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순서 없이, 기억이 떠오른다. 반들반들한 손목 안쪽. 뜨거운 프라이팬이 젖은 싱크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지면서 솟아오르는 증기. 방울방울 떨어져 수챗구멍 속을 빙글빙글 돌다가, 층고 높은 집의 기다란 홈통 전체를 타고 흘러내려가는 정액. 터무니없게도 상류로 치닫는 강물, 그 물살과 너울을 좇는여섯 개의 회중전등. 또 다른 강, 거센 바람이 수면에 물살을 일으켜 물길을 읽을수 없는 드넓은 잿빛 강. 잠긴 문 뒤의, 오래전에 차갑게 식은 목욕물. 마지막 것은 내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 - P11
학교는 런던 중심부에 있었고, 우리는 매일 각자의 집이 있는 자치구에서 학교까지, 하나의 통제시스템에서 다른 시스템으로 이동했다. 그 시절엔 모든 게 지금보다 명백했다. 돈은 모자랐고, 전자기기도 없었고, 패션의 전제정치는 미약했고, 여자친구는 전무했다. 인간 된, 또는 자식된 도리, 즉 공부를 하고, 시험에 합격하여 구직에 필요한 자격을 갖춘 후, 이 모든것을 합쳐 우리 부모의 인생, 즉 우리의 것과 몰래 비교해볼때 소싯적에 더 단순하고, 그래서 더 우월한 인생을 살았던 양반들의 인생에 견주어 눈에 거슬리지 않을 만한 선에서 약간더 충족된 정도로 삶의 방편을 이루고 용인 받는 것으로부터 한눈을 팔게 할 만한 일은 거의 없었다. 이런 것들 중 어느 하나도, 단 한 번도 공공연히 거론된 적이 없음은 당연하다. 영국중산층 특유의 고상하신 사회진화론은 언제나 암묵적으로만 존재한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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