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탈‘이 자본주의에 구조를 부여하는 요소라는 정의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해보자. 앞장에서 본 대로, 수탈은 다른 수단을 통한 축적이다. 즉, 착취와는 다른 방식을 통한 축적이다. 자본이 임금을 대가로 ‘노동력‘을 구매하는 계약 관계 대신 수탈은인간 역량과 자연 자원을 징발하여 자본 확장 회로에 징용함으로써 작동한다. 징발은 신세계 노예제에서 그랬듯이 뻔뻔스럽고폭력적일 수도 있고, 우리 시대의 약탈적 대출과 담보물 압류에서 그렇듯이 상거래라는 베일을 뒤집어쓸 수도 있다. 또 수탈당하는 주체는 자본주의 주변부의 농촌이나 토착민공동체일 수도 있고, 자본주의 중심부의 종속 집단이나 하위 집단 구성원일 수도 있다. 한때 수탈을 당했더라도 운이 좋으면 착취받는 프롤레타리아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면 빈민, 슬럼거주자, 물납 소작인sharecropper‘, ‘원주민‘, 노예, 임금 계약 바깥에서 계속 수탈당하는 주체로 끝날 수도 있다. 징발된 자산은노동, 토지, 가축, 도구, 광산이나 에너지 매장지일 수도 있지만, 또한 인간, 인간의 성적·생식적 역량, 자녀와 장기臟器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핵심은 징발된 역량들이 자본의 핵심 특징인 가치 확장과정에 흡수된다는 것이다. 단순한 도둑질이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있었던 강탈 같은 행위와는 달리, 내가 말하는 수탈은 징발과 징용을 통해 축적에흡수되는 것이다. - P85
나의 명제는 자본주의의 인종화 역학이 착취 대상인 자유로운 주체들과 수탈대상인 종속적 주체들을 구별하는, 구조적 토대를 갖춘 ‘표식‘에응축돼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전개하려면 이제 초점을 ‘경제적인 것‘에서 ‘정치적인 것‘으로 옮겨야 한다. 오직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 질서를 주제로 삼을 경우에만 이 구별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인종‘의 짜임새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88
하지만 자본주의 안에서 종속적 주체를 정치적으로 직조하는 일은 결코 지위의 경계선 긋기에만 머물지 않았다. 지정학적경쟁과 경제적 팽창주의가 서로 얽힌 뿌리 깊은 논리를 바탕으로, 강대국들은 (피탈 주체를 구성하기 위해) 멀리 떨어진 자본주의 세계체제 주변부로 향했다. 유럽 식민 국가들과 그 뒤를 이은 미합중국 제국주의는 지구상의 가장 먼 곳까지 약탈하며, 수십억 인류를 이런 피탈 주체로 만들었다. 정치적 보호를 박탈당하고, 징발당할 만반의 준비가 된 주체로 말이다. 이들 강대국이 창조한 수많은 피수탈 주체는 이 국가들이 착취를 위해 해방시킨‘ 시민노동자의 수를 초과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예속민이 식민 통치에서 해방됐다고 하여 결코 종식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도 나날이 수많은 새로운 피수탈 주체의 무리들이 창조되고 있다. 과거의 식민 지배국과 포스트식민 국가들, 그리고 축적기계에 기름칠을 해주는 글로벌 금융기구를 비롯한 초국적 권력의 합동 작전의 결과다. 이 경우에도 공통된 위협은 바로 정치적인 벌거벗기기다. 즉 한계를 설정하거나, 보호를 기대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실제로 피수탈의 가장 근본적인 측면이며, 피수탈성을 피착취성과 구분하는 핵심 요소다. 그리고 인종적 억압의 핵심을 이루는 것도 바로 이러한 피수탈성, 즉 아무런 방어 수단 없이 폭력에 노출된 상태다. 한마디로 피착취 주체와 종속적인 피수탈 주체를 구별해주는 것은, 이러한 불가침성에서 벗어나 있다는 신호인 ‘인종‘ 표식이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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