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석방되자마자 감옥에서 알게 된 또래의 몇몇 청년과 함께네차례에 걸쳐 뿌리가 뽑혀버린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위한 조직방식을 수립했다. 그들은 각자 역할을 분담하여 조직 구성에 들어갔다. 먼저 학생운동을 위하여 남녀 고보와 전문학교 대학 등을 전담할 구성원을 정하고, 경성과 영등포, 인천 등지의 공장을 산별 부문으로 구분하여 전담자를 정했으며, 운동의 원칙과 방법론을 제시했다. 최초의 역할 분담을 맡은 이재유를 비롯한 구성원이 중앙이 되고, 이들이 각자 맡은 현장에서 만난 이들로 소그룹을 형성했으며, 이 그룹의 성원들은 다시 각자 역할 분담을 통하여 하위 그들을 만들어냈다. 이 조직은 과거와 달리 아무런 명칭도 강령도없었다. 다만 각 그룹들은 합법적인 책자를 읽으면서 차츰 중앙에서 내려오는 비합법 필사본이나 유인물을 읽었다. 서로 교류나 소통을 최소화하고, 점조직화된 연락망을 통하여 중앙과 의견을 주고받는 방식이었다. 이들은 나중에 일제 검거가 시작되었을 때에거의 이백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세상에 알려졌지만, 체포를 모면하고 현장이나 외곽에 잔존해 있던 구성원들이 그만큼 되었다고본다면 오백여명 가까이 되었을 것이다. 오백여명의 대중적 활동가를 토대로 가진 조직은 능히 상부에 당을 재건할 능력이 있었던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함경도, 평안도 지방의 원산이나 평양에서부터 황해도 평야지대의 일본인 대농장의 소작농들, 그리고 남쪽의 충청, 전라도의 농민들과 광주 목포 부산 대구의 노동자들 사이에 스며들어간 사회주의 활동가들의 운동과 공공연하게 전국적으로 연계하는 것을 겸허하게 삼가고 있었다. 아직 연대투쟁을 벌일단계는 아니었고, 최소한의 인적 교류를 통하여 누가 어디서 무슨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 정도로 서로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재유를비롯한 조선공산당재건위 성원들은 경성을 중심으로 보다 알차고탄탄한 조직으로 성장시키려고 하였다. 이들이 이른바 경성 트로이카 조직이었다. - P2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