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가 강물이 마음을 바꾼 듯, 파도가 일 미터 남짓한 높이로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강물이 강 너비를 고스란히 장악하며 밀려와 이 둑, 저 둑에서 부서지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속삭이는 소리, 길게 목을 빼는 모습과 함께 습하고 추운 생각도 일제히 사라져버렸다. 부풀어올라 굽이치는 물결이 키 높이로 다가오더니, 순식간에 우리를 지나쳐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멀리 물러갔다. 함께 있던 친구 몇몇은 물살이 그들을 앞지르는 동안 쫓아가면서 고함을 치고 욕을 퍼붓다가 고꾸라졌다. 나 혼자 강둑에 남아 있었다. 그 순간이 내게 가져다준 느낌을 나는 지금도 적절히 형용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것은-내가 그것들을 직접 봤다는 뜻은 아니지만- 토네이도같지도 지진 같지도 않았다. 자연이 난폭하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우리의 본분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뭔가가 고요한 가운데 잘못된 것처럼 보이고 느껴져서 더욱 혼란스러웠다. 마치 우주의 작은 레버가 눌리는 바람에 바로 이곳에서 불과 몇 분 동안, 자연이 뒤집히고 시간도 거꾸로 흐른 것처럼. 또한 해가 진 후에 그 현상을 목격해서인지 한층 신비로웠고, 더욱 속세의 것이 아닌 듯 느껴졌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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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이민자 집단을 탓하고, 빈자와 고령자에게 등을 돌리는 행태가 2020년에도 다시 등장했다. 심지어 일부 목사들까지 그와 같은 구태를 되풀이하고 나섰다. 하지만 사람을 구별하지 않을뿐더러 아무 의도도 없는 바이러스에 감염됐다고 해서 그 사람을 비난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바이러스는 사람을 차별하지않는데, 우리는 왜 차별해야 할까?
분명히 밝혀두지만, 안전하지 않은 성행위를 하거나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사람은 본인과 주변 사람들의 불행에 일조하는 셈이다. 이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짚어야 할 것은 병에 걸리는 개인이나 그 개인이 우연히 속한 집단이 아니라, 개인의 행동이다. 성공한 공중보건 운동은 늘 그런 원칙을 중심에 두었다. - P256

물론 바이러스는 의지가 없는 존재이니 의도를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러 사회적·경제적 요인 때문에 그 사람이 누구냐가 중요해진다. 전염병이 돌면 기존에 있던 사회적 구분이 증폭되기도 하지만, 전에 없던 구분이 생겨나기도 한다. 병자와 건강한자가 나뉜다.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깨끗한 자와 오염된 자가 나뉘고, 떳떳한 자와 비난받을 자가 갈리면서 그 사이의 골이 깊어진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이원론적 사고가 팽배하면서, 사람들은 선과 악, 우리와 타인으로 세상을 나눈다.  - P262

어린이가 SARS-2에 비교적 잘 감염되지 않는 이유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행동적·환경적 차이(가령 흡연과 공해에 대한 장기적 노출이 덜한 점)도 있지만, 유력한 몇 가지 생물학 가설에 따르면 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침투하는 통로로 이용하는 ACE2 수용체의 차이, 바이러스를 막아내는 면역체계의 차이, 백신 또는 다른 바이러스 노출 경험의 차이 등과도 관련이 있다.
몇몇 연구에 따르면 ACE2 수용체는 나이가 들수록 적게 발현되는 것으로 나타나, ACE2 수용체의 풍부성 또는 수용체 활동의 차이로 인해 어린이의 SARS-2 면역력이 역설적으로 강화되는 효과가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령, 고혈압, 당뇨, 심장질환등 코로나19 감염 위험 요인 몇 가지는 모두 ACE2 수용체 결핍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  폐내 ACE2 수용체의 정확한 분포 상태도 나이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이 역시 원인이 될 수 있다. 코로나19와 관련된 ACE2 수용체의 생리적 역할을 밝히기 위해서는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나이에 따라 본래 달라지는 면역체계의 특성을 지적하는 가설들도 있다. 예컨대 어린이의 면역은 적응적인 특성이 강하고(즉 경험하지 못한 병원체를 막는 데 최적화되어 있고), 어른의 면역은 기억에 의존하는 특성이 강하다(즉 이전에 경험한 병원체를 대비하는 데 맞춰져 있다). 어린이의 면역세포가 어른의 면역세포보다 효율적이어서 SARS-2 등의 병원체에 대해 항체를 더 효과적으로 만들어내는지도 모른다. 또 어린이의 면역체계는 아직 미성숙하여 사이토카인 폭풍을 일으키기 어려운지도 모른다. 사이토카인 폭풍은 면역체계가 과도하게 반응하는 현상으로, 코로나19의 병세와 사망률에 큰영향을 미친다. 
또 한 가지 설은, 소아기에 일반적으로 시행되는 예방접종이SARS-2에 대해서도 ‘교차면역cross-immunity‘을 형성시켜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결핵 백신인 BCG (현재 미국에서는 사용되지 않음)는 여러 병원체를 막아주는 비특이적 효과가 있어 신종 바이러스에도 효과가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은 바 있다.  - P266

모든 감염병이 그렇듯 코로나바이러스도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피해를 초래하는 정도가 다르다. 코로나19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을 야기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극명히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
앞서 뉴욕시의 퀸스 중부 등 저소득 지역과 이민자 밀집 지역에서는 감염률이 훨씬 높았다는 사실을 살펴봤다. 또 뉴욕시의 부자들은 확산 중심지를 피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 원격근무를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저소득 직업은 대개 원격근무가 불가능하다. 요리사, 간호조무사, 마트 계산원, 건설 노동자, 건물 관리인, 보육교사, 트럭운전사는 재택근무를 할 방법이 없다. 이런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경기 침체로 일자리를 잃지 않은 이상 감염 위험이 높아진 환경에서 일해야 했다. 게다가 건강보험에 제대로 가입되지 않은 경우가 많아 아파도 의료 접근이 어렵고 병가를 내기조차 쉽지 않다. 그래서몸이 안 좋아도 병원에 가지 않고 계속 출근하는 노동자가 많았고,
아픈 채로 일하는 근무자는 유행을 더욱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다. 전염성이 강한 감염병은 극명한 불평등과 보편적 의료보장의 부재가 사회 전반에 미치는 폐해를 고스란히 드러내게 되어 있다.  - P274

전쟁이나 기근 또는 허리케인과 지진 같은 자연재해 때는 사람들이 함께 모일 수 있지만, 유행병은 집단적 재해이면서도 개별적으로 겪어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우리를 물리적으로 갈라놓는다. 과거 수백 년간 유행병이 돌 때 사람들은 집에 틀어박혀 이웃과 친구들을 피했고, 심지어 홀로 죽기도 했다. 또 앞서 살펴봤듯이 유행병은 우리의 어두운 성향을 자극하여 공포, 분노, 비난을 부추길수 있다. 하지만 유행병은 함께 뭉칠 기회를, 아니 반드시 뭉쳐야 하는 상황을 제시하기도 한다. 유행병은 우리 모두의 취약성과 인간다움을 고스란히 드러내준다. 다른 집단적 재해처럼 유행병에 맞설 때도 연대가 필요하다. 다행히도 인류는 유익한 특성들을 발전시켜왔다. 바로 사랑, 협동, 교육이다. -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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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공포는 긍정적 역할을 하기도 한다. 두려움에 질린 사람은 스스로 격리하거나 마스크를 쓰거나, 그 밖에 본인과 사회에 이로운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활동 인구가 줄기 때문에 유행병의 피해가 일반적으로 줄어든다. 겁에 질린 사람은 동네 술집에서 남들과 어울리지 않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이로움도 반드시 오래간다고는 할 수 없다. 움츠렸던 사람들이 때 이르게공포에서 ‘회복‘하게 되면, 부적절한 시기에 (예컨대 아직 확산이 충분히 통제되지 않았을 때) 사회 활동을 재개하기도 한다. 이는 2차, 3차파동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 또 일이 더 복잡해질 수도 있는 것이, 공포로 인해 달아나는 사람들이 생기면 (앞에서 살펴봤듯이 전염병 발병기에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때까지 탈이 없던 지역에 확산의 씨앗이 뿌려지면서 유행이 전체적으로 더 심각해질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공포로 인해 낙인찍기와 희생양 만들기가 성행하거나정보를 제대로 습득하지 못할 만큼 대중의 불안감이 고조될 경우, 이 역시 유행병의 피해를 키울 수 있다. - P218

감정과 거짓 정보의 유행은 그 바탕에 깔린 바이러스의 유행과 우려스러운 모습으로 서로 뒤얽힌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범유행 시기 공공교육의 역할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과학적 지식이빈약하고 알려진 사실들은 상황에 따라 바뀔지라도, 당국자들은 얼마든지 기민한 동시에 정직한 자세로 대처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한다. 물론 당국자들도 생각이 바뀔 수 있고, 이전에 했던 권고를 수정하거나 숫제 뒤집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 변경의 이유를 설명한다면, 그리고 정보를 공유할 때마다 근거가 얼마나 믿을 만한지(그리고 예측이 얼마나 불확실한지)를 같이 논한다면 대중의 냉소를줄이고 참여 의지를 높일 수 있다.
바이러스 자체가 초래한 상처로, 또 바이러스에 대한 우리의 대응이 초래한 상처로 우리는 수없이 절망을 겪어야 했다. 그렇게 이중으로 가해진 생물적·사회적 충격에 더해, 우리는 우리 앞에 과연 어떤 험로가 놓여 있는지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을 마주해야 했다. 역경속에서 우리는 모든 인간이 공통으로 보이는 심리 반응을 나타냈다. 슬픔과 비탄을 느꼈고, 불안과 공포, 분노의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진실을 서로에게서,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서 감추려고 애썼다.
그와 같은 정서적 반응과 행동은 그 자체를 유행병의 기본 요소로 볼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유행병의 정의에 크나큰 심리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포함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유행병에 대한 공중보건 대응은 의료적·사회적·경제적 측면뿐 아니라 심리적차원에도 초점을 맞춰야 한다. 우리는 21세기에 다시 찾아온 역병에 맞서면서, 예부터 써온 방책을 다시 사용했다. 그리고 예부터 느꼈던 감정들도 다시 느꼈다. -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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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일찌감치 실시된 시선 훈련으로, 시선을 안이 아니라 밖으로 유도하는 방식, 몸을 자아 밖에 존재하는 것으로, 여자 자신인 것이 아니라 여자가 갖고 있는 무엇으로 경험하는법을 배우는 한 방식이었다. 7학년부터 시작해 우리는 계속이 기술을 연마해나가고, 몸을 부분들로 분해하여 점점 더 철저하게 점검하고, 다리와 팔, 배와 가슴, 엉덩이와 머리카락을 별개의 존재들로 바라보는 법을 배운다. 그 존재들은 대부분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를 초래하고, 언제나 위계적 용어와 비교의 용어로 기술되며, 다른 이들과의 비교 속에서 관찰된다. 내 머리카락 대니나의 머리카락, 내 눈 대 질의 눈. 이건 고쳐야 하고 저건 숨겨야 해. 하나씩 하나씩, 우리는 자신을 해체하는 법을 배웠다. - P190

그런 독해도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다만 내게는 기업이라는 은유가 다소 고정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여자들은 모두 똑같은 백지들이고, 그들과는 별개인 제3의 존재, 그러니까 우리가 문화라 부르는 외적인 그것이 종이 위에 뭔가를 쓴다는 말 같다. 철학자 엘리자베스 그로스는 그보다는 좀더 유연한 캘리그래피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10 캘리그래피는쓰는 행위만이 아니라 쓰는 데 사용되는 구체적 재료들과 그 재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독특한 상호작용까지 고려하는 과정으로, 이 과정의 최종 산물-여자의 핵심적 자기의식은사용된 종이의 종류와 질감, 메시지에 저항하거나 흡수하는역량, 쓰기 도구의 질, 잉크의 질에 따라 다를 것이다. - P198

그로스는 우리가 모두 시초부터 기입된 존재들이라고 말한다. 우리도 낱낱의 종잇장들처럼 부서지기 쉽게 태어나거나탄력성을 지닌 채 태어났을 수도 있고, 선천적으로 무겁거나얄팍하게, 선천적으로 아름답고 독특하게, 선천적으로 평범하고 밋밋하게 태어났을 수도 있다. 이런 특성들이 환경, 가족, 기질과 충돌하며 시간의 흐름과 함께 우리를 변모시키고 사회적 명령에 대한 저항 혹은 취약성을 형성한다. 이 캘리그래피패러다임의 폭은 대단히 다양하다. 이 패러다임은 욕구에 관한 문화의 메시지들이 저마다 지속성의 차원에서 왜 그렇게 큰 차이가 나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고, 또한 문화가 훨씬 거대한 수프에 들어가는 재료 중 겨우 하나일 뿐인 이유도 설명해준다.
40대의 한-무척 아름답고 뼈대가 굵으며 선천적으로 육감적인 몸매의 여성은 10대 시절에 겪은 전형적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볼링장에서 어머니가 자기때문에 몹시 창피하다는 듯 다급하게 달려와서는 화난 쇳소리로 말했다고 한다. "면 끈이 달린 브라를 사! 가슴이 덜렁거리고 젖꼭지가 딱딱해져 있잖아!"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굵은 나무줄기로 만든 곱고 섬세한 종이 한 장에 갑자기 수치의 잉크 얼룩이 묻고, 이어서 그 얼룩이 반복적으로 묻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것은 분노와 공포로 휘갈겨 쓴메시지다. 몸의 쾌락을 즐기지 마. 몸을 자랑스레 내보이지 마. 몸은 나쁘고, 너도 나빠. 폭식증에서 벗어나는 중인 또한 여성은 너무나도 수줍었던 열네 살 시절 추수감사절 만찬 자리에서 으깬 감자를 더 먹으려고 손을 뻗을 때 삼촌 하나가 가슴 근처 살을 찌르면서 그의 체중에 대해 음란한 말을 던졌던일을 떠올린다. 이 사람은 부드럽고 조곤조곤 말하고, 불확실한 태도와 남들 시선을 의식하는 분위기를 풍기는데, 그의 말을 들을 때 내게는 약하고 물기를 잘 흡수하며 무디고 둔탁한 도구를 사용하면 쉽게 찢어지는 무른 라이스페이퍼 한 장이 떠오른다. 사랑과 섹스 중독자들을 위한 열두 단계 치료 모임에 참석했을 때다. 한 근친 강간 생존자가 여자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의식에 폭력이 지울 수 없이 새겨지는 방식을 간명하게 요약했다. "수년 동안 나 자신에게 성감을 동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게 수치심과 폭행을 당한다는 느낌을 주는 관계를 맺는 것뿐이었어요." 이 말을 들으며 나는 한 여자의 자기상이 얼마나 심오하게 여러 층위로 구성될 수 있는지, 그 자기상의 힘이 얼마나 많은 변수에 영향을 받는지 생각했다. 훌륭한 캘리그래퍼 - 사랑을 주는 부모, 지지해주는 교사, 따뜻하게 보살피는 공동체 - 는 가장 평범한 종이를 가지고도 가장 섬세한 잉크를 사용해 가치와 존중과 사랑스러움에 관한 초기의 메시지들을 세심하게 새김으로써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나쁜 - 방기하고 학대하는 잔인한 - 캘리그래퍼는 가장 고운 종이도 처참히 망쳐버릴 수 있다. - P199

"뚱뚱할 때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게 일시적인 상태인 최해요." 레슬리 역시 마찬가지여서 과거에는 체중을 비밀에 붙었다. 마치 그게 실제로는 자기 체중이 아닌 것처럼, 친구들도 레슬리 본인도 레슬리의 체중에 관해서는 절대 말하지 않았고, 아무도 ‘뚱뚱한‘이라는 단어조차 쓰지 않았다. 그들은 방 안에서 나는 나쁜 냄새를 모른 척하듯 레슬리의 뚱뚱함을 모른 척했다. 시간이 지나면 냄새가 사라지듯 뚱뚱함이 사라지고 진짜 레슬리가 나타날 거라는 듯이. 내면화된 자기혐오의 목소리에 대해 레슬리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다이어트하는 사람들 사고방식의 일부예요. 모두가 자기 안에 밖으로 나올 날을 기다리는 날씬한 사람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레슬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그 여자를 깔고 앉아 죽여버린 거라고 말하고 싶네요." 이 말을 하면서 레슬리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웃었다. 힘차고 호탕한 그 웃음에는 자신에 대한 인정이 손에 잡힐 듯 뚜렷이 배어 있어서, 마치 향수를 뿌린 것처럼 한동안 우리 테이블 주위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 웃음소리는 몇 시간 동안이나 내귓가에 남아 있었고, 그 이미지도 그만큼 오래 머물렀다. 젊은 여자가 자신의 덩치로 자기혐오를 질식시켜버리는 이미지. 심지어, 젊은 여자가. - P226

이처럼 개인적인 면에서도 의학적인 면에서도 복잡한 문제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스물네 살 당시 레슬리와 나의 기본적인 차이점이다. 힘이있는 뚱뚱한 여자와 아무 힘도 없는 빼빼한 여자. 자신감과 유머가 있는 뚱뚱한 여자와 찡그린 표정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빼빼한 여자. 스스로 자처한 추방에서 탈출한 뚱뚱한 여자와냉장고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수치심의 초상과도 같은 빼빼한 여자. 여자들이 품고 사는 자기혐오의 강도는 언제나 내게깊은 충격을 안긴다. 그것은 그야말로 만성적인 고통을 안고사는 방식이다. 각자 정반대의 위치에서 바라보았지만 레슬리와 내가 둘 다 똑같이 이해하게 된 사실은, 자기의 가치를 외모와 결부시키는 일은 매일 한순간도 빠짐없이 경계하고 조심해야 하는 외줄 타기 같은 일이라는 것이다. 다이어트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몸은 항상 박탈에 저항하고, 왜 그냥 저 구운감자를, 저 버터 조각을, 저 부드러운 사워크림 약간을 먹는것조차 허락해주지 않는지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자기비판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특히 여자들이 하는 무자비한 자기비판은 더욱 고통스럽다. 저울에 올라설 때, 복도를 걷는데양쪽 허벅지가 서로 쏠리는 걸 느낄 때, 삼면거울에 비친 자신의 실루엣을 볼 때, 너무 큰 엉덩이와 너무 나온 배를 볼 때후려치듯 쏟아지는 신랄하고 패배감에 젖은 혐오감, 역겨워, 난 역겨운 사람이야. 이렇게 생각하고 느끼고 살아가는 건 너두 극심하게 고통스러운 방식이다.
그러나 치료하지 않은 고통은 계속 남는다. 그 방식을 재고해볼 계기를 만나지 못하면 고통을 인정하는 것조차 어려울지모른다. 레슬리를 만나고 얼마 후 나는 내가 아는 어떤 이에게레슬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성인기의 삶 대부분 동안 체중에 대해 걱정하며 살아온 사람이었고, 자기 다리에 대한 불만이 워낙 심해 40년 동안 치마를 단 한 번도 입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 사람의 반응은 나를 놀라게 했다. "당신한테는 강함이 보이는지 모르지만, 내게는 무엇보다 심장마비, 당뇨병, 뇌졸중이 보여요. 그런 식의 부인과 자기 파괴에 찬사를 보내기는 어려워요."
나는 이 사람 말에 그렇게 확신이 서지 않고, 부인과 자기파괴에 관한 우리의 정의가 그리 일치하는 것 같지도 않다. 나는 성형수술 통계를 들여다본다. 나 자신이 날씬함과 맺고 있던 예속적이고 지독하게 불건전한 관계에 대해 생각해본다. 거울 속 자기 모습을 보면서 짜증난 소리를 뱉어내고, 역겹다는 듯 자신의 살을 움켜쥐고, 아이스티에 가짜 설탕을 다섯 봉지씩 쏟아붓는 여자를 본다. 그러고 나면 레슬리를 많은 여자들이 뭔가를 배울 수 있을 패러다임 이동의 화신으로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레슬리는 의자에 허리를 곧게 세우고 앉아 있었다. 그렇게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할 때 묻어나는 위험은 나이를 의심하게 했다. 레슬리에게는 수동적인 면이나 연약한 면, 나약한 면 위협적이지 않은편, 예의를 차리며 주저하는 면이 전혀 없다. 레슬리에게서는이 문화에서 엄청나게 희귀한 조합이 보인다. 사이즈와 무게, 그리고 한 번도 찾아볼 수 없음이라는 조합이.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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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순서 없이, 기억이 떠오른다.
반들반들한 손목 안쪽.
뜨거운 프라이팬이 젖은 싱크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지면서 솟아오르는 증기.
방울방울 떨어져 수챗구멍 속을 빙글빙글 돌다가, 층고 높은 집의 기다란 홈통 전체를 타고 흘러내려가는 정액.
터무니없게도 상류로 치닫는 강물, 그 물살과 너울을 좇는여섯 개의 회중전등.
또 다른 강, 거센 바람이 수면에 물살을 일으켜 물길을 읽을수 없는 드넓은 잿빛 강.
잠긴 문 뒤의, 오래전에 차갑게 식은 목욕물.
마지막 것은 내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 - P11

학교는 런던 중심부에 있었고, 우리는 매일 각자의 집이 있는 자치구에서 학교까지, 하나의 통제시스템에서 다른 시스템으로 이동했다. 그 시절엔 모든 게 지금보다 명백했다. 돈은 모자랐고, 전자기기도 없었고, 패션의 전제정치는 미약했고, 여자친구는 전무했다. 인간 된, 또는 자식된 도리, 즉 공부를 하고, 시험에 합격하여 구직에 필요한 자격을 갖춘 후, 이 모든것을 합쳐 우리 부모의 인생, 즉 우리의 것과 몰래 비교해볼때 소싯적에 더 단순하고, 그래서 더 우월한 인생을 살았던 양반들의 인생에 견주어 눈에 거슬리지 않을 만한 선에서 약간더 충족된 정도로 삶의 방편을 이루고 용인 받는 것으로부터 한눈을 팔게 할 만한 일은 거의 없었다. 이런 것들 중 어느 하나도, 단 한 번도 공공연히 거론된 적이 없음은 당연하다. 영국중산층 특유의 고상하신 사회진화론은 언제나 암묵적으로만 존재한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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