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커다란 자루에 넣었는데, 차마 쓰레기와 함께 버릴수는 없었어. 언젠가 차를 막 출발시키려는 케퍼스를 보고그 자루를 상점 같은 데 갖다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지. 자선 가게 같은 게 있다는 걸 찾아 봐서 알고 있었거든. 케퍼스는 자루의 물건들을 뒤적여 보더니 뭔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어. 그가 어떻게 알겠어? 그는 웃음을 터뜨리고는 자기가 아는 가게에서는 그런 물건들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더군. 난, 그래도 정말 좋은 물건들이라고 했지. 그러자 그는 내가 좀 감상적이 되었다는 걸 눈치채고는 어조를바꾸더군. 그러고는 ‘좋아, 아가씨, 이걸 옥스팜에 가져다주지.‘ 하고 말했어. 그런 다음 아주 힘들여서 이렇게 덧붙였어. ‘이제 자세히 보니 아가씨 말이 맞군. 꽤 좋은 물건들인걸!‘ 하지만 그 말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었어. 그는 그 자루를 어딘가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을 거야. 그렇지만 적어도 나로서는 그 사실을 확인하지 않아도 되었던 거지." 루스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다시 말했다. "넌 달랐어. 지금도 기억나. 넌 수집품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한 번도 당혹스러워한적 없이 줄곧 간직하고 있었지. 나도 그랬으면 좋았을걸." - P230
근원자 이론의 이면에 있는 기본 개념은 단순한 것으로별다른 논란거리가 아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 각자가 일반인에게서 복제된 개체인 만큼 바깥세상에는 우리의 근원자가 살고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우리 각자가 자기 자신의 근원자를 찾아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밖, 즉 시내나 쇼핑센터, 휴게소 같은 곳에 나가면 줄곧 신경을 곤두세워 자기나 친구들의 근원임직한 사람들, 곧 ‘근원자‘를 찾아보곤 했다. - P243
그다음, 어째서 우리가 자신의 근원자를 찾아내고 싶어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자신의 근원자를 찾아내고싶은 마음 이면에는, 실제로 그 사람을 찾아내면 그를 통해앞으로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다고 예를 들어 누군가의 근원자가 현재 철도국에서 일한다고 해서 그 역시 나중에 철도국 직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모두 정도는 다르지만 자기가 복제되어 나온근원자를 보게 되면 진짜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통찰과 앞으로의 삶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근원자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우리의 근원자는 우리를 이 세상에나오게 하기 위해 기술적으로 필요한 존재였을 뿐, 우리의 삶을 어떻게 만들어 나가느냐 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루스는 언제나 이런 생각을 가진 편이었고 나 역시 그랬던 것 같다. 그렇다 해도 누구의 근원자든 간에 근원자에 대해 새로운 이야기가 들려올 때마다 그것에 무심할 수는 없었다. - P244
그리고 우리가 은밀히 시선을 던져 가며 그들의 대화를 듣는 가운데 뭔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그런 변화는 나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일어나고있음이 분명했다. 만약 우리가 사무실 유리창 너머에 있던그 여자를 보고 돌아섰다면, 그 여자를 따라 시내를 가로지른 다음 그만 놓치고 말았다면, 줄곧 홍분과 의기양양한 기분에 잠긴 채 코티지로 돌아갈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제그 화랑 안에서의 대면은 우리의 바람에 비해 지나치게 가까웠다. 그 여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 여자를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그녀는 점점 더 루스와 달라 보였다. 그런 느낌은 우리 사이에 점점 더 강해져 갔고, 화랑 저편에서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는 루스 역시 그 사실을 극명하게 느끼고 있음이 분명했다. 어쩌면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그렇게 오랫동안 화랑에 머물렀는지도 모른다. 그럼으로써 그 느낌을 말로 인정해야 할 순간을 늦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그 여자가 갑자기 화랑을 나갔다. 우리는 서로 시선을 피하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제 우리 중 누구도 그 여자를 따라갈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똑딱똑딱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상황을 어떻게 보고있는지에 대해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듯했다. - P284
"두 분이 처음 그 얘기를 꺼냈을 때 즉각 그렇게 말하고 싶진 않았지만요. 하지만 봐요. 결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절대로, 결단코 그 여자 같은 사람들이 우리의 근원자가 될 리가 없어요. 생각해 봐요. 그여자가 도대체 왜 그런 걸 하려 들겠어요? 우리 모두 사실을 알고 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사실을 회피하고 있는거예요. 우린 그런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복제된 게 아니에요. 우리가 복제된 것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라....." "루스." 내가 엄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 "루스, 그만해." 하지만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 모두 알고 있어요. 우리는 부랑자나 인간쓰레기, 창녀, 알코올 중독자, 매춘부, 정신병자나 죄수들로부터 복제된 거예요. 그게 우리 근원이에요. 우리 모두 그걸 알고 있어요. 그런데 어째서 말로인정하려 들지 않는 거죠? 아까 본 그런 여자요? 이런, 그래맞아, 토미. 그저 재미 삼아 해본 것뿐이야. 소일 삼아 해 본거라고. 거기에 있던 또 다른 여자, 그 여자의 친구인 화랑의 노부인은 우리가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부인이 우리 정체를 알았다면 그런 얘기를 들려주었을 것 같아요? 우리가 그 부인에게 ‘실례합니다. 혹시 당신 친구분이 클론의 근원자일 가능성이 있을까요?‘라고 물었다면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부인은 우리를 쫓아냈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누구든 자신의 근원자를 찾고 싶다면, 진짜 그 일을 해내고 싶다면 빈민가로, 쓰레기장으로, 화장실로 가야 한다고 말이에요. 그런 곳들이우리가 시작된 곳이니까요." - P290
그러다가 나는 그것을 발견했다.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 줄지어 놓인 카세트테이프 케이스를 훑어보는데 손가락 아래에서 갑자기 오래전 그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그것이 모습을 나타냈다. 주디, 그녀의 담배, 웨이터를 향해 애교부리는 듯한 눈길, 그리고 배경의 흐릿한 종려나무에 이르기까지 내가 잃어버린 것과 같은 테이프였다. 그 순간 나는 조금쯤 흥분되는 다른 물건을 발견했을 때처럼 감탄사를 내지르지 않았다. 나는 기뻐해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한 채 가만히 서서 그 플라스틱 케이스를 바라보았다. 한순간 그것은 실수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이 모든 즐거움을 추구하는 데 완벽한 구실이 되어 준 테이프가 나타났으므로 이제 우리는 그 일을 중단해야 할 터였다. 내가 놀랍게도 즉각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같은 이유에서 나는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척할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때 내 앞에 나타난 그 테이프에는 유년기의 뭔가를 어른이 되고 난 후 대할 때 느껴지는 막연한 당혹감 같은 것이 있었다. 실제로 나는 그 테이프 위에 옆의 테이프를 포개 놓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케이스의 등이 줄곧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결국 토미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 P300
토미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예를 들어 어떤 게 있다는거지? 마담은 우리를 제대로 알려고도 하지 않았어. 그녀는 우리를 개인적으로 알고 싶어 하지 않았어. 게다가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마담 혼자만이 아닐 거야. 더 높은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헤일셤에는 발도 들여놓은 적이 없는 사람들 말이야.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 캐시. 이렇게 생각하면 모든 게 맞아떨어져. 바로 그런 이유에서 화랑이 그토록 중요했던 거야. 그런 이유에서 선생님들은 우리가 미술이나 시를 열심히 공부하기를 원했던 거지. 캐시, 지금무슨 생각하니?" 사실 나는 약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우리가 조금 전에 발견한 문제의 테이프를 어느 날 오후 공동침실에서 혼자 들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나는 가슴에 베개를 끌어안고 몸을 흔들고 있었고, 마담은 두 눈에 눈물이찬 채 문간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지 않았던가. 나로서는지금까지 설득력 있는 설명을 찾지 못한 이 일화 역시 토미의 추론을 적용하면 설명이 되는 듯했다. 머릿속에서 나는 베개가 아니라 아이를 안고 있다고 상상하고 있었지만 마담은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그녀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품에 안고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토미의 추론이 맞는다면, 나중에 우리가 사랑에 빠져 기증 집행 유예를 요청할 때그것을 제대로 판단하려는 유일한 목적에서 마담이 우리와 연결된 거라면 그렇다면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그런 장면을 우연히 발견하고 정말이지 감동했을 터였다. 대개는 우리를 냉랭하게 대했지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이모든 생각을 나는 토미에게 이야기할 참이었다. 하지만 나자신을 억제했다. 우선은 그의 추론을 틀린 것으로 몰고 가고 싶었던 것이다. - P309
나중에 나는 이 순간에 대해 거듭 생각해 보았다. 그때나는 뭔가 할 말을 찾아냈어야 했다. 그렇다 해도 토미는 내말을 믿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나는 루스의 말을 부정할 수있었다. 사태를 사실 그대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했겠지만 그래도 나는 뭔가를 했어야 했다. 루스의 말에 동의할 수없다고 밝히고, 그녀가 사태를 꼬아서 생각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내가 그 동물을 두고 웃음을 터뜨리긴 했지만 조금전 그녀가 말한 그런 이유에서는 아니었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나아가 토미에게 다가가 루스 앞에서 그를 안아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이 떠오른 것은 그로부터 몇년이 지나서였다. 나라는 인간의 성정과 우리 셋의 관계로 미루어 볼 때, 실제로 그것은 당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반응이 아니었으리라. 그렇게 했다면 우리의 말다툼은 더욱격해지기만 했으리라. 나는 어떤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루스가 그렇게 교묘하게 우리의 내밀한 이야기를 발설했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당황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얽히고설킨 혼란 가운데 커다란 피로감, 일종의 무력감 같은 것이 엄습했던 것이 기억난다. 마치 머리에서 기운이 완전히 빠져버린 순간에 풀어야 할 수학 문제가 주어진 것 같았다. 어디엔가 먼 곳에 답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힘을 내 그리로 걸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 안에서 뭔가가 나를 포기시켰다. 어떤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좋아, 그가최악의 경우를 생각하게 내버려 두자고. 그냥 그렇게 생각하게 하자고. 그렇게 해 버려. 체념한 나는 ‘그래 그 말이 맞아. 그 외에 어떤 걸 기대했던 거야?‘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토미를 바라본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무엇보다도 생생하게 토미의 그때 표정을 떠올릴 수 있다. 그 순간그의 얼굴에서는 분노가 빠져나가고 경악에 가까운 표정이 떠올랐다. 마치 내가 담장 기둥에 앉은 희귀한 나비라도 되는 것처럼. - P339
로저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후 몇 달에 걸쳐 나는 그 문제를, 헤일셤 폐교와 그것이 시사하는 바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자 시간이 충분히 있다고 여겨지던 것들에 대해 빨리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그 기회를 영영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내가 겁에질렸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헤일셤이 사라진다고 생각하자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이 바뀌는 것 같았다. 그날 루스의 간병사가 되는 것이 어떠냐는 로라의 말이 내게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당시 내가루스에 대해 여전히 넘을 수 없는 장벽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마치 나의 일부가 이미 결정을 내려놓고있었고, 로라의 말이 단지 그 위에 덮여 있던 베일을 벗겨낸 것 같았다. -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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