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이철입니다. 집에서는 어려서부터 두쇠라구 불렀어요" 한이 먼저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러면 첫쇠나 한쇠가 있겠네요." "예, 한쇠가 우리 형입니다." "제 이름은 한여옥이라구 합니다." 그녀가 이름을 말했을 때 이철은 가슴이 찌릿하면서 어깨가 떨릴 정도였다고 한여옥 본인에게도 말했고 나중에 형수 신금이에게도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그때에 조직의 레포에서 개인의 얼굴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 P260
중국식당의 커튼을 젖히고 방우창에게 알은체했던 젊은이는 사실 순사 보조였다. 나머지 셋 중 한 사람이 정식 일본인 형사였고 나머지 둘은 모두 조선인 보조원들이었다. 일제는 합방 초기부터 헌병과 경찰력을 늘려오면서 조선인 보조원 제도를 시행하였다. 삼일운동이 일어나고 다섯해 동안의 지원자는 이 대 일 또는 삼 대 일 정도의 경쟁률이었으나 1920년대 중반에 십 대 일을 넘고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모집 인원이 증원되었는데도 이십 대 일 이상의 경쟁률을 유지했다. 이들은 대개 밀정의 역할을 하면서 조선인을 사찰하는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된다. 보통학교를 나오고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자는 거주지의 신원조회를 거친 뒤에 시험을 치르고 일정 기간 교육을 받고 나서 헌병대나 경찰서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때로는 헌병과 경찰이 사건에 따라 임시 정보원으로 쓰다가 믿을 만하고 유능하면 특채를 했다. 일제강점기의 후반기로 갈수록 정식 채용자보다는 그러한 정보원 출신이 더 많아지게 된다. - P264
마음이 조급했다. 이제부터 시간 싸움이 시작된다. 활동가들에게는 이십사시간의 불문율이 있었다. 즉 체포된자는 고문을 받기 마련이며 그가 알고 있는 다른 동지들의 도피를위하여 최소한 하루를 버텨야 한다는 규칙이었다. 치안 당국도 그런 점을 알고 있어서 검거하자마자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하여 ‘쥐어짠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의 고문을 가했다. 그 과정에서 무너진 자는 전향하여 적의 도구가 되거나 정신적인 불구가 되어 이탈자가 되었고, 끝까지 버텨내고 견딘 자는 몸이 망가져 옥사하지 않으면 살아남아 더욱 단련된 활동가로 되돌아오기 마련이었다. 결국 조직이란 모든 약하고 외로운 개인들의 집합체였다. - P267
그녀가 평양을 거쳐 경성으로 와서 까페의 여급으로 일했던 것은 조직의 결정이었을지도 모르지만, 한여옥은 마치 태생이 그러했던 것처럼 모던한 기생이나 다름없는 까페 여급 일을 능숙하게 치러냈다. 그녀는 술도 마셨고 손님들과 담화도 나누었지만 별다른 춘사는 벌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여옥은 그누구도 사랑한 적이 없었던 말라 죽은 나무 같은 여자였을까. 신금이의 회고에 의하면 ‘사랑을 받을 겨를이 없었던‘ 가엾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신금이 할머니는 아들 이지산과 손자 이진오에게까지 늘상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 시절에 가엾은 여자가 어디 한둘이라야 말이지." - P283
최달영은 연이어서 말했다. "지쓰요우혼이, 실용본위라구 하지. 어디서나 일본인 상관이그렇게 가르치더군. 인정이니 의리니 하는 게 다 잡동사니 쓰레기란 소리 아닌가. 그런 걸 싹 치워버리면 머릿속도 빈방처럼 청결해진다." 일철은 묵묵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잘 먹고 잘 살자는 게 사람이 태어난 이유고 본분 아닌가. 그게왜 나쁜가 말이다. 나는 강해져야 한다구 결심했고 제일 먼저 실행을 해버렸다." - P301
"이건 지난번 일의 상여금, 이십원이다. 다음에도 일을 잘하면공에 따라 상여금을 주겠다." 달영은 돈 이십원을 받아들자 얼결에 대답해버렸다. "옛,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한달에 삼십원이면 보통학교를 나와서 이십 대 일이나 되는 경쟁을 거쳐 순사 시험에 합격하고 순사보가 되어야만 받는 월급이었다. 뒤에 알았지만 주재소의 조선인 순사 보조원들은 정식 순사보로 발령받은 자들이 아니었고, 최달영처럼 끄나풀이 되어 활동하며 나이가 들어서 순사 보조원이라고 부를 뿐이지 자기와 똑같은 임시 고용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진짜 순사보다도시정에 나가면 조선인들에게 권세가 막강하였다. 이러한 자들을조선인들은 앞잡이나 끄나풀, 또는 여우라고 불렀고 친일 사회단체의 공개적인 장을 맡아 앞잡이들을 총괄하는 각 기관의 조선인촉탁들을 꿩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공안기관 용어로 정탐 또는 밀정이라고 칭했다. 한일합병 직후에 헌병 삼천여명, 경찰 이천육백여명, 그리고 헌병 보조원 사천팔백여명에 순사보 삼천여명, 정탐삼천명이었다. 헌병 보조원과 순사보도 밀정 역할이 위주였으니정탐과 합치면 일만 팔백여명이고, 헌병과 경찰 한 사람당 두명의개인밀정을 합치면 전국적으로 그 수는 어림잡아서 이만 오천여명이 되었다. 이러한 직임이라도 얻어보려고 해마다 이십 대 일의 경쟁을 통과했으니 들지 못한 자들까지 잠재적인 앞잡이로 본다면그 숫자는 수십만이 될 것이다. 한쪽에서는 가산과 가족까지 버리고 목숨을 바쳐 일제와 싸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적의 앞잡이가되어 몇푼의 생활비와 작은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 그렇게나 많았던 것이다. - P305
완바오산사건의 잘못된 선전으로 평양과 평북지방에서는 중국인들에 대한 살상사건이 많이 일어났고 그때의 상흔이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에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일본인은 이러한 갈등으로부터 거리를 두고역과 행정기관이 있는, 이른바 본정통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중국인 노동자들과 직접 접촉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인 노동자들은일터에서 경쟁하고 주거지에서 늘 부딪쳤기 때문에 점점 더 갈등이 쌓여갔다. 국경지방인 신의주는 강 건너 안동과 이웃 동네나 마찬가지여서 아옹다옹하면서도 서로 음식과 풍속이 뒤섞여 있었다. 중국인 노동자는 아무런 증명서 없이도 나룻배를 타거나 얼어붙은강을 건너 조선으로 들어와서는 조선인보다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을 했기 때문에 일본인 기업주들이 때때로 저항하는 조선인 노동자 대신 고용하기에 편했다. 총독부에서는 식민지 경영의 어려움을 나중에야 깨닫고 중국인의 조선 내 취업을 금지시키도록 했으나 일본인 농장주들이나 기업주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만주에서는 반대로 중국인들이 조선인들을 멸시하며 망국노라고 배척했다. 그러나 항일 무장투쟁을 하는 중국과 조선의 젊은이들은 항일연군을 조직하여 함께 싸웠다. 개척 농민이 아닌 기술자 교사 관료상인 등 조선의 중산계층은 만주의 지배자가 누구인가를 뼈저리게 깨달아 자기의 몸과 마음을 일본인과 똑같게 하려고 노력했다. -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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