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러에 따르면 "8000만 명의 선한 독일인이 존재하며, 그들 각각은 훌륭한 유대인을알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다른 사람들은 돼지들이지만, 이 특정한 유대인은 일등급이다." 히틀러는 340명의 ‘일등급 유대인‘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들 모두에게 독일인의 지위를 부여하거나 반쪽 유대인의 특권을 부여했다고 한다. 수천 명의 반쪽 유대인은 모든 제약을 면제받았는데, 이것이 친위대 내에서의 하이드리히의 역할과 괴링의 공군부대 원수인 에르하르트 밀히의 역할을 설명해 준다. 하이드리히와 밀히가 반쪽 유대인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 ‘저명한 유대인을 위한 개입이 ‘저명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그 경우는 종종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히틀러의 가장 열렬한 신봉자 중 한 사람이었던 즈벤 헤딘은 저명한 지리학자인 본 출신의 필리프존 교수를 위해 개입했는데, 그는 "테레지엔슈타트에서 형편없는 조건 속에서 살고 있었다." 히틀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헤딘은 "독일에 대한 자신의 태도는 필리프존의 운명에 달려 있을 것이다"라고 협박했는데, 이에 따라 (H.G. 아들러의 테레지엔슈타트에 대한 저술에 따르면) 필리프존 교수는 즉각 보다 나은 막사를 배정받았다. 오늘날 독일에서는 ‘저명한 유대인에 대한 이러한 생각이 아직도 잊히지 않고 있다. 참전용사들과 다른 특권 계층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명한‘ 유대인의 운명이 애도되고 있다. 어린 한스 콘이 비록 천재는 아니지만 그를 전쟁이 끝날 무렵 살해한 것은 더욱 큰 죄악임을 깨닫지 못한 채, 독일이 아인슈타인을 이주시킨 것을 아직도 공공연히 후회하는 사람들이 특히 문화적 엘리트들 가운데 적지 않다 - P207
그러고는 계속해서 자신이 최종 해결책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은 순간부터 칸트의 원리들을 더 이상 따르지 않았으며, 그리고 자기도 그 점을 알고 있었고, 또그는 자기가 더 이상 ‘자기 행위의 주인이 아니‘라는 생각과 ‘어떤 것도변경시킬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위로했다고 설명했다. 그가 법정에서 지적하지 못한 것은 이제 그 자신이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것처럼이 같은 ‘국가에 의해 합법화된 범죄의 시대‘에는 칸트의 정식이 더 이상 적용 가능하지 않으므로 기각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왜곡하여 읽었던 것이다. 즉 당신의 행동의 원칙이 이 땅의 법의 제정자의 원칙과동일한 한에서 행위하라라든가, (또는 한스 프랑크의 ‘제3제국에서의 정언명법‘의 정식화처럼) "만일 총통이 당신의 행위를 안다면 승인할그러한 방식으로 행위하라" ‘라는 식으로 말이다. 칸트는 분명히 이런종류의 어떤 것도 말할 의도를 갖지 않았다. 반대로 그에게는 모든 사람이 행위를 시작하는 그 순간 입법자이다. 인간이 자신의 ‘실천이성을 사용하여 법의 원칙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하는 원칙들을 발견한다. 그런데 아이히만의 무의식적 왜곡은 그 자신이 ‘어린아이가 가정에서 사용할 칸트라고 불렀던 것과 일치한다. 이러한 가정적으로 사용하는 가운데 남게 되는 칸트적 정신이란, 인간은 법에 대한 복종 이상을행해야 한다는 요구, 단순한 복종의 요구를 넘어서서 법의 배후에 있는원리(법이 발생하는 원천)와 자신의 의지를 일치시켜야 한다는 요구뿐이다. 칸트의 철학에서 그 원천은 실천이성이었다. 아이히만이 말하는 칸트의 가정적 사용에서 그 원천은 총통의 의지였다. 최종 해결책의 수행에서 보인 끔찍이 공들인 철저함(보통 관찰자들에게 전형적으로 독일적이라고, 또는 완벽한 관료의 전형이라고 보인 철저함)의 대부분은사실상 독일에서는 아주 일반화된 이상한 관념, 즉 법을 준수한다는 것은 단순히 법을 따를 것이 아니라 자기가 따르는 법의 제정자인 것처럼행위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이상한 관념으로 그 근원이 추적될 수 있다. 그래서 의무의 부름을 넘어서 나아가는 것이라야 충분하다는 신념이 나온 것이다. - P210
쿠르트 베허는 자기가 헝가리로 파견된 것은 단지 친위대에 쓸 2만 필의 말을 구입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그가 도착하자마자 즉시 거대한 유대인 기업체의 장들과 아주 성공적인 협상을 시작했다. 그와 힘러와의 관계는 돈독했고 그가 원하는때는 언제든지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의 ‘특별 임무‘는 아주 분명했다. 그는 헝가리 정부의 등뒤에서 주요 유대인 사업체의 통제권을 얻으려고 했고, 그 대가로 그 소유주들을 이 나라 밖으로 자유롭게 나갈 수있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외국환으로 상당한 액수를 갖게 해주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거래는 3만 명의 직원을 거느린 거대 기업인 만프레드바이스 철강회사와 가진 것이었는데, 이 회사는 비행기, 트럭, 자전거에서 통조림, 핀, 바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생산하는 회사였다. 그 협상 결과 바이스 가족 45명은 포르투갈로 이주시켰고 베허는 이 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아이히만은 이러한 추잡한 일 (Shweinerei)을 들었을 때 분노했다. 이러한 거래는 헝가리인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벌였던 그의 모든 타협들을 위험에 빠뜨렸다. 헝가리인들은 의당 유대인의 재산을 징발하여 자신이 소유하기를 기대했다. 그에게는 분노할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거래는 통상의 나치스 정책의 아주 관대한 태도와는 모순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에서도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해서 독일인들은 유대인의 재산에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고, 단지 유대인을 이송하고 처형하는 데 드는 비용만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 비용은 나라마다 달랐다. 슬로바키아에서는 유대인 한 사람당 300에서 500제국마르크를 지불하도록 요구했고, 크로아티아에서는 단지 30마르크를, 프랑스에서는 700마르크를, 그리고 벨기에에서는 250마르크를 요구했다. (실제로 돈을 지불한 곳은 크로아티아를 제외하고는 아무 곳도 없었던 것 같다.) 독일이 전쟁 막바지에 헝가리에서 물품으로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이송될 유대인이 소비할 음식의 양만큼 제국으로 식품을 수송할 것을 요구한것이다. - P217
예루살렘에서 히틀러와 총통의 명령에 대한 자신의 특별한 충성심을 입증하는 문서를 대면한 아이히만은 제3제국에서는 "총통의 말이 법적효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수차례 애를 썼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만일 그 명령이 히틀러에게서 직접 내려온 것이라면 그것은 문서로 되어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이것이 자기가 히틀러로부터 문서로 된 명령을 결코 요구하지 않은 이유였다고설명하려 했다. (최종 해결책과 관련된 어떠한 문서도 발견된 적이 없었는데 아마도 그런 것은 결코 존재하지도 않았을는지 모른다.) 그러나그는 힘러에게는 서면 명령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분명한 것은 이것이 환상적인 사태였으며, 아주 ‘유식한‘ 사법적 코멘트를 담은 수많은 문헌이 이에 대해 쓰였는데, 이 모든 것은 총통의 말, 즉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그 땅의 기본적 법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러한 ‘법적‘ 틀 안에서는 히틀러의 말을 적은 글이나 그 정신에 반하는 모든 명령은 정의상 불법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아이히만의 입장은 합법성에 대한 자신의 일상적 경험에 반하기 때문에 범죄적이라고 인식된 명령의 수행을 거부하면서 정상적인 법적 틀 내에서 행동하는 빈번히 인용되는 병사의 입장과 아주 불편한 유사성을 보여준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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