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생 자르기

사장이 혜미에게 처음 관심을 보인 것은 태국 바이어들을 접대한 회식 때였다. - P9

"걔 불쌍하다고, 잘 봐주려고 했었잖아. 가난하고 머리가 나빠 보이니까 착하고 약한 피해자일 거라고 생각하고 얕잡아 봤던 거지.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거든. 걔도 알바를 열몇 개나 했다며, 그 바닥에서 어떻게 싸우고 버텨야 하는지, 개도 나름대로 경륜이 있고 요령이 있는 거지. 어떻게 보면 그런 바닥에서는 우리가 더 약자야. 자기나 나나, 월급 떼먹는 주유소 사장님이랑 멱살잡이해 본적 없잖아?"
부아가 치밀었지만 남편 말이 옳았다. 은영은 입술을깨물고 혜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래?"
전화를 끊자 남편이 물었다.
은영은 헛웃음을 지었다.
"150만원 달래." - P40

그녀는 그즈음 거대한 팬옵티콘을 자주 상상했다. 한번은 실제로 자신이 지금 그런 감옥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도 아주 작은 방에 갇혀 있다는 생각에 빠졌고,
갑자기 숨이 막혀 왔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상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연아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승강기 앞을 왔다 갔다 걸으며 겨우 호흡을 정상으로 되돌렸다. 담당 팀장 승인을 얻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으니 10분 안에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생각하자 서러워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이었을까? 본사가 티앤티와 영업양수도계약을 체결한 순간 그들에게는 티앤티에서 모욕을 당하든지 본사에 남아 모멸을 겪든지 이 두 가지 시나리오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경영기획실장이 아무리 기분 나쁜 태도로 그들을 대했어도 군소리 없이 지시에 따라야 했던 걸까? 회사의 경영은 경영진이 결정하는 것이고, 그들이 어떤 신분으로 일하는지도경영에 대한 사항이니까?
자회사로 가라는 통보를 받았을 때 ‘왜‘라는 의문을 품었던 것 자체가 잘못이었을까? 그들은 이리 와서 일하라고 하면 이리 와서 일하고, 저리 가서 일하라고 하면 저리가서 일해야 하는 잡부나 다름없는 처지였던 걸까. 그런주제에 자신들이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자부심을 느끼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스스로 중요한 결정을 내릴수 있다고 착각했던 걸까. - P66

"그런가?"
"그 회사 새 대표가 탄산수 사업이랑 농장 사업 진출했다가 엄청 말아먹었거든. 그런데 거기에 책임지고 회사를 나간 사람은 없어. 우리 팀 예산의 몇십 배는 더 손해였을 텐데. 씨름 대회나 국악 오케스트라 후원도 그만두지않았어. 그 회사 화장실에 가면 휴지 한 장이 35원이라고한장이면 충분하다고 세면대 옆에 적혀 있었지. 그래서 휴지 덜 쓰면 돈 얼마나 아낄 수 있다고 그걸 아끼라는 건가 싶은데, 휴지를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생각이 또 다른가보지? 그런 휴지 취급을 받는 기분이었어."
"그게 기업이지. 쇼미 더 머니. 사람이나 휴지나." 남편이 말했다.
‘나는 그런 기만에 화가 났던 걸까?‘ 연아는 생각했다.
"그때 윗분이 화났다면서 나더러 반성문 쓰게 한 건 어떻게 생각해? 그건 옳은 일이야?" 연아가 물었다.
"그건 옳지 않지. 잘못한 게 없는데 뭘 사죄해. 아무리 회사라고 해도 그런 건 시키면 안 되지."
"쇼미 더 머니라며. 돈만 준다면 얼마든지 시킬 수 있는 거 아냐?"
"그건 아니지. 그건 인간의 위엄이나 품위에 관계된 일이지. 자기가 돈이 있다고 남의 존엄을 무시하면 안 되지.
그게 갑질이잖아."
"그러면 대기발령은? 그건 옳은 일이야?" 연아가 물었다.
남편이 생각에 잠겼다. - P78

"직원 37퍼센트가 회사를 떠나는 것을 전제로 회생계획을 승인한다."
여자는 법원이 그런 수치까지 정하는 곳인 줄 알지 못했다.
‘판사들은 이게 누구 잘못인지에 대해서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을까? 왜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우리가 잘못한 게 뭐기에?‘
여자는 그것이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천막 밖에서 남자들과 경비업체 직원 사이에 실랑이가붙었다. 대나무를 가득 실은 트럭을 놓고 시비가 붙었다.
"왜 못 들여오게 하는 거야? 우리는 깃발도 세우지 말라 이거야?"
"기정님, 저희 입장 아시잖아요."
기정은 생산직 직급의 명칭이었다. 사무직은 부장, 차장, 과장, 대리, 사원 순으로 높았고, 생산직은 기성, 기정,
기장, 기사 순으로 높았다.
"사장 어디 있어? 사장이 직접 와서 설명하라고 해."
기정이 말했다.
공수부대 대원 같은 복장의 경비업체 직원이 남자들에 둘러싸여 진땀을 흘렸다. 대나무 봉은 보기에 따라 깃대도 죽창도 될 수 있었다.  - P89

진짜 구호도 있었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도장 공장 옥상에 걸렸다. 해고는 살인이었으므로 그들은 ‘죽은 자‘들이었고, 해고자 명단에 오르지않은 사람은 ‘산 자‘가 되었다. - P91

‘당신들이 정말 죽지 않을 각오로 여태까지 일을 해 왔나. 이미 회사를 떠난 사람들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텐가.
당신들은 진짜로 죽는 게 어떤 건지 몰라. 해고를 당한다고 해서 죽지는 않는다. 더 낮은 임금을 주는 일자리로 옮겨 간다고 죽지는 않아. 인정하기 싫겠지만. 진짜로 죽을수 있는 건 회사뿐이다.‘
게다가 회사를 살릴 수 있는 힘은 이미 사측이고 노측이고, 회사 안에 있지 않았다. 회사는 거대한 빚 덩어리였다. 사람을 줄이지 않겠다고 하면 해외에 있는 투자자들은 회사가 앞으로 이윤을 낼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리라. 해외 투자자들은 한국 법원의 산수를 믿지 않았다. 그들에겐 그들의 산수가 있었고, 차라리 공장 문을 닫고 땅과 설비를 내다 파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판단할 때 주저없이 그렇게 할 것이었다. - P92

어쩌면 위원장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자기일지도모르겠다고 사장은 생각했다. 두 사람은 이 상황에서 자유의지라 할 것이 거의 없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회사를살려야 한다는 명제와 채권자, 직원 들의 요구에 갇혀 사장이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것처럼 위원장도 총고용 보장이라는 구호와 조합원들의 요구에 갇혀 있었다. 두 사람모두 타협을 하는 순간 변절자가 될 처지였다. - P94

"야, 이 사측의 앞잡이 새끼야! 거기 내려와! 내려와아아악!"
검은 상복을 입은 여성들이 트럭 아래에서 부장을 향해 악을 쓰고 생수병을 던졌다. 남편이 공장 안에 있는 여자들은 몇 달 동안 독해졌다. 몇몇 여자들은 줄을 선 직원들에게 가서 가슴에 "해고는 살인"이라고 적힌 리본을 달아 주었다. 다듬지 않은 머리가 먼지바람에 휘날리고 손이 급해 미친 여자들 같아 보였다.
"공장 안에 있는 사람들도 다 여러분 동료입니다. 사측의 선동에 속지 마세요."
앞줄에 선 직원들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여자들이 리본을 달지 못하게 하거나 여자들이 지나간 뒤 몸에서 리본을 떼어 냈다. 뒷줄에서는 성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거 존나 시끄럽네!"
"아, 씨발년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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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약 180만 년 전부터 동아프리카에 거주하던 인류의 조상일부가 새로운 형태의 더 정교한 도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으니, 구석기시대의 아슐리안 석기라고 알려진 것이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것이 눈물방울 모양의 주먹도끼로, 그것을 보면 대칭성과 정교한 만듦새가 단번에 눈에 들어오는 것이 마치 우리와 비슷한 마음을 가진 어떤 존재가 종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무엇을 만들어냈다는 인상을 준다. 문화 누적을 이야기할 때 그시작점으로 가장 유력한 시기도 이때인 듯하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우리는 참으로 묘한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아프리카부터 유럽을 거쳐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아슐리안 석기는 100만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 세계에 두루 나타나는데, 어디에서 발견되건 그 모양이거의 똑같다는 사실이다. 즉, 어디를 가도 석기 사이에는 차이가 거의 발견되지 않는데, 이는 곧 석기를 만드는 지식이 문화를 통해 전수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 석기를 만드는 지식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댐을 지을 수 있는 ‘지식‘을 비버가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 P375

다른 포유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경우, 날 때는 락토스(젖당)를 소화시킬 수 있지만 아동기를 지나면 이 소화 능력이 사라져버린다. 락타아제(락토스를 분해하는 효소)를 만들어내는 유전자가 생후 몇 년이 지나면 작동을 멈추는 것인데, 포유동물은 젖을 떼고 나면 더 이상 젖을 먹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부 유럽과 아프리카 몇몇 지대에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소를 키우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덕분에 아이들이나 마셨지 어른들까지는 마실 수 없었던 신선한 우유가대량으로 공급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유리한 쪽은 돌연변이 유전자가 있어 락타아제 생산이 늦게까지 멈추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러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사람들이 남긴 우유 마실 줄 아는 후손이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남긴 후손보다 더 많아졌다(이 사실은 유전자 자체를 통해 확인된다)." 이렇듯 유전자 변화가 일어나자 문화적 혁신이덩달아 일어났다. 이 새로운 락타아제 유전자를 가진 집단은 소떼를 훨씬 대규모로 기르기 시작했고, 나아가 치즈를 만들어내는 등 우유를 활용하고 가공하는 방법을 더욱 늘려간 것이다. 이렇게 문화적혁신이 일어나자 이번에는 덩달아 다시 유전자 변화가 일어났고, 이런 식으로 연쇄반응은 계속해서 이어져 나갔다.
이렇게 문화적 혁신(이를테면 소를 기르는 것)에서 유전적 반응(락토스소화 능력을 가진 성인)이 나올 수 있다고 하면, 도덕성과 관련된 문화적혁신에서도 일련의 유전적 반응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리처슨과 보이드의 주장에 따르면, 인류는 이러한 유전자와 문화의 공진화에 힘입어 여타 유인원과 달리 소집단 차원의 사회성을 뛰어넘을 수 있었고, 그렇게 발전시킨 부족차원의 초사회성은 오늘날의 인간 사회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이 말하는 "부족 본능 가설(tribal instincts hypothesis)"에 따르면, 인간 집단은 주변의 이웃 집단과 어느 정도는 늘 경쟁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쟁에서 대개 승리하는 쪽은. 일련의 문화적 혁신을 통해 (우연이라도) 가족을 뛰어넘어 더 큰 규모로 협동하고 결집한 집단이었다(이는 다윈의 주장과 꼭 같은 내용이다. - P378

그런 문화적 혁신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은 상징적 표시를 통해 자신이 속한 집단을 나타내는 것을 무엇보다도 좋아한다는사실이다. 아마존 부족이 흔히 이용하는 문신과 얼굴 관통 장식부터시작해 유대교 남자들이 반드시 치러야 했던 할례 의식을 거쳐 영국의 펑크족이 애호하는 문신과 얼굴 피어싱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자신이 어느 집단에 속하는지를 온몸으로 드러내기 위해 엄청나고도 값비싼 대가를 치르며 때로는 고통을 감내하기까지 한다. 애초 이런관습은 몸에 물감을 발라 색을 입히는 등의 소박한 방식이었을 것이분명하다. 그러나 그 시작이 어떠했건. 이러한 상징을 이용하는 집단은, 나아가 그 상징을 좀 더 영속적인 형태로 발전시킨 집단은 친족을 넘어서 더 넓은 범위에까지 ‘우리‘의 개념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이 우리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비슷한 말을 쓰면 우리는 그들과 더 잘 신뢰를 쌓고 협동하는 법이다." 그들이 우리와 같은가치와 규범을 가지기를 기대하고 말이다.
그리고 일부 집단은 그렇게 초기 부족주의라는 문화적 혁신이 일단 일어나자, 유전적 진화에 밑바탕이 되는 환경을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리처슨과 보이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러한 환경은 그 집단들의 삶에 맞는 새로운 사회적 본능들이 잘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는 도덕적 규범에 의해 사람들 삶의 틀이 짜이고, 그 도덕적 규범을 배우고 내면화할 수 있는 식으로 삶이 설계되기를 기대하는 심리가 있다. 더불어 수치심과 죄책감 같은감정도 새로 생겨나 규범이 준수될 확률을 높인다. 또 사회적 세계가 상징적 표시를 가진 여러 집단에 의해 나누어지기를 기대하는 심리도 존재하게 된다." - P379

유전적 진화가 어느 정도 속도로 이루어지는지는 자료가 있어야만대답이 가능한 문제인데, 마침 인간 유전체 규명 계획 (Human GenomeProject)이 진행되어준 덕에 문제 해결의 자료는 이미 나와 있는 셈이다. 이 계획에 따라 몇몇 연구팀이 지구상 모든 대륙의 사람들 수천명을 대상으로 하여 그들의 유전자 배열을 분석해놓았기 때문이다. 유전자라는 것이 원래 돌연변이를 일으키고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표류하기 마련이지만, 무엇이 이러한 임의적 표류에 해당하고 무엇이 자연선택에 ‘이끌린‘ 유전자 변화인지는 구분이 가능하다." 그리하여 나온 연구 결과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고, 알고 보니 굴드의주장과는 정반대라는 것이 드러났다. 유전자의 진화 속도는 최근 5만년 사이에 엄청난 가속도가 붙은 것이다. 선택 압력에 대한 유전자변화는 지금으로부터 약 4만 년 전부터 그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해, 2만 년 전부터는 가속도가 점점 더 증가하는 양상을 띠었다. 그러다가 완신세를 거치면서 유전자 변화 속도는 정점에 이르렀으니, 이는유라시아 대륙은 물론 아프리카 대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P387

 나는 그 학문적 지식을 총 네 가지의 ‘증거‘로나누어 집단선택에 대한 변론으로 활용했다."

증거 A: 중대 과도기를 통해 초개체가 만들어진다. 이제까지 지구에서 살아온 생명체의 역사는 ‘중대 과도기‘의 본보기가 몇 번이고되풀이된 과정이었다. 생물학적 위계질서의 한 차원에서 무임승차자 문제가 무난히 해결되고 나면, 그다음 단계의 위계 서열에 들어서는 이전보다 더 거대하고 강력한 탈것(초개체)이 등장한다. 이러한 초개체는 집단 내 노동 분업, 협동, 이타주의 등의 새로운 특성들을 지닌다.
증거 B: 공통된 의도를 통해 도덕 매트릭스가 생겨난다. 우리 인간은공통된 의도를 가지고 다른 이의 머릿속 생각을 읽는 고유한 능력을가지는데, 인간은 이 능력을 가지면서 마치 루비콘 강을 건너듯 집단 내에서 아주 원활히 기능할 수 있게 되었다. 초창기 인간들은 이능력을 바탕으로 서로 협동하고 분업을 이룬 것은 물론, 공통의 규범을 만들어 서로의 행동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도 있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적 삶을 지배하는 도덕 매트릭스도 이 공통의 규범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증거 C: 유전자와 문화는 공진화한다. 우리 조상들이 루비콘 강을건너 서로의 의도를 공유하기 시작한 순간, 우리 인간의 진화는 양갈래 실이 엉키듯 이루어졌다. 사람들이 새로운 관습 ·규범 · 제도를만들어내면 이집단적인 특성이 가지는 적응의 정도도 변화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유전자와 문화의 공진화로 인해 우리가 일련의 부족 본능을 지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어떤 집단에 속했는지 표시하는 것을 무엇보다 좋아하며, 그런 표시를 한 뒤에는 자기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과 우선적으로 협동하려는경향을 보인다.
증거 D: 진화는 빠른 속도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인간의 진화는 지금으로부터 5만 년 전에 속도가 멈추지도 느려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때부터 속도에 불이 붙었다. 유전자와 문화의 공진화는 최근 1만2000년 사이에 가장 맹렬하게 이루어졌다. 인간의 본성이 5만 년 전에서 한 치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인 만큼, 오늘날 지구를 살아가는 수렵 채집자를 보고 그들이 인간 본성의 보편적 모습을대표한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 우리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나아가 우리가 어떻게 해서 바른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이해하려면, 지금으로부터 7만~14만 년 사이에 일어난 극심한 환경 변화를 비롯해 (완신세에 일어난 것과 같은) 문화적 변화를 좀 더 부각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P393

인간 본성 대부분은 자연선택이 개인 차원에서 작동한 결과 형성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그렇지, 전부 그렇지는 않다. 9.11 사태 이후숱한 미국인이 발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인간은 집단과 관련된 적응의 특성도 몇 가지 지니고 있다. 우리 인간은 이중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기적인 영장류이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보다 크고 고결한 무엇의 일부가 되려는 열망도 갖고 있다. 우리의본성은 90퍼센트가 침팬지와 같고, 나머지 10퍼센트는 벌과 같다."
만일 이 주장에 담긴 상징적 의미를 받아들인다면, 사람들이 이집단적으로, 또 군집으로 행동하는 까닭을 훨씬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면 마치 우리 머릿속에 스위치가 하나 들어 있는 것은아닐까 생각될 정도이다. 조건만 딱 들어맞으면 우리 안에 잠재한 꿀벌의 군집 능력을 활성화하는 그런 스위치 말이다. - P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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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토미 말이 옳아 정말 너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확신했다면 적어도 요구 정도는 해 봤어야지. 마담에게 가서 그렇게 해 달라고 요구했어야 해."
그 말, 마담에 대한 언급을 하자마자 나는 내가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루스는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얼굴에 의기양양한 표정 같은 것이 지나갔다. 영화에서 보면상대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동안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실수로 싸움이 일어나 총이 상대에게 넘어간다. 그러면 조금 전에 자기를 위협하던 사람을 바라보는 그사람의 눈빛에는 온갖 종류의 복수가 가능해진 지금의 행운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 순간 나를 바라보는 루스의 눈길이 바로 그러했다. 집행 연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일단 마담을 언급했으므로 이제 우리의 대화는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터였다. - P394

루스가 두 번째 기증을 한 지 사흘 후에 드디어 오전 한두 시간 동안 그녀를 만나 봐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졌다. 루•스는 병실에 혼자 있었는데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는 다 취해진 것 같았다. 의사와 담당자와 간호사의 행동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들은 루스가 고비를 넘길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희미한 불빛을 받으며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다른 기증자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그런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자기 내부로 돌리고 싶은듯했다. 그럼으로써 자기 몸속에 별도로 자리 잡고 있는 고통의 영역을 더 잘 살펴보고 정돈하려는 것이다. 마치 사려깊은 간병사가 전국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서너 명의 병약한 기증자들을 바삐 왔다 갔다 하며 돌보는 것처럼. 엄밀하게 말해서 그녀는 아직 의식을 잃지 않은 상태였지만 철제침대 옆에 서 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의자를 끌어와 그 옆에 앉은 다음 두 손으로 루스의 한 손을 쥐고, 그녀가 고통의 파도에 휩쓸려 손을 비틀어 빼내려 할 때마다 잡은 손에 힘을 주곤 했다. - P402

나는 허락되는 한 오랫동안, 그러니까 서너 시간 이상을그녀 곁에 머물렀다. 앞서 말한 대로 그동안 그녀는 거의 대부분 자기 자신 속에 침잠해 있었다. 하지만 단 한 차례 그녀는 부자연스럽게 무서울 정도로 강하게 몸을 뒤틀었다.
내가 진통제를 더 달라고 간호사를 부르려는 순간, 그녀는몇 초에 걸쳐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것이 분명했다. 죽어 가는 기증자들이 무시무시한 싸움중에 이르곤 하는 그 작은 명징의 섬에 도달한 듯했다. 그 순간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녀의 시선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으므로,
이렇게 말했다. ‘좋아. 그렇게 할게, 루스. 최대한 빨리 토미의 간병사가 될게‘ 나는 그 말을 입 밖에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내가 고함을 친다 해도 어쨌든 그녀로서는 듣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우리의 시선이 서로 얽힌 그 순간 내가 그녀의 시선을 읽은 것처럼 그녀도 나의 표정을 읽기를 바랐다.
이윽고 그 순간이 지나가자 그녀는 다시 정신을 놓았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내 뜻을 이해한 것 같았다. 그리고이제 생각해 보면 그녀는 그런 말을 듣기 전에 이미 내가 토미의 간병사가 되리라는 것, 그날 차 안에서 자기가 말한 것을 토미와 내가 ‘시도‘하리라는 것을 줄곧 알고 있었던 것같다. - P403

그녀는 순간 우리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는 이윽고 깊게숨을 들이쉬었다. "헤일셤에서 그런 얘기가 나올 때마다 나는 다시는 그런 얘기가 나오지 않게 못을 박았지. 하지만 학생들이 우리 손을 벗어난 후에 하는 얘기는 어쩌겠니. 결국나는, 마리클로드 역시 그럴 거다. 안 그런가, 친구? 그 얘기가 일반적인 소문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됐어. 그러니까 내말은 아무 근거도 없이 그런 얘기가 줄곧 생겨났다는 거야. 근원을 찾아 봉쇄해도 다른 곳에서 또다시 생겨난다면 막을 수 없는 거지. 그런 결론에 이른 나는 더 이상 걱정하지않기로 했다. 마리클로드는 그런 걱정 같은 건 한 적이 없어. 만약 학생들이 그 정도로 어리석다면 그런 얘기를 믿게놔두자는 게 저 친구의 입장이었지. 오, 이런, 그렇게 인상쓰지 마, 그게 애초에 당신 입장이었잖아. 세월이 흐른 다음에 나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그 일을 보게 되었어. 그러니까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 결국 그건 내 일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리고 한두 커플은 실망했겠지만 나머지 커플들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야. 그들에게 그것은 그저 하나의 꿈, 하나의 환상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게 무슨 해가 되겠니? - P439

나는 너희 모두를대신해 걱정하고 자문했어. 내가 아는 한 너희 중 어느 누구의 마음속에도 의혹 같은 것은 떠오르지 않았어. 하지만 애들아, 너희는 그런 의문을 품었구나. 가장 단순하게 대답하마. 그러면 나머지 모든 것도 설명될 거야. 어째서 우리가 너희의 작품을 걷어 갔느냐고? 왜 그렇게 했느냐고? 토미, 조금 전에 넌 아주 흥미로운 언급을 했어. 마리클로드와 이런얘기를 하면서 너는 작품이 사람을 드러낸다고 했지. 사람의 내면을 말이야. 네가 말한 게 바로 그거지? 그렇다면 그문제를 제대로 짚은 셈이다. 우리가 너희 작품을 걷어 온건거기에 너희의 영혼이 드러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좀더 세련되게 말하자면 그걸로 너희한테도 영혼이라는 게 있음이 증명되기 때문이었다." - P443

 적어도 우린 너희를 위해 그런 많은 일을 했단다. 하지만 ‘집행 연기‘에 대한 그런 꿈을 허용하는 건 아무리 우리라도 한계를 벗어나는 일이었어. 유감이구나. 지금 내 말이너희에게 그리 달갑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안다. 너희는 낙담하지 않을 수 없겠지. 하지만 나는, 너희의 안전을 보장해 준 데 대해 우리에게 고마움을 느꼈으면 한다. 이제 너희 둘을 좀 보렴! 너희는 멋진 추억이 있고 교육을 받았고 교양이 있어. 그 이상의 것을 해 주지 못하는 건유감이다. 하지만 한때 사태가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너희도 알아야 해. 마리클로드와 내가 이 일을 시작할 무렵 헤일셤 같은 곳은 아예 존재하질 않았단다. 글렌모건 하우스와우리가 처음이었지. 이어 몇 년 후 손더스 트러스트가 나왔어. 우리는 주류는 아니었지만 상당히 영향력 있는 운동을전개하면서 기존의 장기 기증 진행 방식에 정면으로 도전했단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인간적이고 교양 있는 환경에서 사육된다면 ‘학생‘들 역시 일반인들처럼 지각 있고 지성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음을 세상에 증명했어. 헤일셤 이전의 클론들은, 물론 우리는 너희를 ‘학생‘이라고 부르는 게 더 좋지만 말이다. 그저 의학 재료를 공급하기 위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지. 전후 초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희를 그런 존재로 생각했어.  - P445

 그 무렵이 되자 그들은 너희가 어떻게 사육되는지, 너희 같은 존재가 꼭 있었어야 했는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무렵엔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어. 그 과정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단다. 장기 교체로 암을 치유할 수 있게 된 세상에서 어떻게 그 치료를 포기하고 희망 없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겠니? 후퇴라는 건 있을 수 없었지. 사람들은 너희 존재를 거북하게 여겼지만, 그들의 더 큰 관심은 자기 자녀나 배우자, 부모 또는 친구를 암이나 심장병이나 운동신경질환에서 구하는 거였단다. 그래서 너희는 아주 오랫동안 어둠 속에 머물러 있었지.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되도록 너희 존재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단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너희가 우리와는 별개의 존재라고, 인간 이하의 존재들이라고 스스로에게 납득시켰기 때문이지.  - P448

그가 하려던 건 좀 더 강화된 특질을 가진아이를 얻는 거였어. 지성이나 운동 능력 같은 면에서 우수한 아이 말이야. 물론 이제까지도 그 비슷한 야망을 가진 사람들이 여럿 있었지만, 모닝데일이란 사람은 이런 연구를 이전의 그 누구보다도 강하게 밀어붙였지. 그러다가 법의 범위를 넘어서고 말았어. 그런 사실이 적발되자 그의 연구는 끝장나고 말았단다. 물론 그건 우리의 경우와는 상관이 없지. 조금 전에 말한 대로 그건 대단한 사건은 아니었단다. 하지만 그게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 냈지. 그 사건은 사람들에게 줄곧 가지고 있던 공포를 환기시켰다. 너희 같은 학생들을 만들어 내는 장기 기증 진행 계획에 대한 공포 말이다. 혹시 그렇게 만들어진 아이들의 후손이 우리 사회에서 자리•를 잡게 된다면? 그들이 우리 일반인보다 우수하다는 게 증명된다면? 오, 안 돼. 그 생각은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만들었어. 그들은 뒷걸음쳤지. - P449

"고맙다는 말을 들을 거라고 기대하지 마." 우리 뒤에서마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째서 저들이 우리에게 감사같은 걸 하겠어? 저들은 뭔가를 더 얻기 위해 여기에 왔어.
그 세월 동안 우리가 저들을 대신해서 한 모든 싸움, 저들에게 준 것에 대해 뭘 알겠어? 저들은 그걸 신에게서 받은라고 여기고 있어. 여기에 오기 전까지 저들은 아무것도 몰랐잖아. 이제 저들이 느끼는 건 실망감뿐이야. 우리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데도 그 이상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말이야" - P452

"왜냐고? 그녀의 의도가 좋았다는 건 나도 인정한다. 너희는 그녀를 좋아했나 보구나. 그녀에겐 훌륭한 선생님이 될자질이 있었지. 하지만 그녀가 하려던 건 너무 ‘이론적‘이었어. 여러 해에 걸쳐 헤일셤을 운영해 온 우리는 무엇이 효과적인지, 장기적 관점에서 헤일셤을 떠난 이후까지 학생들에게 무엇이 최선인지 알고 있었단다. 루시 웨인라이트는 이상주의자였고 그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에겐 실질적으로 일을 통제할 능력이 없었단다. 현재의 너희에게서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어떤 걸 우리가 줄 수 있었던 건원칙적으로 너희를 ‘보호‘했기 때문이야. 우리가 그러지 않았다면 헤일셤은 존재 가치가 없었을 거다. 좋아, 그러기 위해서는 때때로 너희에게 사태를 숨기고 거짓말을 해야 했던 게 사실이다. 그래,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린 너희를 ‘바보‘로 만들었지.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겠구나. 하지만 우리는그 세월 동안 너희를 보호했고 너희에게 유년을 주었어. 루시의 의도는 좋았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입장을 고수했다면 헤일셤에서 너희 행복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을 거야. 이제 너희를 좀 보렴! 나는 너희 둘이 무척 자랑스럽다. 너희는 우리가 준 것에 기초해서 스스로 삶을 세웠어. 우리가 너희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되지 못했을 거다. 너희는 수업에 몰두하지 못했을 거고, 그림과 글쓰기에도 몰입할 수 없었겠지. 각자 앞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았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니? 그랬다면 너회는 그 모든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박했을 테고, 우리가 어떻게 너희를 설득할 수 있었겠니? 그래서 그녀는 떠나야 했단다." - P456

"조금 전 당신은 상대의 생각을 읽지 못한다고 하시지만그날 당신은 제 생각을 읽으셨어요. 저를 보고 눈물을 흘리신 건 아마 그래서였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 노래의 가사가실제로 어떻든 간에 춤을 추면서 저는 제 식대로 해석했으니까요. 그러니까 저는 그게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선고를받은 어떤 여자 이야기라고 상상했어요. 그런데 그 여자에게 아이가 생겼고 그래서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그 여자는 혹시 뭔가가 자신들을 떼어 놓을까 봐 두려워서 아기를 가슴에 꼭 껴안고는, 베이비, 베이비, 네버 렛 미 고 하고 노래했던 거예요. 진짜 가사의 내용과는 달랐지만 당시에 저는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 제 마음을 읽으셨기 때문에 그 장면이 그렇게 슬프게 여겨지셨을 거예요. 당시에는 그렇게 슬프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제 돌이켜 보니 좀 슬프네요."
마담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옆에서 토미가 몸을 움직이는 것, 그의 옷의 감촉, 그의 행동 같은 것들에 신경을쓰고 있었다. 이윽고 마담이 말했다.
"정말 흥미로운 관찰이구나. 하지만 나는 지금만큼이나그때도 남의 마음을 읽는 데는 소질이 없었어. 내가 흐느꼈던 건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어. 그날 춤을 추는 너에게서 내가본건 좀 다른 거였다. 나는 빠르게 다가오는 신세계를 보았지. 과거의 질병에 대한 더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그래, 더 많은 치료법을 말이야. 맞아, 거칠고 잔인한 세상이지. 나는 어린 소녀가 두 눈을 꼭 감은 채 과거의 세계,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걸 자기도 잘 알고 있는 과거의 세계를 가슴에 안고 있는 걸 보았어. 그걸 가슴에 안고 그 애는 결코 자기를 보내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지. 나는 그 장면을 바로 그렇게 본 거란다. 그건 실제 네 생각이나 행동은 아니었지만 말이야. 하지만 나는 그 장면을 그렇게 해석했고그것에 감동했다. 그리고 그걸 결코 잊을 수 없었지." - P462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캐시. 너는 정말이지 좋은 간병사야. 만약 네가 나한테 이런 존재가 아니었다면, 나한테도 완벽했을 거야." 그는 웃음을 터뜨리고는 내 몸에 팔을 둘렀다.
우리는 나란히 앉은 채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어딘가에 있는, 물살이 정말이지 빠른 강이 줄곧떠올라. 그 물 속에서 두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서로 부둥켜안지만 결국은 어쩔 수가 없어. 물살이 너무 강하거든. 그들은서로 잡았던 손을 놓고 서로 헤어지게 되는 거야. 우리가 바로 그런 것 같아 안타까운 일이야, 캐시. 우린 평생 서로 사랑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영원히 함께 있을 순 없어." - P482

방대한 경작지가 펼쳐진 곳이었다. 두 겹의 철망 울타리때문에 밭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수킬로미터에 걸쳐 바람을 막아 주는 것이라고는 그 울타리와 내 앞에 있는 서너 그루의 나무들뿐이었다. 그 철망 울타리에, 특히 낮은 쪽 철망에 각종 쓰레기들이 걸려 있었다. 마치 해변에 잡동사니가밀려와 있는 것 같았다. 그것들은 바람에 실려 수십 미터를날아와 그 나무들에, 두 겹의 철망에 이른 것이 분명했다. 나뭇가지에도 깨진 플라스틱 판과 낡은 가방 조각들이 걸려있었다. 바로 그 순간 거기에 서서 그 기묘한 잡동사니들을바라보며, 텅 빈 들판에 바람이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환상에 가까운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요컨대 그곳은 노퍽이었고 토미를 잃은 지 겨우 두어 주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에서는 그 잡동사니들, 나뭇가지에걸린 플라스틱 조각, 해안선 같은 철망을 따라 걸려 있는 기묘한 물건들이 떠돌고 있었다. 나는 반쯤 눈을 감고 상상했다. 어린 시절 이후 잃어버린 모든 것들이 이곳에 모여 있다고, 이 앞에 이렇게 서서 가만히 기다리면 들판을 지나 저멀리 지평선에서 하나의 얼굴이 조그맣게 떠올라 점점 커져서 이윽고 그것이 토미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아보게 되리라고, 이윽고 토미가 손을 흔들고, 어쩌면 나를 소리쳐 부를지도 모른다고. 이 환상은 그 이상으로 진전되지는 않았다. 그 이상 진전시킬 수가 없었다.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나는 흐느끼지도, 자제력을 잃지도 않았다. 다만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차로 돌아가 가야 할 곳을 향해 출발했을뿐이다. - P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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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셀로에 따르면, 인간의 인지능력이 침팬지의 그것과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은 우리 조상들이 어느 순간 공통된 의도라는 것을 발달시키게 되면서였다." 우리 조상 중 일부 집단이 최근 100만년 사이의 어느 시점엔가 발달시킨 그 능력은, 두 명 이상이 합심하여 목표를 추구할 때 그 목표의 상을 머리에 똑같이 그려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둘이 함께 먹을 것을 구한다고 하면, 한 명이 나뭇가지를 힘껏 아래로 끌어당기고 다른 한 명이 거기서 과일을 따내 둘이 함께 나눠 먹는 식이다. 침팬지의 경우에는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법이 절대 없다. 또 둘이서 사냥을 하는 경우에도 인간은 양편으로 나뉘어서 동물에게 접근하기 마련이다. 콜로부스원숭이의 경우에서 널리 보고되듯이" 침팬지도 더러 이런 식의 행동을 보이기는하지만, 토마셀로의 주장에 따르면 이는 실질적으로 힘을 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침팬지 한 마리 한 마리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가 그 순간에 최선인 듯한 행동을 각자 취하는 것일 뿐이다." 더구나 침팬지가 겉으로나마 힘을 합치는 것도 오로지 이렇게 원숭이를사냥할 때뿐이며, 이런 드문 상황에서조차 진정한 협동의 표시는 찾아볼 수 없다고 토마셀로는 지적한다. 예를 들어, 이들에게서는 서로 의사소통을 하려는 노력이 전혀 나타나지 않을뿐더러, 사냥에 참여한 개체끼리 전리품을 나누는 능력은 그야말로 서툴기 짝이 없어서 결국 무력을 쓰지 않고는 자기 몫의 고기를 챙길 수 없다. 즉, 침팬지들은 일시에 다 같이 원숭이를 쫓는다 해도, 저마다 다른 꿍꿍이를 품고 그 사냥에 참가하고 있는 것이다. - P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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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커다란 자루에 넣었는데, 차마 쓰레기와 함께 버릴수는 없었어. 언젠가 차를 막 출발시키려는 케퍼스를 보고그 자루를 상점 같은 데 갖다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지. 자선 가게 같은 게 있다는 걸 찾아 봐서 알고 있었거든. 케퍼스는 자루의 물건들을 뒤적여 보더니 뭔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어. 그가 어떻게 알겠어? 그는 웃음을 터뜨리고는 자기가 아는 가게에서는 그런 물건들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더군. 난, 그래도 정말 좋은 물건들이라고 했지. 그러자 그는 내가 좀 감상적이 되었다는 걸 눈치채고는 어조를바꾸더군. 그러고는 ‘좋아, 아가씨, 이걸 옥스팜에 가져다주지.‘ 하고 말했어. 그런 다음 아주 힘들여서 이렇게 덧붙였어. ‘이제 자세히 보니 아가씨 말이 맞군. 꽤 좋은 물건들인걸!‘ 하지만 그 말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었어. 그는 그 자루를 어딘가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을 거야. 그렇지만 적어도 나로서는 그 사실을 확인하지 않아도 되었던 거지." 루스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다시 말했다. "넌 달랐어. 지금도 기억나. 넌 수집품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한 번도 당혹스러워한적 없이 줄곧 간직하고 있었지. 나도 그랬으면 좋았을걸." - P230

근원자 이론의 이면에 있는 기본 개념은 단순한 것으로별다른 논란거리가 아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 각자가 일반인에게서 복제된 개체인 만큼 바깥세상에는 우리의 근원자가 살고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우리 각자가 자기 자신의 근원자를 찾아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밖, 즉 시내나 쇼핑센터, 휴게소 같은 곳에 나가면 줄곧 신경을 곤두세워 자기나 친구들의 근원임직한 사람들, 곧 ‘근원자‘를 찾아보곤 했다. - P243

그다음, 어째서 우리가 자신의 근원자를 찾아내고 싶어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자신의 근원자를 찾아내고싶은 마음 이면에는, 실제로 그 사람을 찾아내면 그를 통해앞으로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다고 예를 들어 누군가의 근원자가 현재 철도국에서 일한다고 해서 그 역시 나중에 철도국 직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모두 정도는 다르지만 자기가 복제되어 나온근원자를 보게 되면 진짜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통찰과 앞으로의 삶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근원자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우리의 근원자는 우리를 이 세상에나오게 하기 위해 기술적으로 필요한 존재였을 뿐, 우리의 삶을 어떻게 만들어 나가느냐 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루스는 언제나 이런 생각을 가진 편이었고 나 역시 그랬던 것 같다. 그렇다 해도 누구의 근원자든 간에 근원자에 대해 새로운 이야기가 들려올 때마다 그것에 무심할 수는 없었다. - P244

그리고 우리가 은밀히 시선을 던져 가며 그들의 대화를 듣는 가운데 뭔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그런 변화는 나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일어나고있음이 분명했다. 만약 우리가 사무실 유리창 너머에 있던그 여자를 보고 돌아섰다면, 그 여자를 따라 시내를 가로지른 다음 그만 놓치고 말았다면, 줄곧 홍분과 의기양양한 기분에 잠긴 채 코티지로 돌아갈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제그 화랑 안에서의 대면은 우리의 바람에 비해 지나치게 가까웠다. 그 여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 여자를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그녀는 점점 더 루스와 달라 보였다. 그런 느낌은 우리 사이에 점점 더 강해져 갔고, 화랑 저편에서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는 루스 역시 그 사실을 극명하게 느끼고 있음이 분명했다. 어쩌면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그렇게 오랫동안 화랑에 머물렀는지도 모른다. 그럼으로써 그 느낌을 말로 인정해야 할 순간을 늦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그 여자가 갑자기 화랑을 나갔다. 우리는 서로 시선을 피하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제 우리 중 누구도 그 여자를 따라갈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똑딱똑딱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상황을 어떻게 보고있는지에 대해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듯했다. - P284

 "두 분이 처음 그 얘기를 꺼냈을 때 즉각 그렇게 말하고 싶진 않았지만요. 하지만 봐요.
결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절대로, 결단코 그 여자 같은 사람들이 우리의 근원자가 될 리가 없어요. 생각해 봐요. 그여자가 도대체 왜 그런 걸 하려 들겠어요? 우리 모두 사실을 알고 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사실을 회피하고 있는거예요. 우린 그런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복제된 게 아니에요. 우리가 복제된 것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라....."
"루스." 내가 엄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 "루스, 그만해."
하지만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 모두 알고 있어요. 우리는 부랑자나 인간쓰레기, 창녀, 알코올 중독자, 매춘부, 정신병자나 죄수들로부터 복제된 거예요. 그게 우리 근원이에요. 우리 모두 그걸 알고 있어요. 그런데 어째서 말로인정하려 들지 않는 거죠? 아까 본 그런 여자요? 이런, 그래맞아, 토미. 그저 재미 삼아 해본 것뿐이야. 소일 삼아 해 본거라고. 거기에 있던 또 다른 여자, 그 여자의 친구인 화랑의 노부인은 우리가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부인이 우리 정체를 알았다면 그런 얘기를 들려주었을 것 같아요? 우리가 그 부인에게 ‘실례합니다. 혹시 당신 친구분이 클론의 근원자일 가능성이 있을까요?‘라고 물었다면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부인은 우리를 쫓아냈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누구든 자신의 근원자를 찾고 싶다면, 진짜 그 일을 해내고 싶다면 빈민가로, 쓰레기장으로, 화장실로 가야 한다고 말이에요. 그런 곳들이우리가 시작된 곳이니까요." - P290

그러다가 나는 그것을 발견했다.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 줄지어 놓인 카세트테이프 케이스를 훑어보는데 손가락 아래에서 갑자기 오래전 그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그것이 모습을 나타냈다. 주디, 그녀의 담배, 웨이터를 향해 애교부리는 듯한 눈길, 그리고 배경의 흐릿한 종려나무에 이르기까지 내가 잃어버린 것과 같은 테이프였다.
그 순간 나는 조금쯤 흥분되는 다른 물건을 발견했을 때처럼 감탄사를 내지르지 않았다. 나는 기뻐해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한 채 가만히 서서 그 플라스틱 케이스를 바라보았다. 한순간 그것은 실수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이 모든 즐거움을 추구하는 데 완벽한 구실이 되어 준 테이프가 나타났으므로 이제 우리는 그 일을 중단해야 할 터였다. 내가 놀랍게도 즉각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같은 이유에서 나는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척할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때 내 앞에 나타난 그 테이프에는 유년기의 뭔가를 어른이 되고 난 후 대할 때 느껴지는 막연한 당혹감 같은 것이 있었다. 실제로 나는 그 테이프 위에 옆의 테이프를 포개 놓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케이스의 등이 줄곧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결국 토미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 P300

토미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예를 들어 어떤 게 있다는거지? 마담은 우리를 제대로 알려고도 하지 않았어. 그녀는 우리를 개인적으로 알고 싶어 하지 않았어. 게다가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마담 혼자만이 아닐 거야. 더 높은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헤일셤에는 발도 들여놓은 적이 없는 사람들 말이야.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 캐시. 이렇게 생각하면 모든 게 맞아떨어져. 바로 그런 이유에서 화랑이 그토록 중요했던 거야. 그런 이유에서 선생님들은 우리가 미술이나 시를 열심히 공부하기를 원했던 거지. 캐시, 지금무슨 생각하니?"
사실 나는 약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우리가 조금 전에 발견한 문제의 테이프를 어느 날 오후 공동침실에서 혼자 들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나는 가슴에 베개를 끌어안고 몸을 흔들고 있었고, 마담은 두 눈에 눈물이찬 채 문간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지 않았던가. 나로서는지금까지 설득력 있는 설명을 찾지 못한 이 일화 역시 토미의 추론을 적용하면 설명이 되는 듯했다. 머릿속에서 나는 베개가 아니라 아이를 안고 있다고 상상하고 있었지만 마담은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그녀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품에 안고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토미의 추론이 맞는다면, 나중에 우리가 사랑에 빠져 기증 집행 유예를 요청할 때그것을 제대로 판단하려는 유일한 목적에서 마담이 우리와 연결된 거라면 그렇다면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그런 장면을 우연히 발견하고 정말이지 감동했을 터였다. 대개는 우리를 냉랭하게 대했지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이모든 생각을 나는 토미에게 이야기할 참이었다. 하지만 나자신을 억제했다. 우선은 그의 추론을 틀린 것으로 몰고 가고 싶었던 것이다. - P309

나중에 나는 이 순간에 대해 거듭 생각해 보았다. 그때나는 뭔가 할 말을 찾아냈어야 했다. 그렇다 해도 토미는 내말을 믿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나는 루스의 말을 부정할 수있었다. 사태를 사실 그대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했겠지만 그래도 나는 뭔가를 했어야 했다. 루스의 말에 동의할 수없다고 밝히고, 그녀가 사태를 꼬아서 생각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내가 그 동물을 두고 웃음을 터뜨리긴 했지만 조금전 그녀가 말한 그런 이유에서는 아니었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나아가 토미에게 다가가 루스 앞에서 그를 안아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이 떠오른 것은 그로부터 몇년이 지나서였다. 나라는 인간의 성정과 우리 셋의 관계로 미루어 볼 때, 실제로 그것은 당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반응이 아니었으리라. 그렇게 했다면 우리의 말다툼은 더욱격해지기만 했으리라.
나는 어떤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루스가 그렇게 교묘하게 우리의 내밀한 이야기를 발설했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당황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얽히고설킨 혼란 가운데 커다란 피로감, 일종의 무력감 같은 것이 엄습했던 것이 기억난다. 마치 머리에서 기운이 완전히 빠져버린 순간에 풀어야 할 수학 문제가 주어진 것 같았다. 어디엔가 먼 곳에 답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힘을 내 그리로 걸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 안에서 뭔가가 나를 포기시켰다. 어떤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좋아, 그가최악의 경우를 생각하게 내버려 두자고. 그냥 그렇게 생각하게 하자고. 그렇게 해 버려. 체념한 나는 ‘그래 그 말이 맞아. 그 외에 어떤 걸 기대했던 거야?‘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토미를 바라본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무엇보다도 생생하게 토미의 그때 표정을 떠올릴 수 있다. 그 순간그의 얼굴에서는 분노가 빠져나가고 경악에 가까운 표정이 떠올랐다. 마치 내가 담장 기둥에 앉은 희귀한 나비라도 되는 것처럼. - P339

로저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후 몇 달에 걸쳐 나는 그 문제를, 헤일셤 폐교와 그것이 시사하는 바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자 시간이 충분히 있다고 여겨지던 것들에 대해 빨리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그 기회를 영영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내가 겁에질렸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헤일셤이 사라진다고 생각하자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이 바뀌는 것 같았다. 그날 루스의 간병사가 되는 것이 어떠냐는 로라의 말이 내게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당시 내가루스에 대해 여전히 넘을 수 없는 장벽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마치 나의 일부가 이미 결정을 내려놓고있었고, 로라의 말이 단지 그 위에 덮여 있던 베일을 벗겨낸 것 같았다. -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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