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과 정책은 점점 더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다. 중국 외교관들은 타국 정부의 행태를 비난할 때 으레 <중국 인민의 감정을 상하게 한다>라고 말했으며그런 식의 표현은 갈수록 잦아졌다. 해당 표현이 사용된 사례를 일일이 세어본 팡커청이라는 기자는 1949년부터 1978년까지 세 번에 불과했던 <중국의감정이 상한 사례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들어 평균 1년에 다섯 번으로늘어났음을 알아냈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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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이탈리아를 달리던 그날 그는 고국에서의 생활을 돌아보며 사색적인 분위기에 젖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이 과연 유익할지 종종의문을 제기합니다. 당연히 유익합니다. 발언의 자유를 누릴 수도 있고 정치가를 직접 선택할 수 있는 자유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일당제(一黨制)도 마찬가지로 이점이 있지 않나요?」 그는 차창 밖 고속도로를 가리키며 지역민의 반대에 맞서느라 그 고속도로를 완공하기까지 10년이 걸렸다고 설명했다. 「중국이었다면 6개월 만에 끝났을 겁니다! 경제가 계속해서 성장하려면 일당제가 유일한 답이에요.」 가이드 리가 얼마나 강하게 이를 지지했는지, 만약 베이징에서 그런 식의 이야기를 일상적으로 듣지 않았더라면 그를 정부 대변인으로착각할 정도였다. 「외국 분석가들은 중국 경제가 그토록 빠르게 성장한 이유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그래요, 중국은 일당제 국가입니다. 그렇지만 그 안의 공무원들은 엘리트들 가운데 선별되고 13억 인구 중에서 선별된 엘리트라면 슈퍼 엘리트라고 불려도 될 겁니다.」 - P159

중국의 발흥에 아무런 반감도 없다고 말하는 미국정치가들을 믿느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우리가 발전하도록놔두긴 할겁니다. 다만 발전의 수위를 제한하려 들겠죠. 내가 아는 사람들 모두 그렇게 생각합니다.」 최대한 예의 바르게 말하고자 한 그의 설명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세계 무대에서 약자의 입장이 되는 데 적응할 필요가 있을 터였다.
한때 중국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미국은 최고의 자리에 있는 것에 매우 익숙하지만 조만간 2등으로 밀려날 겁니다. 지금 당장 그렇게 된다는 건 아니예요. 20년이나 30년 정도 걸리겠죠. 어쨌든 궁극적으로는 중국의 GDP가 미국의 GDP를 앞지르게 될 겁니다. 나는 그가 여행을 많이 했음에도 중국과 서양에는 절대로 극복될 수 없는 철학적 차이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두 가지 서로 다른 사고방식>이 존재한다고 여긴다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는 그들의 도구를 이용하고 그들의 방식을 배울 겁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중국은 언제나중국의 방식을 유지할 거예요.」그는 서구 사회와 나란히 나아가는 중국의 미래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다. 특히 어떤 점에서는 그에게 반박하기가 어려웠다. 예컨대 나에게는 중국이 보다 부유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서구화와 민주화가 진행될 거라는 믿음이 없었다. 톈안먼 광장의 비극적인 잠재력에 이끌렸을 때와 같은 확신이 더이상은 없었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중국은 수시로 고무적인 느낌을 주는가하면 절망적인 느낌을 주기도 했다. 그곳에는 자수성가한 사람들과 비밀 감옥이 동시에 존재했으며, 세상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과 어쩌면 그 세상에서 중국이 차지했어야 할 자리에 대한 방어적인 자긍심이 동시에 존재했다.  - P161

2004년 중앙 선전부에는 굳이 투표까지 하지 않고도 대중의 동향을 조사하고 연구할 수 있는 여론 부서가 신설되었다. 사상화 작업 영역은 시들기는커녕 오히려 규모가 더욱 커지고 복잡해져서, 일부의 추정에 의하면 중국 시민 1백명당 선전관 한 명꼴로 확대되었다. 천둥처럼 요란한 확성기와 등사된 팸플릿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여느 경쟁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중앙 선전부도 이제조회 수와 주요 시간대 시청률로 효율성을 판단했다. 장이머우 같은 유명한영화 제작자들의 도움을 받아 고예산 광고를 제작하고, 한 선전 간부의 말처럼 <사람들의 귀로, 머릿속으로 들어가서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상대적으로 가볍고 감정적인 메시지로 대중을 열광케 했다. 공산당 내 학자들의 지적대로<사람들의 생각을 지배 이데올로기와 일치시켜서 그들의 행동을 표준화하는문제>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중앙 선전부의 최대 관심사는 무엇보다 언론이었다. 톈안먼 사건 후에 장쩌민 주석은 <유산 계급이 진보주의를 요구하는 전장에 중국의 신문이나 라디오, 텔레비전을 방치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의 선언에 따르면 중국은 그가 <이른바 글라스노스트>‘라고 지칭한 어떤 것에 절대로 굴복하지 않을 터였다. 언론인들은 여전히 <한목소리로> 노래해야 했고,
중앙 선전부는 뉴스에 등장하거나 등장하지 말아야 할 방대하고 계속 진화하는 단어 목록을 발표해서 언론이 한목소리를 내도록 도왔다. 어떤 규칙들은 절대로 변하지 않았다. 예컨대 타이완의 법률을 언급할 때는 무조건 <이른바 법률>이라고 해야 했으며, 중국의 정치 제도가 지극히 독특함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은 중국 정부를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절대로 <국제 관행에 따르면>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었다. 경제 문제와 관련해서도 공휴일에는 나쁜 소식을 자세히 다룰 수 없었고, 이를테면 중국 은행의 취약성이나 부자들의 정치적 영향력처럼 정부가 해결할 수 없다>고 분류한 문제들을 심층 보도할 수도 없었다. 가장 엄격하게 금지된 주제는 톈안먼 그 자체였다. 중국 교과서는1989년의 저항 운동이나 유혈 사태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정부는 그해에 벌어진 사건들을 논의할 때 소수의 <검은손>에 의해 조직화된 <혼란> 또는 <소요>라고 묘사했다. - P168

그녀가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정말 터무니없었어요」 농부들은 일을 할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들판에서 때로는 2시간 내내 누워만 있으려고 했어요.
내가 이제 일을 시작해야 하지 않나요?>라고 물으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수 있지?>라고 되물었죠」 그녀가 계속 말했다. 「10년이 지나서야 나는 모든게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그녀 세대의 많은 이들에게 시골살이는 일종의 계시였다. 마찬가지로 농촌에 내려가야 했던 또 다른 젊은 신봉자 우쓰가 내게 주철 공장에서 맞은 첫날에 대해 들려주었다. 「우리는 항상 <프롤레타리아가 사심 없는 계급이다>라고 믿도록 배웠고 그렇게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그가 주철 공장에 도착하고2~3시간이 지났을 무렵 한 동료 노동자가 그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그쯤이면 충분해. 이제 그만해도 돼」우쓰는 당혹스러웠다. 「달리 할 일도 없는데 계속 일할게요.」그러자 그 동료가 귓속말로 조언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거야」우쓰가 하루를 꽉 채워 성실하게 일할 경우 모두의 할당량이 늘어날 터였다. 그는 연장을 내려놓았다. 곧 국영 공장에서 살아남는 다른 요령도 배웠다. 창고에서 부품을 슬쩍하는 방법과 암시장에 내다 팔 램프를 만드는 방법 등이었다. 후에 저명한 작가이자 편집자가 된 우쓰에게 그 일은 두 개의 평행한 현실 세계를 보여 주었다. 그가 내게 말했다. 「하나의 이야기는 대중이 알고 있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 현실입니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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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가운데 언뜻 ‘조선朝鮮‘이란 글자가있기에 찬찬히 살펴보았다.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북경에있는 병부는 조선 사신단에게 건장한 말을 제공하여 여정에 어려움이 없게 하라. 아울러 행리에 필요한 것들을조금도 빠짐없이 공급하라"는 내용이었다. 사신 일행이비를 피해 뒤따라 들어왔기에 수역을 끌어다 그 서류를보게 했더니, 수역이 곧바로 사신한테 가지고 갔다.
역리들에게 내용을 구체적으로 물어보았더니 "저희들은모르는 일입죠. 저희들은 그저 오가는 문서를 장부와 맞춰볼 따름입니다요" 한다.
그러나 문서에 적힌 건장한 말은, 구하기도 어려울뿐더러설령 그런 말을 준다 하더라도 탈 수가 없다. 여기 말들은무척 날래고 건장해서 한 시간에 무려 70리를 달린다.
이름하여, 비체법飛遞法! 길에서 역말이 달리는 것을 보니, 노래하듯이 선창을 하면 뒤에서는 마치 범을 쫓듯이응한다. 그 소리가 산골과 벼랑을 울리면 말이 일시에 굽을 떼어 바위나 시내, 숲이며 덩굴을 가리지 않고 훌훌뛰어오르며 쏜살같이 내달린다. 그 달리는 소리가 마치북을 치듯 소낙비가 퍼붓듯 거침이 없다.
우리나라에선 들쥐처럼 허약한 과하마果下馬 따위를 타면서도 앞에선 견마잡이가 끌어 주고 옆에선 부축까지 해준다. 그러고서도 떨어질까 벌벌 떠는데, 하물며 이렇게 날뛰는 역마를 대체어떻게 탄단 말인가. 황제의 배려로 그런 말들을 타게 될까봐 도리어 걱정이다. - P163

세 겹의 관문을 나온 뒤, 말에서 내려 장성에 이름을 새기려고 패도를 뽑았다. 벽돌 위의 짙은 이끼를 긁어내고 붓과 벼루를 행탁행장을 넣는 여행용 전대나 자루 속에서꺼냈다. 꺼낸 물건들을 성 밑에 주욱 벌여 놓고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물을 얻을길이 없었다. 아까 관내에서 잠깐 술을 마실 때 몇 잔을 더 사서 안장에 매달아두었던 것을 모두 쏟아 별빛 아래에서 먹을 갈고, 찬 이슬에 붓을 적셔 크게 여남은 글자를 썼다. 이때는 봄도 아니고 여름도 아니요 겨울도 아닐뿐더러, 아침도 아니고 한낮도 아니요 저녁도 아닌, 곧 금신이 제때를 만난 가을철인데다 이제 막 닭이 울려는 새벽녘이니. 이 모든 것이 어찌 우연이기만 하겠는가. - P175

대저 우리나라의 말 다루는 방법은 한마디로 위태롭기 짝이 없다. 옷소매는 넓고 한삼 역시 긴 탓에 두 손이 휘감겨 고삐를 잡거나 채찍을 휘두를라치면 몹시 거추장스럽다는 것이 첫번째 위태로움이다. 형편이 그렇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이 견마를 잡게 하니, 온 나라의 말이 졸지에 병신이 되어 버린다. 이때문에 고삐를 잡은 자가 항상 말의 한쪽 눈을 가려서 말이 자유롭게 달릴 수없음이 두번째 위태로움이다. - P177

때마침 상현이라 달이 고개에 드리워 떨어지려 한다. 그 빛이 싸늘하게 벼려져 마치 숫돌에 갈아 놓은 칼날 같았다. 마침내 달이 고개 너머로 떨어지자, 뾰족한 두 끝을 드러내면서갑자기 시뻘건 불처럼 변했다. 마치 횃불 두 개가 산에서 나오는 듯했다. 북두칠성의 자루부분은 관문 안쪽으로 반쯤 꽂혔다. 벌레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나고 긴 바람이 싸늘하다. 숲과 골짜기도 함께 운다. 짐승 같이 가파른 산과 귀신 같이 음산한 봉우리들은 창과 방패를 벌여 놓은 듯하고, 두산 사이에서 쏟아지는 강물은 사납게 울부짖어 철갑으로 무장한 말들이 날뛰며 쇠북을 울리는 듯하다. 하늘 저편에서 학 울음소리가 대여섯 차례 들려온다. 맑게 울리는 것이 마치 피리 소리가 길게 퍼지는 듯한데, 더러는 이것을 거위 소리라고도 했다. - P182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두 산 틈에서 나온 하수는 돌과 부딪쳐 으르렁거린다. 그 솟구치는 파도와 성난 물결과 슬퍼하며 원망하는 여울이 놀라 부딪치고 휘감아 거꾸러지면서 울부짖는 듯, 포효하는 듯, 고함을 내지르는 듯 사뭇 만리장성을 깨뜨릴 기세다. 1만 대의 전차, 1만 명의 기병, 1만문의 대포 1만 개의 전고戰鼓로도 우르릉광쾅 무너뜨려 짓누르고 압도하는 듯한 물소리를 형용해 내기엔 부족하다. 모래 위 거대한 바위는 한쪽에 우뚝 서 있다. 강독의 버드나무숲은 어둑하여 강의 정령들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사람들에게 장난을 거는 듯하고, 양옆에선교통과 이무기가 사람들을 물속으로 끌어들이려는 듯하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가 옛날 전쟁터인 탓에 강물이 저렇게 우는 거야."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다. 강물 소리는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전혀 달라진다.
내 집은 깊은 산속에 있다. 문 앞에 큰 시내가 있는데, 매번 여름철 큰비가 한 번 지나고 나면 물이 급작스레 불어나 항상 수레와 기병, 대포와 북이 울리는 듯한 굉장한 소리를 듣게 되고 마침내 그것은 귀에 큰 재앙이 되어 버렸다.
내 일찍이 문을 닫고 누워 가만히 이 소리들을 비교하며 들어본 적이 있었다. 깊은 소나무숲이 퉁소 소리를 내는 듯한 건 청아한 마음으로 들은 탓이요, 산이 갈라지고 언덕이무너지는 듯한 건 성난 마음으로 들은 탓이요, 개구리 떼가 다투어 우는 듯한 건 교만한마음으로 들은 탓이다. 만 개의 축이 번갈아 소리를 내는 듯한 건 분노한 마음으로 들은탓이요, 천둥과 우레가 마구 쳐대는 듯한 건 놀란 마음으로 들은 탓이요, 찻물이 보글보글끓는 듯한 건 흥취 있는 마음으로 들은 탓이요, 거문고가 우조로 울리는 듯한 건 슬픈마음으로 들은 탓이요, 한지를 바른 창에 바람이 우는 듯한 건 의심하는 마음으로 들은탓이다. 이는 모두 바른 마음으로 듣지 못하고 이미 가슴속에 자신이 만들어 놓은 소리를 가지고 귀로 들은 것일 뿐이다. - P184

나는 이제야 도를 알았다. 명심冥心(깊고 지극한 마음)이 있는 사람은 귀와 눈이 마음의 누가 되지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섬세해져서 갈수록 병이 된다. 지금 내 마부는 말에 밟혀서 뒷수레에 실려 있다. 그래서 결국 말의 재갈을 풀어 주고 강물에 떠서 안장 위에 무릎을 꼰 채 발을 옹송거리고 앉았다. 한번 떨어지면 강물이다. 그땐 물을 땅이라 생각하고, 물을 옷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몸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마음이라 생각하리라. 그렇게 한번 떨어질 각오를 하자 마침내 내 귀에는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번이나 강을 건넜건만 아무 근심 없이 자리에서 앉았다 누웠다 그야말로 자유자재한 경지였다.
옛날 우임금이 강을 건너는데 황룡이 배를 등에 짊어져서 몹시 위험한 지경이었다. 그러나 삶과 죽음에 대한 판단이 먼저 마음속에 뚜렷해지자 용이든 지렁이든 눈앞의 크고 작은 것에 개의치 않게 되었다. 소리와 빛은 외물外物이다. 외물은 언제나 귀와 눈에 누가 되어 사람들이보고 듣는 바른 길을 잃어버리도록 한다. 하물며 사람이 세상을 살아갈 때, 그 험난하고 위험하기가 강물보다 더 심하여 보고 듣는 것이 병통이 됨에 있어서랴. 이에, 내가 사는 산속으로 돌아가 문 앞 시냇물 소리를 들으면서 다시금 곱씹어 볼 작정이다. 이로써 몸가짐에 재빠르고 자신의 총명함만을 믿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바이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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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 교수가 말했다. 미국인은 운명이 자신의 손에 달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반면 중국인은 운명을 자신의 능력 밖에 있는 무엇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행운을 가져다줄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조사에 따르면 중국의 카지노 도박꾼들은 베팅을 투자로, 투자를 베팅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중국인의 관점에서 주식 시장이나 부동산시장은 카지노와 크게 다르지 않다. 행동 과학자 엘케 웨버와 크리스토퍼 시는 재무 위험에 대한 중국과 미국의 접근 방식을 비교했다. 그리고 일련의 실험을 통해 자신이 미국인 투자자들보다 훨씬 신중하다고 주장하는 중국인 투자자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그들에게 가상으로 일련의 재무 관련 결정을 내리게 하자 그동안의 생각이 잘못되었으며 중국인들이 비슷한 재정 상태의 미국인들보다 언제나 훨씬 많은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나는 재무 결정과 관련하여 중국인 친구들이 내 관점에서는 불편할 정도로 위험을 감수할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예컨대 저축한 돈을 털어서 사업을 시작하거나, 직장을 구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이 전국을 떠도는 것처럼 말이다. 웨버와 시가 <쿠션 가설>이라고 명명한 한 가지 해석은 중국의 전통적인 대가족 체제가 사람들로 하여금 위험을 감수한 결과가 좋지 않게 나오더라도 다른사람에게 의지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준다는 것이다. 또 다른 가설은 경기 호황시기에 보다 초점을 맞춘다. 마카오 대학의 경영학 교수 히카르두 시우는 내게 <덩샤오핑이 실시한 경제 개혁은 그 자체로 일종의 도박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위험을 감수하는 행동이 괜찮을 뿐 아니라 유용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죠>라고 설명했다. 극빈층에서 중산층이 된 사람들에 대해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런 생각일 겁니다. 혹시라도 위험을 감수한 결과로 가진 돈의 절반을 잃더라도 괜찮아. 내게는 경험이 있으니까. 다시 가난하던 시절로 돌아가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몇 년 후면 날렸던 돈도 다시 회복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 도박에서 승리한다면? 백만장자가 되는 거야!> - P121

인민공화국은 볼이 빨간 농부들을 그린 그림과 결연한 표정의 군인들을 찍은 영화, 고매한 영웅적 행동을 노래하는 시 등으로 유명해졌다. 이러한 형식은 <혁명적 낭만주의와 조합된 혁명적 현실주의>라고 불렸으며 문화 황제 저우양周楊이 말한 <오늘의 이상이 내일의 현실이다>라는 중국 공산당의 믿음에 의해 모양을 갖추었다. 그 과정에서 현재의 노골적인 사실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춘 예술가들은 오히려 <현실을 다룬> 죄로 기소되어 처벌을 받기도 했다.
1976년에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나자 최초의 전위 예술가 집단이 등장했고, 그들은 그들 중 하나였던 마더성이 이전의 것들에 존재하는 <단조로운 획일성>이라고 지칭한 것에 반발해서 <개성을 강조하기 위해> 스스로를 <스타스Stars>라고 명명했다. 1979년 국립 박물관에서 개최하려던 그들의 첫 번째 전시회가 무산되자 그들은 박물관 외부 담장에 작품을 걸고 <우리는 정치적 민주주의와 예술적 자유를 요구한다>라는 슬로건을 외치면서 행진을 벌였다.
1990년대 전반에 걸쳐 중국 정부는 나체로 대중 앞에 섰다는 이유로 행위 예술가들을 체포했고 실험적인 공연을 폐쇄시켰으며 비주류 예술가들의 마을을 불도저로 밀어 버렸다.
하지만 나라가 부유해지면서 예술가들과 정부의 관계에 변화가 일어났다. 2006년에 이르자 장샤오강 같은 중국인 화가들의 작품이 거의 1백만 달러에 가까운 금액에 거래되었고 경제 붐과 함께 성장한 젊은 세대 예술가들은 독재와 정치 문제를 다루는 데 싫증났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다른 나라의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소비 지향적인 풍조와 문화, 섹스를 바라보는 나름의 안목을 기르며 새로운 세대의 투기자들과 수집가들을 만났다. - P137

서양 문화를 대하는 중국인의 태도에는 동정과 질투, 분노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요컨대 문명의 중심인 중화권 밖에 있는 미개인들에 대한 동정과 그럼에도 그들이 가진 부강함에 대한 질투, 그들의 중국 침략에 대한 분노이다. 중화민국 시대의 문학자 루쉰은 이렇게 썼다. <중국인은 외국인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을 신처럼 우러러보거나 들짐승처럼 내려다볼 뿐이다.)1877년 청나라가 쇠약해지고 서구 열강이 발흥할 때 중국의 개혁론자들은 엔푸라는 젊은 학자 한 명을 잉글랜드에 파견해서 영국 해군력의 비밀을 조사하게 했다. 옌푸는 영국 해군의 힘이 무기가 아닌 지식에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허버트 스펜서, 애덤 스미스, 존 스튜어트 밀, 찰스 다윈을 비롯한 서양사상가의 책을 트렁크 한가득 들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다윈의 <자연 선택>이<자연도태>라는 훨씬 극단적인 단어로 바뀌는 등 그의 번역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 영향력만큼은 엄청났다. 옌푸와 그의 동료들에게 진화는 단순히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치학이었다. 중국의 선구적인 개혁론자 량치차오(梁啓招)는 중국이 <가장 잘 적응한 나라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서구사회를 지나치게 열광적으로 동경하는 태도에는 대가가 따랐다. 20세기 초 행동주의자들이 유럽의 개인주의 개념을 포용하고자 했을 때그들은 <가짜 외국인 놈들>이라는 조롱을 받아야 했다. 마오쩌둥이 집권 말년미국과 외교 관계를 회복하기 전까지, 서구 사회를 동경하는 태도는 처벌받아 마땅한 죄였다.
그럼에도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서구 사회는 점점 더 가능성과 자기 창조의 땅으로 그려졌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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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적 가치관과 불평등을 비난하면서 권력을 잡았던 마르크스와 레닌의 후계자, 즉 중화 인민 공화국의 지도자들이 어떻게 신흥 부자 계급을 노골적으로 포용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사상적인 지배 이념을 고수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다.
하지만 바야흐로 자기 창조의 시대였고 그것은 중국 공산당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임무는 국가주석이자 총서기인 장쩌민에게 넘어갔다. 2002년 당의 가장 중요한 전당 대회에서 그는 심각한 수사학적 왜곡을 보여주었다. 차마 중산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이제부터 <중간소득 계층의 성공을 위해 당이 헌신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중간 소득 계층은 어디에서나 당 기관원의 환영을 받았고 새로운 슬로건마다 그들이 언급됐다. 중국 경찰학교에 근무하는 한 저술가는 중간 소득 계층을 <문명화된 방식의 이면에 존재하는 도덕적인 집단이다. 특권을 없애고 빈곤을 줄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세력이다. 사실상 전부라고 할 수 있다>라고 묘사했다.
동일한 전당대회에서 공산당은 또한 중국 헌법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들은 스스로를 <혁명당>이라고 지칭하는 대신 <집권당>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즉 중국 지도자들이 그들의 존재 이유를 바꾼 것이다. 그렇게 지난 수십년 동안 <반혁명주의자들>이라며 정적을 거세게 비난했던 이전의 반란자들은 집권당임을 자처하면서 이제는 되레 혁명이라는 단어를 문제 삼을 정도로 현상태의 열렬한 옹호자가 되었다. 그 결과 톈안먼 광장 옆 혁명사 박물관은 원래의 이름을 잃고 중국 국립박물관에 흡수되었다. 2004년에 국무원 총리 원자바오는 <실제로 통일성과 안정성이야말로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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