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오프라인 구인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었다는 사실 이상의 문제를 제기한다. 직업소개소의 소멸은 노동자 계층의 지역적 구심점 역할을 하던 공간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조지 오웰은 <위건부두로 가는 길》에서 영국식 술집 ‘펍‘을 두고 비슷한 지적을 한다. 빈민가를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펍도 함께 철거되는데 이것이 공동체의 해체를 가속한다는 것이다.

술집의 경우에는 이러한 단지에서 완전히 추방당했고 (중략) 하지만노동계급에게 술집이란 일종의 모임 장소 역할을 겸하기 때문에 공동체의삶에 큰 타격을 입힌다.*

사람들은 꼭 일자리를 찾을 때만 소개소를 찾지는 않는다. 소개소의 의의는 공간 그 자체에 있다. 소개소를 이용하는 남성들은 40대 후반에서 국민연금 개시연령인 65세 정도까지가 대다수인데 이 연령대 남성들이 서울에서 돈 안 쓰고 모일 수 있는 곳은 소개소가 유일하다. 여기가 아니면 술집뿐이다. 내 눈에 비친 직업소개소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이야기 소리가 끊이지 않는, 도심 속 동네 사랑방이었다.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친분을 쌓고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어떤 이는 여기서 이삿짐 옮기는 걸 거들어줄 사람을 구하고 어떤 이는 집수리를 도와줄 사람을 구한다. 때로는 (대단히 드문 경우긴 하지만) 약간의 돈을 빌리기도 한다.
직업소개소가 사라져서 가장 불행한 대목은 바로 이런 결속력이 산산조각났다는 점이다. 물론 기술이 발전하면 사회의 모습도 변하기 마련이다. 인위적인 노력으로 그것을 멈출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몇몇 산업 영역이 사라져 가는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뜻있는 사람들이 야생동물의 멸종을 슬퍼하는 이유와 같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이 없으면 이 세상은 더 가난하고 더 암울하고 더 쓸쓸한 곳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 P19

상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럴 때가 가장 두려운 순간이다. 극도로 화가 난 고객이 갑자기 조용해졌을 때, 이런 상황은 상담사에게 이런 이미지로 다가온다. 두 사람이 격렬하게 말다툼을 벌인다. 침이 튀고 삿대질이 오간다. 분노에 눈이 뒤집힌 이가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상식적인 방식으로는 더 이상 자신이 느낀 좌절감을 담아낼 수가 없다. 뒷일은 상관없다. 어떻게든 이 분노를 해소해야만 한다. 칼, 망치, 포크, 연필, 젓가락 무엇이든 상대를 한 방에 보내버릴 무기를 찾는다. 이 순간의 정적은 수화기 너머의 고객이 상담사에게 휘두를 언어적 흉기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다는 뜻이다. - P55

콜센터에는 직원 문화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회식도 회의도 공동 업무도 없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직원이 들어오면 팀원들과 인사도 하고 자기소개도 하지만 이곳에서 팀이란 서류상의 구분일 뿐 팀으로 해야 할역할도 공간도 없었다. 나는 퇴사할 때까지 2팀에 속한 사람이 누구라든지 그들이 앉은 자리가 어딘지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팀과는 무관하게 배정되는 자리는 한 달에 한 번씩 바뀌었다. 점심은11시부터 3시까지 한시간 간격으로 4개조로 나누어서 먹었다. 밥 먹는시간도 다 쪼개어져 있어서 누군가와 조금이라도 길게 이야기를 나눌만한 기회도 여의치 않았다. 의도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자리가 아무리바뀌어도 바로 옆 사람과 같은 식사 시간조에 들어가는 경우는 없었다.
모두가 눈인사 정도만 하고 출근해서 각자 자리에 앉았다가 6시가 되면사무실을 떠났다. 팀워크의 측면에서 봤을 때 콜센터는 공유 오피스를이용하는 개인사업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회사에선 한 달에 한 번꼴로 새 직원을 뽑았다. 저런 속도라면 늘어나는 인원을 어떻게 감당하나 싶었는데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충원인력보다 퇴사자가 더 많아서 사무실 구석에는 항상 빈자리가 남아 있었다. 그래선지 직원들도 애써 다른 사람과 가까워지려 애쓰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다음날부터 나오지 않는다. 그런 광경을 낯설어하던 이도 어느 날 갑자기 같은 방식으로 모습을 감춘다. 우리가 한 팀이라면 지하철 좌석에 우연히나란히 앉게 된 사람들도 한 팀이었다. - P61

돼지의 배설물은 따뜻한 물과 비누만 있으면 씻어낼 수 있지만 점잖은 사람들이 입으로 쏟아놓는 오물은 1년, 2년이 지나도 말끔히 사라지는 법이 없고 갑자기 기억 속으로 파고들어 와 분노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게 만든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한다. - P63

평소대로라면 하루에 90콜을 받아도 밀린 설거지를 끝낸 정도의 만족감조차 느끼기 힘들지만 이런 통화를 마치고 나면 비로소 누군가에게 도움을 줬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경험한 바로, 인간의 감정은 식물과 같은 방식으로 다뤄야만 한다. 따뜻한 봄바람만이 봉우리 속의 꽃을 끄집어낼 수 있듯이, 상담사 내부의 열정과 친절함을 이끌어낼 수 있는 건 상냥한 말, 그것뿐이었다. 어떠한 친절 교육도 아무리 호된 질책도 따뜻한 말 한마디만 못했다. 우리가 보호하고 싶고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을 때, 우리가 친절하게 대하고 싶은 대상을 구체적으로 설정할 수 있을 때 이 일은 더할 나위 없이 보람찼다. 이 일을 하다 보면 어째서 평범한 사람이 성자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삶의 허무함을 몰아내는 감각이 분명 우리가 하는 일에 녹아 있었다. 다만 그 감각을 경험하기 위해선 거대한 원석에서 참깨만 한 다이아몬드를 추출할 때처럼 어마어마한 양의 감정을 낭비해야 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밖에서 이 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견해와는 다르게 우리가 유한하게 보유한 에너지의 일부였다. - P86

오늘날 사람들은 묻는다. "어떤 직업들이 사라질 것인가?" "어떤 직업들이 나타날 것인가?" "직업이 사라진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 콜센터를 떠날 때는 여기에 한 가지 질문을 더 하고 싶어졌다. "어떤 직업들은 사라지는 게 나은가?" 급여도 적고 처우도 열악하고 이렇다 할 만족감도 주지 않는 일이라면, 운영 상태가 엉망인 기업을 도산처리하는게 나은 경우가 있듯이 직업도 그렇게 정리하는 게 나을 수 있을까? 나는 콜센터를 떠올리며 그렇다고 이런 일자리는 그냥 사라지는게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상이 현실이 된 광경을 보니 그것이 얼마나 철없는 생각인지 깨달았다. 없어져도 상관없는 것에 없어지는게 오히려 나을 수도 있는 무언가 때문에, 사람들이 영하의 길거리에서 그것을 돌려달라고 소리치고 있을 리 없었다.
<죄와 벌>에는 도스토옙스키가 라스콜리니코프의 입을 빌려 그 전설적인 사형 집행 직전 순간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다.

"어디서 읽었더라? 사형 선고를 받은 어떤 사람이 죽기 한 시간 전에 이런말을 했다던가, 생각했다던가, 겨우 자기 두 발을 디딜 수 있는 높은 절벽위의 좁은 장소에서 심연, 대양, 영원한 암흑, 영원한 고독과 영원한 폭풍에 둘러싸여 살아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평생 1천년 동안, 아니 영원히 1아르신밖에 안 되는 공간에 서 있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지금 죽는 것보다는 사는 편이 더 낫겠다고 했다지! 살 수만 있다면, 살 수 만, 살 수 만 있다면! 어떻게 살든, 살 수 있기만 하다면! 그만한 진실이 또 어디있겠나! 그래 이건 정말 대단한 진실이 아닌가!""

그래도 일하고 싶다. 생존에 있어 진실은 노동에 있어서도 진실이다. - P108

"기자를 보면 기자 같고 형사를 보면 형사 같고 검사를 보면 검사 같은 자들은 노동 때문에 망가진 것이다. 뭘 해 먹고사는지 감이 안 와야 그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다." 소설가 김훈의 유명한 말이다. 기후가 지표면의 풍경을 결정하듯 어떤 일을 하느냐는 피부 표면의 풍경을 결정한다.  - P113

막연하게 상자만 나르면 될 뿐이라고 생각했던 일에도 그 나름대로방식과 절차가 있었다. 내가 일터에서 사랑하는 순간들이 이런 것을 발견하게 될 때다. 너무나도 뻔하고 단순해 보이는 현상 속에서 다양한 체계와 규칙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 조금의 상상력도 자극하지 않는 보잘것없던 존재들이 고통을 함께한 사람에게 자신들의 비밀스러운 단면들을 펼쳐 보여주는 순간들. - P124

잠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물류센터에서 불면증 클리닉을 병행해도 좋을 것 같다. 평상시의 잠, 11시 반쯤 불을 끄고 누워서 핸드폰 알람을맞추고 편한 자세를 찾아 몸을 뒤척이다가 내일 뭐 입을지 고민하다가 12시가 넘어야 의식이 스러지는 잠이 일정한 격식과 절차를 갖춘 협상이라면, 까대기를 끝낸 후의 잠은 습격이자 납치다. 샤워를 끝내고 소파에 앉아 습관적으로 TV 채널을 돌리는데 갑자기 무의식의 검은 주머니가 머리 위로 뒤집어씌워지고 정신을 차려보면 한나절이 지나 있다.
하지만 모두가 나처럼 쉽게 잠이 드는 건 아니었다. 이곳에서 잠은 많은 이들에게 골칫거리였다. 사오십 대 중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잠이다 깨버려서 오히려 집에 있는 내내 깨어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다음은 중년의 선배들이 나눴던 대화다.
"일 끝나면 잠자는 게 숙제야, 숙제, 가면 바로 자야하는데 날은 환하지 또 버스에서 조금 잤더니 잠이 더 안 와. 그렇다고 버스에서 깨어 있으려고 해봤자 소용도 없고" - P145

"일당 때문에 그러지? 늦지도 않고 빼먹지도 않고 바로 다음 날 딱딱꽂아주니까. 그것도 일부러 그러는지 딱 일하러 나가기 전에 받으니까 그 맛에 힘들어도 나오는 거잖아? 안 그래? 일당이 한 10만 원만 넘어가도 중독이 돼 농담 아냐. 그거에 맛들이면 다른 일 찾을 생각이 안 들어. 여기 다 그래. 나도 그렇고, 일당 15만 원 받으면 돈 많이 번 것 같지만, 아니야. 그거 계산해봤어? 그거 다 최저임금이야. 최저임금에서 10원도 더 준 것 없어. 여기에 야간수당이랑 연장수당이라 붙으니까 좀 커보이는거지. 우리가 하루에 열두 시간 일해. 오래 일을 해서 돈이 많은 거야. 여기가 임금이 후하고 그런 게 절대 아니야."
"듣고 보니 그렇네요."
"일당은 힘이 없는 돈이야. 훅 불면 고꾸라질 돈이라고 얘네가 돈 안밀리고 주니까 이런 거는 깔끔한 거 같지? 절대 안 그래. 얘네들이 얼마나 치사하게 군다고. 일하다가 열두 달째가 되면 나오지 말라 그래"
"왜요?"
"딱 열한 달 채우면 업체에서 그만 나오라고 해. 일을 안 줘. 1년 일하면 퇴직금 줘야 하거든. 나한테도 그랬어. 한 20일 쉬다 오시라고. 여기업체들 다 그래."
"관리자들이 뭐라고 하는 거예요?"
"아니, 업체에서 전화가 와. 내가 일을 하려고 해도 안 잡아줘. 그리고자기들도 알아 자기들이 퇴직금 때문이라고 까놓고 얘기해." - P154

"경고예요. 또 그러면 집으로 돌려보내요"었다. 짐을그렇지만 사람을 몰아세우면서도 절도가 있었다. 그래서 한 번 더 놀랐다. 화를 내는 법도 목소리를 높이는 법도 없었다. 해야 할 말만 하되 반복해서 지시를 어기면 경고했던 바를 반드시 실행에 옮겼다. 워낙 칼같은 친구라서 다들 조장이나 반장보다 더 무서워했다. 그런데 작업이끝나면 이 친구가 출구 앞에 서서 빠져나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번다. 얼굴은 땀으로 번들거리고 옷에는 허연 소금 자국이 밴 사람들을 향해 육사 생도만큼이나 깍듯한 태도로 허리까지 꾸벅 숙이며 소리쳤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방금 끝난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아는 사람이 같은 일을 한 사람에게만 보일 수 있는 애정과 존경심이 담긴 목소리와 몸짓이었다.
그의 몸짓에서 세상이 나의 가치를 눈여겨봐 준다는 느낌이 전해졌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인생이 조금 덜 외롭고 안심이 되는 느낌이었다. 물류센터에서 일한 시간을 통틀어 그 순간만큼 뭉클할 때가 없었다. 내게는 그 한마디가 삶의 의미를 비춰주는 거울이었다. 그 거울 안에서 나는 자신의 한계를 이겨낸 사람을 봤고 온전하게 자기 몫을 해낸 사람을 봤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당당하게 인정받은 사람을 봤다. 비록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긴 했지만.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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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한참 동안 즐겁고 행복하게 이야기를 나눈 후 문을나섰다. 누군가 나를 부르고 있다. 환한 모습으로…… 발길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저택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프랑스와와 아나톨, 그들이 꿈꿨던 행복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이 집에 살아 있고 앞으로도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모든 이들의 기억의 장소는 바로 집이었다. -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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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며:소개하다

새우는 바다의 열매 같은 거야. 바비큐 해도 되고 끓여도 되고 볶아도 되고살짝만 익혀도 되고 프라이팬에 튀겨도 되고 기름솥에 넣고 튀겨도 되고...
파인애플 새우도 맛있고 레몬 새우도 맛있고 코코넛 새우도 맛있고 고추새우도 맛있고 새우 수프도 맛있고 새우 스튜도 맛있고 새우 샐러드도 맛있고 새우샌드위치도 맛있고..."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는 ‘바‘라는 인물이 나온다. 그는 주인공 톰행크스의 절친한 군대 동기로 머릿속엔 오로지 새우 생각밖에 없는 어딘가 살짝 모자라 보이는 청년이다. 버바의 가족은 대대로 앨라배마에서 새우 요리를 만들며 살아왔는데 그의 꿈도 군에서 돈을 모아 자신만의 새우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보시다시피 버바에게는 오직 한가지 대화 주제만이 존재했다. 새우. 소총 조립할 때도, 군화 닦을 때도, 바닥 청소할 때도 버바는 오직 새우 이야기뿐이었다.
작가란 어떤 면에선 버바 같은 존재다. SF를 쓰든 동화를 쓰든 논픽션을 쓰든 깊숙이 내려가 보면 그들이 하고자 하는 말은 언제나 하나뿐이다. 버바의 새우가 내게는 ‘노동‘이다. 사람들이 일하는 이야기. 먹고살기 위해 우리가 참고 벼르고 각오하는 이야기. 인간이 무의식의 세계 다음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에서 지지고 볶는 이야기. 내가 읽고 싶고 또 쓰고 싶은 이야기는 항상 그런 것이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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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과 다르게 과거 집들의 문은 오직 하나뿐인 형태로 존재했다. 마치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처럼 문 또한 그랬다. 문은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그 집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저택의 문 앞에 서면 그 집과 첫인사를 나누는 기분이 드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각각의 문들은 서로 다른 말투로 인사를 건넨다. 때론 무섭게, 때론 무표정하게, 때론 웃음 지으며…사람의 표정과 닮은 존재, 그게 바로 대문이다. - P51

"원장님. 아까 그 복도, 아니 통로라고 부르던 그 공간은 도대체 뭐죠?"
"우리는 그 통로를 자연의 나팔관, 자연의 통로라고 불러요. 거기는 사람이 지나는 통로가 아니에요."
"네? 사람이 다니는 복도가 아니라 자연의 뭐라고요?"
"아까 수잔 부인이 뤼미에르 씨를 발견한 곳은 야외 테라스이면서 동시에 복도예요. 그 테라스 복도 기억나세요?"
"수잔 부인이 누구죠? 아, 아까 제 손을 잡으셨던 그분이요?"
"네, 실어증을 앓고 계신 할머니요. 그분이 계셨던 곳, 기억하시나요?"
"경황이 없어서 기억이 나질 나네요."
"바로 그곳이 바깥 자연과 연결된 외부 테라스 복도였어요. 외부 테라스는 건물 뒤편 온실과 이어져 있죠. 밖에서 보면 분명 테라스인데 건물 안에서 보면 복도인 공간이죠."
"아, 그래요? 그런데 나팔관은 뭐죠?"
"그 공간을 통해 자연의 소리를 듣고 향기도 맡을 수 있어요.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요. 예를 들면 꽃향기, 풀잎 내음도들어오고 귀를 기울이면 새소리, 바람 소리도 들을 수 있죠. 자연 속에 숨어 있는 음악을 듣는 거예요. 더불어 ……아침햇살이 그 틈으로 들어올 때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진답니다. 저희 병원에 계신 분들은 모두 그 공간에서 귀를 기울이거나 가만히 바라보세요. 그곳에 들어가려고 애쓴 분은 오늘 처음 봤어요." - P82

웅장한 종탑은 나를 내려다보는 거대한 거인 같았다. 저종소리가 울리면 이 주변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종탑으로 시선을 향할 것이다. 소리는 과연 얼마나 멀리까지 퍼질까? 건축가는 종탑을 설계할 때 이웃 종탑과 겹치지 않는 범위와 어디까지 들리게 할 것인지를 고려한다. 베니스국제건축포럼에 참여할 때 만났던 건축대학의 돌체타 교수는 베네치아사람들이 같은 종소리를 듣는 사람과 연대감을 느낀다고 알려주었다. 베니스에는 수많은 작은 광장과 성당 그리고 종탑이 있다. 그러나 한 종탑의 소리는 주변 다른 종탑과 소리가 섞이지 않는다. 지도상의 행정구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듣는 종탑의 소리가 같은 지역 주민이라는 연결고리는 만드는 셈이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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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한 통이 내 삶을 통째로 바꾸어 놓은 날이었다.
침대에 누운 채 눈도 뜨지 않고, 손을 허우적거리면서 휴대전화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 있는지 도저히 잡히지않았다. 할 수 없이 침대 옆에 놓여 있는 작은 스탠드를 더듬거리며 불을 켰다. 주변이 좀 밝아지자 침대 밑에 떨어진 휴대전화가 눈에 들어왔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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