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바로 빅토리아 시대 멜랑콜리의 본질이다. 인류의 역사를보면 신앙이 강한 시기와 약한 시기가 번갈아 나타나기는 하나, 이처럼 신의 존재와 의미 자체에 대해 갖게 된 불신은 전능한 신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슬픔보다도 훨씬 큰 고통이었다. 자신이 강렬한 증오의 대상이라는 것도 괴로운 일이지만 거대한 무(無) 속에서 무관심의 대상인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앞선 세대들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 일이다. 매슈 아널드는 그 절망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세상은 우리 앞에 꿈나라처럼 그리도 다채롭고 아름답고 새롭게 펼쳐져 있지만, 사실 기쁨도, 사랑도, 빛도, 확신도, 평화도 주지 못하고 고통을 덜어 주지도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 어스름 속의 벌판에서 격투와 도망의 혼란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무지한 군대가 밤새 싸움을 벌인 곳에서.
이것이 바로 현대 우울증이 취하는 형태로, 신을 잃은 위기가신의 저주를 받은 위기보다 훨씬 더 일반적이다. - P527
우울증은 계층을 초월하지만 우울증 치료는 그렇지 못하다. 무슨 뜻인가 하면, 대부분의 가난한 우울증 환자는 계속해서 가난한 우울증 환자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우울증과 가난은 오래 방치될수록 그만큼 더 심각해진다. 가난은 우울증을 악화시키고, 우울증은 장애와 고립으로 가난을 심화시킨다. 가난은 사람을 운명에 수동적이게 만든다. 가난한 우울증 환자는 자신을 극히 무력한 존재로 인식하여 도움을 청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가난한 우울증 환자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고 자신으로부터도 분리된다. 그들은 가장 인간적인 자질인 자유의지를 상실한다. 중산층에 찾아온 우울증은 상대적으로 발견하기 쉽다.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하다 갑자기 저조한 기분에 빠지는 형태를 보이기때문이다. 이들은 이유 없이 일이 싫어지고,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도 잃고, 이제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리하여 점점 위축되고 긴장성 분열증 증세를 보이며 주위 사람들의 우려 섞인 관심을 끌게된다. - P550
그러나 밑바닥 계층의 사람들에게 찾아온 우울증은 즉시 눈에 띄기가 어렵다. 억압받고 가난한 이들에게 인생은 늘 비참하고 불만족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남부럽지 않은 직업을 가져본 적도,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뜻을 품어 본 적도, 대단한 자기 통제력 같은 걸 발휘해 본 적도 없다. 이들의 정상적인 상태는 우울증의병적 상태와 상당히 흡사해 어떤 것이 정상적이고 어떤 것이 병적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단순히 힘겨운 삶을 사는 것과 기분장애에 시달리는 것은 큰 차이가 있으며, 우울증이 그런 삶의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의견이 아무리 일반적이라 해도 사실 그 반대인 경우도 많다. 사람을 무능하게 만드는 우울증에 시달리다 보면 자기 구제부터 해야 한다는 생각에 압도되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밑바닥에 머물러 살 수밖에 없게 된다. 가난한 우울증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은 대개의 경우 그들이 야망과 능력과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 P550
우울증을 생활 사건과 분리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유행처럼 여겨져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난한 우울중환자들은 우울증 발병의 몇 가지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이들이 지닌 문제들의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부모, 자녀, 남자친구, 여자친구, 남편,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들은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 슬픔이나 고통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도록 해 주는 만족스러운 직업이나 즐거운 여행의 기회도 갖고 있지 못하다. 이들은 좋은 기분에 대한 근본적인 기대조차 없다. 우리는 우울증을 의학에 소속시키는 데 골몰하여 ‘진짜‘ 우울증은 외부적 요인과 관계없이 일어난다는 입장에 편향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미국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자신이 밑바닥 인생이라는 비굴한느낌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으로 위축되고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식욕을 잃고 과도한 공포나 불안감에 시달리고 짜증스럽고 공격적이 되고 자신이나 타인을 배려하지 못하는 등의 증세가 있는 임상적인 질환을 갖는다. 사실상 미국의 빈곤층 모두가 자신의 상황을 불만족스럽게 여기며, 설상가상으로 그들 중 다수가 자신의 처지를 개선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채 살아간다. 이 복지 개혁의 시대에 우리는 빈곤층에 자립을 요구하지만 중증 우울증을 앓는 빈곤층에게 자립이란 불가능한 일이다. 일단 우울증에 걸리면 재교육프로그램도, 시민 계도 활동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약물치료와 심리치료를 통한 정신 치료다. - P551
성우들이 성신상애에 의한 것이다. 진보적 정치가들은 빈곤층의 불행을 자유방임주의 경제의 불가피한 결과이며 정신보건상의 개입으로 고쳐질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가 하면 우파 정치인들은 그것을게으름의 결과로 여겨 정신보건상의 개입으로 해결될 수 없다고 본다. 사실 대다수 빈곤층에게 그것은 고용 기회나 일하려 하는 동기의 부재 때문이라기보다 노동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심각한 정신장애 때문이다. - P556
"우울증이라는 말을 듣자 위안이 되더군요. 문제가 있어서 그랬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요. 무슨모임에 나가게 되었는데 그게 너무 힘들었어요. 거기 가서 말은 한마디도 안 하고 내내 울기만 했죠." 롤리의 말이다. 정신의학계에서는 스스로 도움을 받고자 찾아오는 환자가 아니면 도울 수 없다고들 여기지만 빈곤층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자꾸 전화가 왔어요. 모임에 나오라고요. 귀찮을 정도로 들볶더라고요. 한번은 집에까지 데리러 왔다니까요. 처음에는 그 모임이 싫었어요. 그런데 모임에 온 다른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나와 똑같은 문제들을 갖고 있더군요. 그래서 나도 가슴에만 묻어 두었던 이야기들을 털어놓기 시작했지요. 치료사는 우리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그런 질문들을 했던 거예요. 나는 자신이 변하고 있는 것을, 강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죠. 모두 내 태도가 달라진 걸 느끼기 시작했어요." - P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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