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처벌이 부도덕하다는 느낌은 그것을 집행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는 감정이다. 영국에서도 많은 경찰, 판사, 교도관 같은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 일이 끔찍스러워 남몰래 시달릴 것이다. 그런데 버마에서 우리는 이중의 억압을 범하고 있었다. 우리는 사람들을 목매달고 감방에 처넣는 등의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원치 않는 외국 침략자 역할도 했던 것이다. 버마인들도 우리의 사법권 행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가 감방에 가둔 도둑은 정당한 처벌을 받은 게 아니라 외국 정복자에게 희생됐다고 생각했다. 그가 받는 벌은 방자하고 무의미한 잔학 행위일 뿐이었다. 유치장의 묵직한 카운터 뒤나 감방의 철창 뒤에서 그의 얼굴이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나는 인간의 얼굴 표정에 무심해지도록 스스로를 단련하지 못했다. - P199
하지만 스스로 도저히인정할 수 없는 일을 5년 동안이나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하게 느낄 것이다. 번민 끝에 결국 얻은 결론은 모든 피압제자는언제나 옳으며 모든 압제자는 언제나 그르다는 단순한 이론이었다. 잘못된 이론일지 모르나 압제자가 되어본 사람으로 얻을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나는 내 자신이 단순히 제국주의에서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인간의 모든 형태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느꼈다. 나는 스스로 완전히 밑바닥까지 내려가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어졌다. 그들 중 하나가 되어 그들 편에서 압제에 맞서고 싶어졌다. 모든 걸 혼자서만 생각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압제에 대한 증오심을 유난히 길게 끌고 갈수 있었다. 당시에는 실패만이 유일한 미덕처럼 보였다. 조금이라도 자기 발전을 생각한다면, 심지어 한 해 몇 백 파운드를 버는 정도의 ‘성공‘이라도 바란다면 비열한 짓 같았다. 내 마음이 영국의 노동 계급에게로 향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내가 노동 계급을 제대로 인식하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무엇보다 그들에게서 유사성을 발견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 P200
이런 식의 눅눅하고 설익은 위선은 모든 ‘진보‘ 적 견해에서발견된다. 제국주의를 예로 들어보자. 좌파 ‘지식인‘ 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반제국주의자다. 그는 계급적 특권의 밖에 있다고 주장하는 만큼 자동적이고 독선적으로 제국의 특권 밖에 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영국의 제국주의가 딱히 싫지 않은 우파 ‘지식인‘ 도적당히 거리를 둔 척 한다. 대영 제국에 대해 재기 넘치는 태도를취하기는 너무나 쉽다. 「백인의 부담The White Man‘s Burden」 같은 시「브리타니아여 지배하라」 같은 노래, 키플링의 소설, 따분한 인도거주 영국인들 이런 것들을 조소 없이 언급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교양 있는 사람치고, 영국이 인도를 떠난다면 페샤와르와 델리 사이에 돈 한 푼도 처녀 하나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늙은 인도인 하사관에 대한 농담 한번 안 해본 사람이있을까? 그게 일반적인 좌파 사람들이 제국주의에 대해 취하는 태도이며, 아무 도움도 안 되는 매가리 없는 태도다. 결국 가장 중요한 질문은 대영 제국이 건재하기를 바라느냐, 아니면 해체되기를 바라느냐이다. 그러나 영국인치고 대영 제국이 해체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이는 아무도 없다. 특히 인도에 거주하는 영국인 연대장에 대해 재기 넘치는 조롱을 보이는 유의 사람은 더더욱 그렇다. 다른 것은 별도로 치더라도, 영국에서 우리가 누리는 높은 생활수준은 우리가 제국을, 그중에서도 인도나 아프리카 같은 열대 지역에 대한 지배를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영국인이 상대적으로 안락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인도인 500만명이 기아선상에서 허덕여야만 한다. 그것은 참으로 못된 일이지만, 우리가 택시에 발을 들여놓거나 딸기 곁들인 크림 한 접시를 먹을 때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대안은 제국을 뒤집어엎고 영국을 축소시켜, 우리 모두 아주 열심히 일해야 하고 청어와 감자를 주로 먹어야 하는 춥고 시시하고 작은 섬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느 좌파 사람도 원치 않는 바다. 그러면서 그는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아무 도덕적 책임도 느낄 필요가없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는 제국의 단물은 다 빨아들일 태세이면서, 제국을 지키는 사람들을 조롱함으로써 자기 영혼을 구제한다. - P214
나는 런던에서 열린 독립노동당의 한 지회에 처음 참석했다가 맛본 소름끼치는 충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부르주아가 그만큼 많지않은 북부였더라면 좀 달랐을지 모르겠다). 그때 나는 ‘이따위 쩨쩨한것들이 노동 계급을 위해 싸우는 투사란 말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이 남녀를 불문하고 우월감 가득한 거만한 중산층 중에서도 가장 질 나쁜 성흔을 지닌 이들이었던 탓이다. 진짜 노동자가 이를테면 탄광에서 막 퇴근한 시커먼 광부가 그들 가운데로 갑자기 걸어 들어왔다면, 그들은 몹시 난처해하거나 화를 내거나 역겨워했을 것이다. 그런 경향은 사회주의 문학에서도 나타나는 바, 공공연히 내려다보는‘ 태도로 쓴 작품이 아닌 경우일지라도 쓰는 말이나 사고방식이 노동 계급과는 언제나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 P235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 부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혁명이란그들이 어울리고 싶어 하는 서민이 주체가 되는 운동을 뜻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똑똑한 ‘우리‘가 하층 계급인 ‘그들‘에게 부여할일련의 개혁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책으로 단련된 사회주의자를 감정이라곤 없는 냉혈한으로 본다면 잘못이다. 착취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의 증거는 많이 못 내놓는다 해도, 착취하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좀 괴상하고 이론적이며 공허한 증오)는 아주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희한한 것은 거의 모든 사회주의 작가들이 타고났거나 선택해서 자기가 속한 계급에 대해 그토록 쉽게 분노를 터뜨릴수 있다는 점이다. 때로는 부르주아의 습성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중오가 너무 광범위해서 책에 등장하는 부르주아 인물들에게까지 미친다. 앙리 바르뷔스에 따르면, 프루스트나 지드 같은 이들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제발 바리케이드 저편에 있었으면 싶은인물들이었다. 여기서 ‘바리케이드‘에 주목하자. 『포화Le Fet』를 보고 판단했다면, 나는 바르뷔스가 지긋지긋하게 겪었기 때문에 바리케이드를 혐오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상상 속에서 반격하지 않을 ‘부르주아‘ 에게 총검을 휘두르는 것은 실제 상황과는 좀 다르다. - P242
그렇다면 자본가가 아닌 수많은 사람들은, 물질적인 의미에서 파시즘에서 아무것도 얻을 게 없으며 종종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파시스트인 사람들은 어떻단 말인가? 명백히 그들의 접근법은 순전히 이념적인 노선을 따라온 것이었다. 그들이 파시즘으로 내몰린 것은 공산주의가 경제적인 동기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를(애국심이나 종교 같은 것들을 공격했거나 공격한 것처럼 보였다는 이유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공산주의가 파시즘을 낳았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거의 항상 경제적인 문제에만 집중함으로써 이데올로기의 약점을 본의 아니게 누설해버린 것은 딱한 일이다. 이는 그로 인한 불이익과 더불어 그들의 선전이 대부분 과녁을 빗나가는 것이라는 사실도 드러낸다. - P253
제일 먼저 주목할 점은 사회주의라는 사상이 다소 불가피하게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 체제라는 관념과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주의는 산업화와 대체로 동시에 성장했고, 언제나 그 뿐리를 도시 프롤레타리아와 도시 지식인에게 두어왔으니, 산업 사회가 아니라면 과연 사회주의가 생겨났을지 의심스럽다. 산업화를인정한다면 사회주의라는 사상이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것은, 사적 소유는 모든 개별 단위가(가족이든 다른 단위든) 최소한의 자급을 할 수 있어야만 허용될 수 있는데 산업화는 그 누구든 한순간이라도 자급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산업화란 어지간한 수준을 넘어서면 ‘반드시‘ 모종의 집단생산주의 (집산주의)로 이어진다. 물론 반드시 사회주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파시즘은 일종의 예고에 지나지 않는 노예 국가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또한 그 반대도 성립된다.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이 사회주의를 낳을 수 있듯이 사회주의가 세계 체제가 되면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이 불가피해지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원시적인 생활방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온 세계가 사회주의화 되려면 이를테면 세계의 모든 지역들 간에 지속적인 상호 연락과 물자 교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아울러 어느 정도 중앙집권화된 지배가 필요하며, 모든 인류의 생활수준이 거의 비슷해져야 하며 교육도 어느 정도 획일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가 실현되는 사회는 어디나 적어도 지금의 미국만큼 고도로 기계화되어야 한다. 아마 그보다 훨씬 더 그래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이 그리는 세계는 언제나 완전히기계화된 세상이며 엄청나게 조직화된 세상이다. 그것은 옛 문명들이 노예에 의존하듯 기계에 의존하는 세상이다. - P-1
그것은 신체의 모든 기관과 모든 기능의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이 먹고, 마시고, 잠자고, 숨쉬고, 번식하는 것 이상의 활동을 할 이유가 아예 없어진다. 그 밖의 ‘모든‘ 것은 기계가 대신 해줄 테니 말이다. 그러니 기계적 진보의 논리적 귀결은 인간을 병 속에 든 뇌 비슷한 무엇으로 축소시키는것이다. 그리고 이는 물론 우리가 뜻하는 바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미 우리가 향해가고 있는 목표이다. 위스키를 매일 한 병씩 마시는 사람이 딱히 간경화에 걸릴 뜻이 있는 게 아니듯 말이다. ‘진보‘가 암시하는 목표는 ‘딱히 병 속에 든 뇌는 아닐지 모르나, 아무튼 편함과 무기력이 지배하는 인간 이하의 무시무시한 수령일 것이다. 그리고 유감스러운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진보‘라는 말과 ‘사회주의‘라는 말이 서로 떼놓을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기계를 혐오하는 부류의 사람은 사회주의를 혐오하는 것도 당연시한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는 언제나 기계화, 합리화, 근대화에 호의적이거나, 적어도 호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내가 얼마전에 만난 어느 저명한 독립노동당원은 적잖이 유감스러워하며(그게 무슨 부적절한 일이기도 하다는 듯 "말(馬)을 좋아한다"는 고백을 했다. 말은 지나가버린 농경 세계에 속하는 것이니만큼, 과거에대한 모든 감상은 막연히 이단의 냄새를 풍긴다는 것이다. - P271
그리고 이러한 전망은 불길한 것이다. 지금도 기계화의 과정이 우리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된 것은 그것이 인간의 습성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화학자는 새로운 고무 합성법을 완성하려 하고, 기계공은 새로운 피스톤 핀을 고안하려 한다. 왜일까? 이유를 딱히 뭐라 밝힐 순 없겠지만, 발명하고 개량하려는 충동이 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본능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평화주의자를 폭탄 제조공장에서 일하게 해보라. 두 달도 안 돼 새로운 유형의 폭탄을 만들어내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서 독가스 같은 극악무도한 것이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런 것은 인류를 위해 기여하겠다는 포부가 있는 발명가 자신도 예상치 못한 결과이다. 독가스 같은 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화약에 대한 거인국 왕의 태도같은 것이 되어야 하겠지만, 우리는 기계와 과학의 시대에 살고있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진보‘는 지속되어야 하고 지식은 절대로 억제되어선 안 된다는 관념에 감염되어 있다. 우리는 말로는 기계가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지 사람이 기계를 위해 만들어진 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기계의 발달을 제어하려는 시도는지식에 대한 공격이며 곧 일종의 불경으로 간주되는 것 같다. 그리고 설사 온 인류가 갑자기 기계에 반발하여 보다 단순한 생활양식으로 돌아갈 작정을 한다 하더라도 실행하기는 너무나 힘들 것이다. - P278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서는 파시즘을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그러자면 파시즘이 상당한 해악뿐만 아니라 약간의 장점도 갖고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실제로 파시즘은 악랄한 절대 권력이며, 권력을 잡고 유지하느라 쓰는 수법도 워낙 악랄해서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마저 그 이야기는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파시즘의 근간이 되는 정서, 즉 사람들을 처음 파시즘 진영으로 끌어들이는 정서는 그리 한심한 게 아니다. 파시즘은 <새터데이 리뷰SaturdayReviewiew>가 심어주려는 인상, 말하자면 볼셰비키 요괴가 악을 쓰는 끔찍한 꼴을 보이기만 하는 게 아니다. 파시즘 운동을 어느 정도 지켜본 사람이라면 말단의 파시스트 당원이 반듯한(이를테면 실업자의 운명을 개선하고자 하는 열의가 진지한) 사람이라는 걸 안다. 그런데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파시즘이 보수주의의 나쁜 변종뿐 아니라 좋은 변종에서도 힘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전통과 질서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파시즘을 일단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요령 없는 사회주의자들의 선전만 잔뜩 듣다 보면 파시즘을 유럽 문명의 장점을 지킬 마지막 방어선으로 보게 되기가 아주 쉽다. 심지어 한손엔 몽둥이를 들고 다른 한손엔 약을 든, 상징적으로 최악인 파시스트 깡패도 자신을 깡패라 생각지 않는다. 그보다는 기독교계를 지키기 위해 롱스보 고개에서 야만족과 맞서 싸운 롤랑이 된 기분일 것이다. 우리는 파시즘이 어디서나 약진한다면 그것은 우선 사회주의자들 자신의 잘못이란 점을 인정해야 한다. - P287
하지만 그보다는 사회주의자들이 말하자면 자기네 입장 중에서도 엉뚱한 쪽을 먼저 들이대는 탓이 더 크다. 그들은 경제적인 면에만 눈이 멀어 있어서, 인간에겐 영혼이란 게 없다는 가정에 따라 활동해왔으며, 노골적으로건 암시적으로건 물질적 유토피아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말았다. 때문에 파시즘은 쾌락주의와 ‘진보‘ 라는 값싼 관념에 반발하는 모든 충동을 이용할 수 있었다. 달리말해 파시즘은 유럽 전통의 옹호자 시늉을 할 수 있었으며, 기독교신앙과 애국주의와 군사적 가치에 호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파시즘을 ‘집단 사디즘‘이니 뭐니 하며 간단히 무시해버린다면, 그냥 무익하기만 한 게 아니라 몹시 해로울 수 있다. 파시즘을 머지않아 절로 사라질 예외적인 현상인 듯 여긴다면, 누구에게 몽둥이로 얻어맞고서 깨어날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바람직한 건 파시스트의 입장을 연구하고, 나름의 일리가 있는지 알아본 뒤에 파시즘에도 바람직한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런 부분은 사회주위에도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확실히 알리는 것이다. - P288
그보다 더 급한 문제는 파시스트 세력이 유럽을 장악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회주의를 효과적인 형태로 널리 그리고 빨리 확산시키지 못한다면, 파시즘을 타도할 가망은 없어진다. 사회주의야말로 파시즘이 상대해야 할 유일한 적수이기 때문이다. 자본가와 제국주의자가 지배하는 정부는 강탈당할 염려가 있다 해도 스스로는 파시즘에 작정하고 대적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를 잘 알고 있는 우리의 지배자들은 사회주의가 승리하는 꼴을 보느니 대영 제국의 마지막 땅 한 뼘까지 이탈리아나 독일이나 일본에 넘겨주는 쪽을 택할 것이다. 파시즘이 히스테리성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다 싶을 때는 쉽사리웃어넘길 수 있었다. 스스로를 세상에 반하는 선택된 민족으로 여기는 파시스트 국가들이 서로 치고받다 망할 것처럼 보였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전혀 벌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제 파시즘은 국제적인 운동이 되었으며, 그것은 파시스트 국가들이 약탈을 목적으로 단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은 확실히 의식하지 못할지는 몰라도 세계 체제를 모색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전체주의 국가라는 비전 대신에 전체주의 세계라는 비전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기계와 기술의 발전은 결국 모종의 집단생산주의로 이어질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꼭 평등주의적인 체제가 아닐 수 있다. 달리 말해 사회주의 아닌 어떤 체제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에겐 실례가 되겠지만, 경제적으로 집단생산 체제인(즉 이윤의 원리를 제거한) 세계 사회를 상상하기는 아주 쉬우나 그것은 정치, 군사, 교육에 관한 모든 권력이 소수의 지배 계급과 그 하수인들의 손에 넘어간 사회일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슷한 사회야말로 파시즘이 목표로 삼는 사회인 것이다. 물론 그런 사회는 노예 국가 또는 노예 세계라고 하겠다. 그것은 아마도 외양간 같은 사회일 터이며, 과학적으로 개발한다면 어마어마할 세계의 부를 고려할 때 노예들이 잘 먹고 만족하며 지내는 사회일 것이다. 벌에게는 큰 결례가 되겠지만, 파시스트들의 목표가 ‘벌집 국가‘ 라는 말을 흔히들한다. 그보다는 족제비의 지배를 받는 토끼들의 세상이라고 하는게 더 적확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끔찍한 가능성에 맞서 단결해야한다. - P289
사회주의자들은 앞으로 큰 과제를 남겨두고 있다. 그들은착취자와 피착취자를 가르는 선이 정확히 어디부터인지를 확실히밝혀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도 본질을 고수하는 게 중요한데, 여기서 핵심은 수입이 적고 불안정한 모든 사람은 한 배를 탄 이들이며 한편이 되어 싸워야 한다는 점이다. 아마도 우리는 ‘자본가‘나 ‘프롤레타리아‘ 란 말은 덜 쓰고 약탈자나 피약탈자란 말은 더 쓰면서 일을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단, 아무튼 프롤레타리아는 육체노동자뿐인 듯 대하는 잘못된 습성은 버려야 한다. 사무원, 엔지니어, 출장 판매원, ‘영락한‘ 중산층, 마을 식품점 주인, 하급 공무원. 그밖의 온갖 애매한 사람들에게 바로 그들 ‘자신‘이 프롤레타리아란 사실을. 그리고 사회주의란 건설 인부나 농장인부 만큼이나 그들에게도 바람직한 체제라는 사실을 납득시켜야 한다. ‘h‘ 발음이되는 사람들과 안 되는 사람들 사이의 싸움이라는 생각을 하도록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간 그들은 ‘h‘ 발음이 되는 사람들 편에 설것이니 말이다. - P305
이해관계가 상반되는 계급끼리 협력한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다. 자본가는 프롤레타리아와 협력할 수 없다. 만일 고양이가 협력을 제안하고 생쥐가 어리석게도 동의한다면, 얼마못가 생쥐는 고양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것이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같은 한 협력은 언제나 가능하다. 연합해야 할 사람들은 사장에게 굽실거려야 하고 집세 낼 생각을 하면 몸서리쳐지는 모든 이들이다. 이는 소규모 자작농이 공장 노동자와 연합하고, 타자수가 광부와, 학교장이 자동차 정비공과 연합해야 한다는 뜻이다. - P306
진정으로 혁명적인 정부가 들어서면 금권정치가 가만히 앉아 있지만은않을 테니 말이다. 계급차가 큰 사람들끼리 진정한 사회주의 정당을 결성하여 함께 싸운다면, 서로에 대한 감정이 달라질 것이다. 그런 뒤라야 계급적 편견이라는 재앙이 서서히 사라질 것이며, 가라앉아가는 우리 중산층은 (학교장, 툭하면 굶어야 하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대령의 연 소득 75파운드인 과년한 딸, 케임브리지 출신 실업자, 탈 배가 없는 해군사관, 사무원, 공무원, 출장 판매원, 시골 읍내에 사는 세 번 파산한 포목상은) 더 이상 발버둥 칠 것 없이 우리가 속한 노동 계급 속으로 내려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우리가 두려워하던 것만큼 끔찍한 일이 아닐 것이다. 결국 우리가 잃을 것은 우리의 ‘h‘ 발음밖에 없을 테니까. - P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