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말해, 대가를 지급하기로 약속한 결과 창조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향상되기는커녕 오히려 저하되었다. 교육 심리학에서는 이외에도 다양한 실험으로 대가, 특히 ‘예고된‘ 대가가 인간의 창조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현저히 훼손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 가운데 유명한 실험을 하나 예로 들자면 에드워드 데시 교수와리처드 리스트너 교수, 리처드 라이언 교수의 연구를 꼽을 수 있다.
그들은 대가가 학습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128건의 연구에 메타 분석meta analysis (단일 주제를 조사한 많은 연구물의 결과를 객관적으로 종합해 고찰하는 연구 기법-옮긴이)을 실시했다. 이 실험의 결과로 그들은 과정의어느 단계에서든 대가를 예고하면 이미 재미를 느껴 몰입해 있는 활동에 대한 자발적 동기가 저하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에드워드 데시 교수의 연구에서는 대가를 약속하면 피험자의성과가 저하되고, 예상 가능한 정신 측면에서의 손실을 최소한도로 억제하거나 또는 성과급이 기대되는 행동만을 하도록 만든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즉 대가를 약속받으면 높은 성과물을 내려고 최대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적은 노력으로 가장 많은 대가를 얻기위해서 무엇이든 하게 된다는 것이다. 더불어 스스로 과제를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신의 능력과 지식을 향상시킬 수 있는 도전적인 과제가 아니라 가장 많은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과제를 선택하게된다. - P64

예정설에 따르면 깊은 신앙심이나 많은 선행은 그 사람이 신에게 구원받는 여부와는 관계가 없다. 이러한 사고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동기‘의 인식과 크게 모순을 일으킨다. 대가와 노력의 관계에서 보면, 대가가 약속되어 있기에 노력하려는 동기가 생겨난다는 사고가 보편적이다. 그런데 예정설에 따르면 노력 여부와 상관없이 대가를 받을 사람과 받지 못할 사람이 미리 결정되어 있다.
이 인과관계를 불교와 비교해 보면 예정설의 이상한 점이 눈에띈다. 불교에서는 모든 일이 원인에서 발생한 결과이며 원인 없이는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는 인과율을 중시한다. 전 우주는 인과율에 지배받고 있으며, 석가모니의 큰 깨달음 역시 이 인과율의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석가모니는 전 우주를 지배하는 인과율을 ‘다르마dharma‘, 즉 법이라고 명명했다. 당연히 석가모니 이전부터 법은 존재했다. 교조와는 별개로 절대적으로 법이 존재했으므로 이를 ‘법전불후法前佛後‘라고 한다. 반면 예정설은 이를 완전히 뒤엎는다. 신이 모든것을 미리 정해 놓기 때문에 인과율은 적용되지 않는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신전법후神前法後‘인 셈이다. - P78

그렇다면 노력 여부에 관계없이 구원받을 사람은 미리 정해져 있다는 믿음이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까? 이 물음에 "그 반대다!"라고 외친 사람이 막스 베버다. 그는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칼뱅파의 예정설이 자본주의를 발달시켰다는 논리를 펼쳤다.
구원 여부도 불확실하고 현세에서의 선행도 의미가 없다면 사람들이 쉽게 허무 사상에 빠져들 수 있다. 혹은 현세에서 어떤 삶을살아가든 구원받을 자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쾌락을 좇으며 사는과감한 선택을 내리기 쉬울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물론 그런사람도 있었겠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전능한 신에게 구원받기로 미리 정해진 사람이라면 금욕적으로 천명(독일어로 beruf,
이 단어는 ‘직업‘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됨-옮긴이)을 다해 성공하는 인간일거라 생각하고 ‘자신이야말로 구원받기로 선택된 인간‘이라는 증거를 얻기 위해 금욕적으로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는 것이 막스 베버의 논리다. - P79

로크가 도달한 결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일이든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생각, 즉 현실 세계에 관한 이해는 직접 감각을 통해 얻은 경험에 의해 이끌리든가 아니면 간접 경험으로부터 도출된 요소가 바탕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아주 당연하게 들린다. 그 사람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더욱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그 사람이 무엇을 긍정하고 있는지보다 무엇을 부정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있다. 철학에서도 이러한 사고방식은 유용하다. 과연 로크는 무엇을 부정했을까? 로크는 두 위대한 철학자의 사고를 부정했다.
한 사람은 데카르트다. 세상을 단순한 사고와 연역으로 이해할수 있다는, 즉 경험에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는 데카르트의 주장을 로크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로크가 부정한 또 한 사람은 플라톤이다. 로크는 이데아와 관련해서,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전생에서 얻은 지식을 갖고 있다는 플라톤의 주장을 강하게 부정했다. 그는 사람이 태어날 때는 백지 상태이며 그 위에 경험이 채색되면서 점차 현실에 관한 지식과 이해가 구축된다고 믿었다. - P83

시민이 중세 이후 지속된 봉건제도의 예속에서 해방된 시기는유럽은 16세기에서 18세기에 걸친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후,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거치고 난 뒤다. 시민이 자유를 획득하기까지는수많은 희생이 따랐다. 소위 자유라는 것을 얻기 위해 매우 비싼 값을 치른 셈이다. 그렇다면 그 값비싼 자유를 손에 넣은 사람들은 과연 행복해졌을까?
프롬은 나치 독일에서 발생한 파시즘‘ascism에 주목했다. 왜 비싼대가를 치르고 획득한 ‘자유의 과실‘을 맛본 근대인이 그것을 내던져 버리고 파시즘의 전체주의에 그토록 열광했을까? 날카로운 고찰은 언제나 예리한 질문에서 탄생한다. 이 의문에 대한 프롬의 대답또한 우리의 가슴을 찌를 듯이 날카롭다.
프롬의 분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자유에는 견디기 어려운고독과 통렬한 책임이 따른다. 이 고독과 책임을 감당하고 견디면서, 더욱이 진정한 인간성의 발로라고 할 수 있는 자유를 끊임없이 갈구함으로써 비로소 인류에게 바람직한 사회가 탄생하는 법이다.
하지만 자유의 대가로서 필연적으로 만들어지는, 폐부를 찌르는 듯한 고독과 책임의 무게에 몹시 지친 나머지 그들은 비싼 대가를 치르고 손에 넣은 자유를 내던지고 나치의 전체주의를 택한다. 특히나치즘을 지지하는 세력의 중심에 소상인, 장인, 사무직 근로자들로이루어진 하층 및 중산 계급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프롬은 자유로부터 벗어나 권위에 맹종하는 길을 선택한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성격 특성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프롬은 하층 및 중산계급 중에서 나치즘을 반기며 맞이한 이들이 자유로부터 도피하기 쉬운 성격이며 자유의 무게에서 벗어나 새로운 의존과 종속을 추구하는 성향임을 밝히고 이를 ‘권위주의적 성격‘이라고 명명했다. 프롬에 의하면, 이러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권위를 따르기 좋아하는 한편, 스스로 권위를 갖고 싶어 하고 동시에 다른 사람을 복종시키고 싶어 한다. 한마디로 ‘자신보다 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아첨하고 아랫사람에게는 거만하게 구는 인간‘이다. 이 권위주의적 성격이 파시즘 지지의 기반이 된 것이라고 프롬은 강조했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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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비만이면 당신의 몸은 여러 측면에서 공식 기록이 된다. 당신의 몸은 지속적으로 뚜렷하게 대중에게 전시된다. 사람들은 당신의 몸에 대해 자신들이 추측한 이야기를 입힐 뿐이고 당신의 몸에 담긴 진실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 진실이 무엇인가에는 상관없이.
뚱뚱하다는 건 피부색과 흡사하게 절대로 숨길 수 없는 특징으로 아무리 짙은 색 옷만 입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 가로줄 무늬 옷을 피해도별수 없다. 파티에서 벽에 기대어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일에 점점더 능숙해지기도 한다. 혹은 파티에서 재담꾼이 되어야만 하는데, 그래야 사람들이 당신을 비웃거나 당신과 함께 웃느라 바빠서 그들이 속으로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을 당신의 체중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있기때문이다. 이 세상은 당신 같은 몸에는 어떤 인내심도 어떤 자비도 베풀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고 어떻게든 이 안에서 살아남는 법을 고안해야한다.
당신이 무슨 말과 행동을 하는지에 상관없이 오직 당신의 몸만이 가족과 친구들에게, 때론 낯선 사람들에게 공공 담론의 대상이 된다. 당신의 몸무게가 늘었을 때, 감량을 했을 때, 혹은 그대로 유지했을 때도 어느 누구나 당신 몸의 비평가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은 당신에게 비만의 위험성에 대한 각종 통계와 정보를 코앞에 들이미는데 마치 당신은 뚱뚱할 뿐만 아니라 멍청해서 당신 몸의 실체에 대해, 그 몸을 최대한 적대적으로 대하는 이 세상에 대해 무지하거나 착각에 빠져 있는 줄 아는 것 같다. 그 사람들은 언제나 당신에게 가장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이런 비평들은 항상 염려라는 말로 포장되곤 한다. 그들은 당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잊는다. 당신은 곧 당신의 몸이고 결코 그 이상이 아니며 당신의 몸은 그보다 더 못한 것이 되어야만 한다. - P145

유행병이란 급속히 확산되는 전염성 질환을 말한다. 인류는 주기적으로 도래하는 전염성 질환의 행군을 막을 수가 없었다. 역사적으로 우리가 아는 수많은 유행병이 있으나 -홍역, 독감, 수두, 가래톳 페스트, 황열병, 말라리아, 콜레라-뉴스 보도에 따르면 이 가운데 어떤 것도 비만 유행병만큼 치명적이거나 만연해 있지 않다고 한다. 이 질병의 증상은 고열, 물집, 림프샘 비대, 발진이 아니라 출렁거리는 복부와 비대한 몸집이다. 비만인의 몸은 무절제와 타락과 나약함의 상징이다. 비만인의 몸은 대규모 감염이 진행되고 있는 현장이다. 이 몸은 의지력과 음식과 신진대사 사이의 전쟁이 벌어졌다가 폐허가 되어버린 전쟁터이며 당신이 최후의 패배자다. - P147

내가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여성스러운 표현이 있다. 왜냐하면 내 몸이 사회에서 강요하는 여성스러운 몸에 대한 기준에 맞지 않으므로 내겐 그런 표현을 사용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 나를 혹은 내가 누군가를 부드럽게 만지는 식의 온화한 애정 표현을 거부한다. 마치 나 같은 몸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런 쾌락을 누릴 자격이 없다는 듯이. 학대는 사실 내가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다. 나는 내게 매력이 있다는 것도 부정한다. 물론 내게도 매력적인 면이 있지만 그것을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내가 어떻게 감히 그런 것을 원할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감히 내가 원하는 것을 고백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감히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행동할 수 있을까?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스스로 금기시해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기를 깨고 뛰쳐나오려고 몸부림치는 수많은 욕망이 내 안에 있다.
거부함으로써 우리가 원하는 것을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둘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것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와 호텔 방에서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즐겁게 밀린 수다를 떨고 있는데 친구가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더니 엄지손톱에 매니큐어를 발라주겠다고 했다. 꼭 발라주고말겠다고 거의 협박조로 말했지만 나는 애매한 이유들을 대가며 거부하고 또 거부했다. 그러다 마침내 나는 굴복했고 내 손을 친구의 손에 맡겼고 친구는 사랑스러운 분홍색으로 내 손톱을 정성스럽게 칠해주었다.
호호 불었고, 마르게 놔두라고 했고, 두 번째 코팅을 했다. 그날 밤은 그렇게 흘렀다. 다음 날 나라 반대쪽으로 가는 비행기에 앉아서 내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최근에 언제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이라는 단순한 기쁨을 스스로에게 허락했는지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내 손톱을 바라보는건 매우 기쁜 일이었는데 내 손톱은 적당히 길었고, 모양도 가지런했고,
내가 손톱을 물어뜯는 습관이 있지만 아직 물어뜯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나는 그만 자의식에 사로잡혔고 엄지를 손바닥에 바짝 붙였다. 마치 이 손가락을 숨겨야 한다는 듯이, 마치 나에게는 예쁠 자격이없다는 듯이, 나 자신에 대해 좋은 기분을 느끼면 안 된다는 듯이, 여성으로서 지켜야 하는 규범-여자란 아담한 몸을 가져야 하고 공간을 적게 차지해야 한다는-을 명백히 어기고 있기 때문에 나를 여성으로 인정하면 안 된다는 듯이 말이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친구는 비행기에서 먹으라고 감자칩 한 봉지를 사주겠다고 했었지만 나는 거부했다. 내가 말했다. "나 같은 사람은 공공장소에서 그런 음식 먹는 거 아니야." 그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한 말 중에서 가장 솔직한 말이었다. 우리 우정의 깊이 덕분에 그런 고백까지 할 수 있었고, 그다음에는 내가 이런 끔찍한 서사에 나를 맞추고 내면화하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졌고, 내가 내 몸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졌고, 너무나 많은 것을 부정하고 살면서도 여전히 충분하지 않은 듯 수많은 것을 부정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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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배우는 새로운 방법

세상에는 소위 철학 입문서가 차고 넘친다. 인터넷 서점에 ‘철학 입문‘이라고 검색하면 철학의 대가인 버트런드 러셀의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비롯해 무려 만 권이 넘는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렇게까지 많은 입문서가 쓰였다는 것은 최종적으로 대표할 만한 책이 아직 쓰이지 않았다는 증거이므로 새롭게 철학 입문서를 쓰는 의미가 있다고도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미 이렇게나 많은 철학입문서가 존재하는 상황이라면 지금까지 쓰인 유사 도서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요소를 드러내지 않는 한 큰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지금까지 나온 방대한 철학 입문서들과 이 책의 차이점을 설명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이 책을 여타 철학 입문서들과 구별 짓는 핵심은 다음 세 가지다.
① 목차를 시간축으로 구성하지 않는다
② 현실의 쓸모에 기초한다
③ 철학 이외의 영역도 다룬다 - P26

•물음의 종류 What‘과 ‘How‘
•배움의 종류 ‘프로세스‘와 ‘아웃풋‘

우선 첫 번째 축인 ‘물음의 종류‘에 관해 생각해 보자. 고대 그리스 시대 이후 수많은 철학자가 다양한 사고를 전개해 왔는데, 이 모든 사상은 다음 두 가지 물음에 어떻게든 답하려 했던 노력으로 인식할 수 있다.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 What의 물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 How의 물음

‘물건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라는 문제에 집중한 고대 그리스의 데모크리토스는 전형적으로 ‘What의 물음‘에 몰두한 철학자다. 한편 기독교적 관점에서 초극(곤경이나 어려움을 극복해 냄옮긴이)을 염두에 두고, ‘근대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의 문제를 ‘초인‘의 개념을 통해 풀고자 했던 니체는 전형적으로 ‘How의 물음‘에 주력한 철학자다. - P39

 르상티망은 사회적으로 공유된 가치판단에 자신의 가치판단을 예속 또는 종속시킴으로써 이루어진다. 자신이 무언가를 원할 때, 그 욕구가 ‘진짜‘ 자신의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혹은 타인이 불러일으킨 르상티망에의해 가동된 것인지를 판별해야 한다.
지금까지 르상티망에 사로잡힌 사람이 전형적으로 나타내는 반응, 즉 르상티망의 원인이 된 가치 기준에 복종하는 일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이번에는 르상티망의 원인이 된 가치판단을 뒤바꾸는 일의 위험성에 관해 고찰해 보자. 니체가 르상티망 문제를 다룬 것도 바로 이 두 번째 반응 때문이었다. 니체에 의하면 르상티망을 갖고있는 사람은 대부분 용기와 행동으로 사태를 호전시키려 들지 않기때문에 르상티망을 발생시키는 근원이 된 가치 기준을 뒤바꾸거나 정반대의 가치판단을 주장해서 르상티망을 해소하려고 한다.
니체는 대표적인 예로 기독교를 들었다. 니체에 따르면 고대 로마시대에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 있던 유대인은 줄곧 빈곤에 허덕였고 부와 권력을 거머쥔 로마인, 즉 지배자를 선망하면서도 증오했다. 하지만 현실을 바꾸기도, 로마인보다 우위에 서기도 어려웠던그들은 복수를 위해 신을 만들어 내 ‘로마인은 풍요로운데 우리는 가난으로 고통받고 있다. 하지만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은 우리 쪽이다. 부자와 권력자 들은 신에게 미움받고 있어서 천국에는 갈 수 없다‘는 논리를 세웠다. 니체는 신이라는, 로마인보다 상위에 존재하는 가공의 개념을 창조함으로써 현실 세계의 강자와 약자를 반전시켜 심리적인 복수를 꾀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르상티망의 원인이 된 열등감을 노력이나 도전으로 해소하려 하지 않고 열등감을 느끼는 원천인 ‘강한 타자‘를 부정하는 가치관을 끌어내 자신을 긍정하려 한 사고관이다.  - P53

인격personality은 그 자체의 정의로 볼 때 본래 짧은 시간에 크게 변화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상황이나 주변과의 관계를 위해 인격을 달리 포장해야 할때가 있다. 이를 심리학적으로 분석한 사람이 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이다. 그는 인격 가운데서 외부와 접촉하는 외적 인격을 페르소나persona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페르소나는 원래 고전극에서 배우가 사용하는 ‘가면‘을 뜻하는데, 융은 페르소나를 한 사람의 인간이 어떠한 모습을 밖으로 드러내는가에 관한, 개인과 사회적 집합체사이에서 맺어지는 일종의 타협이라고 정의했다. 즉, 실제 자신의 모습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낸 가면이 페르소나라는 것이다.  - P58

이렇게 서로 다른 입장이나 역할을 종적인 사일로(기업 내의어떤 부문이나 부서가 외부와 정보를 공유하거나 연계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고립된 상태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개인이 속한 다양한 입장과 소속.
즉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뜻함-옮긴이)라고 생각할 경우, 그 사일로를 횡적으로 연계시키지 않는 것이 좋다. 사일로 자체는 자신이 만들고자해서 만드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인생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어느 사이엔가 만들어진 것도 있다. 반드시 모든 사일로를 충분히납득하고서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사일로들이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룸으로써 사람이 인격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휴대전화가 등장하면서 사일로의 강렬한 횡적 연계가시작된 듯하다. 가령, 집단 따돌림은 아마도 고대부터 있었을 텐데 요즘에 와서 특히 문제의 심각성이 커진 이유는 아이들이 학교와 가정이라는 두 개의 사일로를 구분해 행동하지 못하게 된 데 있다.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는 학교에서 아무리 심한 일을 당해도 집에돌아오면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학교와는 일단 거리를 두어야한다. 그런데 휴대전화라는 가상의 횡적 연계 매체가, 학교라는 사일로에서 심리적으로 분리되기를 바라는 아이에게 그런 상황을 허용해 주지 않는다.
이는 회사원이 가정과 직장, 그리고 개인이라는 세 가지의 인격요소(음식으로 말하면 틀림없이 페르소나인데)를 구분해서 생활하기가 어려워진 것과도 같은 현상이다. 물리적으로 어느 장소에 있든, 또한어떤 사회적 입장에 있든 회사원으로서의 페르소나와 가정의 일원으로서의 페르소나가 따라다닌다. 이렇게 되면 여러 개의 사일로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 잘 살아가야 할 인류가 고대에서부터 지속해 온 생존 전략 자체의 기능을 잃게 되는데, 사실 이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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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온라인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대화하며보냈다. 온라인에서는 뚱뚱하고 친구 없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회 부적응자가 되지 않아도 되었고 그건 당시 내가 나를 보는 모습이었다. 익명성에 점점 매료되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그럴싸한 사람으로 소개할 수 있다는 점에 빠졌다. 7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과 연결된 것같았고 그 기분에 푹 빠져버렸다. 온라인 세상과 접속한다는 건 굉장히 특별하고 당시 절박하게 필요했던 스릴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딱히 연애사라고 할 만한 일이 전혀 없었다. 누구와 데이트를 하기에는 지나치게 부자연스러웠고, 수줍어했고, 엉망진창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피부색 때문에, 나의 사이즈 때문에, 나의 외모에대한 완벽한 무관심 때문에 남자아이들에게 무의 존재가 되었다. 소설을 너무나 많이 읽었기에 마음 깊은 곳에서는 지독한 로맨티시스트였지만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나의 욕망은 현실과 동떨어진 개념에 불과했다. 남학생이 내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 나를 데이트 장소에 데리고 가고 키스를 한다는 그 생각은 좋아했지만 실제로 남자와 단둘이 있고 싶지는 않았다. 남자애들은 나를 해칠 수 있었다.
온라인 채팅창에서 만난 남자들은 낭만적 연애, 사랑, 욕망, 섹스에대한 나의 환상을 마음껏 충족해주면서도 내 몸을 지켜줄 수 있었다. 나는 날씬하고 섹시하고 자신감 있는 척할 수도 있었다. - P113

그 숲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할 수 있는 어휘들을 더 다양하게 보유하게 되었다. 열두 살의 나에게는 그런 단어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때는그저 이 남자애들이 나와 강제로 섹스를 했고 당시의 내가 전혀 몰랐던 사용법으로 소녀의 몸을 유린했다는 것밖에 몰랐다. 책과 상담과 온라인 친구들 덕분에 이 세상에 강간이라 불리는 것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알게 되었다. 여자가 싫다고 말하면 남자는 그 말을 들어야 하고 하던 짓을 멈춰야 한다. 강간을 당한 건 내 잘못이 아니란 것도 알았다. 이렇게 새로운 어휘들을 갖게 되는 건 상당히 스릴이 넘쳤지만 그렇다 해도 여러 면에서 그 어휘들이 나에게 적용된다고는 느끼지 못했다. 이미 고장이 나버리고 너무 연약해져서 그러한 면죄부를 받을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설령 진실이었다고 해도 진실을 아는 것과 진실을 믿는 것은 다른일이며 그 둘을 일치시키는 건 생각처럼 쉽지 않다. - P115

내 예상엔 우리 부모님이 아마도 사설탐정의 도움을 받아 나를 찾아낸 것 같다. 구체적으로 물어보진 않았다. 부모님은 막내 남동생 마이클주니어를 시켜 나에게 전화를 걸게 했는데 어쩌면 우리 집 귀여운 막내목소리를 듣고서는 내가 차마 전화를 끊지 못하리라는 걸 알았던 것 같다. 가족과 나는 머뭇거리며 띄엄띄엄 연락을 주고받게 되었다. 나중에알고 보니 우리 아버지는 뉴헤이븐으로 가서 내가 살던 아파트와 짐을정리했고 룸메이트에게는 내가 무책임하게 떠나버리면서 그 아이가 받게 된 정신적 손해를 보상해주었다. 일단 우리가 연락을 하게 되자 아버지는 내 물건들을 내 주소로 부쳐주었고 나의 막대한 카드빚을 갚아주기도 했다. 아버지는 내가 부모님과 연을 끊기 위해 그 모든 무모한 짓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그 전과 똑같이 아버지 노릇을 했다.

••••••

부모님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걱정으로 가슴이 녹아내릴 것 같았으면서도, 집에 돌아온 나를 기쁘게 맞아주었다. 물론 질문들이 있었고 분노도 있었고 상처도 표현했지만 그것들을 내가 어떻게 해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내 몸무게가 왜 그렇게 계속 늘어가는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보다는 덜 실망스러운 딸이 될 수 있는지도 생각해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에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건, 내가 돌아가면 기뻐해주고 사랑해주는집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여전히 엉망인 상태였다. 내 방에 처박혀서 컴퓨터 앞에 앉아 모뎀으로 연결된 전화선으로 하루 종일 인터넷을 했고 그것은 나머지 가족들의 편의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가상의 세계에 빠져들어 나를 잊는 편이, 내 삶을 추스르려 노력하거나 나를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는 것보다 쉬웠다. 여전히 망가진 상태였고, 내 인생의 모든 것이 틀어져버렸고 다시는 옳게 되돌릴 수 없다는 걸 받아들였을 때의 그 자포자기 상태가 마음에 들었다. 다른 사람인 척 연기하지 않고 새로운 시도나 노력 없이 사는 것이 좋았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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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끊어지고 손실된 수만년 전 화석에서 30억 쌍 게놈 전체를 추출해 해독하는 일은 기술적으로 대단히 큰 도전이었다. 하지만 2010년 5월, 페보 연구팀은 결국 최초로 네안데르탈인 게놈 초안을 모두 해독하는 데 성공했고,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는문을 통해 결과를 공개했다.
논문 제목은 건조하게 ‘네안데르탈인 게놈 해독 초안‘이었다. 하지만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단에서 내놓은 보도자료 제목은 좀 더 사람들의 관심사를 겨냥했다. ‘우리 안의 네안데르탈인‘이었다. 논문에서 연구팀은 단순히 게놈 해독 결과만 제시하지 않고, 유전자의 특성을 현생인류와 비교 분석했다. 그 결과 현생인류의 게놈에 있는 유전자의 일부가 네안데르탈인으로부터 왔음을 확인했다. 현생인류가 수만 년 전 아프리카를 벗어난 뒤 일부가 유라시아에서 네안데르탈인과 만나 피를 섞었으며, 그 결과 현재에도 최초 발상지에 살았던 아프리카인 일부를 제외한 전 세계인의 유전체에 약 2%의 네안데르탈인 유전자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는 10여 년 전 페보 자신이내놨던 연구 결과를 정반대로 뒤집는 내용이었다. 기술 발전으로 새로운 발견이 이뤄지면 이를 수용하고 더 정확한 정보로 갱신하는 일은 과학계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페보 역시 그 경로를 따랐다. 새로운 결과는 대단히 충격적이었지만, 아무도 왜 결과가 다르냐고 되묻지 않았고 과거 연구를 비난하지도 않았다. 새로운 기술과 증거로 밝혀낸 새로운 진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꺼이 수긍했다. 페보는 이후에도 또 다른 친척 인류 데니소바인의 게놈을 최초로 해독하고 이들과 현생인류와의 관계를 밝히는 등 고게놈 분야를게놈 및 진화 연구의 중요한 축으로 올려놨다. 지금은 다른 친척 인류는 물론, 역사시대 현생인류의 인구집단 이동 역사를 파악하는 연구에도 고게놈해독 기술이 널리 쓰이고 있다. 페보는 이런 공로로 202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단독 수상했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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