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란민들이 모여 살던, 북서쪽 항구도시의 ㅎ동, 언덕으로 이어지는 미로 같은 골목들 사이를 부두에서 불어오는 습한 바람이 휘감고 지나던 그 동네의 초입에는 내가 여섯 살까지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았던 작은 집이 있었다. 그 집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마당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만큼 좁은 땅에 심긴 벚나무다. 언제나 봄이면 담장 너머로 꽃잎을 떨구던, 그 집에 어울리지 않게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벚나무. 그리고 백구도, 할아버지는 백구를 좋아했다. 나는 오랫동안, 그 집에 살던 식구 중에서 할아버지의 조건 없는 사랑을 받은 유일한 존재는 백구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곤 했다. 이제부터 나는 그 집에서 할머니와 마지막으로 보냈던 몇 개월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이것은 틀림없이 할머니와 보냈던 한때의 이야기지만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 P9
가끔 집 밖을 나서는 경우도 있었지만 학교생활을 하느라바쁜 친구들을 매번 불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스스로 되뇌긴했지만 그 무렵 나는 내 자신이 실패자이자, 낯선곳을 표류하는 낙오자가 되었다는 느낌에 시달리고 있었다. 정해진 일상이 있는 사람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명확히 아는 사람들을 반복해 만날 때마다 누구나 속해 있는 현재라는 국가의 불법체류자가 된 것 같은 과장된 감정에 사로잡혔다. - P23
할머니를 그토록 사랑했는데, 불면증에 시달리던그 무렵의 나는 알 수 없는 조바심에 항상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어린 시절 내가 발목이 삐면 노른자와 밀가루를 섞어 만든 반죽을 부은 자리에 붙여주고, 감기에 걸리면 파뿌리와 생강을 달여주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낫지 않으면 병원에 데려간 후 병원에서 지어준 가루약을 먹기 좋게 물에 개어주던 사람. 오랜시간이 지난 후 가끔씩 나의 아이가 아플 때, 열이 40도 가까이 오른 아이의 이마를 차가운 물수건으로 닦아주거나 체한 아이의 배를 오랫동안 문지를 때, 거짓말처럼 할머니가 떠오르는 순간이 있었다. 할머니가 그렇게 갑자기 생각나는 밤이면 나는 이제 내가 그러했듯이 할머니 역시 할머니의 한계 안에서 나를 사랑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러니 내가 그때 할머니의 상태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의 나이를 먹었다. 하지만 어쩌다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역에서 환승하기 위해 계단을 바삐 올라가는 수없이 많은 이들의 뒤통수를보거나 8차선 도로의 횡단보도에서 보행자 신호가 바뀌어 내 쪽을 향해 걸어오는 인파를 보다가 가끔씩, 나는 지구상의 이토록 많은 사람 중 누구도 충분히 사랑할 줄 모르는 인간인 것은 아닌가하는 공포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우리가 타인을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대체 어떤 의미인 걸까? - P25
전화를 받은 할머니들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ㅎ동 집으로 왔다. 유리그릇에 파김치와 열무김치를 덜어 담고, 삼계탕은 사기그릇에 담아 할머니들 앞에 하나씩 놓고는 나도 자리를 잡았다. 할머니들이 어쩐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아 닭의 살을 발라 먹는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할머니들은 수십 년째 복날이면 같이 삼계탕을 나눠 먹고 있었다. 복날에는 삼계탕을 나눠 먹고, 정월 대보름에는 오곡밥을 지어 먹고 동짓날에는 팥죽을 쑤어 함께 먹는 사이.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좋은 날 같이 보낼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라고 할머니는 언젠가 내게 말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보면 할머니를 살게 했던 사람들은나나 엄마가 아니라 아가다 할머니와 글로리아할머니였는지도 모르겠다. - P91
"봐라, 인아야, 세상엔 다른 것보다 더 쉽게 부서지는 것도 있어. 하지만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그저, 녹두처럼 끈기가 없어서 잘 부서지는 걸 다룰 땐 이렇게, 이렇게 귀중한 것을 만지듯이 다독거리며 부쳐주기만 하면 돼." - P99
"할머니, 죽었어?" 복도의 저쪽으로는 아직 거동이 가능한 노인들이 모여서 뉴스를 보고 있고 다른 쪽으로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를 면회 온 어린 손주들이 큰 소리를 치며 뛰어가다가 간호사에게 혼나고 있는 시간이었다. 창밖으로 마른 잎을 모두 떨군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커다란 소리를 내면서 지나갔다. 겨울의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암전 직전의 무대처럼 복도가 잠시 환하게 장미색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나의 기억 속에서, 영원 같은 시간이 흐른 후에 할머니는 얇게 미소를 지으며 졸린 듯한 음성으로 아주 천천히, 몇 번이고, 대답한다. "아니, 아직은." - P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