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가 농성하던 거대한 철탑이 태양 빛에 달구어져 누나의 가냘픈 살을 태울 듯 뜨거웠던 계절에 그녀는 동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렇게 썼다. 아직도 덜 식어 후텁지근한 열기가 남은 크레인 운전실의 쇳덩이 방에서 누나는 꿈을 꾸었다. 철탑의 아래에서 스멀스멀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육중한 사각의 크레인 쇠기둥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그것들은 뿌리로 변하여 구불거리고 꿈틀대며 땅속을 파고들어갔다. 대지에 뿌리를 박고 뻗어나가자마자 아래에서부터 나뭇잎이 돋아나고 갈색 페인트 색은 싱싱한 녹색으로 되살아났다. 쇠가 살아 있는 나무로 변하면서 나뭇잎은 무성하게 자라나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위로 위로 올라왔다. 드디어 크레인 철탑은 자취를 감추고 거대한 나무가 되었다. 이진오는 영숙이 누나의 꿈 이야기처럼 아름다운 글을 어떤 책에서도 읽은 적이 없었다. - P406
대공분실을 거쳐 나온 이들은 고문의 무서움보다 더한 모멸감과 수치심 때문에 진저리를 쳤다. 무릎 꿇고 울부짖고 빌면서 네네, 무엇이든 불러주는 대로 받아썼다. 그들의 실직 굶주림 가난 야근 피로 질병 따위의 자세한 고통들은간단하게 개인 사정으로 지워져버렸고 혁명 투쟁 평양 김일성 간첩 같은 엉뚱한 단어들로 조서가 채워졌다. 수사관들도 그들의 파업이나 쟁의 목표가 좀더 나은 임금과 노동환경을 요구하는 일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만, 대공 문제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 오랜 수사기법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정부가 설립한 부서의 이름도 대공분실이었다. - P411
"가시기 전에 서방님에게 알려드릴 일이 있어요." 신금이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그는 마루 끝에 앉았다. "모르셨지요? 지난 석달 열흘 동안 어머님이 늘 머리맡을 지키고 계셨다구요." 이철은 이전처럼 웃거나 농지거리를 하지 않고 다소곳하게 앉아서 형수의 말을 듣고 있었다. "어떤 날은 장산이를 데려오기도 했지요." 그 말에 이철이 울컥하더니 고개를 떨구었고 굵은 눈물이 마루에 뚝뚝 떨어졌다. 신금이도 드디어 참지 못하고 울먹이면서 말했다. "죽고 사는 일이 그렇게 별다를 것이 없지요. 그러니 하고픈 일을 하세요" - P448
어느날 깊은 밤에 신금이는 저절로 담이 깼다. 누군가가 그녀의 가슴을 흔들어 깨웠던 것이다. 어둠 속에 주안댁이 앉아 있었다. "왜 또 오셨어요?" 그랬더니 주안댁이 두 다리를 퍼지르고 앉아서 키득키득 울음을터뜨렸다. "애고 뭐시냐, 내 새끼 두쇠가 죽어버렸구나!" "예에? 어, 언제요?" "방금......" 신금이는 이부자리를 걷으며 상반신을 일으켜 앉았고 주안댁은 방문께로 물러나서 서 있었다. 어느결에 나타났는지 주안댁 옆에 수인복을 입은 이이철이 서 있었다. 그들이 문을 열고 방을 나가려할 때에 신금이는 두 손을 저으며 외쳤다. "잠깐요, 어디루 가세요?" 곁에서 자고 있던 남편 일철이 깨어 일어나 아내의 옷자락을 잡았다. "뭐야, 무슨 일이오?" 그들은 사라졌다. 신금이는 어리둥절한 일철에게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두쇠 서방님이......" "응, 그애가 어쨌다구?" 신금이는 울음을 터뜨렸고 평소 아내의 버릇을 아는지라 일철은 그녀를 안아주며 등을 토닥였다. "서방님이 옥사했어요." "누가 그래•••••• 어머니가 오셨나?" 신금이는 더이상 할 말을 잊고 고개만 끄덕였다. - P501
일왕 히로히토의 공개방송 내용에는 침략에 대한 반성이며 패전에 대한 항복의 의미는 한 글자도 들어 있지 않았다. 심지어 미국영국 등으로부터 동아시아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불가피한 일이었으며 주권 배격과 침략이 그의 뜻이 아니라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그 내용은 연합군 수뇌의 포츠담선언을 수락한다는 내용으로얼버무려져 있었다. 해방된 조선의 식자층과 당시의 어느 논객은뒤에 이렇게 회고했다. "조선에서 해방은 1945년 8월 16일 하루뿐이었다." 히로히토가 8월 15일 정오에 라디오를 통해 ‘대동아전쟁종결조서‘라는 것을 읽어내려간 육성 녹음을 방송했지만, 그것은 명백히 항복 방송이 아니라 종전 방송이었다. 8.15에 일제가 무조건 항복했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었다. 일제는 1945년 9월 2일 오전 아홉시 동경만에 정박해 있던 미해군 전함 미주리호 함상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할 때까지 항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제는 어째서 8월 15일에 항복하지 않고 계속 버티다가 9월 2일에 항복하였는가. 그것은 미군이 일본에 상륙하기를 기다렸다가 미국에게 항복하려고 작정했기 때문이다. 조선반도의 삼십팔도선 분할은 1945년 8월 9일에 대일전쟁을 개시한 소련군이 만주를 거쳐 조선에 진격하자 8월 11일 미국 전략정책단이 소련군의 남진을 저지하려는 긴급대책으로 삼팔선을 그어한반도를 서둘러 분할했다는 것이 공식적 견해였다. 조선반도의 분할은 미국이 즉흥적으로 주도하고 소련이 아무것도 모르고 동의해준 것이라는 견해는 전혀 사실이 아니었고,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진 미국의 전략이었다. 미국 측 전략가들은 세개의 주요 항구를 주목했고 이중 두개의 항구인 부산과 인천을 자기들 쪽에 포함시켜야 하며, 서울 바로 북쪽에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삼팔선을 따라 긋는 것이 가장 좋은 위치라고 판단했다. 미국 대통령과 국무장관은 이미 포츠담회의에서 비공식적으로 조선반도의 분할을 안건으로 내놓았던 것이다. - P520
건준의 보안대나 학병동맹의 청년들이 서울의 각 경찰서를 점거하면서 일경과 마찰을 빚었다. 과거의 원한으로 조선인 경찰들을살해하거나 폭행한 경우가 수십건 발생했지만 사태는 곧 잦아들었다. 이에 비하면 소련군 점령하의 북한은 일본 경찰과 헌병은 물론검사나 판사의 과거 이력을 조사하고 조선인 피해자들의 증언에따라 재판정에 세워 사법적 처벌을 했다. 따라서 수많은 조선인 출신 경찰과 관리가 이남으로 도망쳐 내려왔다. 예상했던 대로 구월초에는 서울의 경찰서마다 뒤숭숭하던 치안 불안 현상이 사라졌다. 서울 시내를 일본군이 지키기 시작했고 일제 경찰 간부들은 조선인 경찰 간부들에게 직임을 승계해주었다. - P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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