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오는 국민학교 시절에 할머니 신금이에게 되물은 적이 있었다.
"일제시대에는 그랬다 치고, 왜 우리 식구들은 힘센 쪽에 붙지못하고 맨날 지는 쪽에만 편들었어요?"
"왜, 약한 쪽 편드는 게 싫으냐?"
"물론이지요. 너무 손해잖아요?"
그러면 할머니는 감실감실 주름살 잡힌 눈을 더욱 가늘게 뜨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때에는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약한 이들이 이기게 되어있다. 너무 느려서 답답하긴 했지만."
그리고 신금이는 덧붙였다.
"오래 살다보면 알 수 있단다. 서로 겉으로 내색을 안 할 뿐이지 속으론 다들 알구 있거든." - P564
이진오는 한달쯤 지나서 우여곡절 끝에 석방되었다. 이제 합의에 따라 해고자 가운데 끝까지 버틴 열한 사람이 복직을 할 차례였다. 그들은 서울에서 모여 고속버스를 타고 지방에 있다는 공장으로 찾아갔다. 공장에는 녹슨 기계 몇대가 남아 있었고 다른 노동자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숙소라고 찾아간 곳은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연립주택이었는데 벽에는 곰팡이가 가득 피어나 있었고 비닐장판이 젖혀진 방바닥은 군데군데 꺼진 곳도 있었다. 화가 치민 그들이 본사에 전화했지만 직급이 높은 자와는 통화할 수가 없었다. 일반 직원은 곧 신입 직원을 모집하여 내려보낼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보라고 같은 소리를 몇번이나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들은 허탈하게 웃기도 하고 서로 싸움질도 했다. 더러는 떠나고 몇 사람은 남았다. 폐허를 떠나 고속버스 정류장 앞에서 각자 헤어지기 전에 그들은 소주를 나누어 마셨다. 마지막 남은 세 사람은 서로의 눈길을 피하며 소주잔만 들여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김형이 진오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다시 올라가자. 이번엔 내가 올라가겠어."
막내 차군도 말했다.
"저두요 김선배, 저두 올라가겠어요."
거기서 대화가 끊기고 더이상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 P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