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가 이탈리아를 달리던 그날 그는 고국에서의 생활을 돌아보며 사색적인 분위기에 젖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이 과연 유익할지 종종의문을 제기합니다. 당연히 유익합니다. 발언의 자유를 누릴 수도 있고 정치가를 직접 선택할 수 있는 자유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일당제(一黨制)도 마찬가지로 이점이 있지 않나요?」 그는 차창 밖 고속도로를 가리키며 지역민의 반대에 맞서느라 그 고속도로를 완공하기까지 10년이 걸렸다고 설명했다. 「중국이었다면 6개월 만에 끝났을 겁니다! 경제가 계속해서 성장하려면 일당제가 유일한 답이에요.」 가이드 리가 얼마나 강하게 이를 지지했는지, 만약 베이징에서 그런 식의 이야기를 일상적으로 듣지 않았더라면 그를 정부 대변인으로착각할 정도였다. 「외국 분석가들은 중국 경제가 그토록 빠르게 성장한 이유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그래요, 중국은 일당제 국가입니다. 그렇지만 그 안의 공무원들은 엘리트들 가운데 선별되고 13억 인구 중에서 선별된 엘리트라면 슈퍼 엘리트라고 불려도 될 겁니다.」 - P159
중국의 발흥에 아무런 반감도 없다고 말하는 미국정치가들을 믿느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우리가 발전하도록놔두긴 할겁니다. 다만 발전의 수위를 제한하려 들겠죠. 내가 아는 사람들 모두 그렇게 생각합니다.」 최대한 예의 바르게 말하고자 한 그의 설명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세계 무대에서 약자의 입장이 되는 데 적응할 필요가 있을 터였다. 한때 중국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미국은 최고의 자리에 있는 것에 매우 익숙하지만 조만간 2등으로 밀려날 겁니다. 지금 당장 그렇게 된다는 건 아니예요. 20년이나 30년 정도 걸리겠죠. 어쨌든 궁극적으로는 중국의 GDP가 미국의 GDP를 앞지르게 될 겁니다. 나는 그가 여행을 많이 했음에도 중국과 서양에는 절대로 극복될 수 없는 철학적 차이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두 가지 서로 다른 사고방식>이 존재한다고 여긴다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는 그들의 도구를 이용하고 그들의 방식을 배울 겁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중국은 언제나중국의 방식을 유지할 거예요.」그는 서구 사회와 나란히 나아가는 중국의 미래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다. 특히 어떤 점에서는 그에게 반박하기가 어려웠다. 예컨대 나에게는 중국이 보다 부유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서구화와 민주화가 진행될 거라는 믿음이 없었다. 톈안먼 광장의 비극적인 잠재력에 이끌렸을 때와 같은 확신이 더이상은 없었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중국은 수시로 고무적인 느낌을 주는가하면 절망적인 느낌을 주기도 했다. 그곳에는 자수성가한 사람들과 비밀 감옥이 동시에 존재했으며, 세상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과 어쩌면 그 세상에서 중국이 차지했어야 할 자리에 대한 방어적인 자긍심이 동시에 존재했다. - P161
2004년 중앙 선전부에는 굳이 투표까지 하지 않고도 대중의 동향을 조사하고 연구할 수 있는 여론 부서가 신설되었다. 사상화 작업 영역은 시들기는커녕 오히려 규모가 더욱 커지고 복잡해져서, 일부의 추정에 의하면 중국 시민 1백명당 선전관 한 명꼴로 확대되었다. 천둥처럼 요란한 확성기와 등사된 팸플릿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여느 경쟁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중앙 선전부도 이제조회 수와 주요 시간대 시청률로 효율성을 판단했다. 장이머우 같은 유명한영화 제작자들의 도움을 받아 고예산 광고를 제작하고, 한 선전 간부의 말처럼 <사람들의 귀로, 머릿속으로 들어가서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상대적으로 가볍고 감정적인 메시지로 대중을 열광케 했다. 공산당 내 학자들의 지적대로<사람들의 생각을 지배 이데올로기와 일치시켜서 그들의 행동을 표준화하는문제>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중앙 선전부의 최대 관심사는 무엇보다 언론이었다. 톈안먼 사건 후에 장쩌민 주석은 <유산 계급이 진보주의를 요구하는 전장에 중국의 신문이나 라디오, 텔레비전을 방치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의 선언에 따르면 중국은 그가 <이른바 글라스노스트>‘라고 지칭한 어떤 것에 절대로 굴복하지 않을 터였다. 언론인들은 여전히 <한목소리로> 노래해야 했고, 중앙 선전부는 뉴스에 등장하거나 등장하지 말아야 할 방대하고 계속 진화하는 단어 목록을 발표해서 언론이 한목소리를 내도록 도왔다. 어떤 규칙들은 절대로 변하지 않았다. 예컨대 타이완의 법률을 언급할 때는 무조건 <이른바 법률>이라고 해야 했으며, 중국의 정치 제도가 지극히 독특함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은 중국 정부를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절대로 <국제 관행에 따르면>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었다. 경제 문제와 관련해서도 공휴일에는 나쁜 소식을 자세히 다룰 수 없었고, 이를테면 중국 은행의 취약성이나 부자들의 정치적 영향력처럼 정부가 해결할 수 없다>고 분류한 문제들을 심층 보도할 수도 없었다. 가장 엄격하게 금지된 주제는 톈안먼 그 자체였다. 중국 교과서는1989년의 저항 운동이나 유혈 사태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정부는 그해에 벌어진 사건들을 논의할 때 소수의 <검은손>에 의해 조직화된 <혼란> 또는 <소요>라고 묘사했다. - P168
그녀가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정말 터무니없었어요」 농부들은 일을 할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들판에서 때로는 2시간 내내 누워만 있으려고 했어요. 내가 이제 일을 시작해야 하지 않나요?>라고 물으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수 있지?>라고 되물었죠」 그녀가 계속 말했다. 「10년이 지나서야 나는 모든게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그녀 세대의 많은 이들에게 시골살이는 일종의 계시였다. 마찬가지로 농촌에 내려가야 했던 또 다른 젊은 신봉자 우쓰가 내게 주철 공장에서 맞은 첫날에 대해 들려주었다. 「우리는 항상 <프롤레타리아가 사심 없는 계급이다>라고 믿도록 배웠고 그렇게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그가 주철 공장에 도착하고2~3시간이 지났을 무렵 한 동료 노동자가 그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그쯤이면 충분해. 이제 그만해도 돼」우쓰는 당혹스러웠다. 「달리 할 일도 없는데 계속 일할게요.」그러자 그 동료가 귓속말로 조언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거야」우쓰가 하루를 꽉 채워 성실하게 일할 경우 모두의 할당량이 늘어날 터였다. 그는 연장을 내려놓았다. 곧 국영 공장에서 살아남는 다른 요령도 배웠다. 창고에서 부품을 슬쩍하는 방법과 암시장에 내다 팔 램프를 만드는 방법 등이었다. 후에 저명한 작가이자 편집자가 된 우쓰에게 그 일은 두 개의 평행한 현실 세계를 보여 주었다. 그가 내게 말했다. 「하나의 이야기는 대중이 알고 있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 현실입니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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