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주가 노동자에게 주는 급여를 줄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제도배열 아래에서 많은 가계는 현금 급여 이외 소득원에서 생계의 일부를 확보한다. 이를테면 자급 활동(텃밭, 바느질), 비공식호혜 활동(상호부조, 현물 교환), 공적이전소득(복지수당, 사회서비스, 공공재) 등이다. 이러한 제도배열에서는 인간 활동과 재화의 상당 부분이 시장의 영향권 바깥에 머문다. 이러한 활동과 재화는 단순히 자본주의 이전 시대가 남긴 잔재가 아니며, 사멸 중인 것도 아니다. 예를 들면, 20세기 중반에 포드주의가 중심부의 선진공업국에서 노동계급 소비주의를 촉진할 수 있었던 것은, 남성의 고용과 여성의 가사활동을 결합한 반-프롤레타리아화된 가계 덕분이면서 동시에 주변부의 상품소비가 발전하지 못하게 막은 덕분이기도 했다. 반-프롤레타리아화는 신자유주의에 들어서 오히려 더 강화됐는데, 신자유주의가 구축한 축적 전략이란 한마디로 수십억 민중을 공식 경제에서 추방해 비공식 회색 지대(자본이 부를 쪽쪽 빨아먹는)로 옮겨버리는 것이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런 종류의 ‘원시 축적‘은자본이 이윤을 뽑아내는 원천이자 기댈 언덕이 되어주는 현재진행형 과정이다. 따라서 요점은, 자본주의 사회의 시장화된 측면‘과 ‘비시장화된 측면‘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이는 예외적 현상이나 우연적인 경험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DNA에 각인된 특징이다. 사실 ‘공존‘은 이 둘의 관계를 포착하기에는 너무 약한 단어다. 더 나은단어는 ‘기능적 중첩imbrication‘이나 ‘종‘이겠지만, 이런 말들도 이 관계의 도착성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앞으로 논의를통해 더 분명해지겠지만, 이러한 측면을 가장 훌륭하게 표현하는 말은 ‘제살깎아먹기cannibalization‘다. - P36
인식의 전환에서 한 가지 핵심적인 것은 ‘생산‘에서 ‘사회적 재생산‘으로 나아가는 전환이다. ‘사회적 재생산‘이란, 인간 존재와 사회적 유대를 생산하고 지탱하는 상호작용, 필수재공급, 돌봄 제공의 형태들을 뜻한다. ‘돌봄‘, ‘감정노동‘, ‘주체화subjectivation‘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는 이러한 활동은 자본주의의 인간 주체들을 형성하고, 그들을 육체를 지닌 자연적 존재로지속시킨다. 또한 그들을 사회적 존재로 구성하고 그들의 활동반경을 이루는 아비투스habitus 와 사회-윤리적 내용 혹은 인륜성Sittlichkeit을 형성한다. - P40
자본주의는 ‘자연‘의 관할영역과 ‘경제‘의 관할영역 사이에 선명한 분할을 전제하며, 실제로 이를 등장시킨다. 이때 자연은 ‘원자재‘를 지속적으로 무상 공급하는, 쉽게 전용할 수 있는 영역으로 인식되고, 경제는 인간을 위해, 인간에 의해 생산되는 가치의영역이라고 인식된다. 이와 더불어, 이미 존재하던 ‘인간‘과 ‘비인간) 자연‘ 사이의 구별도 강화된다. 이 구별에서 인간은 영적이고 사회문화적이며 역사적인 존재라 여겨지고, 비인간 자연은 객관적으로 주어진 몰역사적 물질이라 여겨진다. 이런 구별의 심화 역시, 여러 면에서 사회생활의 리듬이 비인간 자연에 순응하던 이전 세계가 해체된 결과였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자연의 계절적 리듬에서 폭력적으로 분리해내고는, 화석 연료 기반의 제조업이나 화학 비료를 통해 억지로 확대된 이윤 주도 농업에징용한다. 마르크스가 ‘물질대사 균열metabolic rift‘이라 칭한 바가 시작됨으로써, 바야흐로 (다분히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이름인 ‘인류세‘라고 불리는 완전히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가 열렸다‘ ‘인간 활동‘(실은 자본 활동)이 지구를 놓고 제살 깎아먹는 짓을 벌이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 분할 역시 자본주의와 함께 등장했으며, 자본주의 시스템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변화를 거듭했다. 현재의 신자유주의 국면은 ‘더 많은 자연‘을 경제 영역의 본이야기에 끌어들이는 새로운 인클로저 물결(예를 들어, 물의 상품화)이 시작되게 만들었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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