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하루키가 팔아치운 책의 표지를 모두 모아 쌓아놓으면 그간 내가 간신히 판 책의 높이와 거의 비슷해지겠지만, 그런 점에서, 그러니까 장례식에 입고 갈 검은 양복이 없다는 점에서 하루키와 나는 똑같은 처지다. 그리하여 2003년 초, 소설가 이문구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문득 나는 ‘이제 검은 양복 한벌쯤은 필요한 나이가 됐군‘이란 생각을 했다. 그건 말해놓고 보니 굉장히 끔찍한 느낌이 드는 경우였다. 화가 나서 ‘난 엄마가 없어졌으면 좋겠어!‘라고 외쳤다가는 혼자 방구석에 처박혀 울고 싶어지는 느낌과 비슷했다. 그게 반도패션이든 폴 스튜어트든 일단 구입했다면 열심히 입고 다니는 게 본전을 뽑는 일일텐데, 내가 저승사자도 아니고 어찌 그 양복을 최대한 활용할수 있기를 기대한단 말인가. 왜 검은 양복 따위는 친구에게 빌려 입어야만 하는 것인지 그제야 이해가 갔다.
하루키 얘기를 마저 하자면, 상실의 시대」에는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해 있다‘라는, 이성교제 문제로 아버지에게 심하게 꾸중을 들은 여고생이 자살사이트 익명게시판에 적어놓을 만한 문장이 나온다. 원서에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문학사상사에서 낸 번역본에는 혹시 독자들이이 문장을 놓칠까봐 고딕으로 인쇄한 게 눈에 띈다. 한샘국어식으로 따져서 밑줄을 쫙 그을 만한 중요한 문장인가보다. 그래서 우락부락한 인간들이 모여 앉은 흡연구역에서 담배 한 대 피울정도의 시간만큼 생각해봤더니 그건 맞는 말이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 푸른 하늘에도 별은 떠 있듯 평온한 이 삶의 곳곳에는 죽음이라는 웅덩이가 숨어 있다. - P51

키친 테이블 노블이라는 게 있다면, 세상의 모든 키친 테이블 노블은 애잔하기 그지없다. 어떤 경우에도 그 소설은 전적으로 자신을 위해 씌어지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스탠드를 밝히고 노트를 꺼내 뭔가를 한없이 긁적여 나간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서 돌아와 뭔가를 한없이 긁적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긁적이는동안, 자기 자신이 치유받는다. 그들의 작품에 열광한 수많은 독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키친 테이블 노블이 실제로 하는일은 그 글을 쓰는 사람을 치유하는 일이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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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사든 선택의 폭이 너무 넓어서 시간이 원래의 10배는 더 걸리지만, 이상하게도 이것은 불만족을 낳는다. 물건의 종류가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사람들은 더욱 다양한 물건을 찾고, 더욱 다양한 물건을 찾을수록 사람들은 더욱 더 다양한 물건을 찾는다. 여러분은 모든 것을 더욱더 많이 원하는, 끊임없고 억제할 수 없는 욕구를 지닌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느낌을 받을 때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소매점을 돌면서 새로운 물건과 옷과 음식을 찾는 게 주된 여가활동이 된 사회에 살고있는 듯하다. - P267

과학이 노화의 비밀을 밝혀내다‘
요전 날 신문의 헤드라인으로 실린 이 문구가 나를 놀라게 했다. 나는노화를 비밀로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노화는 때가 되면 저절로일어나는 현상으로, 그 안에는 아무런 비밀도 없다.
나에 관한 한 나이 들어간다는 것에는 세 가지 장점이 있다. 앉아서도 잠을 잘 수 있고, <사인펠드> 재방송을 이미 본 것인지도 모르고 몇 번씩다시 볼 수 있으며, 세 번째가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은 노화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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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그 옛날로 돌아가 당시의 사람들에게 백여 년 뒤의 세계에대해 말해준다면 그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텔레비전으로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을 실시간으로 본다거나 스마트폰으로 지인들과 바로바로 편지를 주고받는다고 말한다면? 분명 깜짝 놀랄 것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그들이 가장 믿지 못할 일은 백여 년 뒤의 사람들도 아사히신문에 실린 나쓰메 소세키의「문」을 매일 읽고 있을 것이라는 말이 아닐까 싶다. 2080년의 일들을 상상하는 나에게 미래의 누군가가 찾아와 그때에도 종이신문의 한 귀퉁이에 새로 태어난 아이들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릴 것이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그게 가장 놀랄 만한 일이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을 먼 미래의 사람들도 하리라는 것. 소설을 읽고, 일기를 쓰고, 옆에서 걷는 사람의 손을 잡고, 단골식당 앞에 줄을 서고, 보름달에 소원을 빌고.... 그렇게 이 세계는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놀랄 만한 미래는, 그렇게 다가온다. - P13

그런데 따분하게 이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읽다가 어느 순간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왜 그랬을까? 순전히 밟으면 삐걱대는 오래된 마루널처럼 몸이 아픈 어머니를 떠나보낸 내 감정이입일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온갖 금지 사항만을 늘어놓던 이덕무가 어느 결엔가 이런 문장을 썼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와 숙부들이 다 살아 계실 때는 매우 우애가돈독하였다. 다섯 분 형제가 한 방에 모이시면 화기가 가득하였다. 어머니께서는 이분들을 공경히 섬겨 아침저녁 식사를 반드시 손수 장만하시어 다섯 그릇의 밥과 다섯 그릇의 국을 반드시 큰상에 차려서 드렸다. 다섯 분은 빙 둘러앉아서 똑같이 식사를 드시는데 화기가 애애하였다. 나는 어릴 때 그 일을 보았다. 지금은 네 분 숙부가 다 작고하고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셨으며, 아버지만이 홀로 계시는데, 때로 그 일을 말씀하실 때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신 적이 없었다.‘
이 문장을 쓰면서 이덕무는 그저 ‘어릴 때 그 일을 보았다‘
며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셨다‘고만 말했다. 자기 마음은 하나도 밝히지 않고 은근슬쩍 그 일을 말씀하실 때마다 눈물을 흘리시는 아버지 얘기만 하더니 다시 하지 마라‘는 식의 글이 이어진다. 이 문장에서 이덕무는 별말이 없었는데, 나는 그가 어머니와 네 분 숙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들을 여의고 난 뒤집이 얼마나 조용해졌는지, 아버지와 둘이 앉아 옛일을 얘기하노라면 슬피 우시는 아버지 때문에 눈물도 보이지 못한 이덕무의 가슴이 얼마나 아팠겠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제야 나는 이 책에 실린 말들이 사실은 이덕무의 말이 아니라, 그 어머니의 말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손에 묻어도 빨아먹지 말아라, 얘야, 참외를 먹다가 남에게 줄 때는 꼭 칼로 이빨 자국을 깎아버리고 주어야 한다. - P33

정약용이 쓴 「선중씨先仲氏 정약전 묘비명」을 읽는데 내 눈에 문득 이런 구절이 들어왔다.

차마 내 아우로 하여금 바다를 두 번이나 건너며 나를 보러오게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내가 마땅히 우이보에 나가서기다려야 되지.
不忍使吾弟 涉重以見我 我當於牛耳堡待之

1801년 11월 21일 목포 쪽과 해남 쪽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주막거리인 나주 율정점에 도착한 죄인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는 다음 날 아침 그곳에서 헤어져 각자 자기의 유배지로 떠났다. 이 일을 정약용은 「율정별栗亭別」이란 시에서‘로 이은 가게집, 새벽 등잔불이 푸르스름 꺼지려 해 / 잠자리에서 일어나샛별 바라보니 이별할 일 참담해라/ 그리운 정 가슴에 품은 채묵묵히 두 사람 말을 잃어/ 억지로 말을 꺼내니 목이 메어 오열이 터지네‘라고 노래했다.
그렇게 헤어지고 14년이 지난 1814년 아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풀려나리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처음 떠나올 때만 해도 흑산도 입구인 우이도에 살았으니 우이도로 잘못 찾아간 아우가 한 번 더 바다를 건너는 수고를 할까봐 정약전은 고집을 피워 우이도로 다시 나갔다. 그리고 거기서 3년을 더 아우를 기다리다가 죽었으니 아우 정약용이 그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는가!
그 묘비명에 ‘악한 놈들의 착하지 못함을 쌓아가던 게 이와 같았었다‘라고 쓰는 심정을 알 것도 같다.
유배 16년 동안, 겨우 몇 권의 책만 낸 정약전. 그가 뭍이 아니라 아우를 그리워했다는 사실을, 그 그리움을 잊으려고 물고기들을 하염없이 바라봤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내가 마지막으로 집을 떠나고서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사랑은 물과 같은 것인가. 그 큰사랑이 내리 내리 아래로만 흘러간다. 그런 줄도 모르기 때문에 아이들은 자라 집을 떠나고 어린 새들은 날개를 퍼덕여 날아가는 것이다. - P42

열무와 나의 두번째 여름은 그렇게 끝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열무에게 익숙하지 못한 아버지였다. 하지만 내게 아버지가 없었더라면 그마저도 못할 뻔했다. 아이가 생기면 제일 먼저 자전거 앞자리에 태우고 싶었다. 어렸을 때, 내 얼굴에 부딪히던그 바람과 불빛과 거리의 냄새를 아이에게도 전해주고 싶었다. 아버지에게 받은 가장 소중한 것. 오랜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남아 있는 것. 집이 있어 아이들은 떠날 수 있고 어미 새가 있어 어린 새들은 날갯짓을 배운다. 내가 바다를 건너는 수고를 한 번이라도 했다면 그건 아버지가 이미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이다. 나도 이제 열무를 위해 먼저 바다를 건너는 방법을 배워야겠다. 물론 어렵겠지만,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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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사람도 한 짐, 부지런한 사람도 한 짐이라더니.... 철딱서니 없는 것도 속을 끓이기 시작하니 호되게 끓이네, 원.."
할머니는 이모가 안쓰러운 거였다. 갈상머리 없고 덤벙대는 막내딸이 속을 끓이며 아파하니 그것이 더 할머니 마음에 와닿는 모양이었다. 성숙한 어른이 슬퍼하는 것보다는 철없는 아이의 슬픔이 더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러므로 철없는 사람은 마음껏 철없이 행동하면서도 슬픔이 닥치면 불공평하게도 더 많은 사랑과 배려를 받는 것이다. 성숙한 사람은 으레 슬픔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그 같은 배려를 받지 못한다. 성숙한 사람은 언제나 손해이다. 나는 너무 일찍 성숙했고 그러기에 일찍부터 삶을 알게 된 만큼 삶에서 빨리 밑지기 시작했다. - P362

죽은 이선생님이 이런 얘기를 했었다.
숲속에 마른 열매 하나가 툭 떨어졌다. 나무 밑에 있던 여우가그 소리에 깜짝 놀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멀리서 호랑이가 그 여우를 보았다. 꾀보 여우가 저렇게 다급하게 뛸 때는 분명 굉장한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호랑이도 뛰기 시작했다. 호랑이의 뛰는 모습을 숲속 동물들이 보았다. 산중호걸인 호랑이가 저렇게 도망을 칠 정도면 굉장한 천재지변이거나 외계인의 출현이다. 그해서 숲속의 모든 동물이 다 뛰었다. 온 숲이 뒤집어졌고 숲은 그숲이 생긴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삶도 그런 것이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 P403

"진희야. 네 아버지야."
이모가 말문을 열자 지금까지 힘들게 참았다는 듯이 남자도 그말을 되풀이했다.
"진희야. 아버지다."
나는 왼쪽 털신 속에 발을 집어넣고 이번에는 오른쪽 털신을 벗어들고는 그 안의 눈을 털어냈다. 보여지는 나가 말한다. 공손하게 인사를 해. 침착하게 바라보는 나가 말한다. 반가워하지 마. 아버지라고 농담이야. 60년대엔 나에게 아버지가 없었지. 그러니 이건 새로운 농담이 틀림없어. 70년대식 농담인 거야. 시대라는 구획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건 어쩔 수 없이 인정하더라도 맙소사, 아버지라니, 70년대엔 내게 아버지가 있다니, 이건 대단한 농담이다.
한쪽 손으로 마루 기둥을 잡고 한쪽 손으로 댓돌 위에 털신을 연신 패대기치면서, 그리고 한쪽 다리로 서 있었지만 나는 조금도 비틀거리지 않았다.
눈이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 때 나도 이런 눈을 만들어본 적이 있다. 붓에 흰 물감을 듬뿍 적셔서 검은 켄트지에 마구 뿌려대는 것이다. 그러면 검은 밤 위로 흰 눈이 쏟아지는데 눈이 너무 많이 쏟아지니 시야가 흐릴 것이므로 당연히 다른 풍경은 그릴 필요가 없었다. 지금 나도 시야가 흐렸다. - P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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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러에 따르면 "8000만 명의 선한 독일인이 존재하며, 그들 각각은 훌륭한 유대인을알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다른 사람들은 돼지들이지만, 이 특정한 유대인은 일등급이다." 히틀러는 340명의 ‘일등급 유대인‘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들 모두에게 독일인의 지위를 부여하거나 반쪽 유대인의 특권을 부여했다고 한다. 수천 명의 반쪽 유대인은 모든 제약을 면제받았는데, 이것이 친위대 내에서의 하이드리히의 역할과 괴링의 공군부대 원수인 에르하르트 밀히의 역할을 설명해 준다. 하이드리히와 밀히가 반쪽 유대인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
‘저명한 유대인을 위한 개입이 ‘저명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그 경우는 종종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히틀러의 가장 열렬한 신봉자 중 한 사람이었던 즈벤 헤딘은 저명한 지리학자인 본 출신의 필리프존 교수를 위해 개입했는데, 그는 "테레지엔슈타트에서 형편없는 조건 속에서 살고 있었다." 히틀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헤딘은
"독일에 대한 자신의 태도는 필리프존의 운명에 달려 있을 것이다"라고 협박했는데, 이에 따라 (H.G. 아들러의 테레지엔슈타트에 대한 저술에 따르면) 필리프존 교수는 즉각 보다 나은 막사를 배정받았다.
오늘날 독일에서는 ‘저명한 유대인에 대한 이러한 생각이 아직도 잊히지 않고 있다. 참전용사들과 다른 특권 계층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명한‘ 유대인의 운명이 애도되고 있다. 어린 한스 콘이 비록 천재는 아니지만 그를 전쟁이 끝날 무렵 살해한 것은 더욱 큰 죄악임을 깨닫지 못한 채, 독일이 아인슈타인을 이주시킨 것을 아직도 공공연히 후회하는 사람들이 특히 문화적 엘리트들 가운데 적지 않다 - P207

 그러고는 계속해서 자신이 최종 해결책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은 순간부터 칸트의 원리들을 더 이상 따르지 않았으며, 그리고 자기도 그 점을 알고 있었고, 또그는 자기가 더 이상 ‘자기 행위의 주인이 아니‘라는 생각과 ‘어떤 것도변경시킬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위로했다고 설명했다. 그가 법정에서 지적하지 못한 것은 이제 그 자신이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것처럼이 같은 ‘국가에 의해 합법화된 범죄의 시대‘에는 칸트의 정식이 더 이상 적용 가능하지 않으므로 기각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왜곡하여 읽었던 것이다. 즉 당신의 행동의 원칙이 이 땅의 법의 제정자의 원칙과동일한 한에서 행위하라라든가, (또는 한스 프랑크의 ‘제3제국에서의 정언명법‘의 정식화처럼) "만일 총통이 당신의 행위를 안다면 승인할그러한 방식으로 행위하라" ‘라는 식으로 말이다. 칸트는 분명히 이런종류의 어떤 것도 말할 의도를 갖지 않았다. 반대로 그에게는 모든 사람이 행위를 시작하는 그 순간 입법자이다. 인간이 자신의 ‘실천이성을 사용하여 법의 원칙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하는 원칙들을 발견한다. 그런데 아이히만의 무의식적 왜곡은 그 자신이 ‘어린아이가 가정에서 사용할 칸트라고 불렀던 것과 일치한다. 이러한 가정적으로 사용하는 가운데 남게 되는 칸트적 정신이란, 인간은 법에 대한 복종 이상을행해야 한다는 요구, 단순한 복종의 요구를 넘어서서 법의 배후에 있는원리(법이 발생하는 원천)와 자신의 의지를 일치시켜야 한다는 요구뿐이다. 칸트의 철학에서 그 원천은 실천이성이었다. 아이히만이 말하는 칸트의 가정적 사용에서 그 원천은 총통의 의지였다. 최종 해결책의 수행에서 보인 끔찍이 공들인 철저함(보통 관찰자들에게 전형적으로 독일적이라고, 또는 완벽한 관료의 전형이라고 보인 철저함)의 대부분은사실상 독일에서는 아주 일반화된 이상한 관념, 즉 법을 준수한다는 것은 단순히 법을 따를 것이 아니라 자기가 따르는 법의 제정자인 것처럼행위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이상한 관념으로 그 근원이 추적될 수 있다. 그래서 의무의 부름을 넘어서 나아가는 것이라야 충분하다는 신념이 나온 것이다. - P210

쿠르트 베허는 자기가 헝가리로 파견된 것은 단지 친위대에 쓸 2만 필의 말을 구입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그가 도착하자마자 즉시 거대한 유대인 기업체의 장들과 아주 성공적인 협상을 시작했다. 그와 힘러와의 관계는 돈독했고 그가 원하는때는 언제든지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의 ‘특별 임무‘는 아주 분명했다. 그는 헝가리 정부의 등뒤에서 주요 유대인 사업체의 통제권을 얻으려고 했고, 그 대가로 그 소유주들을 이 나라 밖으로 자유롭게 나갈 수있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외국환으로 상당한 액수를 갖게 해주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거래는 3만 명의 직원을 거느린 거대 기업인 만프레드바이스 철강회사와 가진 것이었는데, 이 회사는 비행기, 트럭, 자전거에서 통조림, 핀, 바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생산하는 회사였다. 그 협상 결과 바이스 가족 45명은 포르투갈로 이주시켰고 베허는 이 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아이히만은 이러한 추잡한 일 (Shweinerei)을 들었을 때 분노했다. 이러한 거래는 헝가리인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벌였던 그의 모든 타협들을 위험에 빠뜨렸다. 헝가리인들은 의당 유대인의 재산을 징발하여 자신이 소유하기를 기대했다. 그에게는 분노할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거래는 통상의 나치스 정책의 아주 관대한 태도와는 모순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에서도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해서 독일인들은 유대인의 재산에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고, 단지 유대인을 이송하고 처형하는 데 드는 비용만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 비용은 나라마다 달랐다. 슬로바키아에서는 유대인 한 사람당 300에서 500제국마르크를 지불하도록 요구했고, 크로아티아에서는 단지 30마르크를, 프랑스에서는 700마르크를, 그리고 벨기에에서는 250마르크를 요구했다. (실제로 돈을 지불한 곳은 크로아티아를 제외하고는 아무 곳도 없었던 것 같다.) 독일이 전쟁 막바지에 헝가리에서 물품으로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이송될 유대인이 소비할 음식의 양만큼 제국으로 식품을 수송할 것을 요구한것이다. - P217

예루살렘에서 히틀러와 총통의 명령에 대한 자신의 특별한 충성심을 입증하는 문서를 대면한 아이히만은 제3제국에서는 "총통의 말이 법적효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수차례 애를 썼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만일 그 명령이 히틀러에게서 직접 내려온 것이라면 그것은 문서로 되어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이것이 자기가 히틀러로부터 문서로 된 명령을 결코 요구하지 않은 이유였다고설명하려 했다. (최종 해결책과 관련된 어떠한 문서도 발견된 적이 없었는데 아마도 그런 것은 결코 존재하지도 않았을는지 모른다.) 그러나그는 힘러에게는 서면 명령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분명한 것은 이것이 환상적인 사태였으며, 아주 ‘유식한‘ 사법적 코멘트를 담은 수많은 문헌이 이에 대해 쓰였는데, 이 모든 것은 총통의 말, 즉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그 땅의 기본적 법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러한 ‘법적‘ 틀 안에서는 히틀러의 말을 적은 글이나 그 정신에 반하는 모든 명령은 정의상 불법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아이히만의 입장은 합법성에 대한 자신의 일상적 경험에 반하기 때문에 범죄적이라고 인식된 명령의 수행을 거부하면서 정상적인 법적 틀 내에서 행동하는 빈번히 인용되는 병사의 입장과 아주 불편한 유사성을 보여준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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