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메랑은 이 가정을 산산이 부수었다. 첫 번째로 그는 미모사를 탁트인 곳에 꺼내 놓아서 낮의 햇빛과 밤의 어둠에 노출시켰다. 예상대로, 잎은 낮의 빛 속에서는 펼쳐지고 밤의 어둠 속에서는 닫혔다.
그 다음 단계에서 그의 천재성이 발휘되었다. 드메랑은 미모사를24시간 동안 밀봉된 상자에 두었다. 밤낮으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둔 것이었다. 24시간 어둠 속에 둔 상태에서 그는 때때로 살짝 들여다보면서 잎의 상태를 관찰했다. 낮의 빛이 주는 영향을 받지 못하는상태에서도, 미모사는 여전히 햇빛을 받는 양 행동했다. 잎을 자랑스럽게 활짝 펼쳤다. 반면에 낮이 저물 무렵에는 해가 저무는 신호를전혀 받지 못했음에도, 마치 그 신호를 받은 양 잎을 닫았다. 그리고 밤새 그 상태로 있었다.
혁신적인 발견이었다. 드메랑은 살아 있는 생물이 나름의 시간에따라 움직이며, 태양의 리듬에 예속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미모사의 몸속 어딘가에 햇빛 같은 바깥 세계에서 오는 단서가전혀 없이도 시간을 파악할 수 있는 24시간 리듬 생성기가 있었다. 미모사는 하루 주기 리듬을 지녔을 뿐 아니라, 그 리듬을 스스로 생성했다. 즉 그 리듬은 <내생적>이었다. 마치 우리 심장이 스스로 생성하는 박자에 맞추어서 쿵쿵거리는 것과 같다. 우리 심장 박동기의 리듬이 훨씬 더 빠를 뿐이다. 우리 심장은 하루 주기 시계처럼 24시간마다 한 번 뛰는 대신에 대개 적어도 1초에 한 번은 뛰니까. - P28

 얼굴에 인상적일만치 수염이 수북이 자라는 동안, 그들은 두 가지 혁신적인 발견을했다. 첫 번째는 드메랑의 향일성을 띤 식물처럼, 사람도 태양에서오는 빛이 없는 상태에서도 자체 내생적 하루 주기 리듬을 생성한다는 것이었다. 즉 동굴로 내려온 뒤 클라이트먼도 리처드슨도 수면 양상이 아무 때나 자고 깨고 하는 식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그들은 장시간(약 열다섯 시간) 깨어 있다가 약 아홉 시간을 죽자는, 예측가능하면서 되풀이되는 양상을 보였다.
두 번째 발견은 예기치 않았으면서 더욱 심오한 것이었다. 믿을만하게 되풀이되는 그들의 수면과 각성의 주기가 정확히 24시간이아니라, 그보다 좀더 길다는 부정할 수 없이 일관된 결과가 나왔다. 20대였던 리처드슨의 수면-각성 주기는 26~28시간이었다. 40대였던 클라이트먼의 주기는 24시간에 좀더 가까웠지만, 그래도 그보다는 길었다. 따라서 햇빛이라는 바깥의 영향을 제거했을 때, 개인의 체내에서 생성되는 <하루>는 정확히 24시간이 아니라, 그보다 좀 더 길었다. 좀 느리게 가는 부정확한 손목시계처럼, 바깥 세계에서 (실제) 하루가 지날 때마다, 클라이트먼과 리처드슨은 체내에서 생성된더 긴 시계에 따라서 시간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타고나는 생물학적 리듬이 정확히 24시간이 아니라 그 언저리에 있기에, 그것을 가리킬 새로운 용어가 필요해졌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하루 주기 리듬이다. 즉 길이가 약 하루이지만, 정확히 하루는 아닌 주기이다. 카이트먼과 리처드슨의 선구적인 실험이 이루어진 지 75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어른의 내생적 하루 주기 시계의 평균 기간이 약 24시간 15분이라고 본다. 지구의 자전 시간인 24시간과 그리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지만, 자긍심이 있는 스위스시계 제조공이 받아들일 만큼 정확히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다행히도 대부분의 사람은 매머드 동굴 속이나, 그렇게 어둠만이 이어지는 곳에 살지 않는다. 우리는 부정확한, 더 긴 체내 하루 주기시계로부터 우리를 구조하는 태양의 빛을 으레 받는다. 햇빛은 부정확한 손목시계의 옆에 달린 용두를 조작하는 엄지와 검지 역할을 한다. 햇빛은 매일 우리의 부정확한 체내 시계를 절묘하게 다시 맞춘다. 우리가 약 24시간이 아니라 정확히 24시간 주기에 맞추도록 <바늘을 감는다>. - P30

우리 뇌의 한가운데에 들어 있는 24시간 생물학적 시계에는 시교차상핵 suprachiasmatic nucleus 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해부학 용어가으레 그렇듯이, 이영어 용어도 발음하기는 무척 어렵지만 많은 것을설명한다. 수프라 supra는 위, 키아즘chiasm은 교차점을 뜻한다. 교차점은 양쪽 눈에서 나온 시신경들이 서로 교차하는 지점을 가리킨다. 두 시신경은 뇌의 한가운데에서 만나서 서로 엇갈린다. 교차상핵은 이 교차점 바로 위에 있는데, 거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양쪽눈에서 시신경을 타고서 시각 처리가 이루어지는 뇌 뒤쪽으로 향하는 빛 신호를 <표본 추출하기 위해서다. 시교차상핵은 이 신뢰할 수있는 빛 정보를 토대로 본래 맞지 않는 시간을 정확한 24시간 주기에다시 맞춤으로써, 막나가지 않게 막아준다.
시교차상핵이 2만개의 뇌세포, 즉 뉴런(신경 세포)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면, 머리뼈 안의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엄청난 규모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아주 조그맣다. 뇌는 약 1,000억 개의 뉴런으로 이루어지므로, 대뇌 물질의 규모에 비하면 시교차상핵은 아주 작다.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교차상핵이 뇌의 나머지 영역들과 몸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약하지 않다. 이 작은 시계는 생물학적리듬이라는 교향악을 연주하는 수석 지휘자다. 우리뿐 아니라 모든종들에게서 그렇다. 시교차상핵은 아주 다양한 행동들을 통제한다. 이 장에서 주로 논의할 행동도 그렇다. 언제 자거나 깨고 싶어 하는지다. - P32

따라서 다른 신체적 차이(시각 장애 같은)를 보완하기 위해 우리가제공하는편의 조치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조치를 취하는 사회적변화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어느 한 극단에 있는 시간형만이 아니라. 모든 시간형에 더 잘 들어맞는 더 융통성 있는 업무 일정표가 필요하다.
대자연이 사람들 사이에 왜 이런 차이가 나도록 프로그래밍을 했는지 의아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사회적 종이니까, 사람 사이의 상호 작용을 최대화할 수 있도록 모두가 동조하여 동시에 깨어나야하지 않겠는가? 아마 아닐 것이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사람들은 홀로 또는 쌍으로가 아니라, 가족 단위나 심지어는 부족 전체가 함께 모여서 잠을 자는 쪽으로 진화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진화적 맥락에서 보면, 수면-각성 시간이 사람마다 다르도록 유전적으로 정해진 것이 어떤 혜택이 있을지 이해할 수 있다. 집단에서 밤 올빼미형은 오전 1~2시가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가, 오전 9~10시나 되어서야 일어날 것이다. 반면에 아침 종다리형은 오후 9시면 잠자리로 들어갔다가 오전 5시에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집단 전체가 취약해지는 시간(즉 모두가 잠에 빠져 있는)은 여덟 시간이 아니라 고작 네시간에 불과하다. 집단의 모두가 여덟 시간씩 잘 기회를 얻으면서 말이다. 그러면 생존 적합도가 50퍼센트 높아질 수 있다. 대자연은 생존안전장치를 강화함으로써 그만큼 종의 적합도를 높일 수 있는 생물학적 형질 여기서는 부족구성원들이 자고 일어나는 시간이 서로 달라지는 유용한 변이를 결코 내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 결과를 보고있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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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잠이 들다

지난주에 충분히 잤다고 생각하는지? 굳이 카페인이 없이도, 자명종이 없이도 맑은 기분으로 깨어난 적이 언제인지 떠올릴 수 있는지? 이 질문 중 어느 하나에라도 <아니오>라고 답한다면? 당신만 그런것이 아니다. 모든 선진국을 통틀어서 성인 중 3분의 2는 하룻밤 권장수면 시간인 여덟 시간을 제대로 채우지 못한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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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처벌이 부도덕하다는 느낌은 그것을 집행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는 감정이다. 영국에서도 많은 경찰, 판사, 교도관 같은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 일이 끔찍스러워 남몰래 시달릴 것이다. 그런데 버마에서 우리는 이중의 억압을 범하고 있었다. 우리는 사람들을 목매달고 감방에 처넣는 등의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원치 않는 외국 침략자 역할도 했던 것이다. 버마인들도 우리의 사법권 행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가 감방에 가둔 도둑은 정당한 처벌을 받은 게 아니라 외국 정복자에게 희생됐다고 생각했다. 그가 받는 벌은 방자하고 무의미한 잔학 행위일 뿐이었다. 유치장의 묵직한 카운터 뒤나 감방의 철창 뒤에서 그의 얼굴이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나는 인간의 얼굴 표정에 무심해지도록 스스로를 단련하지 못했다. - P199

하지만 스스로 도저히인정할 수 없는 일을 5년 동안이나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하게 느낄 것이다. 번민 끝에 결국 얻은 결론은 모든 피압제자는언제나 옳으며 모든 압제자는 언제나 그르다는 단순한 이론이었다. 잘못된 이론일지 모르나 압제자가 되어본 사람으로 얻을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나는 내 자신이 단순히 제국주의에서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인간의 모든 형태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느꼈다. 나는 스스로 완전히 밑바닥까지 내려가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어졌다. 그들 중 하나가 되어 그들 편에서 압제에 맞서고 싶어졌다. 모든 걸 혼자서만 생각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압제에 대한 증오심을 유난히 길게 끌고 갈수 있었다. 당시에는 실패만이 유일한 미덕처럼 보였다. 조금이라도 자기 발전을 생각한다면, 심지어 한 해 몇 백 파운드를 버는 정도의 ‘성공‘이라도 바란다면 비열한 짓 같았다.
내 마음이 영국의 노동 계급에게로 향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내가 노동 계급을 제대로 인식하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무엇보다 그들에게서 유사성을 발견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 P200

이런 식의 눅눅하고 설익은 위선은 모든 ‘진보‘ 적 견해에서발견된다. 제국주의를 예로 들어보자. 좌파 ‘지식인‘ 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반제국주의자다. 그는 계급적 특권의 밖에 있다고 주장하는 만큼 자동적이고 독선적으로 제국의 특권 밖에 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영국의 제국주의가 딱히 싫지 않은 우파 ‘지식인‘ 도적당히 거리를 둔 척 한다. 대영 제국에 대해 재기 넘치는 태도를취하기는 너무나 쉽다. 「백인의 부담The White Man‘s Burden」 같은 시「브리타니아여 지배하라」 같은 노래, 키플링의 소설, 따분한 인도거주 영국인들 이런 것들을 조소 없이 언급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교양 있는 사람치고, 영국이 인도를 떠난다면 페샤와르와 델리 사이에 돈 한 푼도 처녀 하나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늙은 인도인 하사관에 대한 농담 한번 안 해본 사람이있을까? 그게 일반적인 좌파 사람들이 제국주의에 대해 취하는 태도이며, 아무 도움도 안 되는 매가리 없는 태도다. 결국 가장 중요한 질문은 대영 제국이 건재하기를 바라느냐, 아니면 해체되기를 바라느냐이다. 그러나 영국인치고 대영 제국이 해체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이는 아무도 없다. 특히 인도에 거주하는 영국인 연대장에 대해 재기 넘치는 조롱을 보이는 유의 사람은 더더욱 그렇다. 다른 것은 별도로 치더라도, 영국에서 우리가 누리는 높은 생활수준은 우리가 제국을, 그중에서도 인도나 아프리카 같은 열대 지역에 대한 지배를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영국인이 상대적으로 안락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인도인 500만명이 기아선상에서 허덕여야만 한다. 그것은 참으로 못된 일이지만, 우리가 택시에 발을 들여놓거나 딸기 곁들인 크림 한 접시를 먹을 때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대안은 제국을 뒤집어엎고 영국을 축소시켜, 우리 모두 아주 열심히 일해야 하고 청어와 감자를 주로 먹어야 하는 춥고 시시하고 작은 섬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느 좌파 사람도 원치 않는 바다. 그러면서 그는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아무 도덕적 책임도 느낄 필요가없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는 제국의 단물은 다 빨아들일 태세이면서, 제국을 지키는 사람들을 조롱함으로써 자기 영혼을 구제한다. - P214

나는 런던에서 열린 독립노동당의 한 지회에 처음 참석했다가 맛본 소름끼치는 충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부르주아가 그만큼 많지않은 북부였더라면 좀 달랐을지 모르겠다). 그때 나는 ‘이따위 쩨쩨한것들이 노동 계급을 위해 싸우는 투사란 말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이 남녀를 불문하고 우월감 가득한 거만한 중산층 중에서도 가장 질 나쁜 성흔을 지닌 이들이었던 탓이다.
진짜 노동자가 이를테면 탄광에서 막 퇴근한 시커먼 광부가 그들 가운데로 갑자기 걸어 들어왔다면, 그들은 몹시 난처해하거나 화를 내거나 역겨워했을 것이다. 그런 경향은 사회주의 문학에서도 나타나는 바, 공공연히 내려다보는‘ 태도로 쓴 작품이 아닌 경우일지라도 쓰는 말이나 사고방식이 노동 계급과는 언제나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 P235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 부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혁명이란그들이 어울리고 싶어 하는 서민이 주체가 되는 운동을 뜻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똑똑한 ‘우리‘가 하층 계급인 ‘그들‘에게 부여할일련의 개혁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책으로 단련된 사회주의자를 감정이라곤 없는 냉혈한으로 본다면 잘못이다. 착취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의 증거는 많이 못 내놓는다 해도, 착취하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좀 괴상하고 이론적이며 공허한 증오)는 아주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희한한 것은 거의 모든 사회주의 작가들이 타고났거나 선택해서 자기가 속한 계급에 대해 그토록 쉽게 분노를 터뜨릴수 있다는 점이다. 때로는 부르주아의 습성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중오가 너무 광범위해서 책에 등장하는 부르주아 인물들에게까지 미친다. 앙리 바르뷔스에 따르면, 프루스트나 지드 같은 이들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제발 바리케이드 저편에 있었으면 싶은인물들이었다. 여기서 ‘바리케이드‘에 주목하자. 『포화Le Fet』를 보고 판단했다면, 나는 바르뷔스가 지긋지긋하게 겪었기 때문에 바리케이드를 혐오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상상 속에서 반격하지 않을 ‘부르주아‘ 에게 총검을 휘두르는 것은 실제 상황과는 좀 다르다. - P242

 그렇다면 자본가가 아닌 수많은 사람들은, 물질적인 의미에서 파시즘에서 아무것도 얻을 게 없으며 종종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파시스트인 사람들은 어떻단 말인가? 명백히 그들의 접근법은 순전히 이념적인 노선을 따라온 것이었다. 그들이 파시즘으로 내몰린 것은 공산주의가 경제적인 동기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를(애국심이나 종교 같은 것들을 공격했거나 공격한 것처럼 보였다는 이유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공산주의가 파시즘을 낳았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거의 항상 경제적인 문제에만 집중함으로써 이데올로기의 약점을 본의 아니게 누설해버린 것은 딱한 일이다. 이는 그로 인한 불이익과 더불어 그들의 선전이 대부분 과녁을 빗나가는 것이라는 사실도 드러낸다.  - P253

제일 먼저 주목할 점은 사회주의라는 사상이 다소 불가피하게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 체제라는 관념과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주의는 산업화와 대체로 동시에 성장했고, 언제나 그 뿐리를 도시 프롤레타리아와 도시 지식인에게 두어왔으니, 산업 사회가 아니라면 과연 사회주의가 생겨났을지 의심스럽다. 산업화를인정한다면 사회주의라는 사상이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것은, 사적 소유는 모든 개별 단위가(가족이든 다른 단위든) 최소한의 자급을 할 수 있어야만 허용될 수 있는데 산업화는 그 누구든 한순간이라도 자급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산업화란 어지간한 수준을 넘어서면 ‘반드시‘ 모종의 집단생산주의 (집산주의)로 이어진다. 물론 반드시 사회주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파시즘은 일종의 예고에 지나지 않는 노예 국가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또한 그 반대도 성립된다.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이 사회주의를 낳을 수 있듯이 사회주의가 세계 체제가 되면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이 불가피해지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원시적인 생활방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온 세계가 사회주의화 되려면 이를테면 세계의 모든 지역들 간에 지속적인 상호 연락과 물자 교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아울러 어느 정도 중앙집권화된 지배가 필요하며, 모든 인류의 생활수준이 거의 비슷해져야 하며 교육도 어느 정도 획일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가 실현되는 사회는 어디나 적어도 지금의 미국만큼 고도로 기계화되어야 한다. 아마 그보다 훨씬 더 그래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이 그리는 세계는 언제나 완전히기계화된 세상이며 엄청나게 조직화된 세상이다. 그것은 옛 문명들이 노예에 의존하듯 기계에 의존하는 세상이다. - P-1

 그것은 신체의 모든 기관과 모든 기능의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이 먹고, 마시고, 잠자고, 숨쉬고, 번식하는 것 이상의 활동을 할 이유가 아예 없어진다. 그 밖의
‘모든‘ 것은 기계가 대신 해줄 테니 말이다. 그러니 기계적 진보의 논리적 귀결은 인간을 병 속에 든 뇌 비슷한 무엇으로 축소시키는것이다. 그리고 이는 물론 우리가 뜻하는 바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미 우리가 향해가고 있는 목표이다. 위스키를 매일 한 병씩 마시는 사람이 딱히 간경화에 걸릴 뜻이 있는 게 아니듯 말이다. ‘진보‘가 암시하는 목표는 ‘딱히 병 속에 든 뇌는 아닐지 모르나, 아무튼 편함과 무기력이 지배하는 인간 이하의 무시무시한 수령일 것이다. 그리고 유감스러운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진보‘라는 말과 ‘사회주의‘라는 말이 서로 떼놓을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기계를 혐오하는 부류의 사람은 사회주의를 혐오하는 것도 당연시한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는 언제나 기계화, 합리화, 근대화에 호의적이거나, 적어도 호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내가 얼마전에 만난 어느 저명한 독립노동당원은 적잖이 유감스러워하며(그게 무슨 부적절한 일이기도 하다는 듯 "말(馬)을 좋아한다"는 고백을 했다. 말은 지나가버린 농경 세계에 속하는 것이니만큼, 과거에대한 모든 감상은 막연히 이단의 냄새를 풍긴다는 것이다.  - P271

그리고 이러한 전망은 불길한 것이다. 지금도 기계화의 과정이 우리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된 것은 그것이 인간의 습성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화학자는 새로운 고무 합성법을 완성하려 하고, 기계공은 새로운 피스톤 핀을 고안하려 한다. 왜일까? 이유를 딱히 뭐라 밝힐 순 없겠지만, 발명하고 개량하려는 충동이 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본능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평화주의자를 폭탄 제조공장에서 일하게 해보라. 두 달도 안 돼 새로운 유형의 폭탄을 만들어내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서 독가스 같은 극악무도한 것이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런 것은 인류를 위해 기여하겠다는 포부가 있는 발명가 자신도 예상치 못한 결과이다. 독가스 같은 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화약에 대한 거인국 왕의 태도같은 것이 되어야 하겠지만, 우리는 기계와 과학의 시대에 살고있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진보‘는 지속되어야 하고 지식은 절대로 억제되어선 안 된다는 관념에 감염되어 있다. 우리는 말로는 기계가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지 사람이 기계를 위해 만들어진 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기계의 발달을 제어하려는 시도는지식에 대한 공격이며 곧 일종의 불경으로 간주되는 것 같다. 그리고 설사 온 인류가 갑자기 기계에 반발하여 보다 단순한 생활양식으로 돌아갈 작정을 한다 하더라도 실행하기는 너무나 힘들 것이다. - P278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서는 파시즘을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그러자면 파시즘이 상당한 해악뿐만 아니라 약간의 장점도 갖고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실제로 파시즘은 악랄한 절대 권력이며, 권력을 잡고 유지하느라 쓰는 수법도 워낙 악랄해서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마저 그 이야기는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파시즘의 근간이 되는 정서, 즉 사람들을 처음 파시즘 진영으로 끌어들이는 정서는 그리 한심한 게 아니다. 파시즘은 <새터데이 리뷰SaturdayReviewiew>가 심어주려는 인상, 말하자면 볼셰비키 요괴가 악을 쓰는 끔찍한 꼴을 보이기만 하는 게 아니다. 파시즘 운동을 어느 정도 지켜본 사람이라면 말단의 파시스트 당원이 반듯한(이를테면 실업자의 운명을 개선하고자 하는 열의가 진지한) 사람이라는 걸 안다. 그런데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파시즘이 보수주의의 나쁜 변종뿐 아니라 좋은 변종에서도 힘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전통과 질서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파시즘을 일단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요령 없는 사회주의자들의 선전만 잔뜩 듣다 보면 파시즘을 유럽 문명의 장점을 지킬 마지막 방어선으로 보게 되기가 아주 쉽다. 심지어 한손엔 몽둥이를 들고 다른 한손엔 약을 든, 상징적으로 최악인 파시스트 깡패도 자신을 깡패라 생각지 않는다. 그보다는 기독교계를 지키기 위해 롱스보 고개에서 야만족과 맞서 싸운 롤랑이 된 기분일 것이다. 우리는 파시즘이 어디서나 약진한다면 그것은 우선 사회주의자들 자신의 잘못이란 점을 인정해야 한다.  - P287

하지만 그보다는 사회주의자들이 말하자면 자기네 입장 중에서도 엉뚱한 쪽을 먼저 들이대는 탓이 더 크다. 그들은 경제적인 면에만 눈이 멀어 있어서, 인간에겐 영혼이란 게 없다는 가정에 따라 활동해왔으며, 노골적으로건 암시적으로건 물질적 유토피아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말았다. 때문에 파시즘은 쾌락주의와 ‘진보‘
라는 값싼 관념에 반발하는 모든 충동을 이용할 수 있었다. 달리말해 파시즘은 유럽 전통의 옹호자 시늉을 할 수 있었으며, 기독교신앙과 애국주의와 군사적 가치에 호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파시즘을 ‘집단 사디즘‘이니 뭐니 하며 간단히 무시해버린다면, 그냥 무익하기만 한 게 아니라 몹시 해로울 수 있다. 파시즘을 머지않아 절로 사라질 예외적인 현상인 듯 여긴다면, 누구에게 몽둥이로 얻어맞고서 깨어날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바람직한 건 파시스트의 입장을 연구하고, 나름의 일리가 있는지 알아본 뒤에 파시즘에도 바람직한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런 부분은 사회주위에도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확실히 알리는 것이다. - P288

그보다 더 급한 문제는 파시스트 세력이 유럽을 장악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회주의를 효과적인 형태로 널리 그리고 빨리 확산시키지 못한다면, 파시즘을 타도할 가망은 없어진다. 사회주의야말로 파시즘이 상대해야 할 유일한 적수이기 때문이다. 자본가와 제국주의자가 지배하는 정부는 강탈당할 염려가 있다 해도 스스로는 파시즘에 작정하고 대적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를 잘 알고 있는 우리의 지배자들은 사회주의가 승리하는 꼴을 보느니 대영 제국의 마지막 땅 한 뼘까지 이탈리아나 독일이나 일본에 넘겨주는 쪽을 택할 것이다. 파시즘이 히스테리성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다 싶을 때는 쉽사리웃어넘길 수 있었다. 스스로를 세상에 반하는 선택된 민족으로 여기는 파시스트 국가들이 서로 치고받다 망할 것처럼 보였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전혀 벌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제 파시즘은 국제적인 운동이 되었으며, 그것은 파시스트 국가들이 약탈을 목적으로 단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은 확실히 의식하지 못할지는 몰라도 세계 체제를 모색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전체주의 국가라는 비전 대신에 전체주의 세계라는 비전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기계와 기술의 발전은 결국 모종의 집단생산주의로 이어질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꼭 평등주의적인 체제가 아닐 수 있다. 달리 말해 사회주의 아닌 어떤 체제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에겐 실례가 되겠지만, 경제적으로 집단생산 체제인(즉 이윤의 원리를 제거한) 세계 사회를 상상하기는 아주 쉬우나 그것은 정치, 군사, 교육에 관한 모든 권력이 소수의 지배 계급과 그 하수인들의 손에 넘어간 사회일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슷한 사회야말로 파시즘이 목표로 삼는 사회인 것이다. 물론 그런 사회는 노예 국가 또는 노예 세계라고 하겠다. 그것은 아마도 외양간 같은 사회일 터이며, 과학적으로 개발한다면 어마어마할 세계의 부를 고려할 때 노예들이 잘 먹고 만족하며 지내는 사회일 것이다. 벌에게는 큰 결례가 되겠지만, 파시스트들의 목표가 ‘벌집 국가‘ 라는 말을 흔히들한다. 그보다는 족제비의 지배를 받는 토끼들의 세상이라고 하는게 더 적확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끔찍한 가능성에 맞서 단결해야한다. - P289

사회주의자들은 앞으로 큰 과제를 남겨두고 있다. 그들은착취자와 피착취자를 가르는 선이 정확히 어디부터인지를 확실히밝혀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도 본질을 고수하는 게 중요한데, 여기서 핵심은 수입이 적고 불안정한 모든 사람은 한 배를 탄 이들이며 한편이 되어 싸워야 한다는 점이다. 아마도 우리는 ‘자본가‘나 ‘프롤레타리아‘ 란 말은 덜 쓰고 약탈자나 피약탈자란 말은 더 쓰면서 일을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단, 아무튼 프롤레타리아는 육체노동자뿐인 듯 대하는 잘못된 습성은 버려야 한다. 사무원, 엔지니어, 출장 판매원, ‘영락한‘ 중산층, 마을 식품점 주인, 하급 공무원. 그밖의 온갖 애매한 사람들에게 바로 그들 ‘자신‘이 프롤레타리아란 사실을. 그리고 사회주의란 건설 인부나 농장인부 만큼이나 그들에게도 바람직한 체제라는 사실을 납득시켜야 한다. ‘h‘ 발음이되는 사람들과 안 되는 사람들 사이의 싸움이라는 생각을 하도록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간 그들은 ‘h‘ 발음이 되는 사람들 편에 설것이니 말이다. - P305

이해관계가 상반되는 계급끼리 협력한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다. 자본가는 프롤레타리아와 협력할 수 없다. 만일 고양이가 협력을 제안하고 생쥐가 어리석게도 동의한다면, 얼마못가 생쥐는 고양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것이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같은 한 협력은 언제나 가능하다. 연합해야 할 사람들은 사장에게 굽실거려야 하고 집세 낼 생각을 하면 몸서리쳐지는 모든 이들이다. 이는 소규모 자작농이 공장 노동자와 연합하고, 타자수가 광부와, 학교장이 자동차 정비공과 연합해야 한다는 뜻이다.  - P306

 진정으로 혁명적인 정부가 들어서면 금권정치가 가만히 앉아 있지만은않을 테니 말이다. 계급차가 큰 사람들끼리 진정한 사회주의 정당을 결성하여 함께 싸운다면, 서로에 대한 감정이 달라질 것이다. 그런 뒤라야 계급적 편견이라는 재앙이 서서히 사라질 것이며, 가라앉아가는 우리 중산층은 (학교장, 툭하면 굶어야 하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대령의 연 소득 75파운드인 과년한 딸, 케임브리지 출신 실업자, 탈 배가 없는 해군사관, 사무원, 공무원, 출장 판매원, 시골 읍내에 사는 세 번 파산한 포목상은) 더 이상 발버둥 칠 것 없이 우리가 속한 노동 계급 속으로 내려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우리가 두려워하던 것만큼 끔찍한 일이 아닐 것이다. 결국 우리가 잃을 것은 우리의 ‘h‘ 발음밖에 없을 테니까. -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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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기서 참 얄궂은것은 돈이 없는 사람일수록 건강에 좋은 음식에는 돈을 쓰고 싶은마음이 없어진다는 점이다. 백만장자라면 아침 식사로 오렌지주스와 리비타 Ryvita 비스킷을 즐길 수 있을 테지만, 실업자는 그렇지가않다. 앞장 끄트머리에서 언급한 경향이 여기서도 적용된다. 말하자면 실업자가 되어 못 먹고 시달리고 따분하고 비참한 신세가 되면, 몸에 좋은 음식은 심심해서 먹기가 싫은 것이다. 그보다는 먹는 ‘재미‘가 있는 게 좋으며, 그럴 때 유혹하는 싸고 그럴싸한 먹을거리는 언제든 있게 마련이다. 3페니 주고 푸짐한 감자튀김을 사먹자! 나가서 2페니 주고 아이스크림을 사먹자! 주전자 물 올리고, 모두 차 한 잔 근사하게 하자! 실업수당을 받는 형편이 되면 사람 마음이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흰 빵에 마가린에 설탕친 차는 영양에 별 도움이 되지 않으나, 누런 통밀 빵에 비계에 찬물보다는 ‘근사한 것이다(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 P129

그런 흉한 광경들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면, 두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첫째, 꼭 그래야만 하는가? 둘째, 그게 무슨 대순가?
나는 산업화 자체가 본질적이고 불가피하게 흉측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공장이(심지어 가스공장도) 본래부터 흉해야만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궁전이나 개집이나 성당이 꼭 그래야만하는 게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모든 건 시대의 건축 관행에 달려있다. 북부의 산업 도시들이 흉한 것은 오늘의 철강 건축법과 매연처리술이 알려지지 않은 시절에, 그리고 모두가 돈 벌기만 바빠 다른 생각을 전혀 못하던 시절에 세워진 탓이다. 나아가 이 도시들이계속해서 추한 것은 북부인들이 그런 풍경에 익숙해져 더 이상 추한 줄도 모르게 된 탓이다. 셰필드나 맨체스터의 주민 가운데 상당수는 콘월 지역의 바닷가 공기를 맡으면 아마 냄새가 싱겁다고 할것이다. 그러나 전쟁 이후 산업은 남부 쪽으로 옮겨가는 경향이 있고, 그러면서 제법 멋까지 갖추게 되었다. 전후의 전형적인 공장은삭막한 막사도, 시커먼 건물과 매연 토해내는 굴뚝이 엉망으로 널려 있는 곳도 아니다. 콘크리트와 유리와 철골로 만든 반짝반짝하고 하얀 구조물을 푸른 잔디와 튤립 화단이 둘러싸고 있는 곳이다. 그레이트웨스턴 철도를 타고 런던에서 서부로 갈 때 눈에 띄는 공장들을 보라. 미의 극치라고는 못 해도 셰필드의 가스공장들처럼 흉하지 않은 건 분명하다. 그런데 산업화의 흉측함이 워낙 두드러지고 처음 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혀를 차는 것이라 해도, 나는 그게 가장 중요한 문제일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또한 지금의 산업화라는 게 다른 무엇이기도 하다는 양 위장할 줄 알게 되는 것.
도 바람직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 씨가 정확히 지적한 바와 같이, "악마의 시커먼 공장 dark Satanic mill" 은 악마의 시커먼 공장 같아야지 신비로운 사원이나 찬란한 신神 같아서는 안 된다. - P145

 아마도 상류 중산층의 중요한 특징 하나는 그 전통이 돈벌이와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주로군대나 공직이나 전문직과 관련이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 계급 사•람들은 땅을 소유하지 않아도 하느님 보시기엔 지주라는 생각을스스로 하여, 장사보다는 전문직이나 군복무에 종사함으로써 준귀족적인 관련을 잃지 않으려 했다. 어린 소년들은 자기 접시에 남은 자두 씨 개수를 헤아리는 동시에 "육군, 해군, 교회, 의술, 법"을 차례로 읊으며 자기 운명을 점치곤 했다. 그중에서도 ‘의술은 다른 것들에 비해 다소 열등한 취급을 받았으나 균형을 고려하여 포함된 직업이었다. 연 소득이 400파운드 수준이면서 이 계급에 속한다는 건 참으로 피곤한 노릇이었다. 그럴 때 상류층에 속한다는것은 순전히 이론적인 사실에 가까웠다. 말하자면 두 가지 차원을 동시에 살아야 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이론상으로는 하인들에 대해 전부 알고 그들에게 팁 주는 요령까지 다 알았지만, 실제로는 집에 함께 거주하는 하인이 기껏해야 한둘이었다. 이론상으로는 정장 입는 법과 정찬 주문하는 법을 알았지만, 실제로는 번듯한 양복점이나 번듯한 음식점에 갈 형편이 도무지 아니었다. 이론상으로는 사냥하고 승마하는 법을 알았지만, 실제로는 말도 없고 사냥할 땅 한 뼘도 없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알아야 하급 상류 중산층이 인도에 (더 최근엔 케냐나 나이지리아 등에) 매력을 느낀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군인이나 공직자로 그곳에 간 사람들은 돈벌이를 하러 간 게 아니었다. 돈은 군인이나 공직자가 버는 게 아니었다. 그들이 거기까지 간 것은 예컨대 인도에 가면 말도 싸고 사냥도 공짜로 하고 얼굴 까만 하인들도 얼마든지 둘 수 있어 특권층 노릇을하기가 아주 쉽기 때문이었다. - P166

그게 우리가 듣고 자란 말이다. "아랫것들은 냄새가 나"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넘을 수 없는 장벽과 마주친다. 어떤 호감도 혐오감도 ‘몸‘으로 느끼는 것만큼 근본적일 수는 없다. 인종적 혐오, 종교적 적개심, 교육이나 기질이나 지성의 차이, 심지어 도덕률의 차이도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신체적인 반감은 극복 불능이다. 살인자나 남색자男色者에겐 호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입냄새가 지독한(상습적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사람에겐 호감을 가질 수가없다. 어떤 사람에게 아무리 호의를 품는다 해도, 아무리 그의 정신과 성품을 존경한다 해도, 입 냄새가 고약하면 그는 끔찍한 대상이 되며 당신은 마음속 깊이 그를 혐오하게 된다. 평균적인 중산층사람이 노동 계급은 무식하고, 게으르고, 술꾼이고, 상스럽고, 거짓말쟁이라 믿도록 교육받고 자란다 해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더러운 존재라 믿도록 교육받는다면 대단히 해로운일이다. 그리고 내 어린 시절, 바로 우리가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랐던 것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노동 계급 사람의 신체에는 묘하게 역겨운 데가 있다는 믿음을 습득하게 되는데, 그러고 나면 자기도모르게 그런 사람 가까이 다가가기가 어려워진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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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산업 지대인 북부의 실업률이 아무리 끔찍한 수준이라 해도 런던에 비하면 빈곤이 (특히 극심한 빈곤이) 덜 두드러져 보인다. 모든 게 더 초라하고 누추하지만, 자동차도 적고 잘 차려입은 사람도 적지만, 확연히 궁핍해 보이는 사람도 런던보다 적다. 북부는 리버풀이나 맨체스터 같은 큰 도시에서도 걸인이 적다는게 놀랍다. 런던은 버려진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소용돌이와도 같은 곳이며, 워낙 거대해서 고독한 익명의 생활이 가능하다. 그리고 법을 어기지 않는 한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않으며, 자기를 아는 이웃들이 많은 곳에서는 가당치도 않을 정도로 망가질 수도 있다. - P108

일자리를 잃는다고 해서 인간이기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임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빈곤에 시달리는 지역들은 어떤 면에서는 생각만큼 사정이나쁜 게 아니다. 그들의 삶은 그럭저럭 정상이라 할 수 있으며 생각 이상으로 그렇다. 수많은 가족이 빈궁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가족 제도가 깨진 건 아니다. 사람들은 이전보다 긴축 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운명에 발악하기보다는 생활수준을 낮춤으로써 상황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수준을 낮춘다고 해서 반드시 사치를 끊고 꼭 필요한 것으로만 사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더 흔한데, 잘 생각해보면 그게 더 자연스럽다 할 수 있다. 그래서 유례없는 공황기에 온갖 값싼 사치가 늘어나는 현실이 가능한 것이다.  - P119

히틀러가 라인 지방을 다시 점령했을 때 나는 우연히 요크셔에있었다. 히틀러나 로카르노, 파시즘이나 전쟁의 위협 같은 건 그곳 사람들의 스쳐가는 관심거리도 되지 못했다. 반면에 경기 일정을 미리 발표하지 않겠다는 축구협회의 결정은(축구 도박을 억제해보려는 시도였다)은 요크셔를 분노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아울러 배곯는 사람들에게 기적을 퍼부어주는 오늘날의 전기 과학이 빚어내는 진풍경도 가관이다. 이불이 없어 밤새 떨다가도 아침이면 공공도서관에 가서 샌프란시스코나 싱가포르에서 전송한 뉴스를 읽는게 오늘날인 것이다. 영국에선 2천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제대로 먹지 못하지만, 말 그대로 누구나 라디오를 들을 수 있다. 우리는 먹는 것에서 생긴 결핍을 전기로 채우는 셈이다. 정말 필요한 것은 전부 강탈당한 상당수의 노동 계급이 생활의 표피만을 누그러뜨리는 값싼 사치로 부분적인 보상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현상을 바람직하다고 보시는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노동 계급이 겉으로나마 보이고 있는 적응은 그들이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혁명적으로 변한 것도 자존심을 잃은 것도 아니다. 단지 노여움을 참고 ‘피시앤드 칩스‘ 수준에서 그럭저럭 견뎌 나가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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