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페스트 또는 흑사병으로 불리는 병은 보통 가래톳 페스트bubonic plague 선페스트 또는 림프샘 페스트라고도 한다-옮긴이를 가리킨다. 역사학자 프랭크 스노든Frank Snowden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병에는 "네종류의 주역four protagonists"이 필요하다. 첫째는 병의 원인균인 페스트균이다. 둘째는 페스트균을 옮기는 벼룩이다. 셋째는 벼룩을 실어 나르며 숙주 역할을 하는 쥐다. 마지막으로 넷째는, 쥐와 마찬가지로 이 균에 희생되는 인간이다. 페스트균은 벼룩을 통해 동물 개체에서 동물 개체로, 그리고 종에서 종으로(가령 쥐에서 인간으로) 옮아간다. 이처럼 페스트는 야생 설치류가 주로 걸리는 병이 우연히 인간에게 옮겨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점에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다른 인수공통감염병과 유사하다.
페스트는 쥐의 병이기도 하므로, 보통 사람이 죽기 직전에 쥐가먼저 끔찍하게 죽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땅 위에 나와 물을 찾다가길바닥에서 죽는 쥐들이 많이 목격됐다. 당시 흑사병을 묘사한 그림에 쥐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쥐는 불길한 징조였다.
페스트균을 보유한 벼룩이 쥐에서 사람 몸으로 옮겨 가면, 그때부터 균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간다. 벼룩은 사람 간 밀접한 접촉을통해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직접 퍼져 나갈 수 있다. 벼룩은 동물의 몸에서 나는 열을 감지해 숙주로 삼을 대상을 찾게끔 진화되어 있다. 그래서 벼룩은 숙주가 죽어 몸이 싸늘하게 식으면 새 숙주를 찾아 주변으로 뛴다.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소중한 이의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벼룩의 다음 숙주가 되곤 했다. - P121

우리는 과거 범유행의 교훈을 여러 이유로 잊는다. 어떤 경우는너무 오래전 일이라 집단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거나 다른 사건에가려 주목받지 못한다. 그런 전염병들은 소수의 역사학자나 과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거나, 설화나 신화의 주제가 된다. 2020년 4월초 유대교의 절기인 유월절 기간에 내 유대인 친구들 몇 명이 한 말이 있다. 성서 속의 역병 이야기가 늘 추상적으로만 느껴졌는데, 이제는 실감이 난다는 것이었다. 유월절 만찬 때 읽는 「출애굽기」이야기의 요지가 더 명확히 와닿았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더 단순한이유로 우리의 기억에서 잊히는 경우도 있다. 역학적 측면에서 그규모나 파장에 한계가 있었다는 이유다. 범유행병이었지만 그리 치명적이지 않았거나(2009년 H1N1 인플루엔자), 전염성이 높지 않아 발병자가 적었거나(메르스), 너무 빨리 소멸했거나(SARS-1), 특정인구집단 내에서만 발병했거나(에볼라), 백신으로 정복됐거나(홍역과 소아마비), 치료가 가능하거나(HIV), 박멸됐다는(천연두) 이유로 대부분 사람의 기억에서 까맣게 잊히고 있다.
코로나19 시대에 바뀌어버린 우리의 일상이 생경하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사실 생경한 것도 부자연스러운 것도 아니다. 전염병은 인간의 삶에 늘 따라오는 요소 중 하나다. 2020년에 벌어진 사건은 인류가 처음 겪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처음 겪는 일일 뿐이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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