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임 순사인 모리다는 밤마다 야간 당직에 들어왔고 여러차례 깊은 대화를 나눈 두 젊은이는 서로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어느날 한참이나 대화를 나누고 나서 이재유는 조심스럽게 지나가는 말처럼 던져보았다.
"나는 밖에 나가고 싶소. 옳은 일을 하며 자유롭게 살고 싶소."
모리다의 얼굴에서 일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러고는 진지한말투로 대답했다.
"밖에서는 활짝 피어 있던 벚꽃도 이곳에만 들어오면 시들어버립니다. 그러나 시들지 않고 피어나는 꽃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친구가 가버리면 외로워지겠지요. 그렇지만 소란을 피우지는않을 겁니다. 차 한잔이 식을 때까지는." - P342

미야케가 검거된 후 그의 아내 히데는 경성제대를 나온 제자들의 도움으로 병목정에서 고서점을 열었다. 그러다가 조선인 활동가들의 도움으로 명치정에서 ‘거북의 집, 가메야‘라는 고서점을 개업하여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였다. 출옥 후 미야케는 아내가 열었던 고서점을 정리하고 1937년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부인 히데와함께 일본에 돌아간 그는 다시는 대학에 복직할 수 없었고, 산기슭에서 버섯을 재배하며 살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야 교직에 복귀했다. 그는 여든두살의 나이로 죽기 일년 전까지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다. 생전에 그가 소장하고 있던 장서는 센다이의 동북대학에 ‘미야케 문고‘라는 이름으로 기증하여 보관되었다. - P349

또한 신금이 눈에는 역귀도 보였다고 한다. 지산이와 장산이가 나란히 고뿔이 들어 열 내고 기침도 하기 전이었는데 버드나무집 동네 골목에서 신금이가 고년을보았다고 한다. 황혼 무렵이라 서향의 골목은 안쪽이 어둡고 바깥쪽으로는 햇빛이 곧추 들어와 눈이 부셨다. 신금이가 장 보러 나가려고 대문을 나서는데 작은 계집아이가 집 앞에 서 있었다. 고것은양 갈래 땋은 머리에 노랑저고리 다홍치마를 입고서 마치 사방치기라도 하듯이 깨금발을 뛰면서 놀고 있었다.
"요년, 왜 남의 집 앞에서 방정맞게 뛰어다녀?"
신금이가 날카롭게 중얼거리자 계집아이는 놀랐는지 동작을 멈추고 오뚝 섰다.
"아주머니 내가 보여요?"
"그럼, 보이다마다. 니까짓 게 우리 집을 노리는 모양인데 시루속에 갇히고 싶으냐?"
계집아이가 혀를 낼름 내밀어 보이고는 달아나면서 종알거렸다.
"홍, 벌써 들러서 나왔지."
그 소리를 듣고 신금이는 가슴이 철렁했다. 낮잠이 든 사이에 고년이 집 안에 들어왔다가 나온 모양이었다. 계집아이는 치맛자락을 팔랑거리며 역광이 비낀 골목 안을 이 집 저 집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렇다고 신금이는 무당이나 점쟁이 판수를 찾아다닐 정도는 아닌 개화 여성이어서 그냥 내버려두었다. 장산이가 숨을 거둔아침에 신금이는 대문간 쪽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바가지에 냉수를떠다가 고춧가루를 타서는 문 앞에 이리저리 뿌렸다.
"예끼 이 고얀년, 썩 물러가거라!" - P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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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이철입니다. 집에서는 어려서부터 두쇠라구 불렀어요"
한이 먼저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러면 첫쇠나 한쇠가 있겠네요."
"예, 한쇠가 우리 형입니다."
"제 이름은 한여옥이라구 합니다."
그녀가 이름을 말했을 때 이철은 가슴이 찌릿하면서 어깨가 떨릴 정도였다고 한여옥 본인에게도 말했고 나중에 형수 신금이에게도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그때에 조직의 레포에서 개인의 얼굴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 P260

 중국식당의 커튼을 젖히고 방우창에게 알은체했던 젊은이는 사실 순사 보조였다. 나머지 셋 중 한 사람이 정식 일본인 형사였고 나머지 둘은 모두 조선인 보조원들이었다. 일제는 합방 초기부터 헌병과 경찰력을 늘려오면서 조선인 보조원 제도를 시행하였다. 삼일운동이 일어나고 다섯해 동안의 지원자는 이 대 일 또는 삼 대 일 정도의 경쟁률이었으나 1920년대 중반에 십 대 일을 넘고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모집 인원이 증원되었는데도 이십 대 일 이상의 경쟁률을 유지했다. 이들은 대개 밀정의 역할을 하면서 조선인을 사찰하는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된다. 보통학교를 나오고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자는 거주지의 신원조회를 거친 뒤에 시험을 치르고 일정 기간 교육을 받고 나서 헌병대나 경찰서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때로는 헌병과 경찰이 사건에 따라 임시 정보원으로 쓰다가 믿을 만하고 유능하면 특채를 했다. 일제강점기의 후반기로 갈수록 정식 채용자보다는 그러한 정보원 출신이 더 많아지게 된다. - P264

마음이 조급했다. 이제부터 시간 싸움이 시작된다. 활동가들에게는 이십사시간의 불문율이 있었다. 즉 체포된자는 고문을 받기 마련이며 그가 알고 있는 다른 동지들의 도피를위하여 최소한 하루를 버텨야 한다는 규칙이었다. 치안 당국도 그런 점을 알고 있어서 검거하자마자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하여 ‘쥐어짠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의 고문을 가했다. 그 과정에서 무너진 자는 전향하여 적의 도구가 되거나 정신적인 불구가 되어 이탈자가 되었고, 끝까지 버텨내고 견딘 자는 몸이 망가져 옥사하지 않으면 살아남아 더욱 단련된 활동가로 되돌아오기 마련이었다. 결국 조직이란 모든 약하고 외로운 개인들의 집합체였다.  - P267

그녀가 평양을 거쳐 경성으로 와서 까페의 여급으로 일했던 것은 조직의 결정이었을지도 모르지만, 한여옥은 마치 태생이 그러했던 것처럼 모던한 기생이나 다름없는 까페 여급 일을 능숙하게 치러냈다. 그녀는 술도 마셨고 손님들과 담화도 나누었지만 별다른 춘사는 벌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여옥은 그누구도 사랑한 적이 없었던 말라 죽은 나무 같은 여자였을까. 신금이의 회고에 의하면 ‘사랑을 받을 겨를이 없었던‘ 가엾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신금이 할머니는 아들 이지산과 손자 이진오에게까지 늘상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 시절에 가엾은 여자가 어디 한둘이라야 말이지." - P283

최달영은 연이어서 말했다.
"지쓰요우혼이, 실용본위라구 하지. 어디서나 일본인 상관이그렇게 가르치더군. 인정이니 의리니 하는 게 다 잡동사니 쓰레기란 소리 아닌가. 그런 걸 싹 치워버리면 머릿속도 빈방처럼 청결해진다."
일철은 묵묵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잘 먹고 잘 살자는 게 사람이 태어난 이유고 본분 아닌가. 그게왜 나쁜가 말이다. 나는 강해져야 한다구 결심했고 제일 먼저 실행을 해버렸다." - P301

"이건 지난번 일의 상여금, 이십원이다. 다음에도 일을 잘하면공에 따라 상여금을 주겠다."
달영은 돈 이십원을 받아들자 얼결에 대답해버렸다.
"옛,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한달에 삼십원이면 보통학교를 나와서 이십 대 일이나 되는 경쟁을 거쳐 순사 시험에 합격하고 순사보가 되어야만 받는 월급이었다. 뒤에 알았지만 주재소의 조선인 순사 보조원들은 정식 순사보로 발령받은 자들이 아니었고, 최달영처럼 끄나풀이 되어 활동하며 나이가 들어서 순사 보조원이라고 부를 뿐이지 자기와 똑같은 임시 고용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진짜 순사보다도시정에 나가면 조선인들에게 권세가 막강하였다. 이러한 자들을조선인들은 앞잡이나 끄나풀, 또는 여우라고 불렀고 친일 사회단체의 공개적인 장을 맡아 앞잡이들을 총괄하는 각 기관의 조선인촉탁들을 꿩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공안기관 용어로 정탐 또는 밀정이라고 칭했다. 한일합병 직후에 헌병 삼천여명, 경찰 이천육백여명, 그리고 헌병 보조원 사천팔백여명에 순사보 삼천여명, 정탐삼천명이었다. 헌병 보조원과 순사보도 밀정 역할이 위주였으니정탐과 합치면 일만 팔백여명이고, 헌병과 경찰 한 사람당 두명의개인밀정을 합치면 전국적으로 그 수는 어림잡아서 이만 오천여명이 되었다. 이러한 직임이라도 얻어보려고 해마다 이십 대 일의 경쟁을 통과했으니 들지 못한 자들까지 잠재적인 앞잡이로 본다면그 숫자는 수십만이 될 것이다. 한쪽에서는 가산과 가족까지 버리고 목숨을 바쳐 일제와 싸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적의 앞잡이가되어 몇푼의 생활비와 작은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 그렇게나 많았던 것이다. - P305

완바오산사건의 잘못된 선전으로 평양과 평북지방에서는 중국인들에 대한 살상사건이 많이 일어났고 그때의 상흔이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에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일본인은 이러한 갈등으로부터 거리를 두고역과 행정기관이 있는, 이른바 본정통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중국인 노동자들과 직접 접촉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인 노동자들은일터에서 경쟁하고 주거지에서 늘 부딪쳤기 때문에 점점 더 갈등이 쌓여갔다. 국경지방인 신의주는 강 건너 안동과 이웃 동네나 마찬가지여서 아옹다옹하면서도 서로 음식과 풍속이 뒤섞여 있었다. 중국인 노동자는 아무런 증명서 없이도 나룻배를 타거나 얼어붙은강을 건너 조선으로 들어와서는 조선인보다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을 했기 때문에 일본인 기업주들이 때때로 저항하는 조선인 노동자 대신 고용하기에 편했다. 총독부에서는 식민지 경영의 어려움을 나중에야 깨닫고 중국인의 조선 내 취업을 금지시키도록 했으나 일본인 농장주들이나 기업주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만주에서는 반대로 중국인들이 조선인들을 멸시하며 망국노라고 배척했다. 그러나 항일 무장투쟁을 하는 중국과 조선의 젊은이들은 항일연군을 조직하여 함께 싸웠다. 개척 농민이 아닌 기술자 교사 관료상인 등 조선의 중산계층은 만주의 지배자가 누구인가를 뼈저리게 깨달아 자기의 몸과 마음을 일본인과 똑같게 하려고 노력했다. -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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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력과 자살의 문제는 충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내 어머니의 경우에도 통제력에 대한 집착이 자살의 동기가 되었으며, 실제로 그것은 다양한 상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많은 이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문제에 대해 앨버레즈는 이렇게 썼다. "자살은 결국 선택의 결과다. 자살 행동이 아무리 충동적이고 자살 동기가 아무리 뒤죽박죽이라 하더라도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로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는 순간에는 일시적인 명쾌함을 얻는다. 자살은 자신의 인생을 실패로 판정하는 파산 선고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종국성으로 인해 완전히 실패라고는 할 수 없는 결정이다. 나는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머리를 맑게 하기 위해 자살하는 부류도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방해받지 않는 현실을 스스로 만들기 위해, 혹은 무의식중에 자신의 인생에 부과한망상과 필연성의 패턴을 극복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자살을 이용한다. "

사회적인 약자들 사이에서는 살인이 자살보다 흔한 데 반해 강자들 사이에서는 살인보다 자살이 많다. 일반적인 믿음과는 반대로, 자살은 우울한 정신이 취하는 최후의 수단이 아니다. 정신적인 붕괴의 최후 순간도 아니다. 실제로 병원에 입원 중인 환자들보다 퇴원한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의 자살 가능성이 더 높은데, 병원에서는 제약이 심해 자살을 실행하기가 어렵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살은 정신의 자기 반란이며 우울의 극에 이른 정신이 이해할 수 없는 복잡성을 지닌 이중적인 환멸이다. 그것은 자신을 저절로 해방시키기 위한 고의적인 행동이다. 날카로운 자기 인식이 있어야 그 인식의 대상을 파괴할 수 있으므로 온순한 우울증 상태에서는 자살을 상상하기도 힘들다. 자살은 지극히 약하거나 비겁한 행동이라기보다 그릇된 용기와 불행한 힘에 의한 행동이다. - P466

「다니엘서」 4장 33절에 나오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대한 서술은 광기는 신이 죄인을 벌하기 위해 보낸 것임을 증명하는 근거로 이용되었다. 5세기 에카시안은 "마음의 권태와 고뇌와의 여섯 번째 전투"에 대해 쓰면서
"이것은 자신이 있는 곳을 싫어하고 타인을 혐오하고 경멸하고 나태하게 만드는, 「시편 90편 [NIV 성경으로는 91편 6절]에 나오는 ‘한낮의 악마‘다."라고 했다. 불가타 성경의 「시편」에서 이 부분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야훼의 진실함은 방패로 너를 에워쌀 것이니, 너는 밤의 공포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로다./ 낮에 날아오는 화살도, 암흑 속에서 걸어다니는 것도, 침입도, 한낮의 악마도.(abincrusus, et daemonio meridiano.)" 카시안은 "밤의 공포는 악을, "낮에 날아오는 화살은 인간 적들의 맹공격을, "암흑 속에서 걸어다니는 것은 잠 속에 찾아드는 악마를, "침입은 악마가 붙는 것을, "한낮의 악마"는 백주에 분명하게 볼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영혼을 신으로부터 억지로 떼어 내는 존재인 멜랑콜리를 가리킨다고보았다. - P481

중세가 우울증을 도덕적으로 설명했다면 르네상스기는 우울중을 미화했다. 고대의 의사들보다는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르네상스 사상가들은 우울증을 심오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가정했다. 인문주의는 점점 더 기독교 교리에 강하게 도전했다. 중세에는 죄이자 저주로 여겨진 불합리한 고통이 이제 병(멜랑콜리아, 우울증)이요 성격의 특성(멜랑콜리, 우울)이 되었다. 우울증에 대한 글을 쓴르네상스기의 수많은 작가들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인물은 위대한철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였다. 그는 멜랑콜리는 누구에게나 존재하며 위대함과 영원성에 대한 열망의 표시라고 믿었다. 그는 멜랑콜리 기질을 지닌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썼다. "우리가 한가할 때마다 추방자처럼 슬픔에 빠지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왜 그런 슬픔을 느끼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말이다. 우리는 즐거운 놀이를 하다가도 이따금 한숨 지으며 놀이가 끝나면 더욱 슬퍼진다." 여기에 설명된 멜랑콜리는 일상의 분주함의 저변에 깔린 변함없는 정신 상태다. 피치노는 우울증을 신성한 광기를 지닌 슬픔으로 보았던 아리스토텔레스와 견해를 같이하여, 철학자나 깊이 생각하는 자나 예술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이 멜랑콜리에 더 가까울 수밖에 없으며멜랑콜리의 체험에서 오는 심오함은 일상적인 산만함을 초월한 정신을 반영한다고 말했다. 피치노의 견해에 따르면, 고통받는 정신은신에 대한 앎이라는 멜랑콜리한 부적절성을 향해 돌진하게 되므로가치 있는 것이다.  - P486

멜랑콜리에 대해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었던(이런 점은 햄릿이라는 인물의 묘사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셰익스피어는 멜랑콜리에 대한 이해를 영원히 바꿔 놓았다. 그 어떤 작가도 셰익스피어만큼 그것에 공감하면서, 그토록 세밀하게 기쁨과 슬픔에 엮어 넣어서, 지혜에 꼭 필요한 것이자 어리석음의 근거임을 보이면서, 교활한 동시에 자기 파괴적인 속성을 부여해 그토록 복잡하게 묘사하진 못했다. 셰익스피어 이전에는 분리된 실체였던 멜랑콜리가 셰익스피어 이후에는 자아에서 쉽사리 분리될 수 없는, 자아라는 백색광 스펙트럼의 남색 빛이 되었다. 하나의 프리즘이 일시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태양의 일상적인 실체를 바꾸어 놓을 수 없다.
『햄릿』이 무대에 올려지자 멜랑콜리는 병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거의 특권이 되었다. 17세기 중반의 한 연극에서 침울한 이발사가 멜랑콜리를 느낀다고 말하자 가혹한 질책이 떨어진다. "멜랑콜리? 예끼, 이 사람, 멜랑콜리가 어디 이발사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인가? 자네는 마음이 무겁고 나른하고 우둔하다고 말하는 게 어울려. 멜랑콜리는 귀족의 문장(紋章) 같은 것이니까!" 당대 어느 의사의 기록에 의하면 자신을 찾은 멜랑콜리 환자의 40퍼센트가 귀족이었다고 한다.  - P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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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석방되자마자 감옥에서 알게 된 또래의 몇몇 청년과 함께네차례에 걸쳐 뿌리가 뽑혀버린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위한 조직방식을 수립했다. 그들은 각자 역할을 분담하여 조직 구성에 들어갔다. 먼저 학생운동을 위하여 남녀 고보와 전문학교 대학 등을 전담할 구성원을 정하고, 경성과 영등포, 인천 등지의 공장을 산별 부문으로 구분하여 전담자를 정했으며, 운동의 원칙과 방법론을 제시했다. 최초의 역할 분담을 맡은 이재유를 비롯한 구성원이 중앙이 되고, 이들이 각자 맡은 현장에서 만난 이들로 소그룹을 형성했으며, 이 그룹의 성원들은 다시 각자 역할 분담을 통하여 하위 그들을 만들어냈다. 이 조직은 과거와 달리 아무런 명칭도 강령도없었다. 다만 각 그룹들은 합법적인 책자를 읽으면서 차츰 중앙에서 내려오는 비합법 필사본이나 유인물을 읽었다. 서로 교류나 소통을 최소화하고, 점조직화된 연락망을 통하여 중앙과 의견을 주고받는 방식이었다. 이들은 나중에 일제 검거가 시작되었을 때에거의 이백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세상에 알려졌지만, 체포를 모면하고 현장이나 외곽에 잔존해 있던 구성원들이 그만큼 되었다고본다면 오백여명 가까이 되었을 것이다. 오백여명의 대중적 활동가를 토대로 가진 조직은 능히 상부에 당을 재건할 능력이 있었던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함경도, 평안도 지방의 원산이나 평양에서부터 황해도 평야지대의 일본인 대농장의 소작농들, 그리고 남쪽의 충청, 전라도의 농민들과 광주 목포 부산 대구의 노동자들 사이에 스며들어간 사회주의 활동가들의 운동과 공공연하게 전국적으로 연계하는 것을 겸허하게 삼가고 있었다. 아직 연대투쟁을 벌일단계는 아니었고, 최소한의 인적 교류를 통하여 누가 어디서 무슨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 정도로 서로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재유를비롯한 조선공산당재건위 성원들은 경성을 중심으로 보다 알차고탄탄한 조직으로 성장시키려고 하였다. 이들이 이른바 경성 트로이카 조직이었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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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도 그런 질문을 던졌다. "자살은 하나의 실험으로, 인간이 자연에게 던지는 하나의 의문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죽음이 인간의 존재와 사물의 본질에 대한 통찰에 어떤변화를 가져다줄 것인가다. 죽음은 의문을 제기하고 대답을 기다리는 의식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툰 실험이라고밖에 볼수 없다. 자살의 결과에 대해서는 직접 시도해 보지 않고는 알 수없다. 왕복표를 가지고 죽음의 세계를 여행한다는 것은 멋진 일이며 나 자신도 한 달쯤 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이런 생각은 절망, 호기심, 우유부단함을 반영한다. 우리는 죽음의 명백한 종말성에, 자살의 철회 불가능함에 움츠러든다. 의식은 우리를 인간이게 하며, 우리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의식이 죽음 너머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만족시키고 싶어 하는 호기심도그 대답이 주어진 때에는 이미 존재할 수 없으리라 여기고 있다. 나자신도 살아 있고 싶지 않아서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해 보다가도, 죽으면 그런 의문 자체가 의미 없으리라 결론짓게 된다. 우리를 계속 살아 있게 하는 것은 그 의문이다. 나는 내 인생의 외적인것들은 포기할 수 있지만 그 의문만은 포기할 수 없다. - P404

뒤르켕의 분류는 이제 더 이상 임상학적 목적으로는 이용되지않지만 자살에 대한 사고를 현대적으로 규정했다. 뒤르켕은 당대의 믿음과는 반대로 비록 자살이 개인적인 행위이기는 하지만 그 근원들은 사회적이라고 주장했다. 개개의 자살은 정신병리학적 결과이지만 정신병리학적 자살 성향의 상대적으로 일관된 양상은 사회적 구성 개념들과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각 사회마다 자살행동의 정황은 다르지만 사실상 모든 사회에서 특정 비율의 자살이 발생한다. 한 사회의 가치들과 관습들이 어떤 원인들이 어떤 환경에서 자살 행동에 이를 것인지를 결정한다. 유일무이한 정신적 외상으로 인해 자살을 기도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사실은 단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하나의 경향을 나타내는 것인 경우가 많다. - P411

동물 실험은 자살 연구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 동물들은 자신의 유한성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스스로 죽음을 모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갈망할 수는 없다. 자살은 인간의 자의식의 대가이며 다른 종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동물들도 고의적인 자해 행위를 할 수는 있으며 지나친 변화에 노출되면 종종 그런 행위를 한다. 쥐들을 계속 좁은 곳에서 우글거리게만들면 제 꼬리를 물어뜯는다. 어미에게서 떼어 놓은 붉은털원숭이는 생후 5개월경부터 자해 행위를 하기 시작하며 다시 집단 속에넣어 주어도 평생 그런 행위가 지속된다. 이런 원숭이들은 뇌의 중요한 부분들의 세로토닌 수치가 정상보다 떨어지는 것으로 보이며 이것 또한 생물학적인 것과 사회학적인 것의 상관성이다. 나는서커스에서 재주를 부리고 먹이를 받아먹는 데 길이 든 한 문어가 자살한 이야기를 듣고 매혹된 적이 있다. 서커스단이 해체되자 문어는 수족관에서 재주를 부려도 아무 관심도 받지 못하며 살게 되었다. 그러자 점차 빛깔을 잃어 갔고(문어는 몸 색깔이 변하는 것으로 기분 상태를 나타낸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재주를 부려 보았지만 여전히 보상이 없자 새의 부리처럼 생긴 주둥이로 제 몸을 찔러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 P423

 청년들은 또 자살 기도가 실제 죽음으로 이어지지는 않으리라고 믿기 쉽다. 이들은 다른 사람을 벌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살 기도를 할 수도 있는데,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는 나의 태도를 흉내 내며 이렇게 풍자하고는 했다. "내가 벌레를 먹고 죽으면 엄마는 나한테 잘못한 걸 후회할 거예요." 그런 행동은 아무리 교묘한 속임수라 하더라도 도움을 청하는 외침이므로 그대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자살 기도 전력이 있는 청년들에게는 어른들의 따뜻한 관심이필요하며, 그들의 문제는 진짜로 심각한 것이므로 이유를 이해할수 없다 하더라도 그 심각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 P425

나는 바쁘게 약병들을 정리하다 세코날 병에 손이 닿자 동작을 멈추었다. 나 자신도 질병과 절망에 대한 두려움이있었기에 그 약병을 주머니에 넣어 가져와 내 약장 맨 구석에 감추었다. 10월의 어느 날에 어머니가 했던 말이 기억났던 것이다. "약을구했어. 때가 오면 할 수 있게 되었어."
어머니의 욕실을 치운 열흘 뒤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남은 세코날은 어떻게 된 거니?" 아버지의 노기등등한 물음에 나는 어머나의 이름으로 된 약은 모조리 버렸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우울해 보여서 그 약을 아버지 손이 미치는 곳에 둘 수 없었노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그 약들을 버릴 권리가 없어." 긴 침묵이 흐른 뒤 아버지가 다시입을 열었다. "나중에 나도 병들면 그때 쓰려고 남겨 둔 건데. 그러면 약을 구하려고 수고할 필요가 없잖아." 우리 가족은 어머니가 그빨간 알약들 속에 계속 살아 있어서 어머니 생명을 끊은 그 독을 지니고 있으면 어머니에게 다가갈 수 있을 듯한 기분에 젖어 있었다.
남은 약을 먹을 계획을 세우는 것으로 어머니와 다시 연결될 수 있는 것처럼. 나는 자살의 전염성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어머니를 잃은 뒤 우리에게 한 가지 위안이 있었다면 어너니의 뒤를 따를 계획을 세우는 것이었다. - P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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