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에게는 미국 장애인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영재교육에 관한 연방 정부의 공식 지침도 없다. 하지만 우리가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는 차이로 나타나는 이례적인 머리를 가진 학생들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의 중요성을 인지한다면, 놀라운 능력을 보여 주는 이례적인 머리를 가진 학생들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특별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대니얼 신갤Daniel Singal은 「애틀랜틱 먼슬리」에서 <문제는 평등을 추구하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과정에 따라오는 우수성에 대한 편견이다> 2"라고 썼다. 2007년 「타임지에 쓴 글을 통해 교육가 존 클라우124John Cloud는 아동 낙오 방지법이 <철저히 평등주의적인> 가치관에만 근거해서 영재 학생들에게는 어떤 지원도 제공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2004년에 발표된 「전국 월반 현황에 관한 템플턴 보고서 Templeton National Report on Acceleration」는 학교 제도가 뛰어난 능력을 지닌 아이들의 발목을 잡기 위해 설계되었다고 단언한다. 적대적이거나 무관심한 교육제도에 직면해서 자녀의 요구를 지지하는 책임은 또다시 부모의 몫으로 떨어진다. 레온 보트스타인이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만약 베토벤이 오늘날의 유치원에 다녔다면 사람들은 그에게 약물치료를 했을 테고, 그는 우체국직원이 되었을 것이다. - P104

대부분의 경우에 사회적인 환경에 의해 성과가 좌우된다는 점에서 천재성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는 일도 사회의 책임이다. 어떤 면에서 천재성은 최고의 수평적 정체성이다. 스키에 선천적인 소질이 있지만 과테말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은 절대로 자신의 소질을 발견하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 아무리 컴퓨터 프로그래머로서 가장 중요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라도 15세기에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이누이트족으로 태어났어도 그토록 바쁜 일생을 보냈을까? 갈릴레오가 1990년대에 살았더라면 끈 이론을 발전시킬 수 있었을까? 이상적으로 말하면, 천재가 재능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도구와 환경뿐 아니라동료와 추종자로 이루어진 특정한 수용 집단이 필요하다. 미국의 인류학자 앨프리드 크로버가 1940년대에 주장했던 것처럼, 천재는 천재를 낳는다.137 아이작 뉴턴 경은 <내가 조금 더 멀리 봤다면 그건 그대들 같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오>‘"라고 인정했다. <성인(聖人)>과 마찬가지로 <천재>란 상당한 시간과 몇 번의 기적이 있어야 비로소 정당하게 붙을 수 있는 꼬리표다. 우리는 보다 인간적이고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장애인을 돕는다. 비범함에 대해서도 동일한 마음가짐으로 접근할 수있다. 동정은 장애인의 자존감을 저해한다.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적의가 유사한 장애물이다. 동정과 적의는 하나같이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느낄 때 나타나는 징후다. - P128

신동을 자녀로 둔 모든 부모들은 위험 요소가 많고 결과 또한 미심쩍은 목표에 지극히 헌신적이다. 요컨대 그들은 자칫 도외시될 수 있는 사회적 발달과 주체할 수 없는 실망감, 고질적인 괴리감, 심지어 가족 관계의영구적인 균열 등의 위험 요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성취하기 어려운, 그마저도 신동인 자녀가 어른이 되었을 때 정말로 원할지조차 확실치 않은생활 방식을 갈구한다. 자녀를 지나치게 몰아붙여서 결국 자녀가 포기하도록 만드는 부모들이 있는 반면에, 재능을 개발하고자 하는 자녀의 열정을 받쳐주지 못한 채 어쩌면 그 자녀가 향유했을 수 있는 유일한 삶을 박탈하는 부모들도 있다. 부모라면 누구나 어느 쪽으로든 실수를 범할 수있다. 자녀를 지나치게 밀어붙이는 실수가 훨씬 확연하게 보이고 특히 우리 문화에서 빈번하게 나타나지만 나머지 다른 하나도 심각한 실수이기는 마찬가지다. 평범한 자녀를 양육하는 법에 관한 사회적 동의가 부재한다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 비범한 자녀를 양육하는 법에 관한 사회적 동의도 없으며, 행복을 가늠하는 내적인 잣대가 근본적으로 다른 자녀 때문에신동 자녀를 둔 많은 부모들이 당황스러워한다는 사실 역시 놀라운 일은아니다 - P135

강간에 의해 태어나는 아동은 왜소증이나 다운증후군 아동만큼이나힘든 출발을 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임신은 재앙으로 여겨지며, 어쩌면이미 갈등으로 벌집이 된 가정생활을 완전히 뒤집어엎는다. 친모는 자신이 그 아이의 양육을 둘러싼 온갖 도전은 물론이고 그런 아이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를 극복할 수 있을지도 확신이 없다. 그 같은 상황에서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믿음직한 파트너는 좀처럼 드물다. 초보 어머니들에게는 으레 모순된 감정이 병존하기 마련이지만 흔히 강간으로 잉태된 아이의 친모가 직면하는 적대감과 혐오감은 그 가족에 의해서 더욱 증폭될수 있다. 또한 사회는 그런 어머니와 아이 모두에게 매정한 평가를 내릴 것이다.
대다수 장애에서 자신의 특정한 상황을 공유하지 않는 장애인들은 주어진 상황 안에서 인간적인 부분을 찾으려고 애쓰는 반면, 그들의 상황을 공유하는 장애인들은 지원과 인증, 집단적 정체성을 목표로 서로에게 이끌린다. 하지만 강간에 의해 태어난 아동의 경우 그들의 결함은 이방인에제도, 때로는 가족이나 친지에게도, 그리고 보통은 어쨌거나 그로 인한 정신적 그늘을 극복해야 하는 아동 본인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강간에 의해태어난 아동의 수평적 정체성은 난해한 동시에 상궤를 벗어난다. 일반적으로 그런 아동의 정체성은 입양된 경우와 마찬가지로 가족의 비밀이 되고, 누가, 무엇을, 언제, 누구에게 이야기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잠재적인위험을 내포한 거래가 된다. 자녀가 청각 장애이거나, 신동이거나, 자폐인경우 부모는 그 사실을 오직 짧은 시간 동안만 비밀로 할 수 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금방 알아차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당사자인 아동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반면에, 강간에 의해 태어난 아이는자신의 정체성을 모른 채 평생을 살아갈 수도 있다. 이는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과 어머니의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의 모습이 각각의 사례별로 유동적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아이가 입양의 완전한 의미를 이해할 수 없더라도 해당 사실을 일찍부터 아이와 공유해야 한다고 믿는 전문가들이 많은 입양의 경우와 달리, 강간은 이제 막 걸음마를뗀 아이에게 설명해 주기에는 너무나 혼란스럽고 무서운 이야기다. 아이의 입장에서 자기 부모에게 약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록 그 약점에 자신이 연루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끔찍한 일이다. - P139

여성을 비난하는 이러한 관행은 19세기초 사회정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비로소 변화를 맞이했다. 「킹스턴 브리티시 휘그Kingston British Whig』 지는 1835년에 <행실이 나쁜 여성이라고해서 법적으로 보호받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 당시 미국에서는 흑인 여성에 대한 강간은 인정되지 않았다. 자신의 소유물을 침해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었기 때문이며, 주인에 의한 강간으로 태어나는 아이들 역시 노예가 되었다. 강간죄로 기소되는 흑인 남성은 혹시라도 재판 없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대체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한편 백인 남성은 기소를 피하기 위해 백인 피해자와 돈으로 합의하는 경우가 많았다. 1800년대의 법원은 어쩌면 억울하게 기소되었을지 모를 백인 남성을 보호하는 데 주로 관심을 기울였다.‘ 강간 혐의로 상대를제소하고자 하는 여성은 일반적으로 육체적 상해를 증거로 제시해서 자신이 저항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했으며, 피의자 남성이 그녀의 질 내부에사정했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입증>해야 했다. " - P143

마리나는 아뮬라와 함께 있을 때자신이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는다. 나는 이를테면 <오, 내일수영을 해야 하는데 네 옷들은 깨끗하니?>라는 생각을 해요. 엄마 노릇에 전념하는 거죠. 그때의 기억이 스멀스멀 떠오르는 것은 밤에 자려고 혼자침대에 누웠을 때예요. 그녀는 자신을 이라크에서 돌아온 참전 용사에 비유했다. 그들은 말로 결코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광경들을 목격했어요. 그런 상태로 고향에 돌아왔기 때문에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라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 거죠. 아무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그들에게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런저런 기대를 갖고 있는 지역사회로 돌아가죠. 내가 받는 느낌이 바로 그래요.
그녀는 강간을 당한 직후에 아이를 낳음으로써 회복에 걸린 시간이 단축된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말했다. 「나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했고, 앞으로 나아가야 했으며, 이 아이를 돌봐야 했어요.」 하지만 만약 아뮬라가 없었다면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단순히 잊으려고 노력하는 데그쳤을 거라고 인정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가서는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겠죠.

마음만 먹으면 손쉽고 안전하게 낙태할 수 있는 환경은 강간으로 임신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여성으로 하여금 결정이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자신이 결정의 주체라고 느끼도록 도와준다. 심지어 임신에 관련된 각종선택에 반대하는 사람들조차 일반적으로 <강간의 예외성>을 인정한다. 적어도 이 무대에서만큼은 강간 피해자 여성에게 무제한의 독립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요컨대 낙태를 하든, 꼬박 10개월을 기다려서 아이를 낳은 또는 직접 아이를 키우든, 아니면 입양을 보내든, 당사자인 여성의 결정이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한 아이를 직접 키우기로 결정하는 여성은 장애 아동을 둔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아이의 도전적인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로 아이와 함께 사회적인 비난에 직면하기도 한다.
낙태할 방법이 없어서, 또는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또는 강압적인 파트너나 남편, 부모 때문에 강간에 의해 임신한 아이를 그대로 낳아 기르는여성들도 많다. 나는 깊은 자기반성의 의미로 그 같은 결정을 내린 여성들도 만났다. 임신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강간당할 때 경험했던 강요된 수동성을 침묵 속에서 똑같이 재연하는 행위라고 주장하는 여성들도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아이를 증거처럼 느낀다고 밝혔다. 그들은 아이를 지우는 것이 그 아이가 존재하도록 만든 사건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설명했다. 어떤 경우든 낙태를 선택하는 행위는 페미니즘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여성들 중 상당수는 유일하게 낙태 반대 운동을 통해 도움을 받았고, 따라서 그들이 꼭 동의하는 것은 아닌 도덕적 담론의 짐을 짊어지게 되었다. 강간으로 생긴 아이를 낳아서 키우기로 선택한 많은 여성들이 낙태를 강요하는 극심한 사회적 압력을 느꼈다고 밝혔다. - P153

강간에 의해 잉태된 아기는 친모의 유전자와 강간범의 유전자를 나눠갖는다. 따라서 어떤 여성들은 강간으로 잉태된 태아를, 외부 생명체가 자신의 육체를 부당하게 정복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반면에 어떤 여성들은 자신의 확장된 모습으로 받아들인다. 유에스 뉴스 앤 월드 리포트U.S. News & World Report]에 소개된 한 기사에 따르면, 사정이 달랐으면 아마도 낙태에 반대했을 한 여성이 강간을 당해서 임신한 여동생에게 <만약어떤 사람이 네게 총을 쐈다면 너는 그 총알을 계속 몸 안에 지니고 다니겠니?"라고 조언한다. 똑같은 상황의 다른 어떤 여성은 <아기에게는 죄가 없다. 나처럼 희생자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몸 안에 있는 <총알을 제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무고한 아기>의 생명을 빼앗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화자가 사용하는 용어는 그사람의 도덕적 가치관을 암시한다. 낙태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 조앤 켐Joan Kemp는 <강간에 의해 태어난 아이를 《강간 피해자의 아이》라고 부르지 않고 대체로 《강간범의 아이>라고 부르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대체 어떻게 강간범이 <아이의 아버지>로 간주될 수 있을까?>라고 개탄한다. 용어의 선택은 <합리적인> 행동 방침을 좌우할 수 있다. 켐프는 초병에게 강간을 당한 한 여성이 <그 아이는 내 아이이며, 그 아이를 거부하는것은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에 굴복하는 행위라고 판단했다>고 말한다.
그 여성의 경우에 친모에게 박힌 상징적인 총알은 그녀에게 힘을 주는 원천이었다. - P154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분명한 생각이 없는 젊은 여성이나 어린 소녀는 강간에 의한 임신을 유지하거나 중단하기로 결정할 때 대체로 부모나 다른 연장자의 바람에 대한 반항심이나 복종심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임신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여성들도 있다. 강간이 원인이 된 임신 사례 중 3분의 1은 임신 중기(中期)가 되어서야 발견된다. 임신 사실을 뒤늦게 발견하거나 그에 따른 대응이 늦어질 경우 여성의 선택권이 줄어드는 문제도 있지만, 아기를 낳을지 말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도 피해 여성이 여전히 회복되는 과정에 있는 경우가 많다. 궁극적으로 어떤 선택을 하든 상관없이 강간에 이은 임신은 우울증과 불안, 불면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 강간은 영구적인 손상을 초래한다. 흉터를 남기지는않지만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긴다. 내가 인터뷰한 어떤 여성이 말했듯이<아이를 지울 수는 있지만 경험까지 지울 수는 없다>.
철학자인 동시에 강간 피해자이기도 한 수전 브라이슨Susan Brison은 <트라우마는 피해 여성의 의식과 무의식을 점령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몸 안에 모든 감각 기관에 남아서 트라우마를 초래한 사건을 되살릴 기회가 생기면 언제든 수면 위로 부상시킬 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임신은 낙태나 출산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몸 안에서 말 그대로 그 같은 상황을 연출한다. 강간 피해 여성들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설명하면서 크로아티아의 정신의학과 교수 베라 폴네고비츠-스멜크Vera Folnegović-Smalc는 <우리는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본능을 잃어버렸거나 심지어 죽음을 동경하는 환자들과 자주 마주친다. 특히 자살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말했다. - P16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