰를 해보면 사형이 막상 기대했던 것만큼 만족감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P245

같이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이라도 가족의 약속에 따라 다른 선고를받을 수 있다. 어떤 판사는 내게 말하기를 부모가 긍정적인 영향력을 가졌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가해 아동이 또다시 다른 사람의 삶을 파괴하는대신 무언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항상 낮은 형량을 선고한다고 했다. 내가 만난 한 어린 범죄자는 징역 10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반면에 그의 공범자는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았는데 적어도 일정 부분은 그가가족의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이 불리하게 작용했다. 이러한 생각이 건전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아이러니는 피할 수 없다. 범죄를 부추긴 가난이 이제는 형량마저 더 길게 만들기 때문이다. 청소년 범죄는 해당 청소년의 유전적인 특징과 성격 및 성향, 가족의 행동과 태도, 해당 청소년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씨가 나쁘다는 발상은 시대에 뒤떨어진 듯 보인다. 하지만 엄지손가락이 없는 상태로 태어나는 사람이 있듯이 윤리적인 판단력이 없는 상태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는것 같다. 윤리적인 측면이 유전되는지 확인하는 것은 우리의 원시적인 과학을 훨씬 넘어서는 영역이다. 무한한 사랑과 지원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성격으로 자라기도 하며 공감 능력이 부족하거나 현실감각이 흐릿한 경우도 있다. 그래도 대다수 사람들에게 잠재된 범죄성이 발현되려면 외부 자극이 필요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이코패스처럼 강력한 내부적 요인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 P254

그래도 소년 사법에는 온정이 남아 있다. 경찰은 구금된 청소년을 풀어 줄 수 있는 재량권을 가졌고, 많은 아이들이 훈방 조치와 함께 부모에게 방면된다. 지난 20년 동안 좌파는 미국 시민 자유 연맹ACLU을 비롯해이와 유사한 조직들을 중심으로 청소년 범죄자가 보다 적법한 절차와 보다 나은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 왔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형식화된 절차는 사법제도에서 관용을 앗아 갔다." 한 최근 조사에 따르면 청소년 범죄자 중 3분의 1만이 자신의 변호사가 도움이 되었다고 느꼈다. 한편 우파는 보다 가혹한 처벌을 주장해 왔다. 요컨대 좌파는 미성년자들이 성인과 동일한 권리를 갖되 성인과 동일한 책임을 부담하지는 않기를 원한 반면, 우파는 정확히 그 반대를 요구했다. 사건의 진행 과정도 끔찍할 정도로 느려서 청소년은 공판이 열리기 전인 심리 기간 동안에최대 일 년까지 구금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해당 청소년의 사회적, 학문적 발전은 커다란 차질을 빚게 된다. 또한 미란다 원칙이나 그 밖의 법적권리가 고지되기는 하지만 청소년들 중 적어도 절반은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실제로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형량은 골트 사건 이전보다 더욱 가혹해졌다. 소년 사법학자인 토머스 그리소Thomas Grisso와 로버트 슈워츠Robert G. Schwartz는 「재판 받는 청소년Youth on Trial」에서 <좌파에 의해 도입된 성인과 동등한 절차와 우파에 의해 도입된 처벌 조치가나란히 작용하여 소년 법정을 꼴사납고 가혹하며 내적으로 모순된 형태로만들었다"고 말했다. - P257

사법제도 안에 있는 아이들과 부모 사이의 관계는 대체로 다음 네 가지 가능성 중 하나를 따른다. 첫째로, 부모가 감옥에 간 자녀를 포기함으로써 아이가 외로움, 상실감, 고립감, 절망감에 사로잡힐 수 있다. 둘째로, 부모가 자녀를 포기함으로써 오히려 자녀가 자신의 일에 대해서 스스로책임을 지게 될 수 있다. 셋째로, 부모가 자녀의 일에 그동안 깊이 관여해왔거나 이제 그렇게 된 경우에 아이는 밝은 미래가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있다. 마지막으로, 부모가 자녀의 일에 깊이 관여해 왔거나 그렇게 되면서 자녀에게 부인(否認)을 허용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그 결과 자녀의 반사회적 행동이 강화될 수 있다. - P272

감독이 그날의 축성을 하고 주일학교 지도자가 설교를 했다. 그는 자녀가 잘못된 길로 빠져들지 않기를 바라는 부모의 간절한 바람에 관한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했으며, 사무엘하와 고린도전서에서 경계의 모델을 언급했다. 「여러분의 자녀가 친하게 지내는 친구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가말했다.「자녀가 나쁜 무리와 어울리기 시작하면 나쁜 무리가 아이들을 타락시키고 결국 여러분의 자녀는 나쁜 짓을 저지르게 될 겁니다. 나는 아이들의 타고난 순수성을 더럽히는 <나쁜 무리>에 대한 교회의 비난에 충격받았다. 설교자는 계속해서 악을 열거하기 시작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 교회 사람들은 <동성애 왕국>에 반대해서 일어나야 했고, 현대판 고리대금업자는 거룩한 장소에서 추방되어야 했다. 미니애폴리스의 흑인 문제가 동성애자와 유대인, 은행의 잘못이라는 그 같은 발상은 내게 세 번의 차 사고에 대한 다숀테의 변명이나, 다리우스가 자신을 속여서 위법행위를 저지르게 했다는 그의 주장을 떠올리게 했다. 타인에 대한 신도들의 증오는 이상하게도 갱단의 정신을 연상시켰다. 그 공동체는 호전성과 뒤얽힌 관용을 보였고, 가혹함과 친절이 뒤섞인 설교자의 주장을 예수그리스도가 무한한 사랑과 최후의 심판에 있을 가혹한 판결을 예언했던 것과 동일 선상에서 이해했다.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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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서 이론가들은 강간이 대체로 번식을 위한 하나의 전략이며, 따라서 유전자가 전략적으로 선택되는 경향이 있다고 추정하는 진화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워싱턴 앤 제퍼슨 칼리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조너선과 티파니 고트셜 부부는 강간범들이 <비단 나이뿐 아니라 희생자의 가임 능력을 암시하는 육체 및 행동 신호들이 신호들 중 상당수는 강간과 상관없는 상황에서도 동일한 매력을 발산한다-을 포괄적으로 고려해서 희생자를 선정한다"고 제안한다. 「강간의 자연사A NaturalHistory of Rape」를 저술한 랜디 손힐과 크레이그 T. 팔머는 강간을 자행하는 남자들이 그들의 씨를 널리 퍼뜨리고, 그 결과 그들의 이기적인 유전자가 저절로 대물림될 수 있는 추진력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강간범의 마음속에 강압적인 번식 방식에 대한 환상이 있다는 개념은페미니즘 이론과도 일치한다. 학자 캐서린 매키넌Catharine MacKinnon은 이러한 구조를 강조하면서 강요된 임신은 강간에서 시작되어 낙태 거부로이어지는 익숙한 패턴을 보여 준다. 또한 이미 노예 시대에 시작되었고 낙태가 불가능한 여성들에게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수전 브라운밀러는 번식이 대다수 강간범들의 주된 동기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그녀는 성교가 임신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한 뒤로 남자들이 여자들을 강간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세상이 발전한 뒤로 강간은 학대 관계에서나 효율적인 번식 전략일 뿐 대부분의 경우에는 효율적이지 않다.
희생자가 임신까지 가는 경우가 좀처럼 드물기 때문이다. 또한 임신을 하게 되더라도 희생자들 중 대다수는 낙태 수술을 받는다. 또한 강간범은 강간범대로 교도소에 수감되어 번식 잠재력이 축소될 수 있다. 애리조나 공중 보건 대학의 임상 심리학자이면서 성폭력 문제를 연구하는 메리 P. 코스Mary P. Koss 교수는 강간을 둘러싼 진화론적인 해석과 사회적인 해석을놓고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보다 그 둘을 통합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 P171

<나는 어떻게 태어났는가?>라는 의문은 어린 시절에 가장 절박한 문제 중 하나다. 그리고 두려움과 무기력함이 담긴 부모의 반응은 자녀를 불안하게 만들 수 있다. 자녀를 낳아 기르는 대다수의 강간 피해자들은 그들이 안정적인 연애 기간도 없이, 또는 금전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자녀를 돌볼 능력이 없음에도 부적절한 나이에 아이를 낳은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여성 자신이 평가받는다고 느끼는 정도에 따라 그들이 은폐하거나 부정하는 범위가 결정되기도 한다. 굳이 해답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 안정적인 아이에게는 자신의 잉태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가 일종의 폭력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없었던 어머니들은 이제 그들이 아이를 보호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그리고 잉태 과정의 끔찍한 일을 아이 본인에게 비밀로 하는 것 역시 그런 보호 행동의 일부이다. 같은 이유로 한 어머니는 온라인상에 내 아들은 자신의 출생에 관련된 자세한 내막을 절대로 모를 것이다. 나는 그가 누구도 바라지 않았던 존재라거나 사랑이 결여된 채 잉태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라는 다짐을 피력했다.
지극히 충격적인 정보를 차단하는 행위는 그 사실을 알려 주는 행위만큼이나 위험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정보가 차단된 아이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사람에게 우연히 그 사실을 전해 듣고 일생일대의 비밀에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해 아이와 사실을 공유하기에 적당한 시기나안전한 방법도 존재하지 않지만 사실을 감추기로 하는 결정도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다. 입양 상담사 홀리 판 굴덴은 <가족제도 안에서 특히 부모 자식 간에 비밀이 있다는 것은 그 비밀이 수치스러운 내용임을 암시한다>고 설명한다. 잉태 과정을 비밀로 해서 자식을 보호하려고 할 때어디까지가 어머니의 선택이고, 어디까지가 위험한 형태의 부정(否定)일까? 심지어는 핵심 정보를 공유할지 또는 보류할지 심사숙고해서 결정한경우에도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 P178

자기가 대다수 어머니들이 상상도 하기 싫어하는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분노가 치밀면서 자기 회의에 빠질 수도 있다. 유전자 기형을 안고 태어난 사람들이 선택적 낙태 탓에 그들의 삶이 가치가 없어지고, 그들의 계승자마저 근절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느끼는 자기 회의와 유사하다. 강간에 의해 태어난 사람들 중 일부는 그들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낙태 반대론자가 되기도 했다. 열여덟 살에 직장상사에게 겁탈당한 리 이젤은 딸 줄리를 낳자마자 입양을 보냈다. 그녀는한 번도 줄리를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21년 후에 줄리가 그녀를 찾아왔고 그들은 서로 해후의 기쁨을 나누었다. 줄리가 말했다. 1963년에 나의 친모가 낙태를 선택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가 나를 쉽게 지울 수 있다는 강한 유혹에 굴복했을지도 모르잖아요」 리를 만났을 때 그녀의 사위가 말했다. 「당신에게 악수를 청하고 싶어요. 줄리를 낙태하지 않아 주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 P179

기적은 언제나 두 가지 요소가 맞물려서 일어난다. 즉 자신의 무시무시한 유전자를 극복하는 아이와, 처음의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 내는 어머니가 있어야 한다. 적극적인 표현은 어머니와 아이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 다음은 한 낙태 반대론자의 글이다. <나는 강간에 의한, 하지만 단순한 강간이 아닌 근친상간에 의한 산물이다. 나의 어머니는 나를 위해 당신의 욕구를 희생했고, 당신의 몫이 아닌 수치를 감내했으며, 어쩌면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지 모를 나를 낳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안전한 울타리와 음식, 하늘을 가릴 지붕, 학교 교육 등 평범한 아이에게 필요한 것들을 줄 수 없었던 어머니는 나에 대한, 자기 자식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 그녀는 내가 일곱 살 때 욕심을 버리고 나를 입양 보냈다. 자신의 입양 사실을 헌신으로 받아들이려면 의지라는 요소가 필요하다. - P184

강간으로 임신한 아이를 키우는 여성은 강간범과 영원한 연결 고리를갖는 셈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증오와 두려움이 그 같은 연결을 유효하게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강간범이나 그 강간범의 아이 중 어느 한쪽이 궁극적으로 다른 한쪽을 찾아낼 것이라고 강간 피해자인 어머니가 굳게 믿는경우도 있다. 학대받은 아동이 이성보다는 생물학적 관계에 이끌려서 폭력적인 부모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강간을 당한 여성들이 끔찍할 만큼 강력한 연결 고리를 끊지 못하고 그들을 폭행한 사람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들은 강간범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행위가 그 결과로 태어난아이를 거부하는 행위라도 되는 것처럼 느낀다. 요컨대 이러한 여성들은자신이 강간당한 것에 걸맞은 분노를 느끼지 못할 경우 자신을 망치게 되고, 반대로 분노를 분명하게 드러낼 경우 아이를 망쳤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이 문제는 이혼한 사람들이 흔히 직면하는 문제의 보다 극단적인 버전이다. 이런 양면성을 극복하기까지 꼬박 한 세대가 소요되기도 한다.  - P189

원조 교제는 그동안 일반적으로 매도되어 왔던 범주다. 내가 인터뷰한 어떤 사람은 열여덟 살(법적 성인)이던 그보다 6개월 어린 여자 친구와 섹스를 한 것이 밝혀져서 체포되었다. 그 여자 친구의 부모가 그들의 관계를 인정했어도 소용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18세 이상의 성인이 절대로 18세 이하의 미성년자와 육체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다는 원칙이 옹호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럼에도 원조 교제가 명백히 강간인 경우가 많다. 부모에 의해서 방치되거나 학대를 당한 어린 소녀들에게 마틴 같은 남자들이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은 무궁무진하다.  - P206

최근의 한 연구는 <강요된 출산을 지배력과 통제권이라는 무기고에들어 있는 하나의 무기>로 간주했다. 남편에게 강간을 당한 수많은 여성들의 증언에 따르면 강간은 여성을 철저하게 자신의 지배하에 묶어 두려는 남자들이 사용하는 하나의 수단이며, <집에서 아이나 키우도록 함으로써 아내를 지배하려는 고전적인 수법이다. 조사에 응한 여성들은 다음과 같은 다양한 주장을 내놓았다. 그는 내가 절대로 아이들을 버리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항상 임신한 상태로 있도록 나를 강간했다.」「아이를 갖는 순간 당신은 그 남자의 소유물이 된다. 남자들이 아이를 만드는목적 중 하나는 당신을 통제하기 위해서다. 이러한 어머니를 둔 아이들은 그들이 상습적인 성폭력의 증거인 까닭에 정신적으로 엄청난 충격을받고, 그들 스스로 성폭력의 희생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매우높다.
강간을 당해도 마땅한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여성의 행동이 여성 자신의 안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는 있다. 그럼에도 되풀이해서 자신을 지극히 취약한 상황에 빠뜨리는 여성들도 있다. 보통 사람들은 잠재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나쁜 일을 대체로 미리 예상하지만 일이 이미 벌어진 다음에만 반응하는 사람들도 있다. 강간을 당해 아이를 낳은 수많은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그들이 자신의 선택에 내재된 위험성을 전혀예상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나쁜 일이 닥칠 때마다항상 새삼스레 놀라워했다. 심지어 동일한 가해자에 의해 똑같은 일이 저질러지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구분하지도 못했다. 사람에 대한 통찰력이 부족해서 당사자가 본색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나쁜 사람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 P207

내가 만난 여성들 중 그러한 문제가 있는 여성들은 어릴 때 제대로 된보살핌이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자란 경우가 많았다. 애초에 그들은 보살핌을 받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몰랐고 따라서 그 자체를 인지할 수 없었다. 어떤 이들은 사랑과 관심을 갈망했고 그래서 더욱 손쉬운 표적이 되었다. 또한 대다수가 방치되거나 학대받는 것에 익숙해서 그들에게 그런 순간들이 닥쳤을 때 순순히 받아들였다. 학대를 친밀함과 동일시하는 사람들도많았으며, 주어진 상황을 개선하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했지만 똑같은 과거를 단순히 되풀이하는 데 그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그들에게 익숙한 오물 속으로 후퇴했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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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릴리안이 멈칫하고는 뭘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뜻밖에도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얼굴이 새빨개진 채 침대 머리맡으로 다가와, 프랜시스에게서 한 발짝쯤 떨어진 자리에 멈춰 서서 그녀의 가슴에 손을 뻗었다. 젖가슴 자체를 만진 건 아니었다. 어리둥절한채 가만히 얼어붙어 있는 프랜시스의 가슴 위의 허공에 손을 올리더니, 거기에서 삐져나온 무언가를 움켜쥐듯 손가락을 구부리는 시늉을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입으로 끼익, 쉭 하는 소리를 내면서 천천히 손을 끌어당겼다.
그 짧은 연극이 끝날 때쯤에야 프랜시스는 그 의미를 이해했다. 릴리안이 손을 올렸던 자리는 프랜시스의 심장 바로 위였다. 릴리안은 심장에 박힌 말뚝을 빼내는 시늉을 한 것이다.
릴리안은 프랜시스와 한 번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지만, 그 손길은 매끄럽고 세심했다. 심지어 손을 우아하게 펼쳐서, 빼어 들었던 말뚝을 저편에 팽개치는 시늉까지 해 보였다. 그러고는 자기 행동에 담긴 의미에 스스로 놀랐는지 가만히 서 있었다. 릴리안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목 아래 피부가 북 가죽처럼 떨리는 게 프랜시스에게도 보였다. 둘은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 순간은 팽창하는 듯, 어딘가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채 정지한 듯 느껴졌다. 마치 물방울처럼, 눈물 한 방울처럼. 그러다가 커튼이 바람에 펄럭거리고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자 릴리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발길을 돌려 방을 나갔고, 문을 닫았다.
왜 그런 행동을 한 걸까? 무슨 의도로? 프랜시스는 베개에 등을 파묻은 채, 멀어져가는 릴리안의 발소리를 들으며 의문에 빠졌다. 가슴에 손을 얹어보니 상상 속의 말뚝에 관통당했던 자리가 약간 말랑말랑하게 느껴졌다. 프랜시스는 블라우스 옷깃을 끌어 내리고 축 처진캐미솔 끈을 젖힌 뒤, 방 저편의 거울 앞으로 건너가서 가슴을 비춰보았다. 눈에 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피부에 아무런 흠도, 자국도없었다. 당연히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침대로 돌아와 심장위에 손을 올리고 누우면서 그녀는 확신했다. 릴리안의 손길이 자신의 가슴에 일으켜놓은 어떤 열기가 일렁이는 것이, 피가 훅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진다고. -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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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에게는 미국 장애인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영재교육에 관한 연방 정부의 공식 지침도 없다. 하지만 우리가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는 차이로 나타나는 이례적인 머리를 가진 학생들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의 중요성을 인지한다면, 놀라운 능력을 보여 주는 이례적인 머리를 가진 학생들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특별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대니얼 신갤Daniel Singal은 「애틀랜틱 먼슬리」에서 <문제는 평등을 추구하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과정에 따라오는 우수성에 대한 편견이다> 2"라고 썼다. 2007년 「타임지에 쓴 글을 통해 교육가 존 클라우124John Cloud는 아동 낙오 방지법이 <철저히 평등주의적인> 가치관에만 근거해서 영재 학생들에게는 어떤 지원도 제공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2004년에 발표된 「전국 월반 현황에 관한 템플턴 보고서 Templeton National Report on Acceleration」는 학교 제도가 뛰어난 능력을 지닌 아이들의 발목을 잡기 위해 설계되었다고 단언한다. 적대적이거나 무관심한 교육제도에 직면해서 자녀의 요구를 지지하는 책임은 또다시 부모의 몫으로 떨어진다. 레온 보트스타인이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만약 베토벤이 오늘날의 유치원에 다녔다면 사람들은 그에게 약물치료를 했을 테고, 그는 우체국직원이 되었을 것이다. - P104

대부분의 경우에 사회적인 환경에 의해 성과가 좌우된다는 점에서 천재성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는 일도 사회의 책임이다. 어떤 면에서 천재성은 최고의 수평적 정체성이다. 스키에 선천적인 소질이 있지만 과테말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은 절대로 자신의 소질을 발견하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 아무리 컴퓨터 프로그래머로서 가장 중요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라도 15세기에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이누이트족으로 태어났어도 그토록 바쁜 일생을 보냈을까? 갈릴레오가 1990년대에 살았더라면 끈 이론을 발전시킬 수 있었을까? 이상적으로 말하면, 천재가 재능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도구와 환경뿐 아니라동료와 추종자로 이루어진 특정한 수용 집단이 필요하다. 미국의 인류학자 앨프리드 크로버가 1940년대에 주장했던 것처럼, 천재는 천재를 낳는다.137 아이작 뉴턴 경은 <내가 조금 더 멀리 봤다면 그건 그대들 같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오>‘"라고 인정했다. <성인(聖人)>과 마찬가지로 <천재>란 상당한 시간과 몇 번의 기적이 있어야 비로소 정당하게 붙을 수 있는 꼬리표다. 우리는 보다 인간적이고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장애인을 돕는다. 비범함에 대해서도 동일한 마음가짐으로 접근할 수있다. 동정은 장애인의 자존감을 저해한다.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적의가 유사한 장애물이다. 동정과 적의는 하나같이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느낄 때 나타나는 징후다. - P128

신동을 자녀로 둔 모든 부모들은 위험 요소가 많고 결과 또한 미심쩍은 목표에 지극히 헌신적이다. 요컨대 그들은 자칫 도외시될 수 있는 사회적 발달과 주체할 수 없는 실망감, 고질적인 괴리감, 심지어 가족 관계의영구적인 균열 등의 위험 요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성취하기 어려운, 그마저도 신동인 자녀가 어른이 되었을 때 정말로 원할지조차 확실치 않은생활 방식을 갈구한다. 자녀를 지나치게 몰아붙여서 결국 자녀가 포기하도록 만드는 부모들이 있는 반면에, 재능을 개발하고자 하는 자녀의 열정을 받쳐주지 못한 채 어쩌면 그 자녀가 향유했을 수 있는 유일한 삶을 박탈하는 부모들도 있다. 부모라면 누구나 어느 쪽으로든 실수를 범할 수있다. 자녀를 지나치게 밀어붙이는 실수가 훨씬 확연하게 보이고 특히 우리 문화에서 빈번하게 나타나지만 나머지 다른 하나도 심각한 실수이기는 마찬가지다. 평범한 자녀를 양육하는 법에 관한 사회적 동의가 부재한다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 비범한 자녀를 양육하는 법에 관한 사회적 동의도 없으며, 행복을 가늠하는 내적인 잣대가 근본적으로 다른 자녀 때문에신동 자녀를 둔 많은 부모들이 당황스러워한다는 사실 역시 놀라운 일은아니다 - P135

강간에 의해 태어나는 아동은 왜소증이나 다운증후군 아동만큼이나힘든 출발을 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임신은 재앙으로 여겨지며, 어쩌면이미 갈등으로 벌집이 된 가정생활을 완전히 뒤집어엎는다. 친모는 자신이 그 아이의 양육을 둘러싼 온갖 도전은 물론이고 그런 아이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를 극복할 수 있을지도 확신이 없다. 그 같은 상황에서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믿음직한 파트너는 좀처럼 드물다. 초보 어머니들에게는 으레 모순된 감정이 병존하기 마련이지만 흔히 강간으로 잉태된 아이의 친모가 직면하는 적대감과 혐오감은 그 가족에 의해서 더욱 증폭될수 있다. 또한 사회는 그런 어머니와 아이 모두에게 매정한 평가를 내릴 것이다.
대다수 장애에서 자신의 특정한 상황을 공유하지 않는 장애인들은 주어진 상황 안에서 인간적인 부분을 찾으려고 애쓰는 반면, 그들의 상황을 공유하는 장애인들은 지원과 인증, 집단적 정체성을 목표로 서로에게 이끌린다. 하지만 강간에 의해 태어난 아동의 경우 그들의 결함은 이방인에제도, 때로는 가족이나 친지에게도, 그리고 보통은 어쨌거나 그로 인한 정신적 그늘을 극복해야 하는 아동 본인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강간에 의해태어난 아동의 수평적 정체성은 난해한 동시에 상궤를 벗어난다. 일반적으로 그런 아동의 정체성은 입양된 경우와 마찬가지로 가족의 비밀이 되고, 누가, 무엇을, 언제, 누구에게 이야기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잠재적인위험을 내포한 거래가 된다. 자녀가 청각 장애이거나, 신동이거나, 자폐인경우 부모는 그 사실을 오직 짧은 시간 동안만 비밀로 할 수 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금방 알아차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당사자인 아동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반면에, 강간에 의해 태어난 아이는자신의 정체성을 모른 채 평생을 살아갈 수도 있다. 이는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과 어머니의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의 모습이 각각의 사례별로 유동적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아이가 입양의 완전한 의미를 이해할 수 없더라도 해당 사실을 일찍부터 아이와 공유해야 한다고 믿는 전문가들이 많은 입양의 경우와 달리, 강간은 이제 막 걸음마를뗀 아이에게 설명해 주기에는 너무나 혼란스럽고 무서운 이야기다. 아이의 입장에서 자기 부모에게 약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록 그 약점에 자신이 연루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끔찍한 일이다. - P139

여성을 비난하는 이러한 관행은 19세기초 사회정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비로소 변화를 맞이했다. 「킹스턴 브리티시 휘그Kingston British Whig』 지는 1835년에 <행실이 나쁜 여성이라고해서 법적으로 보호받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 당시 미국에서는 흑인 여성에 대한 강간은 인정되지 않았다. 자신의 소유물을 침해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었기 때문이며, 주인에 의한 강간으로 태어나는 아이들 역시 노예가 되었다. 강간죄로 기소되는 흑인 남성은 혹시라도 재판 없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대체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한편 백인 남성은 기소를 피하기 위해 백인 피해자와 돈으로 합의하는 경우가 많았다. 1800년대의 법원은 어쩌면 억울하게 기소되었을지 모를 백인 남성을 보호하는 데 주로 관심을 기울였다.‘ 강간 혐의로 상대를제소하고자 하는 여성은 일반적으로 육체적 상해를 증거로 제시해서 자신이 저항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했으며, 피의자 남성이 그녀의 질 내부에사정했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입증>해야 했다. " - P143

마리나는 아뮬라와 함께 있을 때자신이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는다. 나는 이를테면 <오, 내일수영을 해야 하는데 네 옷들은 깨끗하니?>라는 생각을 해요. 엄마 노릇에 전념하는 거죠. 그때의 기억이 스멀스멀 떠오르는 것은 밤에 자려고 혼자침대에 누웠을 때예요. 그녀는 자신을 이라크에서 돌아온 참전 용사에 비유했다. 그들은 말로 결코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광경들을 목격했어요. 그런 상태로 고향에 돌아왔기 때문에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라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 거죠. 아무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그들에게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런저런 기대를 갖고 있는 지역사회로 돌아가죠. 내가 받는 느낌이 바로 그래요.
그녀는 강간을 당한 직후에 아이를 낳음으로써 회복에 걸린 시간이 단축된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말했다. 「나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했고, 앞으로 나아가야 했으며, 이 아이를 돌봐야 했어요.」 하지만 만약 아뮬라가 없었다면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단순히 잊으려고 노력하는 데그쳤을 거라고 인정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가서는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겠죠.

마음만 먹으면 손쉽고 안전하게 낙태할 수 있는 환경은 강간으로 임신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여성으로 하여금 결정이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자신이 결정의 주체라고 느끼도록 도와준다. 심지어 임신에 관련된 각종선택에 반대하는 사람들조차 일반적으로 <강간의 예외성>을 인정한다. 적어도 이 무대에서만큼은 강간 피해자 여성에게 무제한의 독립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요컨대 낙태를 하든, 꼬박 10개월을 기다려서 아이를 낳은 또는 직접 아이를 키우든, 아니면 입양을 보내든, 당사자인 여성의 결정이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한 아이를 직접 키우기로 결정하는 여성은 장애 아동을 둔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아이의 도전적인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로 아이와 함께 사회적인 비난에 직면하기도 한다.
낙태할 방법이 없어서, 또는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또는 강압적인 파트너나 남편, 부모 때문에 강간에 의해 임신한 아이를 그대로 낳아 기르는여성들도 많다. 나는 깊은 자기반성의 의미로 그 같은 결정을 내린 여성들도 만났다. 임신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강간당할 때 경험했던 강요된 수동성을 침묵 속에서 똑같이 재연하는 행위라고 주장하는 여성들도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아이를 증거처럼 느낀다고 밝혔다. 그들은 아이를 지우는 것이 그 아이가 존재하도록 만든 사건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설명했다. 어떤 경우든 낙태를 선택하는 행위는 페미니즘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여성들 중 상당수는 유일하게 낙태 반대 운동을 통해 도움을 받았고, 따라서 그들이 꼭 동의하는 것은 아닌 도덕적 담론의 짐을 짊어지게 되었다. 강간으로 생긴 아이를 낳아서 키우기로 선택한 많은 여성들이 낙태를 강요하는 극심한 사회적 압력을 느꼈다고 밝혔다. - P153

강간에 의해 잉태된 아기는 친모의 유전자와 강간범의 유전자를 나눠갖는다. 따라서 어떤 여성들은 강간으로 잉태된 태아를, 외부 생명체가 자신의 육체를 부당하게 정복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반면에 어떤 여성들은 자신의 확장된 모습으로 받아들인다. 유에스 뉴스 앤 월드 리포트U.S. News & World Report]에 소개된 한 기사에 따르면, 사정이 달랐으면 아마도 낙태에 반대했을 한 여성이 강간을 당해서 임신한 여동생에게 <만약어떤 사람이 네게 총을 쐈다면 너는 그 총알을 계속 몸 안에 지니고 다니겠니?"라고 조언한다. 똑같은 상황의 다른 어떤 여성은 <아기에게는 죄가 없다. 나처럼 희생자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몸 안에 있는 <총알을 제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무고한 아기>의 생명을 빼앗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화자가 사용하는 용어는 그사람의 도덕적 가치관을 암시한다. 낙태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 조앤 켐Joan Kemp는 <강간에 의해 태어난 아이를 《강간 피해자의 아이》라고 부르지 않고 대체로 《강간범의 아이>라고 부르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대체 어떻게 강간범이 <아이의 아버지>로 간주될 수 있을까?>라고 개탄한다. 용어의 선택은 <합리적인> 행동 방침을 좌우할 수 있다. 켐프는 초병에게 강간을 당한 한 여성이 <그 아이는 내 아이이며, 그 아이를 거부하는것은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에 굴복하는 행위라고 판단했다>고 말한다.
그 여성의 경우에 친모에게 박힌 상징적인 총알은 그녀에게 힘을 주는 원천이었다. - P154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분명한 생각이 없는 젊은 여성이나 어린 소녀는 강간에 의한 임신을 유지하거나 중단하기로 결정할 때 대체로 부모나 다른 연장자의 바람에 대한 반항심이나 복종심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임신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여성들도 있다. 강간이 원인이 된 임신 사례 중 3분의 1은 임신 중기(中期)가 되어서야 발견된다. 임신 사실을 뒤늦게 발견하거나 그에 따른 대응이 늦어질 경우 여성의 선택권이 줄어드는 문제도 있지만, 아기를 낳을지 말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도 피해 여성이 여전히 회복되는 과정에 있는 경우가 많다. 궁극적으로 어떤 선택을 하든 상관없이 강간에 이은 임신은 우울증과 불안, 불면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 강간은 영구적인 손상을 초래한다. 흉터를 남기지는않지만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긴다. 내가 인터뷰한 어떤 여성이 말했듯이<아이를 지울 수는 있지만 경험까지 지울 수는 없다>.
철학자인 동시에 강간 피해자이기도 한 수전 브라이슨Susan Brison은 <트라우마는 피해 여성의 의식과 무의식을 점령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몸 안에 모든 감각 기관에 남아서 트라우마를 초래한 사건을 되살릴 기회가 생기면 언제든 수면 위로 부상시킬 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임신은 낙태나 출산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몸 안에서 말 그대로 그 같은 상황을 연출한다. 강간 피해 여성들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설명하면서 크로아티아의 정신의학과 교수 베라 폴네고비츠-스멜크Vera Folnegović-Smalc는 <우리는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본능을 잃어버렸거나 심지어 죽음을 동경하는 환자들과 자주 마주친다. 특히 자살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말했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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