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가운데 언뜻 ‘조선朝鮮‘이란 글자가있기에 찬찬히 살펴보았다.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북경에있는 병부는 조선 사신단에게 건장한 말을 제공하여 여정에 어려움이 없게 하라. 아울러 행리에 필요한 것들을조금도 빠짐없이 공급하라"는 내용이었다. 사신 일행이비를 피해 뒤따라 들어왔기에 수역을 끌어다 그 서류를보게 했더니, 수역이 곧바로 사신한테 가지고 갔다.
역리들에게 내용을 구체적으로 물어보았더니 "저희들은모르는 일입죠. 저희들은 그저 오가는 문서를 장부와 맞춰볼 따름입니다요" 한다.
그러나 문서에 적힌 건장한 말은, 구하기도 어려울뿐더러설령 그런 말을 준다 하더라도 탈 수가 없다. 여기 말들은무척 날래고 건장해서 한 시간에 무려 70리를 달린다.
이름하여, 비체법飛遞法! 길에서 역말이 달리는 것을 보니, 노래하듯이 선창을 하면 뒤에서는 마치 범을 쫓듯이응한다. 그 소리가 산골과 벼랑을 울리면 말이 일시에 굽을 떼어 바위나 시내, 숲이며 덩굴을 가리지 않고 훌훌뛰어오르며 쏜살같이 내달린다. 그 달리는 소리가 마치북을 치듯 소낙비가 퍼붓듯 거침이 없다.
우리나라에선 들쥐처럼 허약한 과하마果下馬 따위를 타면서도 앞에선 견마잡이가 끌어 주고 옆에선 부축까지 해준다. 그러고서도 떨어질까 벌벌 떠는데, 하물며 이렇게 날뛰는 역마를 대체어떻게 탄단 말인가. 황제의 배려로 그런 말들을 타게 될까봐 도리어 걱정이다. - P163

세 겹의 관문을 나온 뒤, 말에서 내려 장성에 이름을 새기려고 패도를 뽑았다. 벽돌 위의 짙은 이끼를 긁어내고 붓과 벼루를 행탁행장을 넣는 여행용 전대나 자루 속에서꺼냈다. 꺼낸 물건들을 성 밑에 주욱 벌여 놓고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물을 얻을길이 없었다. 아까 관내에서 잠깐 술을 마실 때 몇 잔을 더 사서 안장에 매달아두었던 것을 모두 쏟아 별빛 아래에서 먹을 갈고, 찬 이슬에 붓을 적셔 크게 여남은 글자를 썼다. 이때는 봄도 아니고 여름도 아니요 겨울도 아닐뿐더러, 아침도 아니고 한낮도 아니요 저녁도 아닌, 곧 금신이 제때를 만난 가을철인데다 이제 막 닭이 울려는 새벽녘이니. 이 모든 것이 어찌 우연이기만 하겠는가. - P175

대저 우리나라의 말 다루는 방법은 한마디로 위태롭기 짝이 없다. 옷소매는 넓고 한삼 역시 긴 탓에 두 손이 휘감겨 고삐를 잡거나 채찍을 휘두를라치면 몹시 거추장스럽다는 것이 첫번째 위태로움이다. 형편이 그렇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이 견마를 잡게 하니, 온 나라의 말이 졸지에 병신이 되어 버린다. 이때문에 고삐를 잡은 자가 항상 말의 한쪽 눈을 가려서 말이 자유롭게 달릴 수없음이 두번째 위태로움이다. - P177

때마침 상현이라 달이 고개에 드리워 떨어지려 한다. 그 빛이 싸늘하게 벼려져 마치 숫돌에 갈아 놓은 칼날 같았다. 마침내 달이 고개 너머로 떨어지자, 뾰족한 두 끝을 드러내면서갑자기 시뻘건 불처럼 변했다. 마치 횃불 두 개가 산에서 나오는 듯했다. 북두칠성의 자루부분은 관문 안쪽으로 반쯤 꽂혔다. 벌레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나고 긴 바람이 싸늘하다. 숲과 골짜기도 함께 운다. 짐승 같이 가파른 산과 귀신 같이 음산한 봉우리들은 창과 방패를 벌여 놓은 듯하고, 두산 사이에서 쏟아지는 강물은 사납게 울부짖어 철갑으로 무장한 말들이 날뛰며 쇠북을 울리는 듯하다. 하늘 저편에서 학 울음소리가 대여섯 차례 들려온다. 맑게 울리는 것이 마치 피리 소리가 길게 퍼지는 듯한데, 더러는 이것을 거위 소리라고도 했다. - P182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두 산 틈에서 나온 하수는 돌과 부딪쳐 으르렁거린다. 그 솟구치는 파도와 성난 물결과 슬퍼하며 원망하는 여울이 놀라 부딪치고 휘감아 거꾸러지면서 울부짖는 듯, 포효하는 듯, 고함을 내지르는 듯 사뭇 만리장성을 깨뜨릴 기세다. 1만 대의 전차, 1만 명의 기병, 1만문의 대포 1만 개의 전고戰鼓로도 우르릉광쾅 무너뜨려 짓누르고 압도하는 듯한 물소리를 형용해 내기엔 부족하다. 모래 위 거대한 바위는 한쪽에 우뚝 서 있다. 강독의 버드나무숲은 어둑하여 강의 정령들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사람들에게 장난을 거는 듯하고, 양옆에선교통과 이무기가 사람들을 물속으로 끌어들이려는 듯하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가 옛날 전쟁터인 탓에 강물이 저렇게 우는 거야."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다. 강물 소리는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전혀 달라진다.
내 집은 깊은 산속에 있다. 문 앞에 큰 시내가 있는데, 매번 여름철 큰비가 한 번 지나고 나면 물이 급작스레 불어나 항상 수레와 기병, 대포와 북이 울리는 듯한 굉장한 소리를 듣게 되고 마침내 그것은 귀에 큰 재앙이 되어 버렸다.
내 일찍이 문을 닫고 누워 가만히 이 소리들을 비교하며 들어본 적이 있었다. 깊은 소나무숲이 퉁소 소리를 내는 듯한 건 청아한 마음으로 들은 탓이요, 산이 갈라지고 언덕이무너지는 듯한 건 성난 마음으로 들은 탓이요, 개구리 떼가 다투어 우는 듯한 건 교만한마음으로 들은 탓이다. 만 개의 축이 번갈아 소리를 내는 듯한 건 분노한 마음으로 들은탓이요, 천둥과 우레가 마구 쳐대는 듯한 건 놀란 마음으로 들은 탓이요, 찻물이 보글보글끓는 듯한 건 흥취 있는 마음으로 들은 탓이요, 거문고가 우조로 울리는 듯한 건 슬픈마음으로 들은 탓이요, 한지를 바른 창에 바람이 우는 듯한 건 의심하는 마음으로 들은탓이다. 이는 모두 바른 마음으로 듣지 못하고 이미 가슴속에 자신이 만들어 놓은 소리를 가지고 귀로 들은 것일 뿐이다. - P184

나는 이제야 도를 알았다. 명심冥心(깊고 지극한 마음)이 있는 사람은 귀와 눈이 마음의 누가 되지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섬세해져서 갈수록 병이 된다. 지금 내 마부는 말에 밟혀서 뒷수레에 실려 있다. 그래서 결국 말의 재갈을 풀어 주고 강물에 떠서 안장 위에 무릎을 꼰 채 발을 옹송거리고 앉았다. 한번 떨어지면 강물이다. 그땐 물을 땅이라 생각하고, 물을 옷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몸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마음이라 생각하리라. 그렇게 한번 떨어질 각오를 하자 마침내 내 귀에는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번이나 강을 건넜건만 아무 근심 없이 자리에서 앉았다 누웠다 그야말로 자유자재한 경지였다.
옛날 우임금이 강을 건너는데 황룡이 배를 등에 짊어져서 몹시 위험한 지경이었다. 그러나 삶과 죽음에 대한 판단이 먼저 마음속에 뚜렷해지자 용이든 지렁이든 눈앞의 크고 작은 것에 개의치 않게 되었다. 소리와 빛은 외물外物이다. 외물은 언제나 귀와 눈에 누가 되어 사람들이보고 듣는 바른 길을 잃어버리도록 한다. 하물며 사람이 세상을 살아갈 때, 그 험난하고 위험하기가 강물보다 더 심하여 보고 듣는 것이 병통이 됨에 있어서랴. 이에, 내가 사는 산속으로 돌아가 문 앞 시냇물 소리를 들으면서 다시금 곱씹어 볼 작정이다. 이로써 몸가짐에 재빠르고 자신의 총명함만을 믿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바이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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