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력과 자살의 문제는 충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내 어머니의 경우에도 통제력에 대한 집착이 자살의 동기가 되었으며, 실제로 그것은 다양한 상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많은 이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문제에 대해 앨버레즈는 이렇게 썼다. "자살은 결국 선택의 결과다. 자살 행동이 아무리 충동적이고 자살 동기가 아무리 뒤죽박죽이라 하더라도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로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는 순간에는 일시적인 명쾌함을 얻는다. 자살은 자신의 인생을 실패로 판정하는 파산 선고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종국성으로 인해 완전히 실패라고는 할 수 없는 결정이다. 나는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머리를 맑게 하기 위해 자살하는 부류도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방해받지 않는 현실을 스스로 만들기 위해, 혹은 무의식중에 자신의 인생에 부과한망상과 필연성의 패턴을 극복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자살을 이용한다. "
사회적인 약자들 사이에서는 살인이 자살보다 흔한 데 반해 강자들 사이에서는 살인보다 자살이 많다. 일반적인 믿음과는 반대로, 자살은 우울한 정신이 취하는 최후의 수단이 아니다. 정신적인 붕괴의 최후 순간도 아니다. 실제로 병원에 입원 중인 환자들보다 퇴원한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의 자살 가능성이 더 높은데, 병원에서는 제약이 심해 자살을 실행하기가 어렵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살은 정신의 자기 반란이며 우울의 극에 이른 정신이 이해할 수 없는 복잡성을 지닌 이중적인 환멸이다. 그것은 자신을 저절로 해방시키기 위한 고의적인 행동이다. 날카로운 자기 인식이 있어야 그 인식의 대상을 파괴할 수 있으므로 온순한 우울증 상태에서는 자살을 상상하기도 힘들다. 자살은 지극히 약하거나 비겁한 행동이라기보다 그릇된 용기와 불행한 힘에 의한 행동이다. - P466
「다니엘서」 4장 33절에 나오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대한 서술은 광기는 신이 죄인을 벌하기 위해 보낸 것임을 증명하는 근거로 이용되었다. 5세기 에카시안은 "마음의 권태와 고뇌와의 여섯 번째 전투"에 대해 쓰면서 "이것은 자신이 있는 곳을 싫어하고 타인을 혐오하고 경멸하고 나태하게 만드는, 「시편 90편 [NIV 성경으로는 91편 6절]에 나오는 ‘한낮의 악마‘다."라고 했다. 불가타 성경의 「시편」에서 이 부분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야훼의 진실함은 방패로 너를 에워쌀 것이니, 너는 밤의 공포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로다./ 낮에 날아오는 화살도, 암흑 속에서 걸어다니는 것도, 침입도, 한낮의 악마도.(abincrusus, et daemonio meridiano.)" 카시안은 "밤의 공포는 악을, "낮에 날아오는 화살은 인간 적들의 맹공격을, "암흑 속에서 걸어다니는 것은 잠 속에 찾아드는 악마를, "침입은 악마가 붙는 것을, "한낮의 악마"는 백주에 분명하게 볼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영혼을 신으로부터 억지로 떼어 내는 존재인 멜랑콜리를 가리킨다고보았다. - P481
중세가 우울증을 도덕적으로 설명했다면 르네상스기는 우울중을 미화했다. 고대의 의사들보다는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르네상스 사상가들은 우울증을 심오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가정했다. 인문주의는 점점 더 기독교 교리에 강하게 도전했다. 중세에는 죄이자 저주로 여겨진 불합리한 고통이 이제 병(멜랑콜리아, 우울증)이요 성격의 특성(멜랑콜리, 우울)이 되었다. 우울증에 대한 글을 쓴르네상스기의 수많은 작가들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인물은 위대한철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였다. 그는 멜랑콜리는 누구에게나 존재하며 위대함과 영원성에 대한 열망의 표시라고 믿었다. 그는 멜랑콜리 기질을 지닌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썼다. "우리가 한가할 때마다 추방자처럼 슬픔에 빠지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왜 그런 슬픔을 느끼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말이다. 우리는 즐거운 놀이를 하다가도 이따금 한숨 지으며 놀이가 끝나면 더욱 슬퍼진다." 여기에 설명된 멜랑콜리는 일상의 분주함의 저변에 깔린 변함없는 정신 상태다. 피치노는 우울증을 신성한 광기를 지닌 슬픔으로 보았던 아리스토텔레스와 견해를 같이하여, 철학자나 깊이 생각하는 자나 예술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이 멜랑콜리에 더 가까울 수밖에 없으며멜랑콜리의 체험에서 오는 심오함은 일상적인 산만함을 초월한 정신을 반영한다고 말했다. 피치노의 견해에 따르면, 고통받는 정신은신에 대한 앎이라는 멜랑콜리한 부적절성을 향해 돌진하게 되므로가치 있는 것이다. - P486
멜랑콜리에 대해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었던(이런 점은 햄릿이라는 인물의 묘사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셰익스피어는 멜랑콜리에 대한 이해를 영원히 바꿔 놓았다. 그 어떤 작가도 셰익스피어만큼 그것에 공감하면서, 그토록 세밀하게 기쁨과 슬픔에 엮어 넣어서, 지혜에 꼭 필요한 것이자 어리석음의 근거임을 보이면서, 교활한 동시에 자기 파괴적인 속성을 부여해 그토록 복잡하게 묘사하진 못했다. 셰익스피어 이전에는 분리된 실체였던 멜랑콜리가 셰익스피어 이후에는 자아에서 쉽사리 분리될 수 없는, 자아라는 백색광 스펙트럼의 남색 빛이 되었다. 하나의 프리즘이 일시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태양의 일상적인 실체를 바꾸어 놓을 수 없다. 『햄릿』이 무대에 올려지자 멜랑콜리는 병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거의 특권이 되었다. 17세기 중반의 한 연극에서 침울한 이발사가 멜랑콜리를 느낀다고 말하자 가혹한 질책이 떨어진다. "멜랑콜리? 예끼, 이 사람, 멜랑콜리가 어디 이발사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인가? 자네는 마음이 무겁고 나른하고 우둔하다고 말하는 게 어울려. 멜랑콜리는 귀족의 문장(紋章) 같은 것이니까!" 당대 어느 의사의 기록에 의하면 자신을 찾은 멜랑콜리 환자의 40퍼센트가 귀족이었다고 한다. - P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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