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주가 노동자에게 주는 급여를 줄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제도배열 아래에서 많은 가계는 현금 급여 이외 소득원에서 생계의 일부를 확보한다. 이를테면 자급 활동(텃밭, 바느질), 비공식호혜 활동(상호부조, 현물 교환), 공적이전소득(복지수당, 사회서비스, 공공재) 등이다. 이러한 제도배열에서는 인간 활동과 재화의 상당 부분이 시장의 영향권 바깥에 머문다.
이러한 활동과 재화는 단순히 자본주의 이전 시대가 남긴 잔재가 아니며, 사멸 중인 것도 아니다. 예를 들면, 20세기 중반에 포드주의가 중심부의 선진공업국에서 노동계급 소비주의를 촉진할 수 있었던 것은, 남성의 고용과 여성의 가사활동을 결합한 반-프롤레타리아화된 가계 덕분이면서 동시에 주변부의 상품소비가 발전하지 못하게 막은 덕분이기도 했다. 반-프롤레타리아화는 신자유주의에 들어서 오히려 더 강화됐는데, 신자유주의가 구축한 축적 전략이란 한마디로 수십억 민중을 공식 경제에서 추방해 비공식 회색 지대(자본이 부를 쪽쪽 빨아먹는)로 옮겨버리는 것이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런 종류의 ‘원시 축적‘은자본이 이윤을 뽑아내는 원천이자 기댈 언덕이 되어주는 현재진행형 과정이다.
따라서 요점은, 자본주의 사회의 시장화된 측면‘과 ‘비시장화된 측면‘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이는 예외적 현상이나 우연적인 경험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DNA에 각인된 특징이다. 사실 ‘공존‘은 이 둘의 관계를 포착하기에는 너무 약한 단어다. 더 나은단어는 ‘기능적 중첩imbrication‘이나 ‘종‘이겠지만, 이런 말들도 이 관계의 도착성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앞으로 논의를통해 더 분명해지겠지만, 이러한 측면을 가장 훌륭하게 표현하는 말은 ‘제살깎아먹기cannibalization‘다. - P36

인식의 전환에서 한 가지 핵심적인 것은 ‘생산‘에서 ‘사회적 재생산‘으로 나아가는 전환이다. ‘사회적 재생산‘이란, 인간 존재와 사회적 유대를 생산하고 지탱하는 상호작용, 필수재공급, 돌봄 제공의 형태들을 뜻한다. ‘돌봄‘, ‘감정노동‘, ‘주체화subjectivation‘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는 이러한 활동은 자본주의의 인간 주체들을 형성하고, 그들을 육체를 지닌 자연적 존재로지속시킨다. 또한 그들을 사회적 존재로 구성하고 그들의 활동반경을 이루는 아비투스habitus 와 사회-윤리적 내용 혹은 인륜성Sittlichkeit을 형성한다. - P40

자본주의는 ‘자연‘의 관할영역과 ‘경제‘의 관할영역 사이에 선명한 분할을 전제하며, 실제로 이를 등장시킨다. 이때 자연은 ‘원자재‘를 지속적으로 무상 공급하는, 쉽게 전용할 수 있는 영역으로 인식되고, 경제는 인간을 위해, 인간에 의해 생산되는 가치의영역이라고 인식된다. 이와 더불어, 이미 존재하던 ‘인간‘과 ‘비인간) 자연‘ 사이의 구별도 강화된다. 이 구별에서 인간은 영적이고 사회문화적이며 역사적인 존재라 여겨지고, 비인간 자연은 객관적으로 주어진 몰역사적 물질이라 여겨진다. 이런 구별의 심화 역시, 여러 면에서 사회생활의 리듬이 비인간 자연에 순응하던 이전 세계가 해체된 결과였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자연의 계절적 리듬에서 폭력적으로 분리해내고는, 화석 연료 기반의 제조업이나 화학 비료를 통해 억지로 확대된 이윤 주도 농업에징용한다. 마르크스가 ‘물질대사 균열metabolic rift‘이라 칭한 바가 시작됨으로써, 바야흐로 (다분히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이름인 ‘인류세‘라고 불리는 완전히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가 열렸다‘ ‘인간 활동‘(실은 자본 활동)이 지구를 놓고 제살 깎아먹는 짓을 벌이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 분할 역시 자본주의와 함께 등장했으며, 자본주의 시스템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변화를 거듭했다. 현재의 신자유주의 국면은 ‘더 많은 자연‘을 경제 영역의 본이야기에 끌어들이는 새로운 인클로저 물결(예를 들어, 물의 상품화)이 시작되게 만들었다.  - P4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가 타고 있는 객차의 아래쪽에서 끽끽거리는 쇳소리가 나더니 뭔가가 다가와서 세차게 부딪치고는 자리를 잡았다. 마이어스는 미로 같은 선로들을 내다보다가 기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돌아서서 허겁지겁 객차의 끝으로 가서 원래 자기가 앉아 있던 객차로 넘어갔다. 그는 복도를 걸어 자신의 칸막이 객실로 갔다. 하지만 신문을 읽고 있던 젊은 남자는 없었다. 그리고 마이어스의 여행가방도 없었다. 그건 그가 타고 있던 칸막이 객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번쩍 정신이 들며 그는 기차가 조차장에 있는 동안 자신이 타고 있던 객차를 떼어낸 뒤 다른 이등 객차를 연결시킨 게 분명하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가 서 있는 칸막이 객차 안에 꽉 들어찬, 몸집이 작고 살갗이 검은 사내들은 마이어스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언어로 빠르게 말하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그에게 들어오라는 몸짓을 했다. 마이어스가 칸막이 객실 안으로 들어서자 그 사람들이 앉을 공간을 만들어줬다. 칸막이 객실 안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몸짓을 했던 사내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자기 옆에 앉으라고 의자를 두들겼다. 마이어스는 진행 방향으로 등을 돌리고 앉았다. 차창 밖 시골 풍경이 점점 더 빨리 스쳐가기 시작했다. 한순간, 마이어스는 그 풍경이 자신에게서 멀어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어딘가로 가고 있었고, 그걸 알았다. 그리고 그게 잘못된 방향이라면, 조만간 그는 알게되리라. - P86

"애가 왜 깨어나지 않는 걸까?" 앤이 말했다. "하워드, 이 사람들한테 무슨 대답 좀 들었으면 좋겠어."
하워드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다시 의자에 앉더니 다리를 꼬았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는 아들을 한 번 바라본뒤,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고 앉아 눈을 감고 잠들었다.
앤은 창가로 걸어가 주차장을 내다봤다. 밤이라 자동차들은 불을 켜고 주차장을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창틀을 꽉 잡은채 서 있었다. 그녀는 이제 자신들이 다른 어떤 곳, 어떤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두려웠다. 입이 덜덜덜 떨리기 시작하자 그녀는 입을 앙다물었다. 그녀는 병원 앞에 대형자동차 한 대가 서자 롱코트를 입은 한 여인이 그 차에 올라타는 걸 봤다. 자신이 그 여자였더라면, 그래서 그게 누구든, 누군가 자기를 태우고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그러니까 스코티가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이 차에서 내리면 "엄마!" 하고 외치면서 품안으로 뛰어들어오는 곳으로. 데려갔으면 좋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워드가 깨어났다. 그는 다시 아이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의자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켠 뒤, 창가로 걸어가 앤의 곁에섰다. 두 사람은 나란히 주차장을 빤히 쳐다봤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제 그들은 서로의 가슴속까지도 느끼는 듯했다. 마치 걱정을 많이 하다보니 아주 자연스럽게 온몸이 투명해진 사람들처럼. - P104

그들은 롤빵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앤은 갑자기 허기를 느꼈는데, 그 롤빵은 따뜻하고 달콤했다. 그녀는 롤빵을 세 개나 먹어 빵집 주인을 기쁘게 했다. 그리고 그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신경써서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지치고 비통했으나, 빵집 주인이 하고 싶어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빵집 주인이 외로움에 대해서, 중년을 지나면서 자신에게 찾아온 의심과 한계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들에게 그런 시절을 아이 없이 보내는 일이 어떤 것인지 말했다. 매일 오븐을 가득 채웠다가 다시 비워내는 일을 반복하면서 보내는 일이 어떤 것인지. 그가 만들고 또 만들었던 파티 음식, 축하 케이크들. 손가락이 푹 잠길 만큼의 당의 케이크에 세워두는 작은 신혼부부 인형들. 몇백, 아니, 지금까지 몇천에 달할 것들, 생일들. 그 많은 촛불들이 타오르는 것을 상상해보라. 그는 반드시 필요한 일을 했다. 그는 빵집 주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꽃장수가 아니라 좋았다. 사람들이 먹을 것을 만드는 게 더 좋았다. 언제라도 빵냄새는 꽃향기보다 더 좋았다.
"이 냄새를 맡아보시오." 검은 빵 덩어리를 잘라내면서 빵집 주인이말했다. "퍽퍽한 빵이지만, 맛깔난다오." 그들은 빵냄새를 맡았고, 그는 맛보라고 권했다. 당밀과 거칠게 빻은 곡식 맛이 났다. 그들은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먹을 수 있는 만큼 먹었다. 그들은 검은 빵을 삼켰다. 형광등 불빛 아래에 있는데, 그 빛이 마치 햇빛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이른 아침이 될 때까지, 창으로 희미한 햇살이 높게 비칠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는데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 P1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즉, 현 위기를 발생시킨 책임은 ‘식인 자본주의‘ 시스템에 있다. 현재의 위기는 다양한 폭식증의 발작이 한데 모인 예외적유형의 위기다. 수십 년에 걸친 금융화로 인해 지금 우리가 직면한 위기는, ‘단지‘ 극단적인 불평등이나 저임금 불안정 노동의 위기만이 아니다. ‘단지‘ 돌봄이나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만도 아니고, 이민과 인종화된 폭력의 위기만도 아니다. 또한 뜨거워진 지구가 치명적 전염병을 토해내는 ‘단순한‘ 생태적 위기만도 아니고, 무너져가는 인프라와 군사주의 증대, 독재자의 만연을 특징으로 하는 ‘오로지‘ 정치적인 위기만도 아니다. 아니, 이 위기는 ‘더 나쁜 무엇‘이다. 이 모든 재난이 한데 모여 서로를 악화시키며 우리를 집어삼키겠다고 위협하는, 사회 질서 전체의 전반적 위기다. - P20

마지막으로 식인 자본주의는 광범하게 포진해 있으면서 서로 복잡하게 결합된 사회적 투쟁을 촉발한다. 생산 지점에서벌어지는 계급투쟁만이 아니라, 이 시스템을 구성하는 접합 부위마다 벌어지는 경계투쟁boundary struggles을 불러일으킨다. 생산이 사회적 재생산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시스템은 돌봄(공공부문이든 민간부문이든, 유급 노동이든 무급 노동이든)을 둘러싼 갈등을 유발한다. 착취와 수탈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시스템은 ‘인종‘, 이민, 제국을 둘러싼 투쟁이 끓어오르게 만든다. 또한 축적이 자연의 한계에 직면한 지점에서도 식인 자본주의는 토지, 에너지, 식물군과 동물군, 지구의 운명을 둘러싼 갈등을 폭발시킨다. 마지막으로 지구 시장과 초거대 기업이 국민국가 또는 초국적 거버넌스 기구와 만나는 지점에서, 식인 자본주의는 공적 권력의 형태와 통제, 범위를 둘러싼 투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처한 곤경의 이 모든 가닥은 자본주의에 관한 확대된 인식(통일성과 차별성을 동시에 갖춘)을 통해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 P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직장에서 알게 된, 버드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가 저녁이나 함께 먹자며 프랜과 나를 초대했다. 나는 버드의 아내를 몰랐고 버드는 내 아내 프랜을 몰랐다. 그 점에서 우리는 공평했다. 하지만 버드와 나는 친구였다. 버드의 집에 아기가 있다는 사실도 나는 알고 있었다. 버드가저녁식사에 초대했을 즈음, 아기는 생후 팔 개월 정도였을 것이다. 팔개월이라니? 그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도대체, 지금까지의 시간은 또 다 어디로 간 걸까? 버드가 시가 박스를 들고 출근한 날이 생각난다. 구내식당에서 버드는 내게 시가를 내밀었다. 드럭스토어에서 파는 시기였다. 더치 매스터스. 그런데 한 개비마다 붉은 스티커를 붙여놓고 ‘사내애랍니다‘라는 글씨가 인쇄된 포장지로 싼 시가였다."
원래 시가를 잘 피우지 않지만, 어쨌든 한 개비를 집었다. "몇 개 더 가져." 버드가 말했다. 그는 박스를 흔들었다. "나도 시가는 안 좋아해. 그 사람 아이디어지." 그러니까 버드는 자기 처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 P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런 게 있어?"
"오늘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 중 하나가 그건데, 사실 그런 일들이 별로 남아 있진 않아. 뇌 과학이라든가 분자생물학 분야에는아직 혁명거리가 남아 있겠지.
하지만 내가 말하는 건 진짜 혁명 얘기야. 진짜로 세상을 바꾸고사람들의 존경을 얻는 일에 대한 얘기. 진짜 영광스러운 일은 그런일에 있지. 실패하더라도 칭찬을 듣는 일이라니까. 그런데 그런 일들은 이미 워싱턴이라든가 링컨이라든가 애덤스라든가 마틴 루터킹 같은 사람들이 다 해버렸어. 동성연애자들이 결혼할 권리까지 이미 누가 먼저 주장해버렸다니까."
"그래서, 너는 목표가 있어?"
"있지."
"뭔데?"
"아직은 네가 들을 준비가 안 돼 있어."
재키는 웃으며 말했다.
"사실, 너는 내가 죽은 다음에나 준비가 될 거야."

세연은 그해 6월에 죽었다. - P70

모든 혁명의 목소리가 처음에 그랬듯이. 우리의 주장은 다듬이져 있지 않다. 아마 당신은 우리보다 더 빈틈없는 논리와, 손실을줄이면서도 더 효과적인 수행 방법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공산 혁명을 주장했지만, 공산 혁명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우리 세대가 처한 상황과 이 세대의 운명에 대한 우리의 분석에 동의한다면, 당신은 넓은 의미의 선언자다. 누군가가 와이두유리브닷컴을 ‘부모 덕택에고생 모르고 자란 배부른 녀석들의 복에 겨운 헛소리‘ 라고 매도하려들 때 "그 방식은 과격하지만 그들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라고 맞서며 우리의 논리를 그 자리에 소개한다면 당신은 선언자다. 우리 세대가 하루하루 좌절에 빠지는 이유가 우리 개개인의 잘못이 아님을 알고, 그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면 당신은 우리와 같은 편이다.
다만 나는 당신들이 ‘자살 선언‘의 대안으로 길거리에서 플래시몹을 하거나 서명 운동을 벌이거나 인터넷 카페를 만들고 거기에글을 올리는 일 따위는 고려하지 않기를 바란다. 청년 연대니 청년노조니 하는 단체도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 별 효과가 없으리라는것이 뻔히 보이는 데 더해, 무엇보다 우스꽝스럽기 때문이다. 공격은 언제나 번개같이 빠르고, 위협적이어야 한다. - P182

새로운 담론을 제기할 수조차 없는 환경은 우리 세대의 가치관에도 예상치 못한 영향을 미친다. 이른바 ‘표백 세대‘ 의 등장이다.
이 세대에게는 실질적으로 어떤 사상도 완전히 새롭지 않으며, 사회가 부모나 교사를 통해 전달하는 지배 사상에 의문을 갖거나다른 생각에 빠지는 것은 낭비일 뿐이다. 그런 시도는 기껏 잘돼봤자 기존 지배 사상이 얼마나 심오하고 빈틈없는지를 더 잘 이해할수 있게 되는 효과만 낳는다.
이들에게 지배 사상은 큰 틀에서 항상 옳으며, 그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개인마다 과정과 깊이가 다를 수는 있으나 결론은 언제나같다. 이들은 지배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따라서 실제 삶에서 온갖 종류의 불편함과 부당함을 겪어야 하는데도, 이에 대한 문제 제기는 개인이나 작은 이익집단 단위를 넘어서지 못하게 되며, 세계는 사상적으로 완전무결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바로 표백 과정이다. 아무도 더 나은 시스템을 떠올리지 못한다. 거대한 흰색 세계는 모든 빛을 흡수하며 무결점 상태를 유지한다. - P191

이런 한계 속에서 표백 세대의 내면은 추하게 일그러진다. 그들은 자신의 역사적인 위치나 사명에 대해 깊이 고민할 것이 없으므로 역사 의식이 희박해지며, 민족주의처럼 그들의 자존감을 손쉽게높여줄 수 있는 불합리하고 값싼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는 경향이 생긴다.
박탈감과 좌절감은 뿌리 깊이 박혀 있지만 이런 좌절감은 집단적인 분노로 발전하지 못한다. 투쟁은 손해 보는 일이라는 것을 모두 다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선배와 상사, 기성세대를 찢어죽일 것처럼 성토하다가도 면접 시험장에서는 한없이 고분고분해지고 공손해진다.
패배를 자연스러운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이들 중 몇몇은 정면승부를 벌이고 작은 이득을 위해 아득바득 싸우는 태도를 촌스럽다고 여기게 된다. 기왕에 지는 것, 한발 물러난 자세로 "나는 크게개의치 않는다"와 같은 태도를 보이거나 아예 싸움을 피하는 것이그나마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다. 그것이 ‘쿨한 모습‘으로 받아들여진다.
진정으로 새로운 주장이나 사상이 없는 상태에서 조롱과 비아냥거림, 의미 없는 장난이 이 세대의 트레이드마크가 된다. - P197

마르크스는 노예는 자신의 노예적 존재를 지속할 수 있는 일정한 조건을 보장받는 데 비해 노동자는 그 계급적 지위가 점점 가라앉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노동자는 노예보다 더 비참하다고 주장했다.
표백 세대는 정신적인 면에서 산업화 시대의 노동자들보다도 더한심한 처지에 있다.
산업화 시대의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사회라는 ‘다음 단계‘를 꿈꾸며,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주체로서 뚜렷한 이념과 이상을 갖고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표백 세대는지배 이념에 맞서 그들을 묶어주거나 그들의 이익을 대변할 이념이없으며, 그렇기에 원자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낙원‘에서 태어난 이들에게 이상향은 있을 수 없기에, 표백 세대는 혁명과 변혁에 관한 한 아무런 희망을 품을 수 없다.
이들은 사회를 비난할 권리조차 박탈당한다. 완성된 사회에서 표백 세대의 실패는 그들 개개인의 무능력 탓으로 귀결된다. - P199

자살 선언에 대한 내 반론의 핵심은 모든 사람이 위대한 일을 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세연은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의 존경을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무가치한 것처럼 얘기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것을 우리 모두 잘 알잖아. 우리가 호모사피엔스라는 동물 종으로서잘 가꿔진 숲길을 걸을 때 거부할 수 없는 작고 소소한 기쁨을 맛본다면, 그 숲을 지키고 가꾸는 일에 가치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어. 좋은음악이나 그림, 음식을 즐기는 데서 오는 즐거움은 본능적인 것이고,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만들거나 만드는 기술을 갈고 닦는 데에는 왜우리가 그걸 해야 하는지,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애써 설명해야할 필요가 없어. 그러니 그런 일을 하면서 보내는 삶에도 가치는 있는거야.
‘인정에 대한 욕구‘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의 패배나 사회 변혁이 없어도 적절한 수준에서 채워질 수 있을 것 같아. 실제로 평범한 사람들은 승진을 하거나 표창을 받았을 때 그런 욕구가 풀렸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어떤 업적에 대한 욕망이랄까, 자부심을 충족시키는 데에도 그 거래를 내가 성사시켰다. 저 건물을 짓는 데 내가 참여했다. 저 길을 여는 데 내가 힘을 보탰다. 저 정책이 바뀌는 데 나도 일조했다. 이런 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우리 앞의 세대라고 해서그 사람 중 어느 누구 한 명이 자기 힘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것은 아니잖아. 그네들이 가진 자부심도 하나하나 쪼개놓고 보면 나도 가방 하나 들고 해외 출장 나가봤다. 밤새워 일해봤다. 거리에서돌 던져봤다. 그런 일들 아닌가. - P297

회원 등급제 도입은 이 같은 문제점을 방지하고 사이트를 개설초기 모습으로 다시 되돌리기 위한 것입니다. 다만 회원 등급 부여는 다른 회원들이 게시물에 매긴 점수에 따라 자동적으로 이뤄지도록 해 운영자의 독단이 개입되는 일이 없도록 할 방침입니다.
많은 회원이 정치 게시판과 문화 게시판 등을 새로 개설해줄 것을 요청하고 계시지만 이는 사이트 설립 취지와 맞지 않는다는 판단 아래 만들지 않기로 했습니다. 다만 이 같은 주제를 모두 다룰수 있는 ‘잡담 게시판‘을 하나 둘 생각입니다.
사이트 개편은 이달 말에 들어가 5월 중 완료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개편 중에도 기존 메뉴들은 예전처럼 이용할 수 있으나 최종 작업을 마칠 때까지 접속이 다소 불안정할 수 있습니다. 빠른 시간 안에 정상화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P33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