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르누아르가 그린 욕구
여자들이 물가에서 어슬렁어슬렁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들은더없이 이례적인 방식으로, 그러니까 큰 덩치와 관능성과 풍만함과 즐거워하는 모습으로 눈부신 매력을 발산한다. 강기슭을 따라 느긋하게 자리 잡은 채 태양을 향해 팔을 들어올리고, 유연하면서 널찍하고 튼튼한 등 뒤로 머리카락이 물결치듯 흘러내린다. 움직임에 부드러움과 더불어 힘과 육감이 배어있는 걸 보면, 이들은 자신의 중량과 물질적 실체가 주는 감각을 한껏 즐기는 듯하다. - P13
굶기는 비할 데 없이 뒤틀린 방법이긴 했으나 어쨌든 곧 세상에 나가 새로운 권리와 특권을 차지할 준비를 하고 있던, 그러나 아직 자아관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겁먹은 젊은 여자의 불안을 처리해주었다. 거대하고 모호하고 압도적인 대상(일이나 사랑) 대신 작고 구체적이며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대상(팝콘 한 알에 초점을 맞추게 한 것이다. 또한 굶기는 새롭게 바뀐 풍경 속 내 위치에 대해 느끼기 시작한 불편함을 처리할 방법도 제공해주었다. 그러니까 내게 굶기는 갈망이라는 더 큰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일종의 심리적 흥정이었던 셈이다. 나는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큰 존재가 되어도 된다(야심을 가져도 된다. 강력한 힘을 행사해도 된다. 경쟁에서 이겨도 된다)는 허가를 받았지만, 자신을 한 마리 굴뚝새처럼 작고 연약하고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존재로 만듦으로써 그 불편함을 상쇄하려 했다. 또한 굶기는 역시 과장된 방식으로, 여성 전반에대한, 특히 여성의 신체에 대한 엄청나게 많은 (그 일부는 내가족에게서 물려받았지만 거의 대부분은 문화가 뒷받침한) 감정들과 여성의 신체는 선천적으로 어떤 부끄러운 결함을 내포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감시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순순히 받아들인 결과였다. 물론 굶기는 애초에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부터 품고 있던 동경과 허함과 슬픔 등 온갖 오래된 감정들에도 대처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내 모든 갈망을 한 장소에 몰아넣고 다이아몬드처럼 응축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음식은 한편으로는 내가 얼마나 많이 원하는지,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결코 충분히 얻지 못할 것을 얼마나 확신하는지에 대한) 무시무시하고도 막강한 상징이 되었고, 따라서 나의 음식 거부는 내가 마련할 수 있는 가장 주체적인 해결책이 되었다. 난 너무 배가 고파, 이 허기는 결코 충족되지 않을 거야. 어떤 사람이 세계를 이해하는 기준이 이러하다면 (당시의 나는 그랬던 것 같다) 굶기는 합리적인일이 되고 음식 통제는 그 배고픔과 충족될 수 없음의 간극을표현하는 동시에 거부하는 방법이 된다. 당신의 필요들이 당신을 압도하는가? 당신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 필요를 충족해주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 없는가? 심지어 자신이 필요로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는가? 그렇다면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말라. 표류하고 있는 듯 혼란스러웠고 자신에 대한 확신이 너무나도 부족했던 그 시기에 굶기는 하나의 분명한 목표를, 두각을 나타내고 통제력을 발휘할 수단을 내가 잘할 수있는 일을 제시해주었다. - P29
내 경우엔 굶기가 음주로 이어졌는데, 그러자 (내가 통제력이 대단히 강하고 꽤 우월한 사람이라는 느낌과 안전하다는 느낌을 주었던) 식욕 거부가 점차 더욱 전면적인 자기 존재에 대한 거부로 넘어갔고, 술이 음식을 밀어내고 내가 특별히 선택한 물질의 자리를 차지했다. 다른 여자들이 각자 선택한 물질이 무엇인지는 내 경우처럼 구체적으로 지목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대개는 그에 못지않게 강한 악력으로 그들을 움켜쥐고있고 욕구라는 더 폭넓은 주제와도 똑같이 연결되어 있다. 남자들과의 강박적인 관계, 통제되지 않는 쇼핑과 빚, 삶 전체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외모에 대한 집착, 온갖 종류의 ‘이름‘들. 이 모든 것이 허함과 관련되어 있고 내면의 공백을 잘못된 방향에서 메우려는 노력과 관계있으며 모두 똑같은 어두운 감정에서 비롯된다. 많은 여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그 감정은, 갈망은 그 자체로 어쩐지 부당하거나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 원하는 대로 마음껏 누릴 권리는 대가를 지불하거나 스스로 노력해 얻어내야만 한다는 생각, 욕구를 채우려면 희생을 치러야한다는 생각이다. 너무 많이 먹거나, 너무 많이 원하거나, 너무 섹스나 야망이나 갈망에 치우쳐 행동하면 분명 그 청구서가 날아들고, 거기에는 대개 분노에 찬 자기 비난의 야유가 따라붙는다. 넌 돼지야, 게으름뱅이야, 형편없는 인간이야. 욕망 대 박탈, 탐닉 대 자제, 돌봄 대 자기부정. 이런 것들이 특히 여성의 드라마 무대에 반드시 등장하는 주인공이다. - P32
욕구appetite라는 단어는 흔히 음식과 관련해 쓰이기는 하나상당히 폭넓은 의미를 갖고 있다. 웹스터 사전에서는 이렇게정의한다. (1) 자연스러운 욕망, (2) 만족 혹은 충족하고자 하는 선천적이거나 습관적인 욕망 혹은 성향, (3) 욕망의 대상. 나 역시 이처럼 폭넓은 관점을 취하여 우리가 취하는 대상들, 우리가 허하거나 초조하거나 자신이 부족하게 느껴질 때 하는 행위들, 우리에게 가득함과 만족, 완전함의 느낌을 주리라고 상상하는 실체와 행동을 욕구라고 지칭한다. 이런 의미에서 욕구는 꼭 생사가 달린 문제는 아니라는 점에서 ‘필요‘나 ‘본 - P37
능‘과는 다르다. (음식이나 음료에 대한 충족되지 않은 필요는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사람을 죽일 수 있지만 초콜릿에 대한 충족되지 않은 욕구는 그러지 않을 것이며, 포식 동물 앞에서 도피 본능이 제구실을 하지 않는 것은 목숨을 앗아갈 수 있지만 파괴적인 연애 관계에서 그러지 않는 것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욕구는 구체적이고 명확한 생존을 위한 필요와 그보다 더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단어인 욕망 사이 애매한 중간 지대에 자리한다. 욕구는 ‘드라이브‘ 기어가 들어간 욕망으로, 일반적인 바람보다는 더활성화되어 있고 목표 지향적이며 늘 종착지를 염두에 두고있다. 욕구는 이제 막 생겨난 어렴풋한 것에 구체성을 부여하고, 무형의 것에 형태를 부여한다. 내면에서 보글보글 피어오른 감정들이 구체적이고 외적인 것에 달라붙어, 손에 잡히지않는 느낌(동경, 갈망, 허함)을 행위와 행동, 물질과 물건으로 바꿔놓는다. 이 음식, 저 구두, 저 연인••• 물론 가장 명백한 욕구는 육체적인 것, 즉 음식과 섹스에 대한 욕구겠지만 나는 물건들에 대한 욕구, 야망, 그리고 (어쩌면 무엇보다) 자신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그들과 연결되고자 하는 욕구 역시 매우 핵심적이며 삶을 정의하는 욕구라고 생각한다. 이런 일들은 음식과 섹스와 더불어 우리를 앞으로 밀어주고 열망에 불을 붙이고 우리의 행동과 선택을 유도하고 또 자주 결정한다. - P38
솔직히 나는 그 반대가 참이 아닐까 한다. 이 새 천 년의 초입에 많은 여성들의 마음속에 깔린 가장 주된 욕구는 아마 욕구에 대한 욕구일 것이다. 자신의 진짜 욕구가 무엇인지 있는그대로 밝힐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안전하고 안정되었다고 느끼고 싶고, 그 욕구를 만족시킬 충분한 자격과 힘을 갖추었다고 느끼고 싶은 갈망 말이다. 많은 여성들이 그 두 감정을 충분히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은 다이어트와 체중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엄청난 수치에서만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균형과 넓은 시야와 우선순위의 문제들을 고민하느라 여자들로 하여금 한밤중에도 잠 못 이루게 하고 여자들의 신경을 갉아대는 감정들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에서도 드러난다. 여기에는 우선 이따금만 지각될지는 몰라도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인식이 있는데, 그건 바로 우리가 욕구를 한껏 충족하는 일이 아니라 욕구를 억누르려 애쓰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는 것이다. 또 많은 이들이 가짜 신들을 숭배하느라고, 다시 말해 결코 만족을 주지 않을 것만 같은 방식으로 만족을 추구하는라고 (5킬로그램을 줄이는 것으로 안 된다면 아마 저 직장이, 저 집이, 혹은 저 연인이 만족을 줄지도 몰라) 소중한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명확히 정의되지는 않았지만 좀처럼 떨쳐지지 않는 느낌이 또 하나 있는데, 전반적으로 이것이 살아가는 방식 치고는 너무 고통스러운 방식이라는 느낌, 이 방식이 우리를 필요 이상으로 더 불안하게 혹은 더 우울하게 만드는 것 같고, 어쩐지 기만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마치 갈망에 대한, 우리를 먹여주고 채워주고 기쁘게 하는 것들을 원하는 일에 대한 우리의 권리 자체를 어디쯤에선가 도둑맞은것처럼 말이다. - P41
저 옛날의 나에게 ‘좋은 하루‘란 스물네 시간 동안 800칼로리 이하를 먹는 날을 의미했다. 그걸로 끝. 안녕은 그처럼 절대적인 접근 불가능성을 기준으로 판단되었다. 오늘날 내게 좋은 하루란 여러 가지를 의미할 수 있다. 집 근처 강에서 노를 저으며 하루를 시작한 날을 의미할 수도 있다. 조정은 나자신이 유능하고 강하며 살아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활동이다. 또는 하루치 일을 견실하게 해낸 날을 의미할 수도 있고, 친구와 웃으며 통화한 날, 좋은 음식으로 식사한 날, 혹은 밤에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존재, 사람 한 명과 개 한 마리와 포옹한 채 시간을 보낸 날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제나에게 좋은 하루란 고립과 완벽주의와 자기 징벌과 관련된 내 최악의 충동들에 성공적으로 저항했음을 의미하고, 그 대신 재미와 생산성과 연결성 사이에 적당한 균형을 찾았음을 의미한다. 좋은 날들로 향하는 내 길을 찾기 위해, 더욱 힘을북돋는 방식으로 안녕을 정의하기 위해 나는 점진적으로, 그리고 자주 고통을 참아가며 르누아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기어갔다. 충족될 자유를 향한 16년간의 느린 걸음이었다. 사람이 자신의 욕구를 마음껏 충족시킬 만큼, 세상에서 기쁨을 누리고 살아 있음을 마음껏 즐길 만큼 그 사람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 안에 진정한 성배가 한 여자의 갈망의 핵심이 들어 있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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