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도 그런 질문을 던졌다. "자살은 하나의 실험으로, 인간이 자연에게 던지는 하나의 의문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죽음이 인간의 존재와 사물의 본질에 대한 통찰에 어떤변화를 가져다줄 것인가다. 죽음은 의문을 제기하고 대답을 기다리는 의식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툰 실험이라고밖에 볼수 없다. 자살의 결과에 대해서는 직접 시도해 보지 않고는 알 수없다. 왕복표를 가지고 죽음의 세계를 여행한다는 것은 멋진 일이며 나 자신도 한 달쯤 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이런 생각은 절망, 호기심, 우유부단함을 반영한다. 우리는 죽음의 명백한 종말성에, 자살의 철회 불가능함에 움츠러든다. 의식은 우리를 인간이게 하며, 우리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의식이 죽음 너머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만족시키고 싶어 하는 호기심도그 대답이 주어진 때에는 이미 존재할 수 없으리라 여기고 있다. 나자신도 살아 있고 싶지 않아서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해 보다가도, 죽으면 그런 의문 자체가 의미 없으리라 결론짓게 된다. 우리를 계속 살아 있게 하는 것은 그 의문이다. 나는 내 인생의 외적인것들은 포기할 수 있지만 그 의문만은 포기할 수 없다. - P404

뒤르켕의 분류는 이제 더 이상 임상학적 목적으로는 이용되지않지만 자살에 대한 사고를 현대적으로 규정했다. 뒤르켕은 당대의 믿음과는 반대로 비록 자살이 개인적인 행위이기는 하지만 그 근원들은 사회적이라고 주장했다. 개개의 자살은 정신병리학적 결과이지만 정신병리학적 자살 성향의 상대적으로 일관된 양상은 사회적 구성 개념들과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각 사회마다 자살행동의 정황은 다르지만 사실상 모든 사회에서 특정 비율의 자살이 발생한다. 한 사회의 가치들과 관습들이 어떤 원인들이 어떤 환경에서 자살 행동에 이를 것인지를 결정한다. 유일무이한 정신적 외상으로 인해 자살을 기도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사실은 단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하나의 경향을 나타내는 것인 경우가 많다. - P411

동물 실험은 자살 연구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 동물들은 자신의 유한성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스스로 죽음을 모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갈망할 수는 없다. 자살은 인간의 자의식의 대가이며 다른 종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동물들도 고의적인 자해 행위를 할 수는 있으며 지나친 변화에 노출되면 종종 그런 행위를 한다. 쥐들을 계속 좁은 곳에서 우글거리게만들면 제 꼬리를 물어뜯는다. 어미에게서 떼어 놓은 붉은털원숭이는 생후 5개월경부터 자해 행위를 하기 시작하며 다시 집단 속에넣어 주어도 평생 그런 행위가 지속된다. 이런 원숭이들은 뇌의 중요한 부분들의 세로토닌 수치가 정상보다 떨어지는 것으로 보이며 이것 또한 생물학적인 것과 사회학적인 것의 상관성이다. 나는서커스에서 재주를 부리고 먹이를 받아먹는 데 길이 든 한 문어가 자살한 이야기를 듣고 매혹된 적이 있다. 서커스단이 해체되자 문어는 수족관에서 재주를 부려도 아무 관심도 받지 못하며 살게 되었다. 그러자 점차 빛깔을 잃어 갔고(문어는 몸 색깔이 변하는 것으로 기분 상태를 나타낸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재주를 부려 보았지만 여전히 보상이 없자 새의 부리처럼 생긴 주둥이로 제 몸을 찔러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 P423

 청년들은 또 자살 기도가 실제 죽음으로 이어지지는 않으리라고 믿기 쉽다. 이들은 다른 사람을 벌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살 기도를 할 수도 있는데,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는 나의 태도를 흉내 내며 이렇게 풍자하고는 했다. "내가 벌레를 먹고 죽으면 엄마는 나한테 잘못한 걸 후회할 거예요." 그런 행동은 아무리 교묘한 속임수라 하더라도 도움을 청하는 외침이므로 그대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자살 기도 전력이 있는 청년들에게는 어른들의 따뜻한 관심이필요하며, 그들의 문제는 진짜로 심각한 것이므로 이유를 이해할수 없다 하더라도 그 심각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 P425

나는 바쁘게 약병들을 정리하다 세코날 병에 손이 닿자 동작을 멈추었다. 나 자신도 질병과 절망에 대한 두려움이있었기에 그 약병을 주머니에 넣어 가져와 내 약장 맨 구석에 감추었다. 10월의 어느 날에 어머니가 했던 말이 기억났던 것이다. "약을구했어. 때가 오면 할 수 있게 되었어."
어머니의 욕실을 치운 열흘 뒤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남은 세코날은 어떻게 된 거니?" 아버지의 노기등등한 물음에 나는 어머나의 이름으로 된 약은 모조리 버렸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우울해 보여서 그 약을 아버지 손이 미치는 곳에 둘 수 없었노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그 약들을 버릴 권리가 없어." 긴 침묵이 흐른 뒤 아버지가 다시입을 열었다. "나중에 나도 병들면 그때 쓰려고 남겨 둔 건데. 그러면 약을 구하려고 수고할 필요가 없잖아." 우리 가족은 어머니가 그빨간 알약들 속에 계속 살아 있어서 어머니 생명을 끊은 그 독을 지니고 있으면 어머니에게 다가갈 수 있을 듯한 기분에 젖어 있었다.
남은 약을 먹을 계획을 세우는 것으로 어머니와 다시 연결될 수 있는 것처럼. 나는 자살의 전염성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어머니를 잃은 뒤 우리에게 한 가지 위안이 있었다면 어너니의 뒤를 따를 계획을 세우는 것이었다. - P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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