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사람도 한 짐, 부지런한 사람도 한 짐이라더니.... 철딱서니 없는 것도 속을 끓이기 시작하니 호되게 끓이네, 원.."
할머니는 이모가 안쓰러운 거였다. 갈상머리 없고 덤벙대는 막내딸이 속을 끓이며 아파하니 그것이 더 할머니 마음에 와닿는 모양이었다. 성숙한 어른이 슬퍼하는 것보다는 철없는 아이의 슬픔이 더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러므로 철없는 사람은 마음껏 철없이 행동하면서도 슬픔이 닥치면 불공평하게도 더 많은 사랑과 배려를 받는 것이다. 성숙한 사람은 으레 슬픔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그 같은 배려를 받지 못한다. 성숙한 사람은 언제나 손해이다. 나는 너무 일찍 성숙했고 그러기에 일찍부터 삶을 알게 된 만큼 삶에서 빨리 밑지기 시작했다. - P362
죽은 이선생님이 이런 얘기를 했었다.
숲속에 마른 열매 하나가 툭 떨어졌다. 나무 밑에 있던 여우가그 소리에 깜짝 놀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멀리서 호랑이가 그 여우를 보았다. 꾀보 여우가 저렇게 다급하게 뛸 때는 분명 굉장한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호랑이도 뛰기 시작했다. 호랑이의 뛰는 모습을 숲속 동물들이 보았다. 산중호걸인 호랑이가 저렇게 도망을 칠 정도면 굉장한 천재지변이거나 외계인의 출현이다. 그해서 숲속의 모든 동물이 다 뛰었다. 온 숲이 뒤집어졌고 숲은 그숲이 생긴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삶도 그런 것이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 P403
"진희야. 네 아버지야."
이모가 말문을 열자 지금까지 힘들게 참았다는 듯이 남자도 그말을 되풀이했다.
"진희야. 아버지다."
나는 왼쪽 털신 속에 발을 집어넣고 이번에는 오른쪽 털신을 벗어들고는 그 안의 눈을 털어냈다. 보여지는 나가 말한다. 공손하게 인사를 해. 침착하게 바라보는 나가 말한다. 반가워하지 마. 아버지라고 농담이야. 60년대엔 나에게 아버지가 없었지. 그러니 이건 새로운 농담이 틀림없어. 70년대식 농담인 거야. 시대라는 구획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건 어쩔 수 없이 인정하더라도 맙소사, 아버지라니, 70년대엔 내게 아버지가 있다니, 이건 대단한 농담이다.
한쪽 손으로 마루 기둥을 잡고 한쪽 손으로 댓돌 위에 털신을 연신 패대기치면서, 그리고 한쪽 다리로 서 있었지만 나는 조금도 비틀거리지 않았다.
눈이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 때 나도 이런 눈을 만들어본 적이 있다. 붓에 흰 물감을 듬뿍 적셔서 검은 켄트지에 마구 뿌려대는 것이다. 그러면 검은 밤 위로 흰 눈이 쏟아지는데 눈이 너무 많이 쏟아지니 시야가 흐릴 것이므로 당연히 다른 풍경은 그릴 필요가 없었다. 지금 나도 시야가 흐렸다. - P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